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군 남사예담촌 이윤현 향나무
지리산의 동쪽 한 줄기가 내려와 살그머니 발을 멈추니 단성면의 니구산이다. 역시 단성면 청계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계곡물이 이 니구산에서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사수천(남사천)이다. 그리고 남강으로 들어가며 만든 반달 모양의 텃밭이 사월리(沙月里)이다. 위쪽은 위니까 상사월, 아래는 남쪽이니 남사월, 합쳐서 남사촌이다.
니구산과 사수천은 공자의 고향 산동 곡부의 뒷산과 그곳 사수현에서 비롯된다. 남사예담촌의 예담은 옛담, 예를 갖춰 나그네를 맞는 담이니, 마을의 한옥에서 예와 효의 기풍이 느껴지는 연유이다. 또 그 전통은 엄격하고 딱딱함이 아니다. 고샅길을 싸목싸목 걸으면 마치 어머니 품의 평화, 외갓집의 그리움이 새록새록이다. ‘아무개야!’ 부르면 ‘응, 나갈게!’ 친구 얼굴이 곧 쏘옥 나올 정겨움이다.
여기 고샅의 흙돌담길은 처음 걷는 사람에겐 마치 미로처럼 재미있다. 부드러운 흙과 모나지 않은 강돌이 한 폭의 그림인 담 높이가 2m쯤인 것은 말을 탄 사람의 눈높이로 여겨진다.
이 흙돌담 안의 삶을 일궈온 이 마을의 다섯 문중인 하씨, 박씨, 이씨, 최씨, 정씨 집의 다섯매화는 이곳이 고향이거나, 봄날 다녀간 나그네이거나 자나 깨나 잊지 못하는 ‘오매불망(寤寐不忘)’이며 ‘오매불망(五梅不忘)’이다. 그 중 하즙(1303~1380)이 ‘영매시’를 남겨서 그의 호를 딴 ‘원정매’는 650살이다. 또 이 집에 620살 감나무가 있다. 전형적인 반시(납작감)로 산청 곶감의 원조인데 지금도 주렁주렁 홍시를 매달아 기개와 기품이 넘친다. 이는 비바람이 몰아칠 때 도깨비가 보호해 주어서이고 이 도깨비를 보면 어려운 일이 성취된다고 하니 비 오는 날 감나무를 찾아 가볼 일이다. 또 이 감나무는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이 7세 때 어머니께 홍시를 드리기 위해 심은 감나무여서 효자 감나무이기도 하다.
이뿐인가? 이씨 고가 고샅의 3백 살 회화나무는 상대방을 위해 햇빛을 양보했기 때문이라지만, 마치 서로를 껴안은 모습이다. 그래서 사랑나무라 하고, 부부가 나무 아래를 지나면 백년해로는 따논 당상이란다. 또 그래서 심사숙고하라는 당부도 있으니, 세상사는 알고도 모른다는 세태의 반영이다. 역시 이씨 고가 마당의 450살 회화나무도 신통하다. 나무 몸통 배꼽쯤에 쑥 파인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 손을 넣고 빌면 아이를 점지해주는 삼신할머니 나무이다.
그렇게 예스런 사연이 가득한 한옥마을박물관인 이곳에서 꼭 들려야 할 곳이 있다. ‘조상을 귀하게 모시면 그 덕이 자손만대에 후하게 돌아간다’는 귀후문(歸厚門)이 있는,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는 집’ 사효재(思孝齋)이다.
1687년 천연두가 창궐하였다. 감염병을 피해 성주 이씨 이윤현(1670~1694)은 아버지를 모시고 산촌으로 피접하였다. 이때 산적이 아버지를 위협하며 칼을 휘두르자 이윤현은 온몸으로 칼을 막았다. 이때 팔이 잘리는 등 크게 다치어 8년을 병고에 시달리다 스물네 살의 나이에 그만 숨졌다.
이 효자를 기리는 효자각과 재실이 있다. 재실인 사효재에는 520여 살 향나무가 있다. 제를 올릴 때 향을 사르려고 심은 향나무지만 이 사효재의 향나무는 바람이 불면 윙윙 소리 내어 운다. 하지만 효자들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효자도 하늘이 내리는 듯싶다. 또 이윤현을 기리는 효자각은 사수천을 건너는 예담교 가까이 산기슭에 있다,
사람살이가 역사이다. 사람이 그 역사를 만들고 이어가고 물려준다. 그리고 그 역사가 어떤 것이냐는 다 자기 몫이다. 그 자기 몫의 역사를 다시 되새길 수 있으니 곧 남사예담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