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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십자병원의 시신관리
증 언 자 : 정준(남)
생년월일 : 1955.(당시 나이 26세)
직 업 : 무직(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5월 19일 오후 가톨릭센터 앞에서 공수부대에게 붙잡혀 상무대로 끌려감. 21일 풀려나 적십자병원에서 후배들과 함께 시신을 관리, 통제하는 일을 했다.
횡포와 폭력의 대상이 된 광주시민
5월 19일 월요일 오후 2시쯤이었다. 나는 친구 1명과 미도장 부근에 볼일이 있어서 잠시 들렀다가 일을 마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금남로 쪽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금남로로 들어서는데 얼룩무늬의 옷을 입고 서 있는 계엄군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금남로 전역에는 1개 연대 정도 되는 계엄군이 2줄 정도로 무장을 하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막 동구청 앞을 벗어나려는 찰나였다. 동구청 앞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계엄군들이 금남로로 향하는 길을 차단시켰다. 나는 친구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동안 길을 차단당한 채 밀려드는 사람들 속에 서 있었다. 점점 불어나는 시민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두려움과 조바심에 떨며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아마도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지…….' 나는 주위를 계속 살피고 있었다.
얼마 후 계엄군 대위 한 명이 부하인 계엄군에게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더니 가톨릭센터 쪽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빨리 가라고 계속 재촉했다. 시민들이 서로 빨리 가기 위해 웅성거리면서 빠져나갔고 나는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으나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뒤를 돌아 친구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계엄군들은 갑자기 다시 길을 차단하고는 빠져나가려는 시민들을 위협했다. 결국 내 친구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나는 금남맨션 뒤 미도장으로 가려다가 언뜻 보니 금남맨션 앞에서 미도장 종업원들로 보이는 젊은이들 3, 4명이 공수부대들에게 두들겨맞고 군화발에 짓밟히고 있었다. 그 순간 다리가 떨리고 심장이 뛰었다. 재빨리 금남맨션 입구로 들어 갔다. 바로 그때 그곳까지 공수부대원이 나를 쫓아왔다. 공수부대 중위 1명과 하사 1명은 나와 한 선배를 붙잡고 물었다.
"직업이 뭐야?"
행여나 꾸물거리다가 한 대라도 더 맞을까봐 두려워서 얼른 대답했다.
"나는 사업을 하는 사업가요."
하고 대답하자 증명서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호주머니에서 재빠르게 수첩을 내어 신분증을 보여주자 눈을 부릅뜨고 다그쳤다.
"학생이 아니냐?"
"왜 이러십니까? 우리는 학생이 아닙니다."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공수부대 중위 1명은, "학생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놔주면 돌아서서 돌이나 던지고 꼭 데모를 한단 말이야!!"
하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는 지금 바삐 가봐야 하는데, 학생도 아니고……." 하며 다시 사정하자 생각보다는 쉽게 나를 풀어주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금남맨션 관리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김창수 선배가 있었다. 금남맨션 관리사무실에서 선배 김창수와 함께 걸어나오는데 공수부대원이 다시 쫓아왔다. 나의 선배인 김창수의 멱살을 잡고, "학생이지? 틀림없어." 하면서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나는 너무나 화가 나서, "이 사람은 내 선배되는 사람이고 나이도 먹은 사람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하면서 항의하듯 대들자 이유가 많다며 나를 사정없이 곤봉으로 내리쳤다.
광주 새끼들은 모두 죽여버리겠어
이렇게 두들겨맞고 있을 때 금남맨션 위층에서 여대생 1명이 피아노 교재로 보이는 책 1권을 옆구리에 끼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런데 공수부대원은 이 여대생에게까지 이유없이 구타를 가하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 두들겨맞고 밀리고 있을 때 도로로 내려선 시민들이 항의하며 공수부대원들에게 돌을 던졌다. 주위에 널려진 병을 주워 던지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수부대원들은 돌아설 줄을 몰랐다. 오히려 공수부대원 여섯 명 정도는 악을 버럭버럭 질렀다.
"모두 죽여버리겠어."
그리고는 돌과 병을 던지는 시민들을 잡기 위하여 쫓아가고 있었다. 나와 선배, 그리고 여대생 3명은 공수부대들에게 붙잡혔다. 공수부대원은 나와 선배에게, "혁띠를 풀어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혁띠를 풀자 빼앗아버렸다.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라고 명령했다. 우리는 양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금남로 관광호텔 앞으로 무작정 끌려갔다. 가는 도중에는 관광호텔 부근에 배치된 공수들이 총 개머리판으로 몸 아무 곳이나 사정없이 내리쳤다. 군화발로 가차없이 신체의 부분부분을 강타했다.
"이 자식들은 모두 죽여버려야 한다니까."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이미 공수부대들에게 끌려온 20여 명의 젊은 청년과 시민들은 도로 위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나와 선배, 여대생은 이들과 똑같은 자세로 머리를 땅바닥에 대고 각각의 손이 뒤로 젖혀진 채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었다. 나는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만 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형사기동대 차 한 대가 우리 앞에 멈추었다. 시민, 청년 20여 명과 나의 동료 2명을 형사기동대 차에 태웠다.
'어디로 가는 걸까?'
생각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차는 광주경찰서로 갔다. 잡혀온 우리 모두는 광주경찰서 보호실에 수감된 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가만히 들고 주위를 둘 러보았다. 잡혀온 사람들은 남녀구분도 없이 보호실뿐만 아니라 공간이라고 생긴 곳에 모두 가득가득 차 있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기죽어서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통금시간이 9시로 당겨졌다고 한 것 같았고, 저녁 9시가 넘자 전경들 버스 10대가 광주경찰서 앞으로 대기되었다. 보호실에 수감되었던 엄청난 시민, 학생들은 10대의 차에 나누어 오르게 했다. 상대편 등에 머리를 대고 숙이도록 하였으며 앞사람 뒷주머니를 손으로 잡게 했다. 아무것도 쳐다볼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그 자세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거나 손을 놓으면 어김없이 곤봉이 날아왔다. 전경버스 10여 대는 순식간에 가득찼고 차에 사람들이 차기가 바쁘게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처음에는 군부대로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차마다 한 의자에는 3, 4명씩 포개앉아 포승줄로 손이 묶인 채였다.
호송되던 도중 갑자기 차가 멈추었다. 나는 차가 멈추는 틈을 타서 얼른 고개를 들어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계림동 파출소 앞 로터리였다. 공수부대원 4, 5명이 우리가 탄 차로 올라왔다. 마치 우리가 공수부대원에게 뭐라고 항의라도 했다는 듯이 "3공수를 물공수로 봤냐? 너희 이놈의 새끼들은 모두 죽여버려야 해." 하며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 것이었다.
공수부대들의 횡포와 폭력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앞에 앉은 사람부터 곤봉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내가 탄 차에서 2/3 이상의 시민, 학생들은 등과 어깨를 두들겨맞았다. 이렇듯 한참동안을 곤봉으로 내리치더니 피곤하고 지친 표정으로 "광주 새끼들은 모두 죽여버리겠어" 하며 말끝마다 죽여없애겠다고 위협했다.
이를 보고 있던 전경차 호송책임자인 도경찰국 직원 한 사람이 "잡혀온 사람들을 또 때리면 어떡하냐. 더 이상 때리지 말라"고 하자 공수부대원들은 그 사람에게도 쌍스러운 욕설을 퍼부었다.
상무대에서의 생활
이렇게 하여 공수부대원 4, 5명은 차에서 내려가고 한동안 차가 계속 달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순간 나는 고개를 들고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차는 31사단 정문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차가 멈추고 헌병 한 명이 차 가까이에 다가와 "몇 대가 왔습니까?"하고 묻자 호송책임자 중 한 사람이 "10대가 왔다"고 대답했다.
헌병은 이를 확인한 뒤 현재 이곳 31사단은 이미 잡혀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서 더 이상의 수용이 불가능하므로 상무대로 가라고 말했다.
내가 버스에 탔던 자리는 앞에서 두번째 정도였기 때문에 상황을 자세히 보고 들을 수 있었다.
31사단에서 차를 돌려 상무대로 다시 출발했다. 한참 만에 상무대의 헌병대 합동수사본부 앞에 도착했다. 이제는 잡혀온 사람들 모두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 나 역시도 놓치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헌병들은 제각기 곡괭이를 한 자루 씩 들고 하차하는 입구의 양쪽에 2열로 비옷을 입고 서 있었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차창 밖에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헌병들은 우리가 차 에서 내려 그들에게로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헌병들은 사람들이 재빨리 차에서 모두 내릴 것을 강요했다. 그것도 사람들은 각자 앞사람의 엉덩이에 머리를 박고 내려오도록 하였다.
맨 앞에서 인도를 하는 사람 이외에 잡혀온 사람 모두는 이처럼 똑같은 자세로 차에서 내려 캄캄한 강당 같은 곳으로 집결되었다.
이곳에서는 상등병과 이등병의 사병들에게 지시를 받았다. 사병들은 우리를 각각 1열 횡대로 서게 했다. 그리고는 호주머니 속의 소지품을 꺼내게 하고 모든 것을 양손에 올려놓으라고 했다. 우리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대기한 사병들은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손 위에 올려놓은 소지품을 "됐어. 됐어" 하면서 갑자기 소지품을 펴든 양손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소지품은 하나도 남김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몇몇 사람들은 땅에 엎드려 떨어진 소지품을 주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사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고개를 숙인 사람들을 무수히 집단구타하였다. 결국 사병들은 비겁하게도 그따위 구실을 삼아 구타의 미끼로 삼는 행위를 한 치의 부끄럼없이 일삼았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두들겨맞지 않기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부동자세로 서 있자 사병들은 이제 땅에 떨어진 돈과 귀중품들을 여유있게 주워 챙기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돌려주려고 저러는 것은 아니겠지?'
이렇게 잡혀온 것도 억울하고 분한데 소지품까지 탈취당하는 어이없는 일을 당하고 보니 우리 모두는 거의 체념상태에 빠져 있었다.
시키는 대로 했고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 반항도 하지 않았다. 강당 안에는 천여 명의 시민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부상자들이었다. 대검에 찔려 피가 흐르는 사람, 다리를 절며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 얼굴이 부상으로 인해 찌그러진 사람 등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고통스러워하는 부상자들도 쉽게 눈에 띄었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부상자들을 보고 있을 때 사병 한 명이 들어왔다.
"부상자는 모두 손을 들어라."
그리하여 부상자들은 어딘지 모르지만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강당 같은 곳에 남아 있게 되었다. 부상자들이 모두 빠져나간 이후부터는 더욱 괴롭히기 시작했다. 앞사람 엉덩이에 고개가 닿을 정도로 몸을 숙이게 한 다음 부동자세로 있어야 했다. 이틀 동안을 사병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만 했다. 그곳은 반항도 변명도, 그 어떠한 이유도 용납되지 않는 무서운 곳이었다.
내가 잡혀온 지 하루가 지난 다음날 '한국부인회'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밥을 가져왔다. 반찬으로는 단무지가 있었다. 그때 딱 한 번 밥이 나오고 그 외에서는 비상식량 건빵으로 주식을 대신했다. 화장실을 갈 때는 눈을 가리고 앞사람을 잡고 20명씩 함께 행동하도록 했다.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일절 허용되지 않았다.
갑자기 운동장으로 집결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모두들 우르르 운동장으로 나갔다. 단상 위에는 육군본부에서 왔다는 준장, 소장이 있었고 제각기 한마디씩 하는 것이었다.
"여러분이 이곳으로 잡혀오기 이전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 역시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광주시민은 모든 공공 건물을 장악하여 사태는 매우 위험합니다. 그러나 광주시민들과 약속하여 여러분을 풀어주는 대신에 절대로 시위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지장을 받고 여러분의 가족들이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나가거든 부디 조용히 지내기를 부탁합니다."고 말을 마쳤다.
그러나 정작 내가 풀려난 곳은 정문이 아닌 후문이었다. 나는 유덕동으로 걸어 나왔다. 유덕동 사거리에서는 시민들이 미니버스에 타고 있었고 머리에는 띠를 두르고 있었다.
비로소 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상황이 뒤바뀐 것을 알았다. 시민들은 우리들에게 주먹밥을 나누어주었다. 난 먹고 싶지 않아서 받지 않고 곧장 걸어서 화정동 주공아파트 선배 집으로 갔다. 샤워를 한 후 밥을 얻어먹고 잠을 잤다.
시체의 머리는 없고 이빨만 2개
다음날 22일 오후쯤 화정동에서 나왔다. 시내로 가기 위해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시민들이 탄 트럭이 오는 것을 보았다. 재빨리 손을 들어 차를 세웠다.
"전 어제 풀려났습니다."
하고 말하자 차에 오르라고 했다. 차에 올라타고 보니 차 한쪽에는 음료수, 빵 등이 잔뜩 실려 있었다. 차는 시내로 들어왔고 그 도중에 금남로사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보았다. 적십자병원 앰뷸런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중이었다.
나는 얼른 차에서 내려 적십자병원 앰뷸런스를 세웠다. 차 안에는 정찬호, 김영호, 오종호(운전기사) 등 후배들이 타고 있었다. 재빨리 적십자 차에 올라타고 그 동안의 상황을 후배들로부터 상세하게 들었다. 광주시내 곳곳에서는 시민들이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동안 후배들은 적십자병원에서 사망자를 보호하고 부상자를 병원까지 안전하게 호송하여 치료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
후배들과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적십자병원으로 갔다. 병원으로 들어가자 박남선씨가 젊은 청년들을 데리고 시신을 영안실로 옮기고, 부상자를 병원으로 안내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전부터 박남선씨와 안면이 있었으므로 가까이 가서 인사를 했다.
"내가 후배들을 이끌면서 적십자병원을 맡고 열심히 일하겠으니 형님은 이곳 걱정은 마시고 나에게 인계하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야기하자 박남선씨는 알았다고 하면서 나에게 인계하고 병원에서 나갔다. 그 후 박남선 씨는 도청 안으로 들어가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적십자병원의 총지휘자로 일하면서 상황체크를 해나갔다. 사망자는 적십자 병원 내 영안실로 각각 분담하기도 했다.
광주시내 전역, 특히 서방 쪽과 화정동 등 외곽지역을 맡았다. 앰뷸런스와 지프차에는 +자 마크를 붉은색으로 새기고 복장은 하얀 가운을 입었다. 오른쪽 팔에는 +자 마크가 새겨진 완장을 두르고 일했다.
적십자병원은 매일 부상자와 사망자로 붐볐다. 뿐만 아니라 종합병원도 부상자로 가득가득 채워졌다. 병원의 입원실이 부족하여 신문이나 옷 등을 땅바닥에 깔고 누워 있는 환자들이 많았다. 수용하는 병원의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고 부상자들은 줄을 잇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병원에는 간호원들이 많기도 했지만 워낙 많은 환자들로 인하여 일은 밀리고 항상 인원은 부족했다. 우리는 그때마다 즉각 동원되어 간호원의 일을 도와 주곤 했다. 한 사람에게는 영안실 입구에서 영안실을 지키도록 지시했다. 시신을 지키고 영안실의 출입을 통제시키기 위해서였다. 일단 적십자병원에 사망자가 들어오면 제일 먼저 사망자의 신분을 확인했다. 주민등록증 소지자는 이름과 본적, 나이 등을 적어두고, 신분증이 없는 경우에는 옷차림의 특색이나 색깔 등을 기록해 두었다.
예를 들면 신발은 00신발이었고 바지는 00색에 00바지를 입었으며 나이는 보통 어느 정도 되는 남자고 얼굴 형태는 어떻다고 하는 내용을 하얀 큰 종이에 매직으로 적어서 적십자병원 옆 공사장 벽에 붙여두었다. 또 사진이 접수되면 확인하여 붙여두기도 했다. 영안실 내부는 시체 냣는 냄새로 가득했다. 적십자병원 주위의 주택가 아줌마들은 집에서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병원으로 갖다주었다. 영안실 안은 얼음주머니가 쌓여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악취와 부패되는 냄새가 없어질 리 없었다.
병원은 언제나 어수선했다. 이날도 이런저런 잡일을 보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목에 카메라를 주렁주렁 달고 큰 가방을 맨 외국 사람들 2명이 적십자병원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내게 다가와서
"시체실 촬영을 좀 하려고 왔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신분증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UPI통신 기자,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을 보여주며 기자임을 재차 강조했다.
"도와드리는 것은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양만 내면서 사진만 찍고 보도되지 않는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또 얼마나 정확히 보도되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으니……. 정확하게 사실대로 보도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아주 정확히 조사하여 본국에 보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묻는 말에 확실하게 말했다. 이 두 사람은 특파원 종군기자여서 그런지 통역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우리 말을 썩 잘했다. 나는 두 사람을 데리고 시체실로 들어갔다.
적십자병원에는 2개의 영안실이 있었는데, 각각 7평 정도 되는 곳에 20여 구가 넘는 시체가 보관되어 있었다.
이 시체는 모두 5·18 당시 시체들이었고 각각 비닐로 덮어두었다. 영안실은 얼음주머니를 쌓아두었기 때문에 얼음의 수증기로 인하여 마치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자들 2명은 카메라 라이트를 켜고 비추면서 촬영을 시작했고, 나는 시체 위의 비닐을 벗겨주면서 그들을 도와주었다. 하나하나씩 비닐을 벗기며 촬영을 하던 중 머리가 보이지 않는 시체가 나왔다. 이빨 2개만 보이고 몸 전체는 구타의 흔적이 역력하게 보였다. 나는 도저히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영안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도 따라서 나왔다. UPI 연합통신 기자는 계속 사진을 찍었다. 영안실에서 나와 병원 마당에 있는 나무 밑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아사히신문 기자가 옆으로 왔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해도해도 너무 했어요." 이렇게 말하고는 계속해서 훌쩍거렸다. 나는 갖고 있던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도록 그에게 주었다. 아사히신문 기자는 계속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앉아 있더니 다시 일어나 끝까지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UPI 연합통신 기자는 사진촬영을 다 마쳤는지 영안실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난 아사히신문 기자와 함께 또 다시 영안실로 들어갔다. 사진을 모두 찍고 영안실에서 나와 그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정중하게 하고는 꼭 보도가 될 것이라 약속을 하고 돌아갔다.
아가의 눈망울은 초롱초롱 빛나고
5월 23일쯤으로 생각된다. 어디에선가 본 듯한 여자 2명이 적십자병원으로 찾아왔다. 이들은 부상을 입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 21, 22살 정도 먹어보이는 아가씨들이었는데, 병원에서 부상자들을 도와주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기특하기도 하고 갸륵하기도 하여 잘 왔다고 하면서 간호원을 도와주고 부상자들을 돕도록 했다. 두 아가씨는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며 열심히 일해주었다.
이날 오후 2-3시쯤 서방 쪽에서 적십자병원으로 연락이 왔다. 아주머니 한 사람이 아기를 등에 업고 교도소 쪽으로 가던 도중 공수부대들이 쏜 총에 맞았다는 것이었다. 연락을 받은 즉시 정찬호를 비롯하여 4명 정도가 지프차에 담가를 싣고 급히 달려갔다. 시내 곳곳에 시민군들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도청 부근에는 무장한 시민군들이 많이 보였다. 지프차가 날쌔게 달리는 것을 바라보던 시민군들이 놀란 표정으로 발을 구르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서방을 갔더니 총에 맞은 아주머니를 이웃 주민들이 등에 업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머리의 뒷부분을 총에 맞은 것 같았다.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려서 위급하다고 했다. 나는 재빨리 아주머니의 맥을 짚어보았다. 이미 심장이 멎은 것 같았다. 마음 속으로는 이미 죽었다고 판단했다. 아주머니의 아들로 보이는 아가의 눈망울은 초롱초롱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양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 아주머니와 애기를 차에 태워 전남대병원으로 갔다. 전남대병원에 아주머니를 넘겨주고 나자 아기는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곤 하더니 병원 분위기에 주눅이 든 듯 그때에야 "엄마, 엄마" 하고 울기 시작했다. 보채면서 서럽게 울어댔다. 아주머니의 얼굴은 피가 뒤덮고 있어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고 나이를 식별하기조차 어려웠다. 나는 아기를 의사에게 넘겨주며 방금 그 아주머니의 아이라고 일러주고 적십자 병원으로 돌아왔다.
이날도 환자들을 돌보며 일하고 있을 때였다. 불로동 다리 건너편에서 살고있던 정철남 선배가 다 죽을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광주에 공수부대들이 들어온 날 공수들에게 곤봉으로 두들겨맞아 온몸이 피멍으로 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적십자병원에서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치료를 받으러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의사에게 치료를 잘해주라는 부탁을 해주었다. 의사는 적당히 치료를 해주고 "워낙 부상자들이 많으니까, 이 사람은 타박상에 불과합니다. 많이 다친 것은 아니에요"라고 가볍게 얘기했다. 정철남 선배는 환자로 취급도 못 받고 대강 치료가 끝나자 집으로 돌아갔다.
광주시민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다
기자들이 다녀간 다음날 오후쯤 되었을 것이다(5월 23일 추정, 조사자주). 도청 상황실에서 연락이 왔다. 각 병원에 있는 확인된 시체들을 입관시켜 도청 분수대로 모두 옮겨줄 것을 지시했다. 나는 연락을 받은 즉시 관을 사기 위하여 양동 장의사 집을 찾아갔다. 관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사가고 한두 개밖에 없었다. 돈을 받지 않고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병원에 있던 후배들을 시켜서 트럭이나 모든 차를 동원하여 관을 구하여 오도록 지시했다. 관이 어느 정도 모아지자 적십자병원에 있던 시체들을 관에 넣기 시작했다. 안치되었던 시체들은 40-50구 정도 되었다.
대부분의 시체들은 부피가 불어나서 관에 넣기가 힘들었다. 중학생쯤 되어보이던 시체는 어깨쭉지에 총을 맞아 죽어 있었는데 시위광경을 구경하다 총에 맞았다고 했다. 키가 큰 시체는 관의 크기가 맞지 않아 뚜껑이 닫아지지도 않았다.
이웃 주민들은 적십자병원 주변 곳곳에서 입관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집에 보관해 둔 태극기를 갖다주기도 했다. 그 태극기를 관 위에 덮어주기도 하고 시체 전체를 태극기로 덮어주기도 했다. 시체는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많았고 나이 많은 사람도 간혹 끼어 있고 어린애도 눈에 띄었다. 입관이 대강 마무리되고 정리가 되자 관을 차에 싣기 시작했다.
관을 실은 차는 모두 5대 정도 되었다. 그리하여 차에는 가족 되는 사람들 2명 씩을 태우고 차 라이트를 켜고 적십자병원을 출발했다. 태평극장을 지나 충장로파출소, 한일은행을 거쳐 도청 분수대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나는 차에서 메가폰을 들고 "억울하게 계엄군 총에 맞아 돌아가신 애국 시민들이 지금 이곳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모두 애도의 뜻을 표해주십시오" 하면서 도청과 금남로 주변에 모여 있는 시민들에게 외쳤다. 도청 분수대를 주변으로 엄청나게 많은 광주시민들이 운집해 있었고 집회를 하고 있는 듯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연단 위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장례차가 지나간다고 외쳐대자 시민들은 차가 지나가도록 길을 터주었다. 시민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애국가를 불렀고 도청 주위의 분위기는 일제히 숙연해졌다. 차는 도청 분수대를 한바퀴 돌고 난 후 관을 내렸다. 도청 앞 주변과 상무관 앞에는 입관이 되어있는 것과 입관되지 않는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관을 모두 차에서 내리고 향을 피웠으며 간단한 묵념으로 애도의 뜻을 표하는 의식을 가졌다. 식이 끝나고 도청 주위를 둘러보며 서 있는데 학생 하나가 내 가까이에 다가오더니 시민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적십자병원에서 어려운 일을 해주신 이분들께 박수를 보냅시다."
뜻밖에 우리는 박수를 받았다. 그 학생은 순간적으로 시민들에게 호소하며 성금통을 갖고 주위를 돌아다녔다. 시민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었다.
그 학생은 성금통을 들고 오더니 느닷없이 내게 성금통을 내미는 것이었다. 나는 재빨리, "내가 이것을 어떻게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도저히 받을 수 없습니다."며 사양했다.
그렇지만 학생은 완강하게 버티며 받아주기를 원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러면 내 잠시 병원에 가서 원장에게 물어보고 올 테니까 기다리시오" 하고는 차를 타고 적십자병원으로 왔다. 병원 원장에게 물어보았다.
"시민들이 성금을 내어 우리에게 주는데 그것을 받아도 될까요?"
"당신들이나 우리는 어디까지나 봉사하는 것이니까 절대 받으면 안 돼요."
의사는 냉담하게 말했다. 나도 그 말을 듣고 즉시 차를 타고 다시 도청으로 와서 그 학생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은 계속 받아주기를 원했다. 나는 또 다시 적십자병원으로 와서 병원 원장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했더니 마지 못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러면 그 돈을 받기는 받되 부상자들을 위하여 과일을 사서 나누어주도록 하시오."
난 다시 도청 분수대로 차를 타고 왔다. 너무나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성금을 받았다. 당시 도청내에 있었던 장례식 준비위원장과 최규한(장례차 기사), 그리고 나 셋이서 성금통을 가지고 도청 안 '회계실'이라고 씌어진 사무실로 들어 갔다. 사무실로 들어가는 도중 나를 보고 차성원씨가 따라 들어왔다.
사무실에서 성금통의 돈을 꺼내어 세어보았다. 10원짜리까지 모두 합하여 대략 백만 원 정도 되었다. 나는 부상자들에게 과일을 사다주는 비용으로 40만 원을 받아들고 나머지 돈은 장례식 준비위원장이 장례준비비로 가져가기로 했다. 서로 영수증을 주고 받으며 도청 회계실에서 나왔다. 도청에서 나오자마자 앰뷸런스를 타고 시외버스공용터미널 건너편에 있는 청과물시장으로 갔다. 참외, 토마토 등 과일을 차에 가득히 싣고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기독교병원에 과일을 나누어주었다. 각 병원에 나누어주고 남은 과일을 가지고 적십자병원으로 돌아왔다.
주방에서 일하던 아가씨 2명이 가져온 과일을 즙으로 갈아서 각 입원 환자들과 병원내 모든 부상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우리 모두는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조사.정리 안은정) [5.18연구소]
첫댓글 올려주신 자료 덕분에 광주민주화 우동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엇습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