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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8000m 한(恨)을 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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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2 좌절 20년 만에 가셔브롬1봉 ‘성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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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클린치.- 무관의 제왕 미국. 미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늦은 1930년대 히말라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비록 미국의 히말라야 도전은 늦었지만 당시 영국과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산악 선진국과 경쟁할 만큼 강력한 등반력을 과시하며 8000m 초등정 경쟁에 불을 지폈다.
●미국의 K2 도전 특히 미국은 세계 2위봉 K2(8611m)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도전했다. 미국은 1938년과 이듬해에 K2 등정 직전까지 갔다가 패퇴, 안타까움을 더했다. 실제로 1938년 K2 등반에 나선 미국은 찰튼 휴스턴과 페촐트는 아브루치 루트를 따라 해발 7740m까지 접근했으며 정상 공격을 위한 마지막 캠프를 7530m에 설치했다. 6월 21일 휴스턴과 페촐트는 정상공격에 나서 7925m까지 진출, K2 정상을 위협했다. 이 사건은 1856년 영국의 측량장교 몽고메리가 K2를 처음으로 발견한 후 82년 만에 처음으로 정상을 위협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1939년 또다시 K2 등반에 나선 미국원정대는 ‘미국 현대 등반의 아버지’ 프린츠 비스너를 앞세워 인류 최초로 8000m 고봉에 대한 등정을 노렸다. 프린츠 비스너는 아브루치 루트를 따라 해발 7710m에 8캠프를 건설한데 이어 7940m에 9캠프를 만들고 정상 공격을 위한 준비를 모두 마쳤다. 7월 19일 비스너와 셰르파 파상은 드디어 정상 공격에 나섰다. ‘죽음의 지대’인 8000m를 돌파하면서 폭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들은 강인한 체력으로 눈을 헤치고 나가며 8380m까지 진출, 이제 정상까지는 231m를 남겨 놓았다. 비스너와 파상은 2시간만 걸으면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셰르파 파상이 “어두울 때 정상에 오르면 신이 분노한다”며 만류하자 포기하고 말았다. 만약 그들이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면 인류 최초의 8000m 등정은 11년이 앞당겼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가장 등반하기 어렵다는 K2에서 역사적인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
●가셔브롬1봉에 대한 도전 파키스탄 발티어로 ‘빛나는 산’,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의 가셔브롬1봉(8068m). 아름다운 이름의 가셔브롬1봉은 다른 이름도 있다. 바로 히든피크(Hidden peak)다. 1892년 파키스탄 카라코롬 산맥을 탐험한 영국의 콘웨이가 가셔브롬 산군의 여러 봉우리에 가려져 있어 발토르 빙하를 거슬러 올라가야 볼 수 있어 붙여준 이름이다. 현재 국내에서는 가셔브롬1봉으로 알려져 있지만 유럽에서는 가셔브롬1봉보다는 히든피크로 유명하다. 가셔브롬1봉을 가장 먼저 도전한 나라는 스위스였다. 1934년 스위스의 군터 다이렌퍼스가 지휘하는 국제대는 대규모 탐사를 실시했다. 스위스의 로슈와 독일의 에르트르는 남서쪽 방향으로 등반을 시작, 6300m까지 진출했으며 7000m 봉우리를 등정했다. 군터 다이렌퍼스의 부인은 씨아캉리 서봉(7315m)을 세계 초등하면서 당시 여성으로서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기록을 세웠다. 다이렌퍼스의 아들 노만 다이렌퍼스는 1955년 로체를 처음으로 도전해 부자(父子)간, 모자(母子)간 히말라야를 등반한 가족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남기게 된다. 1936년 프랑스가 가셔브롬1봉을 찾았다. 프랑스는 히말라야 등반에 역사적인 첫 도전이었다. 프랑스는 유럽 국가 중 히말라야에 가장 늦게 진출했지만 알프스에서 익힌 뛰어난 등반력과 팀워크, 철저한 사전준비로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해발 4950m에 베이스 캠프를 설치한 프랑스는 3캠프(6100m)까지 순조로운 진행을 보였지만 이후부터 폭설 등 기상악화로 고전하게 된다. 제4캠프를 해발 6600m에 건설했지만 폭설이 내려 4일간 텐트 속에서 발목을 잡혔으며 6월 19일 제5캠프를 6800m에 설치하는데 꼬박 두 달이 걸렸다. 가셔브롬산군에 몬순이 다가오자 엄청난 눈이 내리면서 더 이상의 전진은 어려웠다. 결국 원정대장 세고뉴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폭설로 텐트가 묻히고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악조건에서 대원들은 날씨가 호전되기만을 기다렸다. 가셔브롬1봉은 프랑스의 정상 도전 기회를 주지 않았으며 날씨는 더 악화되면서 대원들은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히말라야 첫 도전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름다운 산 정상의 성조기 미국은 K2에서의 세계 초등을 놓치면서 8000m 초등을 좀처럼 이뤄내지 못했다. 히말라야 전체 14개 봉우리 가운데 이미 11개가 등정됐지만 미국의 성과는 단 한 개의 봉우리도 오르지 못했다. 이제 8000m 봉우리 가운데 초등되지 못한 산은 가셔브롬1봉과 다울라기리, 그리고 시샤팡마 3개 봉뿐이었다. 초조해진 미국은 1958년 가셔브롬1봉에 모든 것을 걸었다. 니콜라스 클린치가 이끄는 미국원정대는 철저한 준비를 마친 후 5월 21일 파키스탄 카라코롬 산맥의 관문인 스카루드를 출발, 본격적인 카라반을 시작했다. 그러나 출발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포터들이 파업을 일으키면서 포터 숫자가 출발 때 120명에서 20명으로 줄어드는 악조건 속에서도 등반을 포기하지 않았다. 20여일간의 카라반을 마치고 해발 4950m에 베이스 캠프를 설치한 후 6월 21일 3캠프를 6550m에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6월 28일 대원들은 3캠프에 모여 3개조로 나눠 물자를 운반하는 등 정상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4캠프를 건설한 후 기상악화로 더 이상의 전진은 어려웠다. 미국원정대는 시간을 끌수록 등정하기 어렵다고 판단, 폭풍설을 뚫고 5캠프를 세우기 위해 전진했다. 강한 바람도 미국원정대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대원들은 제5캠프 설치에 성공했으며 세닝과 카우프만 대원이 정상을 공격하기로 했다. 드디어 7월 5일 하지만 많은 적설량은 그들의 공격속도를 늦췄다. 정상공격을 나선 지 7시간 만에 이들은 산소통을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고 전진을 계속했다. 대원들은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전진하는 바람에 체력 소모가 컸으며 급경사에 가까운 설사면과 암벽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숙원을 알고 있는 세닝과 카우프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다. 드디어 7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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