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41624 성령 보혜사 200527 수요 강해
1.지난 시간에는 요140815 성부와 하나이신 예수님
정리 결론
첫째,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시다-성령까지!
-삼위일체(三位一體)
①예수님을 본 자, 또는 예수님을 믿는 자는 곧 하나님을 본 자이고, 하나님을 믿는 자이다
②예수님의 하시는 일이 곧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둘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이 하신 일뿐만 아니라 더 큰 일도 할수있다
-주님이 가시고 성령이 오셨기 때문=>성령의 능력으로!!
셋째, 무엇이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받는다
-주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죄의 주님!!-대속의 주님!!
넷째,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
기도하고 성령받은 사람은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 주님을 사랑한다
2.오늘은 주님은 십자가에 돌아 가시고 부활하여 승천함으로 제자들을 떠나가시지만 대신 성령 보혜사를 보내시어 영원토록 함께 있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본문에는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께서 장차 성령을 보내주실 것에 대한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즉, 주님 자신이 비록 제자들을 떠나 하늘 나라로 가신다 할지라도, 삼위 일체중 또 다른 하나님이신 보혜사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어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성령을 '보혜사'로 표현하신 것은 성도들 곁에서 일거수 일투족을 감찰하시면서 마땅히 성도들의 말할 바와 행할 바를 가르치고 도와 주시는 위로자, 대언자, 상담자로서의 성령의 사역을(26절) 염두에 두신 것이다.
아무튼 이같이 예수님의 떠나가심이 도리어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큰 축복이 된다는 이 약속은 제자들에 대한 무한한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보혜사 성령에 관한 약속은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승천하신지 얼마 후인 오순절에 성취되었는데,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완전히 변화된 제자들의 신앙과 용기, 그리고 엄청난 권능과 지혜가 바로 그들이 체험한 성령 충만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강해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 '보혜사'(파라클레토스)는 '곁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파라'와 '부르다'라는 뜻의 '칼레오'에서 파생한 '클레토스'의 합성어로서 세속 헬라어에서는 '변호자' '대언자'라는 의미로 쓰였다.
'보혜사'(保惠師)라는 성경의 번역은 '보호하고 은혜 주시며 가르치시는 분'이라는 의미다.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
성령은 주님 오실 때까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는 보혜사 성령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주셨고 영원토록 함께 거하신다.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진리의 영 - 성령은 진리를 전달하는 영이요(요 16:13) 혹은 진리를 증거하고 밝히시는(요 15 : 26, 27) 영이다
본절의 문맥에서는(16, 17절) 성령의 사역이 예수의 사역을 대체한다는뉴앙스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 즉 오실 보혜사는 이제 진리이신 예수님 대신에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는 진리의 영'이신 것이다(요 15:26).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빛'이신 예수를 깨닫지 못하던 어두움인(요 1 : 5, 10) 세상이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을 알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는 근본적으로 세상이 ① 영적 통찰력이 없고('보지 못하고'), ②영적 지식도 없으며('알지도 못함'), ③영적 분별력도 없음으로(고전 2 : 12-14) 성령을 인정하지도 않기(마 12:22-27 ; 행 2: 1-12)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제자들은(7-11절) 그와 동격이신 성령도 당연히 안다.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유대에서 랍비들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같이 여겨졌으므로 제자들은 스승이 죽었을 때 '고아'라고 불리웠다.
이는 헬라의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역시 그 제자들을 '고아'라고 불리워지도록 했다는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예수께서는 유대 사회에서 과부와 더불어 가장 불쌍한 부류의 사람들로 구분되었던 보호자를 상실한 고아가 되도록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다시 오신다는 확실한 보장을 하신다는 사실이다.
한편 '오리라'에 해당하는 '에르코마이'는 역시 3절과 같이 분명한 미래를 의미하는 현재형으로 성령의 오심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모두 표현하는 이중 암시적 용법으로 쓰였다(28절 참조).
이처럼 성령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부모를 다시 찾는 것과 같이 큰 힘이 된다.
->주님은 성령으로, 재림으로 우리를 찾으러 오시고 우리는 그 안에서 평강을 누린다.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조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티 미크론'이란 표현은 일차적으로 임박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가까움을 의미하지만 20절의 표현과 관련시켜 이해할 때 그리스도 승천 이후로부터 재림 이전까지, 즉 종말론적 중간시기로 볼 수도 있다.
이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영안을 통하여 구속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그리스도를 볼 것이나 불신자들은 영적 어두움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망각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영적 안목이 없어서 예수님이나 성령님을 보지 못하는(본절, 17절) 세상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예수를 본다.
이 표현 역시 1차적으로는 제자들이 직접 경험한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을,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신약 시대에 계속될 그리스도와 성령의 구속 사역을 가리키나, 궁극적으로는 주의 재림시 영광 가운데서 예수를 보게 될 것을 가리킨다.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제자들이 주님을 뵈올수 있는 이유로 주님이 부활하여 살아 계실 뿐 아니라 제자들도 믿음으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살아 있는 자요, 주님을 뵈올 수 있는 눈을 가진다.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날'( 에케이네 테 헤메라)이란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된 새로운 교회 시대를,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시작될 종말의 날을 가리킨다.
이 날이 이르면 성부와 성자간의 본질적 일체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도간의 믿음을 통한 영적 인격적 연합에 대한 신비를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성령의 임재와 나아가 종말론적 부활에 참여할(16-20절)자의 자격이 제시된다.
'사랑하면 계명을 지킨다'는 말씀과 '계명을 지켜야 사랑하는 자'는 의미상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을 받은 자가 감사로 응답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더 큰 사랑을 베푸신다(아브라함-독자 이삭, 솔로몬-지혜구함, 10명의 나환자중 한명- 오직 감사의 중요성)
->베푸신 사랑에 감사하여 응답함으로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을 우리를 더 크게 사랑하신다
=우리가 한걸음 나아가면 주님은 열 걸음 가까이 오신다!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가룻인 아닌 유다. 본서 저자 요한은 본절의 유다가 가룟 유다가 아님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간접적으로 가룟 유다에 대한 혐오가 있었음을 암시한다(요 13 : 30).
본절의 유다는 '다대오'라고 불리운(마 10:3; 막 3 : 1)야고보의 아들을(눅6 : 16 행 1:13) 말한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아마도 유다는 21절의 '나타내리라'는 말씀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능력적으로(예를 들면 정치적 메시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오해했던 듯하다.
이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예수께서는 이것에 관해 말씀을 더 부연하신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
한마디로 이 말씀은 진정한 '제자' 혹은 '성도'가 되는 길을 가리킨다.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
21절의 말씀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볼 수 있는 자들이 아버지께 사랑받는 제자들이듯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합과 교제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배타적 축복이다.
이 영적인 연합은 '거처'라는 단어가 영속적인 거주지를 의미한다고 해서 천국에서의 미래적인 거주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6, 17절에서 언급된 성령의 내주(內住)와 연결하여 현재적 임재와 영적 교제로서의 의미 또한 강력한 것이다.
또한 '우리가 와서'(엘류소메다)에서 복수형이 사용된 것은 '아버지와 예수', 나아가 '성령'까지도 성도와 교류의 대상이 됨을 보여 준다.
한편 '저에게 와서'에서 '저에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아우톤'에서 '프로스'란 전치사는 요 1 : 1에서 하나님과 '함께'를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어 성부와 성자간의 밀접한 교제 관계 즉 마치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듯한 상황을 묘사할 때도 사용된 요한의 특징적 표현이다.
이처럼 삼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자들과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신다.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앞부분에서는 계속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계명 준수가 제자됨의 요건임을 반복하여 설명했으나 여기서는 오히려 반대적 서술을 통해 제자됨의 의미를 강조적으로 보여 주시려는 예수의 의도가 나타난다.
즉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당연히 그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데, 이것은 제자의 요건과 정반대 된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15, 21절).
이 제자가 아닌 자들의 심각한 영적 상태는 불순종의 지속이란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사실은 '사랑하지'와 '지키지'가 모두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사랑과 계명 준수가 항상 행하여져야 함을 보여 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아울러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을 거부하는 것이 결국 삼위 가운데 하나이신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는 것임을 밝힘으로써 다시 한번 성자와 성부의 동등되심을 증거하신다(요 7:6 참조),
정리 결론
첫째, 진리의 영인 성령 보혜사가 예수님 대신 오셔서 믿는 자들에게 위로, 인도자가 되신다.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성령을 힙입지 않고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하다
둘째,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가 성령안에서 연합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으면 알수 있다.
셋째, 성령으로 연합되어 있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
성령안에 있는 사람은 연합되어 있음으로 주님의 계명은 주님의 멍에이며 쉽고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