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주산성은 안성 몽골전투 에서 교통의 중심지 였으며
조선시대에도 청주와 충주의 두 길이 만나 서울로 통하는 요지인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강조되어 성을 보수했다고 한다.
안성장은 허생전이 쓰여진 배경이라고도 하는데 서울의 관문 역할을 해서 조선 3대 장터인 만큼
규모가 매우 크고 없는 물건이 없었다고 한다.
태평 미륵은 태평 고려시대 몽고군을 물리친 송문주 장군과 김윤후 장군을 기리고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고한다.
불상처럼 머리가 신체의 다른 부분에 비해서 거대하며 인체 비례 또한 맞지 않지만
당당한 모습을 봤을 때 고려시대 초기 불상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부처의 손모양은 두려움을 다 막아준다는 ...(?)
날씨는 조금 덥고 힘들었지만
나름 좋은 경험을 했던 것 같다
비록 70도 각도의 길을 올라가는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은 추억이 되었다.
올라갔을 때 보살님이 떡이랑 사탕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약숫물도 시원해서 좋았음.
죽주산성은 고려 시대에 죽주성으로 불렸으며 몽고군과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던 곳이다
죽주는 청주와 충주의 두 길이 만나는 중부 내륙교통의 요충지였다
죽주산성은 내성, 본성, 외성의 중첩된 성벽 구조를 갖추고 있다
원래 성벽이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외성뿐이고 내성과 본성은 훼손이 심하게 되었기 때문에 성벽의 구조를 통하여
축조된 시기를 추정하기 어렵다고 한다.
태평미륵은 고려 초기의 형식으로 부처의 손모양은 두려움을 다 막아주겠다는 수인을 가지고있다.
옆의 오층석탑은 그 본 모습을 잃어버리고 미륵을 향하는 길 옆에 있었다.
꽃문양이 있는 보관은 높이 솟아 미륵불을 근엄하게 하고 미륵의 얼굴에는 자비심이 깃들어있다고 한다.
다음은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절의 입구를 알려주는것으로 깃발 지지대의 역할을 한다.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세운 두 개의 받침대로, 그 대강의 형태는 지주밑에 사각형의 대석이 마련되고
지주 사이에 원형 간대를 놓아 지주를 고정시킨 것이며, 대표적으로 분황사의 당간지주가 있다.
태종의 명복을 기리기 위한 안성 봉업사는 조선시대때 없어지고 탑만 남고 상윤부가 없었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때 억불정책 또는 일제강점기때로 인해 본모습을 잃었을 거라고 한다.
그 다음은 칠장사에 갔다. 칠장사는 대웅전, 원통전을 비롯 15동의 건물들이 있고, 여러 구전들이 존재했다.
그 구전에는 임꺽정과 관련된것과 암행어사 박문수에 관한 것이 있었다.
칠장사에서 처음 본 것은 칠장사 소조 사천왕상이다.
그 안에는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의 조상이 양쪽으로 모셔져있었다
비신의 높이는 241cm,폭은 128cm로 양쪽에는 쌍룡이 새겨져있었다.
비신과 함께 받침돌인 귀부, 미수가 옆에 놓여있었다. 그 다음은 죽림시 삼층석탑이다.
탑의 전체 높이는 375cm로 1층탑신은 2매의석재로 구성되있고, 한 면은 둥근 문고리장식이 조각되어있고,
상륜부에는 반형노반만 남아있다.
그 다음으로 본 것은 안성봉업사 석불입상이다.
원래 죽산의 봉업사지에 있다가 죽산 고등학교로 옮겨졌다가 마지막으로 옮겨진 곳이 칠장사이다.
불상의 높이는 166.5cm이고, 총 높이는 206cm. 옷주름은 여러겹의 둥근 모양.
뒷면에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가 있다. 주위에는 불꽃무늬가 있는데 이것은 화불을 의미한다.
이 무늬는 고려초기애 유행하던 불상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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