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소설 '무정'의 정신사적 성격
동촌
《무정》(無情)은 한국 근현대문학의 핵심 인물의 하나인 이광수의 초기 대표작이다. 1917년 조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총 126회에 걸쳐서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연재되고 이듬해인 1918년 7월에는 광익서관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으며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인기도 얻었다.
연재 당시 작자의 나이는 26세로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한 다음해이며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은 27세 때이니 모두 젊은 학창 시절이었다.
그는 평북(平北) 정주(定州) 출신으로 전주 이씨 양반 내력이었으나 가세 몰락해가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선대의 벼슬과 조부와 부친도 글줄을 읽었으나 현실에는 무능한 애주가였는데 11세 때 아버지를 콜레라로 잃고 어머니도 거의 동시에 잃었다. 누이동생이 둘이었으나 그중 하나는 남의 집으로 보내졌다가 곧 사망했다.
그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많은 고초를 겪다가 12세 때 동학의 지역 두령이었던 박대령의 집에 들어가 문서 대필작업을 하며 잠시 정착된 생활을 했다.
박대령의 외동 딸(예옥)은 이광수보다 다섯살 위인 17세였으나 동기간처럼 따뜻이 지냈으며 이광수의 마음 속에 첫사랑과 유사한 영상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소설 무정 속에 나오는 영채는 이 여성을 모델로 한 것이라 알려진다.
그러나 동학 입교 이듬해에 관계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 어린 이광수도 검거자 선상에 올랐다. 불가불 박대령의 집을 떠나 서울로 달아나 무전걸식하다시피 지내면서 세상의 형편을 살폈다. 그러다 동학의 일파로서 친일화한 일진회(一進會)의 소공동학교에서 《일어독학》 암송 능력으로 일어선생으로 채용되었다. 그후 일진회의 일본유학생 프로그램에 의해 일본 유학길에 떠나게 되었다.
유학하는 동안 학비 조달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우여곡절 속에 명치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마치고 제1고등학교에 합격하였으나 조부의 사망으로 귀국, 정주의 오산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학교의 새 운영진이 된 미국인 목사와 뜻이 맞지 않아 교사직을 그만두고 해외 여행으로 견문을 넓히다 돌아왔다. 그후 인촌 김성수의 도움으로 재차 도일하여 와세다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기간 중에 매일신보에 일련의 글을 기고하다 1917년 무정이란 소설까지 연재하게 된 것이다.
그는 매일신보에 기고한 논설류 글에서 고래의 구습 타파와 새로운 가치관 정립을 강력 주장하였으니 말하자면 개혁세력의 기수 역을 자임한 셈이었다.
학생 신분에 불과한 그에게 논설류 글을 게재케하고 장편소설까지 연재시킨 데는 당시 한국 언론을 주관하던 '도쿠도미 소호(德富蘇峰)' 측의 후원이 있었던 듯하다. 그는 일본의 국수주의 언론인이자 역사가이기도 했는데 데라우찌 총독은 한국에 부임하면서 총복부 기관지격인 경성일보 운영을 그에게 주관하게 하였다. 이 신문은 일본어로 발간되었는데 그 산하에 한글판 자매지가 매일신보였다. 본래 매일신보의 뿌리되는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베델이 운영하던 애국 언론이었으나 일제 강점 후 경영진이 바뀌어 사명에 '대한'을 떼어내고 일제의 기관지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도쿠도미는 일본에 언론사를 경영하고 있어 경성일보 사장 자리는 측근인 아베를 대신 취임시키고 자신은 감독 직책으로 배후 실권자로 군림했는데 이광수는 진작 아베와 만났고(1916년) 이후 각종 원고 청탁을 받게되었다. 그해 7월 도쿠도미와도 만났으며(우신사 간 전집 연보) 무정 연재 후에도 아베의 주선으로 그를 친견한다. (1917) 도쿠도미는 그후 지속적으로 이광수에게 애정과 사명감을 주입시켰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1. 이광수는 애초 친일단체였던 일진회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을 했다.
2. 이광수는 일제의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많은 글을 기고하다가 마침내 장편소설 무정까지 연재하게 되었다.
3. 이광수에게 글을 기고하게 배후에서 지원한 세력은 일본의 국수주의자 언론인으로서 당시 한국 언론을 총괄 관리한 도쿠도미 소호 계열이었다.
이 세가지 사실 앞에 우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이광수의 진정이 어떠하던, 무정의 참신성이 어떠하던, 그 배후에는 일제의 엄호가 있었고 이광수는 자의반 타의반 그들의 계획된 사상적 시나리오에 끌려들어간 점 또한 없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흔히 한국 근현대문학사에서 《무정》을 그 효시적 작품으로 들거니와 이같은 제반 사실에 비추어 과연 우리 근대문예를 이로부터 출발시켜도 좋은지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정의 내용은 구래의 도덕과 사상을 폄하 부정하고 새로운 신사상을 강조하는 것인데 그 중심은 일제를 통과하여 들어오는 서구문명 지향이요 찬미다.
주인공 이형식은 영어선생으로 기독교 장로집에 영어 가정교사로도 일하며 가르침을 받은 여성과 함께 정혼하여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이에 겻들인 스토리는 이형식이 진작 배웠던 박진사의 딸 영채와는 결혼이 예정된 사이였지만 그동안 형편을 모르고 지났는데, 알고보니 그녀는 몰락한 가정을 돕기위해 기생이 되었고 다만 정절만은 지켜왔다. 그러다 어느날 순결을 잃어버리게 되자 자살하려 하였는데 일본유학생 병욱의 설득으로 개심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그후 기차간에서 외유 길의 형식(선형)과 영채(병욱) 일행이 모두 조우하게 되는데 삼랑진의 수해 현장에 연착 중 자선음학회를 열어 그 의연금으로 수재민 동포를 돕게 된다.
이 일에는 경찰도 거들고 흔쾌히 참여 지원한다.
식민지 하 재난상을 서구 음악 연주와 그 음악을 이해하는 소수인의 의연금으로 위무하는 종결부는 시대적 문제점을 착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감상주의를 느끼게 한다. 당시는 헌병 무단통치의 잔혹무비한 탄압으로 한반도 전역에 저항의 열기가 피어오르던 3.1운동 수년 전의 시국 정황이었으나, 여기 경찰의 자애로움 또한 어색한 점이 크다.
소설 말미, 주인공들의 장래는 대개 이렇게 장미빛으로 그려진다.
“형식과 선형은 지금 미국 시카고대학 사년생인데 내내 몸이 건강하였으며― 금년 구월에 졸업하고는 전후의 구라파를 한번 돌아 본국에 돌아올 예정이며, 김장로 부부는 날마다 사랑하는 딸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벌써부터 돌아온 후에 할 일과 하여 먹일 것을 궁리하는 중.
병욱은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자기의 힘으로 돈을 벌어서 독일 백림에 이태 동안 유학을 하고, 금년 겨울에 형식의 일행을 기다려 시베리아 철도로 같이 돌아올 예정이며, 영채도 금년 봄에 동경 상야 음악학교 피아노과와 성악과(聲樂科)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아직 동경에 있는 중인데 그 역시 구월경에 서울로 돌아오겠다. 더욱 기쁜 것은 병욱은 베를린 음악계에 일종 이채(一種異彩)를 발하여 명성이 책책하다는 말이 근일에 도착한 베를린 어느 잡지에 유력한 비평가의 비평과 함께 기록된 것과, 영채가 동경 어느 큰 음악회에서 피아노와 독창과 조선춤으로 대갈채를 받았다는 말이 영채의 사진과 함께 동경 각신문에 게재된 것이라. 듣건대 형식과 선형도 해마다 우량한 성적을 얻었다 한다. 삼랑진 정거장 대합실에서 자선 음악회를 열던 세 처녀가 이제는 훌륭한 레이디가 되어 경성 한복판에 떨치고 나설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이다.(126회)“
아울러 다음과 같은 희망가로 최종 결말된다.
“아아, 우리 땅은 날로 아름다워 간다. 우리의 연약하던 팔뚝에는 날로 힘이 오르고 우리의 어둡던 정신에는 날로 빛이 난다. 우리는 마침내 남과 같이 번적하게 될 것이로다. 그러할수록에 우리는 더욱 힘을 써야 하겠고, 더욱 큰 인물…… 큰 학자, 큰 교육가, 큰 실업가, 큰 예술가, 큰 발명가, 큰 종교가가 나야 할 터인데, 더욱더욱 나야 할 터인데 마침 금년 가을에는 사방으로 돌아오는 유학생과 함께 형식, 병욱, 영채, 선형 같은 훌륭한 인물을 맞아들일 것이니 어찌 아니 기쁠가. 해마다 각 전문학교에서는 튼튼한 일꾼이 쏟아져 나오고 해마다 보통학교 문으로는 어여쁘고 기운찬 도련님, 작은아씨 들이 들어가는구나! 아니 기쁘고 어찌하랴.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이 아니요, 무정하던 세상이 평생 무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게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
기쁜 웃음과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하는 『무정』을 마치자.“ (같은 글)
여기서 소설 제목 '무정'이란 한국의 지난 과거사 일반을 상징 표현한 것으로 부정의 대상이며 앞으로 다가올 밝고 '유정'한 시대와 대조하기 위한 수사법임을 알게된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 땅은 날로 아름다워가는 것이 아니라 국권은 상실 후 일제 무단 통치 하에 살벌히 짓밟히고 유린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광수는 이런 장미빛 미래상을 서술했던가?
추정컨대 범개혁주의적 인물로 당시대의 각종 변화상 자체를 긍정한데 일차 원인이 있을 듯하다.
다만 개혁세력 내부에도 두 계열이 있었으니 하나는 한국의 독립성을 수호하며 개혁하려는 자주적 개혁세력이요 다른 하나는 친일 등 외세에 의존해 개혁에 동참하는 친일지향적 개혁세력이다.
이광수는 애초 이 두가지 측면을 동시에 내포하였으나 초기에는 전자에, 후기로 갈수록 후자에 기울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일제의 식민지 언론과 그 주도자들의 지원 하에 그들의 뜻에 부합된 글을 썼으나 한편으로 동경에서 학생들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1919년 2월) 이를 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전하기 위해 상해로 밀항하였으며 그곳의 지도자였던 안창호의 민족개량주의와 점진적 독립운동론에 동조 참여함은 주지되는 바다. 상해에서 돌아와 국내에 머물면서 다시 김성수 등 대일 온건파들에 합류하면서 그들이 발행하는 신문 지면에 왕성한 계몽주의적 소설을 발표하였던 터이다.
한편 국권을 보위하려는 세력도 보수와 개혁파가 병존하였으나 양자 상호 혼융되기도 하였다.
해박한 유교와 한문 지식으로 입신했던 신채호가 양개초의 음빙실문집 등으로 각성하면서 개혁세력의 중추가 되고 다시 독립운동 과정에서 무정부주의자들과 연대하여 무력 투쟁의 전위가 되었음은 이러한 복합성의 상징일 것이다.
그는 1923년 의열단의 입장을 밝히는 <조선혁명선언>을 썼거니와 그 논지는 이광수의 상기한 시각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는 이광수 류의 문화 지향주의를 냉소하면서
“일본 강도 정치 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누구이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약탈의 제도 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전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망이 있으랴? 쇠망한 인도족·유태족도 문화가 있다 하지만, 하나는 금전의 힘으로 그 조상의 종교적 유업을 계속함이며, 하나는 그 토지의 넓음과 인구의 많음으로 오랜 옛날 자유롭게 발달한 남은 혜택을 지킴이니, 어디 모기와 등에 같이, 승냥이와 이리같이 사람의 피를 빨다가 골수까지 깨무는 강도 일본의 입에 물린 조선 같은 데서 문화를 발전 혹 지킨 전례가 있더냐? 검열·압수 모든 압박 중에 몇몇 신문·잡지를 가지고 '문화운동'의 목탁으로 스스로 떠들며, 강도의 비위에 거스르지 아니할 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발전의 과정으로 본다 하면, 그 문화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
라 하며 통열히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광수는 수양동우회 재판 과정에 창씨개명하고 일제에 정식 굴복하며 젊은 시절부터 질긴 인연의 도쿠토미 소호에게 편지로 그의 아들됨을 선언하였다.
반면 신채호는 일제와 정면 투쟁하다 여순 감옥 차디찬 옥방에서 사망하는데 친일 인사 보증 하의 출옥 제안을 거절하는 준열함을 보였다 한다. (채홍규 저, 단재 신채호, 410쪽)
관점과 논리가 달랐으니 그 삶의 궤적도 현저히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결국《무정》은 범 개혁세력의 하나였으나 친일 반민족으로 귀결된 이광수 삶의 단초를 보여주는 뿌리되는 작품이라할 것이다.
해방 후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소환된 것은 이광수의 인생만이 아니라 소설 《무정》도 정밀 검증할 점이 없는지 숙고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