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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시는 아버지 / 누가복음15:11-24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우리는 지난 주 부활절을 보내고 이제 부활의 기쁨가운데 부활신앙으로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잘들 말하지만 아직도 실제론 잘모르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분들도 많고,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성도들조차도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영생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17: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곧 구원이요, 영생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모르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제쳐놓고, 그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만 하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제대로 잘 알려주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님을 우리에게 올바르게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세상엔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지만 세상의 아버지들 역시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장 정확하고 분명하게 보여주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1:18은 이렇게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을 나타 내셨다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빌립이 예수님에게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했을 때,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해 주신 유일한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고 만나야 할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기록하고 있는 곳은 참 많습니다. 구약엔 15회, 신약에는 414회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 4복음서에만 274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직접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170회나 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그분, 예수님의 아버지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냥 상징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좋은 아빠' 더 나아가 '내 아빠'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내들 역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인 것보다 '내 남편'이 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밖에서, 남에게는 너무 좋은 분인데, 가정에서는 아닌 남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들이 늘 하는 이야기가 ‘한번 같이 살아 보세요’라고들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참 좋으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교회란 한 아버지, 하늘 아버지를 섬기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성도들은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계시고, 형제와 자매들이 서로 사랑하며 교제하는 것, 말하자면 ‘아버지’가 있는 교회, 가족과 같은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어떤 마음을 품고 목회하느냐? 그것은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개혁자의 마음을 품고 목회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개혁의 대상으로만 보입니다. 선생의 마음을 품고 목회하면, 모든 사람이 가르침의 대상으로 보입니다. 경영자의 마음을 품고 목회하면, 사람들을 평가하고 업적만을 내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목회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읽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주님이 어떤 배경에서 이 비유를 들려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여기에 보면,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께 나아오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기를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왜 그들이 수군거렸을까요? 아마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리들, 죄인들은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을 저주하시는 분이시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그런 하늘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시려고 ‘내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다’ ‘하늘 아버지는 이런 분이시다’라고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11절 말씀을 보면,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라고 시작을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어떤 사람에게”라는 말은 비유라는 것입니다. 실제의 사건, 실제 인물이 아니라 비유로 주님은 하늘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하늘 아버지를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아버지도 ‘하나님 아버지’ 곧 하늘 아버지를 제대로 보여 주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 아버지를 제대로 보여주실 수 있었다면 아마 아브라함을 보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모세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제대로 보여주었다면 ‘모세의 가정을 보라’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아버지의 중에는 아무도 그런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본문을 읽어나가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들려주고 싶었을까요?
첫째, 허락하시는 아버지입니다. 본문에 보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자기에게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법에는 두 아들이 있다면, 아버지의 재산 중에 2/3는 큰 아들에게, 그리고 1/3은 둘째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그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부당한 요구입니다.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계시는데, 유산을 물려달라는 것은 아버지보고 빨리 죽으라는 말고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세상 아버지라면, 그냥 가만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못된 이 아들을 혼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그냥 허락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허락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허락했다는 것은 우리 하늘 아버지가 인격적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우리 인간들에게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도 함께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강요하시거나 강제하시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허락하심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허락은 하시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나라에 왕을 세우는 문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당신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구했을 때, 하나님은 허락하셨습니다. 또 이혼문제도 그와 같습니다.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 시대 때에 이혼증서를 쓰서 주고 이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자들이 함부로 여인들을 버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혼증서를 반드시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 따라서 불신자와의 결혼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당사자들은 여러 가지 설득력 있는 이유를 붙여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시작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잖아요?’라고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아예 철야기도를 하고, 금식기도까지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허락하십니다. 물론 그리고 난 다음에 많은 고생을 하지요!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매지 말라’(고후6:14)고도 하셨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겠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하므로 많은 손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호언장담했습니다. ‘절대로 배신하지 않습니다. 믿어도 좋습니다.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베드로 이렇게 말할 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뭔가 주의를 줄 수도 있었는데, 아무 말씀하지 않고 그냥 두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실패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그 실패를 통해 다시 일어날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인생에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주시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를 통해 인생에 고귀한 교훈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대대로 베드로는 실패한 이후에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그렇게 좋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기다려주시고, 그리고 사랑으로 용납하시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둘째. 잃어버릴 수 없는 아버지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계속해서 보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나라로 간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하게 아버지의 유산을 다 써버렸습니다. 더군다나 그 땅에는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리자 그는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붙여 겨우 살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이 둘째 아들을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모자라 그는 자신의 배를 채울 수없게 되었습니다. 처량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타락에는 반드시 이런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둘째아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무엇이 이 둘째아들을 아버지에게 돌아오게 했을까요? (흉년~) 맞습니다. 그가 만난 흉년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풍요를 꿈꾸면서 떠났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었든 것은 풍요함이 아니라 흉년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잔소리도, 간섭도 없는 자유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흉년을 만나 돼지를 치는 노예의 자리로 전략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뼈저린 추위와 외로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러시아의 문학가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릴 때, 저들은 하나님만 버린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는 순간, 사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린 것이다’ 참 유명한 말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그것은 자유를 떠나는 것이고, 아버지의 사랑을 떠나는 것이요, 그리고 자신의 모든 가치마저도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아들이 만난 흉년, 인생의 흉년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러한 인생의 흉년을 경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이 흉년이 둘째아들에게는 그의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인생의 흉년을 당하자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 본문 17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여기를 보면, 그는 인생의 흉년을 만나자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비로소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얼마나 많은가, 거긴 종들까지도 풍족하게 먹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스스로 돌이켜’라는 부분을 ‘He came to himself’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먼 나라로 가서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했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아 상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이런 결론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그래 나는 아버지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어, 다른 것은 다 잃어버려도 아버지를 잃어버려서는 안 돼!’ 그렇습니다. 이 둘째 아들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잘 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는 것, 돈은 잃을 수 있어도, 심지어는 건강은 잃을 수 있어도, 결코 우리 인생에서 잃어서는 안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C.S 루이스 교수가 옥스퍼드 채플에서 설교를 하고 나왔을 때, 어떤 학생이 그를 붙들고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선생님,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이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이다지도 많습니까?” 루이스는 그 학생을 행해 대답했습니다. ‘이보게 젊은이, 세상 사람들이 그러지 않아도 이렇게 오만한데, 고통마저 없다면 얼마나 더 교만했겠는가?’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은 말이야, 귀먹은 사람들을 깨워주는 하나님의 확성기, 하나님의 메가폰이야!’ 그렇습니다. 이 둘째 아들에게는 인생의 흉년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아버지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흉년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인생의 흉년이 오거든, 그 흉년 속에서도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우리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20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 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여기에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여기 ‘아직도 거리가 먼데’라는 말은, 제 생각에는 어쩌면, 단순히 문자적인 거리뿐만이 아니라, 이 둘째 아들이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을 심리적인 거리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리적인 거리, ‘글쎄, 아버지가 정말 나를 받아주실까? 내가 얼마나 내 멋대로 개판치고 살았는데, 내가 얼마나 정말 하나님을 비웃고 살았는데...’ 그의 이런 심정을 잘 말해주는 것이 18절, 19절입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 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죄를 가슴에 품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심리적인 거리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본문에 보면,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말합니다. 누가 누구를 보았다는 말입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보았습니다. 누가 먼저 발견했습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그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로 달려갔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집나간 자식이 아버지를 먼저 알아보았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측은히 여겨서 먼저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가 그런 분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자비의 마음’은 아들의 ‘회개하는 마음’보다도 더 빨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하늘 아버지의 용서의 마음은 회개하는 우리 인간들의 발걸음보다 더 빠르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스폴츠라는 설교가는 이 부분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간신히 한걸음 한걸음을 무겁게 내 디디고 있었을 때에, 기다리는 아버지는 열 걸음으로 달려왔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시는 아버지, 그분은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는 기다리시는 아버지입니다. 집나간 아들을 기다린 것처럼 그렇게 기다리십니다. 기다리심으로 맞아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줄 것 다 주시고 그리고 잘못 될 것 다 아시고 그러고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계속해서 본문은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 가져오라’ 새 옷, 의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는 언약의 반지를 끼워준 것입니다. 그리고 발에는 신발을 신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난후, 아버지는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만약 세상의 아버지였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아마 아버지는 둘째아들이 돌아왔을 때, 물론 기다리고 염려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아버지는 일부러 방으로 들어가서, 아무 말도 안하고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이 들어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할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는 ‘이놈아 어떻게 그럴 수 있냐?’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아니면, 몽둥이를 들고 다시 내쫓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용서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미리 용서를 해놓고 기다리셨다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바로 미리 용서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를 그분이 다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아야할 저주, 우리가 받아야할 채찍을 대신 맞으시고, 형벌을 받으시고... ‘너의 죄는 다 해결되었으니, 돌아오기만 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다 용서해놓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오래전, 샘터사에서 나온 오천석씨가 쓴 ‘노란 손수건’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 저와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은 다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그 책에 이런 내용의 글이 나옵니다. 뉴욕형무소에서 4년을 복역한 ‘빙고’라는 사람은 수감생활 동안 아내에게 두통의 편지를 보냅니다. 첫 번째 편지는 ‘자신을 기다리지 말고 잊으라’는 내용의 편지였고, 3년 반이 흘러 가석방 결정이 내려졌을 때 두 번째 편지를 아내에게 보냈습니다. ‘만약 자신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면, 마을 입구 오래된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아두십시오. 노란 손수건이 없으면 저는 그냥 그 버스를 타고 지나칠 것이고, 노란 손수건이 걸려 있으면 당신에게로 갈 것입니다’ 드디어 가석방이 되던 날 그는 버스를 타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내가 자신을 받아줄 것인지, 아닌지, 초조한 마음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결론을 이미 알고 계실지 모르지만 그 동화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을 입구의 그 참나무는 온통 노란 손수건의 물결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20개, 30개, 아니 수백 개가 바람 속에 환영의 깃발로 마구 물결치고 있었다.” 참나무 가지마다 매달린 손수건 하나하나는 아내가 홀로 보낸 기다림의 날들이요, 용서의 마음, 환영의 메시지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정죄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혹시 우리 중에 하나님을 떠나서 방황하거나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혹, 우리 중에 인생의 흉년을 만나 고통당하는 분이 있다면, 절대 잃어버릴 수없는 하나님을 생각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모두를 용서해 놓고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직도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습니까? 아직도 무엇이 그렇게 믿기질 않습니까? 우리의 아버지는 첫째, 모든 것을 허락하시는 아버지입니다. 둘째. 우리를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아버지이십니다. 셋째, 끝까지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 품으로 돌아갑시다. 할렐루야!
기도 / 좋으신 하나님~ 우리 모두다 스스로 돌이켜 이제 주님 앞으로 돌아와 잃어버렸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