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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감호(金現感虎)
【출전】고려 박인량이 지은 {수이전(殊異傳)}에 실려 있던 설화. 현재는 {대동운부군옥} 권15와 {삼국유사}권5 '김현감호'
신라 풍속에 음력 2월 초파일부터 보름까지 청춘 남녀가 흥륜사의 탑을 돌면서 복을 비는 습관이 있었다. 원성왕 때 김현(金現)이란 청년이 밤늦게 탑을 돌다가 거기서 한 처녀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김현이 그 처녀의 뒤를 다라가 보니, 처녀는 뜻밖에 범의 변신이었다. 이 처녀에게는 성질이 사나운 세 오빠가 있었으므로, 마침 하늘이 징계차 한 마리를 죽이려던 차였다. 이에 처녀는 오라비를 대신하여 스스로 죽을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김현에게 "내가 내일 시장거리에 나타나 많은 사람을 해칠 터이니, 낭군은 나를 잡아 그 공으로 높은 벼슬에 오르십시오."라고 했다. 김현이 그의 청을 거절하니 "천명이니 차라리 낭군 옆에서 죽고 싶다."고 애원하였다. 이튿날 과연 범이 시장에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자 나라에서는 큰 상을 걸고 범을 잡게 하였다ㅏ. 김현에 이에 어제 저녁에 들은 대로 숲에 이르니, 과연 처녀가 나와 기꺼이 맞아주며 스스로 칼을 빼어 목을 찔러 죽는데, 몸둥이가 곧 범으로 화했다. 이에 김현이 그 공에 의하여 높은 벼슬을 하게 되매, 호원사란 절을 지어 범의 명복을 빌게 되었다.
도미의 처
【출전】{삼국사기} 권 48 열전 제 8 '도미(都彌)'
백제의 개루왕(蓋婁王) 때, 도ㅗ미라는 사람의 아내가 아름답고 품행이 얌전하여 사람들이 칭송을 받았다. 하루는 개루왕잉 도미를 불러 말하기를 "비록 부인의 덕은 정결이 첫째라지만 만일 남이 모르는 곳에서 좋은 말로꾀인다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자는 적을 것이다." 하였다. 도미는 "사람의 마음은 측량하기 어려우나 저의 아내와 같은 사람은 비록 죽는다고 해도 딴 마음은 먹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고 왕은 시험해 보고자 도미를 궁에 머무르게 하고 하인을 거느리고 밤중에 도미의 집으로 가서 하인으로 하여금 왕이 왔다는 것을 알리게 하고 들어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도미와 내기를 하여 내가 그대를 얻게 되었으니 내일부터는 궁궐에 들어와 궁인이 되라. 이제부터는 그대는 나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하였다. 개루왕이 도미의 처를 탐내어 난행하려고 하자, 도미의 처를 계집종을 잘 꾸며 대신 들여 보냈다. 이에 속은 줄 안 갸루앙은 도미에게 일부러 죄를 내려 그의 눈을 빼어 버리고 작은 배에 태워 강 위에 띄웠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탐ㅎ려 하자 도미의 처는 왕을 속이고 궁궐을 빠져 나와 남편을 찾아가 함께 고구려 산산(蒜山) 아래에 당도하여 구차한 생활을 하며 나그네로 생을 마쳤다.
박종화의 [아랑의 정조]는 이 설화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문전신(門前神) 본풀이
이 이야기는 재생설화(再生說話)의 일종으로 죽은 어머니를 환생꽃을 구해다가 살리는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는 서사무가(敍事巫歌)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남선비가 식구는 많고 흉년은 들어 오동국으로 쌀을 사러 갔는데 삼년을 돌아오지 아니하니 그 부인이 남편을 찾아 오동국으로 간다. 그리하여 남편은 만났으나 노일저대귀의 딸을 첩을 삼아 살며 눈이 어두워 세상을 분별치 못하고 지내는 것을 안다. 그러나 노일저대귀는 남선비의 본부인이 온 것을 알고 샘터에 밀어 넣어 죽이고 본부인의 옷을 입고 남선비의 본집으로 간다. 한편, 남선비의 아들 칠형재는 어머니가 자기의 친어머니가 아닌 것을 알고 이상히 생각한다. 노일저대귀는 아들 칠형제를 죽이려고 거짓으로 병들 체하고 남편 보고 점을 쳐 보라고 하여 아들 칠형제의 간으 먹어야 자기 병이 낫는다는 것으로 알게 한다. 남선비가 아들들을 죽이려고 칼을 가니 막내 아들이 꾀를 내어 자기가 형님들의 간을 꺼내 오겠다 하고 산돼지 여섯 마리를 잡아 그 간 여섯 개를 내어다 주니 노일저대귀는 먹는 척하고 자리 밑에 넣어 버린다. 이것을 안 아들이 노일저대귀를 죽이겠다고 칼을 가니 노일저대귀는 겁이 나서 도망가다가 죽고 남선비도 겁이 나서 도망가다 역시 죽는다. 일곱 형제는 오동국에 들어가 자기 모친의 시신을 찾고 울고 있으려니 곽새가 날아와서 말하기를 쇠고지 포육을 열두 개를 떠 가지고 자기 들에 타고 있으면 서천 꽃밭에 가서 환생(還生)꽃을 구하여 올 수 있다고 하였다. 작은 동생이 포육을 떠 가지고 곽새 들을 타고 서천 꽃밭에 가서 환생꽃을 구해다가 죽은 모친을 살린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출전】{삼국사기} 권 45 열전 제 5 '온달(溫達)'에 수록된 실제 인물의 설화적 전승.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平原王) 때에 이름을 온달이라고 하는 마음이 착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용모는 괴상했으나 속마음은 밝아 홀어머니를 걸식으로 봉양하며 살고 있었다. 그 때의 평강왕의 딸로서 평강공주가 있었는데 어려서 몹시 울어, 부왕이 자꾸 울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농담을 하곤 하였다. 시집갈 나이 28세가가 되어 부왕이 귀족인 상부 고씨 집에 시집보내려 하자 공주는 부왕의 평소 말대로 온달에게 가겠ㄴ라고 우겼다. 부왕은 노하여 공주를 궁궐에서 내쫒자 공주는 그 길로 온달을 찾아가 결혼을 했다. 공주는 자기가 궁궐에서 나올 때 가지고 온 패물로 의식을 해결하고, 왕실의 병약한 말을 사오게 하여 잘 먹이고 온달에게 무예와 학문을 닦게 하였다. 고구려는 매년 봄 3월 3일에 낙랑의 언덕에서 수렵대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온달이 실력을 발휘하여 이 소식이 왕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중국 후주의 무제가 쳐들어오자 온달이 선봉이 되어 무찌르니, 사위로 인정받아 그에게 대형(大兄)의 벼슬이 내려진다. 그러나 다음 왕 때에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출전했다가 아차산성에서 전사했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생사(生死)가 결정되었으니 한을 풀라 하니 관이 움직여 비로서 장사를 지냈다.
역사적 인물 온달은 590년 전사했는데 민간에서 이를 설화화하여 전승시켰다. 그것이 {삼국사기}에 수록된 듯한데, 이 글의 원문은 {삼국사기}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글이다. 이 글에는 당신 민중들의 애국심, 충성심, 무용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미천한 출신인 주인공이 시련을 겪은 후 숭고한 인물로 변한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잘 드러나 있다. 백제의 '무왕설화'도 같은 계열의 작품이다.
이를 소재로 최인훈이 [온달]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그 소설은 소설과 희곡을 겸용한 특이한 형태이다.
박타는 처녀
몽고설화. 일설에 의하면, 원대(元代)에 몽고에 귀화한 고려 여성들을 통해 유입되었다고 한다. 옛날 어느 처녀가 바느질을 하다가 처마 끝에 집을 짓고 살던 제비 한 마리가 땅에 떨어져 다리가 불져 날지 못하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실로 다리를 동여매 주었다. 이에 그 제비가 살아났다. 이듬해 그 제비는 강남에서 박씨 하나를 가져다가 뜰에 떨어뜨렸다. 그 처녀는 박씨를 심었더니 가을이 되어 커다란 박이 하나 열렸다. 그 박을 타 보니 온갖 보화가 쏟아져 나왔다. 이로 인하여 그 처녀는 매우 큰 부자가 되었다. 이웃집에 사는 심술궂은 처녀가 이 말을 들었다. 그 처녀는 자기 집에 가서 제비를 잡아다가 일부러 다리를 부러뜨려 실로 동여매 주었다. 그 제비는 이듬해 박씨를 갖ㄷ가 주었다. 그 처녀는 좋아라고 박씨를 심고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 큰 박이 하나 열렸다. 따서 타 보니 수많은 독사(毒蛇)가 나와 그 처녀를 물어 죽였다.
방이설화
【출전】 당나라의 단성식(段成式)이 지은 {유양잡조(酉陽雜俎)} 권 1과 {태평어람} 권 481
일명 '금추설화(金錐說話)'라고도 한다. "내 코가 석자" 라는 속담도 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신라시대에 방이형제가 살았는데 형인 방이는 몹시 가난하여 구걸을 하며 살았고, 동생은 부자였다. 어느 해인가 방이가 동생에게 누에와 곡식 종자를 구걸했는데 심술이 사납고 포악한 아우는 누에알과 종자를 삶아서 주었다. 이를 모르는 형은 누에를 열심히 치고 씨앗도 뿌려 잘 가꾸었다. 알 중에서 누에 한 마리가 생겨나더니 황소만큼 커졌다. 질투가 난 동생이 와서 누에를 죽였지만 사방의 누에가 모두 모여 들어 실을 켜 주어서 형은 누에 왕이 되었다. 또한 종자에서도 이삭이 하나만 나와 한 자가 넘게 자랐는데 어느 날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이삭을 물고 달아나자 방이는 새를 쫒아 산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밤을 맞은 방이는 난데 없는 아이들이 나타나 금방망이를 꺼내어 돌을 두드리니 원하는 대로 음식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숨어 있다가 아이들이 헤어진 후 놓고 간 방망이를 주워서 돌아와 아우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다. 심술이 난 아우도 형처럼 행동하여 새를 쫒아가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금방망이를 훔쳐간 도둑으로 몰려 연못을 파는 벌을 받고 코끼리처럼 코를 뽑힌 후에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그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속을 태우다가 죽고 말았다.(다른 책에 의하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방이가 이소식을 듣고 달려와 병 구완을 하여 병이 나았다.) 그리고 방망이는 후손에게 전해졌는데, 어느 후손이 "이리 똥 내놓아라."고 희롱했더니 갑자기 벼락이 치며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신라 사람 방이에 대한 설화. 형과 동생 사이의 갈등을 통하여 권선징악(勸善懲惡)을 보여 주고 있다.
뱀신랑
어떤 늙은 부부가 아이를 낳았는데 뱀이었다. 그 아들은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김정승의 달과 결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김정승의 딸들에게 의사를 물어보자 첫째와 둘째딸은 뱀이라서 싫다고 했다. 그러나 셋째는 아버지의 뜻이라면 따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뱀신랑과 결혼을 했다. 혼인하던 날 신랑은 허물을 벗고 잘 생긴 선비가 되었다. 어느날 남편이 길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자기의 허물을 주면서 잘 보관하라고 하였다. 만약 없애면 다시는 마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도을 단단히 일렀다. 이 비밀을 알아챈 두 언니는 몰래 그 허물을 훔쳐다 태워 버려서 남편은 돌아 올 수 없게 되었다. 아내는 남편을 찾아 바위 속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이미 딴 부인이 있었다. 남편은 몇 가지 문제를 내어 통과하는 사람을 진짜 아내로 삼겠다고 하였는데 찾아간 아내(김정승의 딸)가 시험에 통과하였다.(오영진 {시집가는 날}과 관련)
선도산 성모(仙桃山 聖母) 이야기
【출전】{삼국유사} 권 5 감통(感通) 제7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隋喜佛事)'
진평왕 시절에 한 비구니가 있었는데, 그 이름을 지혜(智惠)라 하였으며 어진 행실이 많았다. 그는 자신이 거처하는 안흥사(安興寺) 불전(佛殿)을 새로 수리하려고 했으나 힘이 모자랐다. 그 때 꿈에 모양이 예쁘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나는 선도산 성모인데, 네가 불전을 수리하려는 것을 기뻐해서 금 10근을 주어 그 일을 돕고자 한다. 내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어 주불삼상(主佛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53불(觀樂王樂上二菩薩經에 나타나는 53분의 부처)과 6류성중(六類聖衆) 및 여러 천신(天神)과 오악(五岳)의 신군(神君)을 ,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 두 계절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ㅁ아 널리 모든 중생을 위해 점찰법회(占察法會)를 베풂으로서 일정한 규정을 삼아라."고 말했다. 지혜는 졸라 깨어 무리들을 데리고 선사(仙祠)의 자리 밑으로 가서황금 160량을 파내어 불전 수리를 이루었는데, 모두 성모가 한 말에 따랐던 것이다.
설씨녀 가실
【출전】{삼국사기} 열전
경주에 사는 설씨(薛氏)는 늙은 홀아비로 오직 딸 하나만 데리고 살았다. 설씨의 딸은 재색을 겸비하였다. 그런데 진평왕 때에 이 늙은 홀아비도 병역의 의무는 치르게 되었다. 국방 경비를 위한 소집 영장이 나왔다, 늙고 병든 아비를 보내느니 차라리 자기가 나가고 싶지만 여자의 몸으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사량부(沙梁部)에 설씨의 딸을 좋아하느 가실(嘉實)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가실은 설씨의 집에 딱한 사정을 알고 뛰어 와서, 자기가 대신 군대에 나가겠다고 제의했다. 설씨 부녀는 이 기적같은 원조에 당황하기도 했으나 무척 반가웠다. 설씨는 가실에게 "나를 대신하여 군대에 나가겠다니 기쁘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네. 그대의 은혜를 갚을 생각이니 만약 그대가 내 어린 딸이 어리석다고 생각지 않으면 아내로 맞아주면 어떨지 ?"라고 운을 떠 보았다. 이것은 가실이 원하던 바였다. 딸은 거울 하나를 꺼내어 반을 갈라 한 조각은 가실에게, 마머지 한 조각은 자기의 품에 넣고 뒷날 혼인할 때의 신표(信票)로 삼았다. 가실은 설씨녀에게 말 한 필을 주며 "이것은 천상(天上)의 좋은 말이니 내가 없는 동안 맡아서 기르시오." 하고 의젓이 전쟁터로 나갔다. 3년이면 돌아오게 되어 있는 가실은 기한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나이는 아흔에 가깝고 딸의 나이도 혼기(婚期)를 넘기게 되었다. 아버지는 딸에게 다른 신랑감을 찾아서 가기를 강요한다. 그럴 때마다 딸은 "신의를 저버리고 언약(言約)을 어기면 어찌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 모르게 이웃 청년과 혼약을 맺었다. 딸은 항상 가실이 두고 간 말을 쓰다듬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그 말과 함께 집을 떠나 버리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실이 돌아왔다. 그러나 몰골은 해골처럼 마르고 옷은 남루하여 집안 사람들은 그가 가실인 줄을 몰랐다. 배고픔과 싸움에 지친 가실은 전혀 딴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가실은 거울을 내던졌다. 딸이 그것을 주워 자기의 것과 맞추어 보니 꼭맞았다. 가실이 분명했다. 기뻐하며 그들은 정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손순매아(孫順埋兒)
【출전】{삼국유사} 권5, '손순매아'
손순(孫順)은 모량리(牟梁里) 사람으로서 아버지는 학산(鶴山)이라 했다.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다가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머니는 이름을 운오(運烏)라 했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어, 언제나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므로 손순은 이를 민망히 여겨 그 아내에게 의논하기를,"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기 어렵소. 이제 아이가 저렇게 어머니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의 굶주림이 얼마나 심하겠소? 차라리 이 아이를 땅에 묻어버려서 어머니를 배부르게 해드리는 것이 좋겠소."했다. 이에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북쪽 들로 가서 땅을 파니, 거기에서 갑자기 기이한 석종(石鐘)이 나왔다. 그들 내외는 놀라고 이상히 여겨 잠시 나무 위에 걸고 그 종을 쳐보았더니 그 소리가 은은하고 고왔다. 아내가 말하기를, "이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이의 복인것 같으니 도로 데리고 갑시다."하니, 남편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여 아이를 업고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종을 들보에 달고 두드리니 그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렸다. 흥덕왕(興德王)이 그 종소리를 듣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더없이 맑고 멀리 들리니 속히 조사해 보라."했다. 왕의 사자(使者)가 그 집에 가서 조사해 보고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왕은 "옛날 곽거(郭巨- 손순과 같이 하다가 금솥을 얻는 중국사람)가 아들을 파 묻을 때 하늘이 금솥을 내렸다더니, 지금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하자 땅에서 석종이 솟아났으니 이 두 효도는 천지에 똑같은 본보기로다."하고, 집 한 채와 해마다 곡식 50 석을 주어 그 지극한 효성을 숭상했다. 이에 손순은 전에 살던 집을 내놓아 절을 삼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석종을 안치했다. 진성왕 때에 후백제의 사나운 도둑이 그 마을에 쳐들어와,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았는데, 그 종을 얻은 곳을 완호평(完乎坪)이라 하나 지금은 잘못 전해져서 지량평(枝良坪)이라고 한다.
수삽석남(首揷石枏)
【출전】설화집 {수이전}에 수록되었던 것인데, {수이전}은 지금 전하지 않고 이 설화는 {대동운부군옥} 제 8권에 전하여짐.
신라 최항(崔伉)은 자를 석남(石枏)이라 했다. 그가 사랑하는 첩을 부모가 허락하지 않아 만나지 못하더니 몇 달 후 죽고 말았다. 8일 후에 최항의 혼이 첩의 집에 갔는데, 첩은 최항이 죽은 줄 모르고 반가이 맞았다. 항이 머리에 꽂은 석남가지를 나누어 첩에게 주며 말하기를 "부모가 그대와 살도록 허락하여 왔다."고 하기에 첩은 항을 따라 그의 집까지 갔다. 그런데 은 담을 넘어 들어간 뒤로 새벽이 되어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 아침에 그 집 사람이 그녀가 온 까닭을 물으매 그녀는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그게 무슨 말이냐. 항이 죽은지 이미 8일이 지났으며 오늘이 장사날이다."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 석남가지를 나누어 머리에 꽂았으니 가서 확인해 보라." 하였다. 이에 관을 열고 보니 정말 항의 머리에 석남가지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옷은 이슬에 젖어 있었고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첩이 죽으려 하자, 항이 다시 살아나서 백년해로하였다.
아기 장수 이야기
옛날 어느 곳에 평민이 살았는데, 산의 정기를 받아서 겨드랑이에 날개(혹은 비늘)가 있고 태어나자 이내 날아다니고 힘도 센 장수 아들을 기적적으로 낳았다. 그런데 부모는 이 아이 장수가 크면 장차 역적이 되어서 집안을 망칠 것이라 해서 아기 장수를 돌로 눌러 죽였다. 아기 장수가 죽을 때에 유언으로 콩 닷섬과 팥 닷섬을 같이 묻어 달라고 하였다. 얼마 후 관군(官軍)이 와서 아기 장수를 내놓으라고 하여, 이미 부모가 죽였다고 하니 그들은 무덤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아기 장수의 무덤에 가 보니, 콩은 말이 되고 팥은 군사가 되어 아기 장수가 막 일어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군은 아기 장수를 다시 죽였다. 그런 후 아기 장수를 태울 용마(龍馬)가 근처의 용소(龍沼)에서 나와서 주인을 찾아 울며 헤매다가 용소에 빠져 죽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있다.
야래자(夜來者) 전설
처녀(유부녀일 수도 있다.)가 밤마다 찾아오는 정체 불명의 남자와 함께 동침을 한다.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알 수도 없다(사랑의 감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처녀는 임신을 한다. 그 아버지가 이유를 캐 묻자 딸은 사실대로 고백한다. 아버지는 딸에게 바늘에 실을 꿰어 그의 옷에 찔러 두라고 이른다. 이튿날 그 실이 간 곳을 찾아가서 바늘이 꽂힌 주인공을 찾는다. 그것은 대체로 지렁이나 뱀(용이나 수달피도 있다.) 등이다. 처녀는 애기를 낳는다.그 아이는 견훤과 같이 비상한 능력을 가진다.
연권녀 혹은 효녀 지은
【출전】{삼국사기} 열전
'설씨녀' 바로 앞에 있는 설화. 주인공 지은이 연권(連權)의 딸리기 때문에 '연권녀' 설화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한다. {삼국유사} 권5에는 '빈녀양모(貧女養母)'라 하여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효녀 지은(知恩)은 연권의 딸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느라고 32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다. 그는 품팔이 뿐만 아니라 걸인 노릇도 하면서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섬겼다, 그러나 어는 해 큰 흉년이 들어 동냥도 할 수 없게 되자 지은이 양곡 30석에 남의 집 종이 되었다. 종일 일하고는 밥을 얻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게 된 후로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밥맛을 잃었다. 어머니가 딸에게 따지자 지은은 종이 된 사실을 고백하고 모녀는 붙들고 울었다. 마침 화랑 효종랑(孝宗郞)이 집 앞을 지나다가 듣고는 들어가 사정을 묻고 조[粟] 100석과 의복을 보냈다. 후에 진성왕(眞聖王)이 알고 다시 조 500석과 집 한 채를 하사하고, 군사를 보내어 그 집을 호위하도록 했다. 그 동리를 표창하여 효양리(孝養里)라고 하게 하였다.
이 설화는 [심청전]의 근원설화가 된다.
연오랑 세오녀
【출전】{삼국유사} 권1, '기이(奇異)' 편
해와 달의 생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설화는 일월신화(日月神話)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더구나 일본 측의 자료를 보면 이 설화가 일본의 건국신화와 관계 있음도 알 수 있다. 또 우리 나라의 영일(迎日)이란 지명도 이 이야기와 관계 있다.
신라 8대 임금 아달라(阿達羅) 왕 때의 일이다.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다 위에 홀연히 바위 하나가 나타나자, 연오랑은 이것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는 바위를 타고 온 이 사람을 왕으로 모셨다. 한편 아내인 세오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궁금하여 바다에 나가 보았다.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 자기도 그 바위에 올라탔다. 그리하여 세오녀도 일본으로 건너가 남편을 만나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이 부부가 신라땅을 떠나 뒤부터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왕은 천문을 맡은 신하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구러자 그 신하는 "해와 달의 정(精)이 우리 나라에 있다가 이제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곧 사람의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연오랑 부부을 귀국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연오랑은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 홀홀히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아내가 짠, 가는 명주를 줄 터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하늘에 제사하면 해와 달이 다시 빛을 발할 것이요." 라고 말하며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그 비단을 가지고 와서 하늘에 제사했더니 과연 해와 달이 옛날같이 빛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 명주를 국보로 모시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했고,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이라고 하였다.
오봉산(五峰山)의 불
옛날에 어떤 사람이 시집을 가서 재미있게 살았는데 남편이 문둥병에 걸려 헤어지게 되었다. 여인은 남편을 위해 약이란 약은 다 써보아도 효험이 없자 매일 남편의 병이 낫기만 기도하고 있었다. 어느 말 스님 한 분이 찾아와서 오봉산에 불을 놓고 남편을 찾아가면 낫는다고 하여 백 날 동안 오봉산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남편 옆에 가서 죽으려고 남편을 찾아가다가 도중에 쓰러지고 말았다. 서산으로 지는 해를 보고 제발 남편을 찾아갈 때까지 넘어가지 말라고 손을 휘젓다가 보니 자기 손이 오봉산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섯 손가락에 불을 켜서 붙이고 남편을 찾아갔는데, 남편은 이미 병이 다 나아서 둘은 동리로 내려와서 행복하게 살았다.
욱면설화(郁面說話)
【출전】{삼국유사}권5, '욱면비념불서승(郁面婢念佛西昇-계집종인 욱면이 염불을 하다가 서쪽으로 하늘에 올라감)'
경덕왕 때 강주의 남자 신도 몇 10명이 뜻을 극락세계에 두고 고을 경계에 미타사를 세우고 1만일을 기한하여 계(契)를 만들었다. 이때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집에 욱면이라는 한 계집종이 그 주인을 따라 절에 가 뜰에 서서 중을 따라 염불했다. 주인은 그 종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을 항상 미워해서 곡식 두 섬을 내주면서 이것을 하루 저녁에 다 찧으라고 했다. 그러나 그 종은 그 곡식을 초저녁에 다 찧어놓고 절에 와서 염불하기(속담에 '내일 바빠 주인집 방아 바삐 찧는다'는 여기서 나온 말인 듯.)를 밤 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계집종은 뜰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에 매서 합장하고 좌우로 흔들면서 자기 자신을 격려했다. 그 때 공중에서 소리가 나기를, "욱면은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하라."하니, 절 안의 중들이 이 소리를 듣고 그를 권하여 함께 법당에 들어가 염불했다. 얼마 안 되어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서쪽에서 들려오더니, 종은 몸을 솟구쳐 대들보를 뚫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서쪽으로 가다가 교외에 이르러 육신을 버리고 부처로 변하여 연의대(蓮衣臺)에 앉아서 큰 빛을 내뿜으면서 천천히 사라져가니, 이때 음악소리는 공중에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그 법당에 구멍이 뚫어진 곳이 지금도 있다.
일월산 황씨 부인당 설화(日月山黃氏夫人堂說話)
오랜 옛날, 일월산 아랫마을에 살던 황씨 성을 가진 처녀는 동네 총각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워낙 아름다운 규수라 두 젊은이가 서로 탐내어 다투었었는데, 그 중 한 총각이 행운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혼 첫날밤이었다. 원앙금침에 들기 전, 뒷간에 갔다가 신방(新房) 문 앞에 선 신랑은 기겁을 하고 놀랐다. 신방 문 창호지에 칼날 그림자가 얼씬거린 것이다. 그 그림자가 분명 연적(戀敵- 다른 총각)의 것이라 여긴 신랑은 그 길로 아무 말없이 달아나버렸다. 칼날 그림자란 실은 문 앞에 있던 대마무잎의 그림자에 대한 착각이었지만, 신랑은 그것을 알 길이 없었다. 그 길로 영영 달아나버린 신랑을 기다리던 신부는 조바심을 내며 신랑을 기다리다가 몇 날, 몇 밤을 새웠는지 모른다. 침식을 전폐하고 오직 기다림에 몸을 바치던 신부는 마침내 한을 품고 구천(九天)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러난 그의 시신은 삭을 줄을 몰랐다. 살아 생전 꽂꽂했던 몸가짐도, 앉음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돌부처인 양 시신은 언제나 신방을 지키는 듯 보였다. 한편, 도망간 신랑은 외지에서 다른 색시를 만나 장가를 들었다. 그리고 아이까지 낳았으나 아이는 낳는 대로 이내 죽곤 하는 것이었다. 점장이에게 알아보았더니 바로 황씨 규수의 원한 맺힌 원혼(寃魂)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괴로움에 빠진 신랑은 그를 일월 산정에 묻어주고, 그리고 그를 섬기도록 하여 보라는 어떤 승려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신랑은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지금의 부인당 자리에 시신을 옮기고 작으나마 사당(祠堂)을 지어바쳤다. 그 때야 시신은 홀연히 삭아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일월산은 조지훈의 고향 근처에 있는 산이다. 따라서 이 설화와 그의 [석문(石門)]이라는 시와 관련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석문}은 1993년 11월 제2차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었다.한편 서정주의 [신부]라는 시도 이와 같은 소재를 가지고 있다.
장자못 전설
옛날 전북 옥구군 미면(米面) 지금의 미제지(米堤池)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욕심이 많고, 포악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중이와서 시주를 권하자 그는 심술궂게 시주 대신 소의 똥을 잔뜩 자루에 담아주었다. 때마침 그 광경을 보던 부인이 몰래 중을 불러 쌀을 주면서 남편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중은 그 부인에게 부처님의 심부름으로 남편을 벌주기 위해서 왔다 하고 내일 아침 그 집을 피해 뒷산으로 달아나되 무슨 소리가 나도 뒤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튿날 부인은 어린아이를 업고 뒷산으로 올라가던 중,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므로 금기(禁忌)를 어기고 뒤를 돌아보았더니 조금 전까지 있던 집은 간 곳이 없고 그곳에 물이 괴어 있었다. 여인은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어린아이와 함께 돌로 화하고 말았다 한다. 이후로부터 큰 부자집은 큰 못이 되어버렸다.
조신(調信)의 꿈
【출전】{삼국유사} 권 3 '조신조(調信條)'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주제로 한다. 그리고 아것은 조신이 나중에 깨달은 바 있어 정토사란 절을 세웠다고 하는 사원연기설화(寺院緣起說話)이기도 하다. 조신은 지금의 강릉 지방에 있는 세규사(世逵寺)의 중이었다. 그는 명주 날리군 태수 김흔(金昕)의 딸을 좋아했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낙산대비(洛山大悲)라는 관음보살 부처님에게 그 소원을 하소연했다. 그러나 그런 보람도 없이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고 말았다. 조신은 절망 끝에, 어느 날 대비(大悲)의 앞에 가서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것에 대하여 원망하며 슬피 울다가 너무 지쳐서 얼풋 잠이 들었다. 홀연히 꿈에도 잊지 못하던 김소저가 나타나서 웃으며 "저는 마음 속으로 그대를 몹시 사랑했으나 부모님의 영으로 부득이 출가했다가 이제는 함께 살려고 왔습니다. 나를 용납하여 주시겠습니까? " 하였다. 조신은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서 40년을 함께 살았다.,그러나, 너무도 가난하여 입에 풀칠하기 위하여 십여 년을 문전 걸식을 하다가 15세 되는 큰 아들은 굶어서 죽었고, 조신과 그 아내는 늙고 병들어 누워 있고 열 살짜리 딸이 구걸하다가 개에게 물려서 쓰러졌다. 두 부부는 목이 메었다. 이 때에 그 아내는 의연히 단좌하여 남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제가 처을 당신을 만났을 때, 우리는 나이도 젊었고 얼굴도 예뻤습니다. 그리고 사랑도 두터워서 헝겊 하나로, 또는 밥 한 그릇으로 나누어 먹으면서 살아 왔으나, 이제 50년을 살다 보니 몸은 늙어서 병들었고 아이들은 굶고 추워서 죽기도 하고, 마냥 구걸을 하려고 해도 집집이 문을 굳게 닫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어느 여가에 부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홍안의 미소[紅顔微笑]는 풀 위의 이슬이요, 지란의 약속[約束芝蘭- 친구 사이의 약속]은 광풍 앞에 버들꽃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으니 헤어지는 도리 밖에 없습니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것도 다 운수가 아니겠습니까 ?" 이 말을 들은 조신도 옳게 여기고, 부부는 두 아이를 하나씩 맡아가지고 헤어지기로 했다. 서로 손을 잡고 이별하려고 할 때에 잠이 깨었다. 한바탕 꿈이었다. 대비 앞의 등불은 여전히 깜박거리고 밤은 고요히 깊어만 가고 있었다. 이튿날 깨어보니 머리가 하얗게 세어있었다. 조신은 열다섯 살 아들이 굶어 죽어간 언덕에 찾아가서 그 시체를 파묻은 곳을 파 보았다. 거기서 돌미륵이 나왔다고 한다. 조신은 인간의 일생이 물거품같이 허무함을 느끼고 다시는 인세(人世)에 뜻을 두지 않고 불도(佛道)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이광수의 [꿈]이라는 소설과 관련이 있다.
지귀설화(志鬼說話)
【출전】박인량의 {수이전}에 실려 있다가 지금은 {대동운부군옥}에 실려 있는 이야기.
이 이야기의 제목을 [심화요탑]이라고도 한다. 신라 선덕여왕 때 활리역에 지귀(志鬼)라는 사람이 여왕을 사모하다가 미쳐버렸다. 어느 날 여왕이 분향을 위해 행차하는 길을 막다가 사람들에게 붙들린 지귀는 여왕의 배려로 여왕의 행차를 뒤따르게 되었다. 여왕이 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지귀는 탑 아래에서 지쳐 잠이 들고 만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여왕은 그 광경을 보고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에 놓고 갔다. 잠에서 깬 지귀는 금팔찌를 보고서는 가슴이 타들어가 급기야 화신(火神)이 되고 만다. 지귀가 불귀신이 되어 온 세상에 떠돌아 다니자 사람들은 두려어 하게 되었다. 이에 선덕여왕이 백성들에게 주문을 지어 주어 대문에 붙이게 하니, 그 후 백성들은 화재를 면하게 되었다. 이 때 여왕이 지어주 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귀의 마음의 불이 제 몸을 태워 불귀신이 되었으매 마땅히 창해 밖에 추방하여 이제 다시 돌보지 않겠노라."
지하국 대적 퇴치 설화(地下國大敵退治說話)
옛날 지하국에 사는 아귀(餓鬼)라는 도적이 지상 세계에 나타나 왕의 세 공주를 잡아갔다. 한 무사가 공주를 구출하겠다고 자진해 나섰다. 그러나 왕은 공주를 구하면 막내딸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몇 사람의 부하를 데리고 지하국의 입구를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꿈에 산신이 나타나서 지하국의 입구를 가르쳐 주었다. 입구에 다다른 무사는 부하들을 지상에 남겨두고 광주리를 타고 지하국에 이르렀다. 세 공주 중 하나가 물을 길러 왔다가 무사를 만난다. 무사는 수박으로 변하여 아귀의 집으로 들어갔다. 세 공주는 아귀에게 독주를 권하여 아귀를 잠들게 하고, 그의 힘의 근원이 되는 옆구리의 비늘 두 개를 제거하고 그 목을 잘라서 죽여버렸다. 무사는 세 공주를 지상으로 올려 보냈으나 부하들이 무사는 올리지 않고 그대로 궁으로 돌아갔다. 지하국에 남은 무사는 처음 나타났던 산신의 도움으로 말을 타고 무사히 지상으로 나온다. 한편, 궁궐에서는 부하들이 공주를 데리고 왕 앞에 나아가 자기들이 구한 양 거짓말을 하여 큰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공주들도 자신들이 살아오게 된 기쁨에 무사에 관한 일을 잊고 있었다.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는데 무사가 나타나 자초지종을 고하자 왕은 크게 노하여 부하들을 죽이고 막내딸과 무사를 결혼시켰다.
호동왕자(好童王子)
【출전】{삼국사기}권14, '고구려본기 제2(高句麗本紀第二) 대무신왕(大武神王)'
전설이라 할 수 있다. 호동(好童)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인 대무신왕의 차비(次妃)에게서 난 소생이다. 왕은 그를 심히 사랑하여 호동(好童)이라 이름하였다. 대무신왕 15년 4월에 왕자 호동이 옥저(沃沮)를 유람하였는데, 낙랑의 왕 최리(崔理)가 여기 나왔다가 호동을 보고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다. 그대야말로 북국(北國)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가 ?' 하며 호동을 데리고 돌아가 사위를 삼았다. 그 뒤, 호동이 고구려에 돌아와 낙랑(樂浪)에 있는 아내 최씨녀(崔氏女)에게 사람을 보내어 전하기를 "그대의 나라 무구(武庫)에 들어가 고각(鼓角-북과 나팔)을 몰래 찢어버린다면 내가 그대를 아내로서 맞아들이려니와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부부가 될 수 없으리라." 하였다. 그 이유는 낙랑에는 옛날부터 신기한 고각이 있어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울리는지라, 그로써 침략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과연 최리의 딸(낙랑공주)은 몰래 무고에 들어가 예리한 칼로 그 고각을 찢어 버리고 호동이게 그 사실을 알렸다. 호동이 그 말을 듣고 왕에게 고하여 낙랑을 공격했다. 최리는 고각이 울리지 않으므로 안심하고 있다가 고구려군이 성 밑에 이르러서야 깜짝 놀라 무고에 가보니 벌써 고각은 부서져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최리는 마침내 딸을 죽이고 항복하고 말았다.
홍수설화(洪水說話)
옛날 이 세상에는 큰물이 져서 세계는 전부 바다로 변하고 한 사람의 생존자도 없게 되었다. 그 때에 어떤 남매 두 사람이 겨우 살게 되어 백두산같이 높은 산의 상상봉에 표착하였다. 물이 다 걷힌 뒤에 남매는 세상에 나와 보았으나 인적이라고는 구경할 수도 없었다. 만일 그대로 있다가는 사람의 씨가 끊어질 수밖에 없으나 그렇다고 남매간에 혼인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얼마 동안을 생각하다 못하여 남매가 각각 마주 서있는 두 봉우리에 올라가서 계집아이는 암망(구멍 뚫어진 편의 맷돌)을 굴려 내리고 사나이는 수망을 굴려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하느님에게 기도하였다. 암망과 수망은 이상하게도 산골 밑에서 마치 사람이 일부러 포개 놓은 것같이 합하였다. 남매는 여기서 하느님의 의사를 짐작하고 결혼하기로 결심하였다. 사람의 씨는 이 남매의 결혼으로 인하여 계속하게 되었다. 지금 많은 인류의 조선(祖先)은 실로 옛날의 그 남매라고 한다.
전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이 이야기는 인류의 시조, 천지개벽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중국과 불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서양의 경우 구약에 나온다.
염불 공덕으로 고향에 돌아오다
신라시대 경주 서라벌에는[만장사]라는 절이 있었다. 절 부근 우금리라는 마을에 근근히 끼니를 지탱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불심이 장한 '보게'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일찌기 과부가 되어 아들 장춘 하나만을 유일한 희망 으로 삼고, 한숨과 눈물로써 지내며 고이 키우고 있었다.
봄이면 산나물을 캐서 끼니를 때우고 또한 남의 삯바느질과 김매는 품삯으로 두 목구멍에 풀칠하는 가난한 살림을 지속하였다. 그럭저럭 세월은 흘러 외아들 장춘이도 어느듯 장가보낼 나이가 되었다.
인생은 고해(苦海)라서 근심걱정이 떠날 길 없던 나머지,그래도 어떻게 해서든지 지독한 가난은 면 해야 하겠기에 외아들을 멀리 중국 장사(상인)의 일꾼으로 보내고는, 민장사 에 가서 일을 돌보며 항상 관세음보살을 지성으로 불렀다.
'비록 가난하기느 하였으나 우리 모자는 한번도 남의 재물을 훔친 일이 없고 무턱대고 적은 산 목숨이랃 죽인 일이 없으니, 부디 부처님께서 도와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서소.'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부처님앞에 빌었다.
불행이도 배가 떠나던 그날 저녁부터 모진 강풍이 불며 폭우가 쏟아져 온 천지가 수라장이 되었다.
바다에 나갔던 배는 한척도 돌아오지 못 하였음은 물론이다. 모두가 죽은것으로 여기고 제사를 지내었으나 보게 아주머니만은, '죄 업는 내 아들만은 틀림 없이 살아 올 것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남들 처럼 죽었다고 제사지내는 대신 평상시와 같이 일하면서 기도만 하였다.
얼마를 더 지냈어도 바다에 나갔던 모든 배들은 한 척도 돌아온 것은 없었고 배를 탔던 사람 역시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 장춘이가 탔던 배는 파선되었으나 그는 다행이도 판자에 몸을 기대어 며칠간 표류를 계속하다가 어떤 섬에 다달아 구조 되었다.
그 곳은 당 나라 땅이었는데,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힘이 세었으므로 어느 부 잣집에 고용이 되여 밭갈이등 잡역을 하게 되었다.
어느날 점심 후 곤히 잠을 자다가 문득 민장사 절의 부처님이 나타난 꿈을 꾸고는 일어나 기이하게 생각 하고 다시금 염불을 드높은 소리로 하면서 일을 계속하였다. 때마침 중국에 왔다가 고국으로 떠나가는 신라의 큰 스님이 그 곳 가까이 지나다가, 밭을 가는 농부가 고국말로 염불하기에 놀랜 나머지 그에게 물어보게 되었다.장춘이는 지난 모든 과거를 이야기 하였더니 모두가 "관세음보살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긴 공덕이라."고 극구 칭찬하면서 함께 집주인을 찾아가 인사를 하게 되었다.
주인도 가상히 여기고 적지 않은 재물과 함께 선물을 주어, 큰 스님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국에 돌아와서 다시 어머니를 모시고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았다.
머슴이 죽어 원님이 되다
경남 산청군에 심원사라는 절이 있다. 그 절 주지에 묘심(묘심)이라는 스님 이 있었는데 절이 너무 낡아 묘심은 절을 증수코자 부처님께 기도하였다.
그런데 기도를 끝마치던 날 부처님께서 꿈에 나타나 하시는 말씀이,"네가 내 일 아침 일찌기 일어나 동구 밖에 나가다가 제일 먼저 보는 사람에게 시주를 청하라" 하시었다.
묘심은 꿈으 꾸고 마음이 기뻐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부처님께 예불하고 권선문을 들고 동구밖에 나갔다. 그런데 맨 처음으로 만 난 사람은 아랫마을 조부자집 사는 머슴이라는 꼴에 돈이 있을것 같지 않아 망서리다가 부처님 말씀을 생각하고 다가서서 사정하였더니 머슴은 반가워 하며"절을 중수하려면 돈이 얼마나 듭니까?" 하고 물었다.
"약 백냥만 가지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권선문을 내 놓으라 하였다. 묘심은 하도 허망하여"당신에게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있습니까?"
"예, 저는 조부자집에서 사십년간 머슴을 살았는데 장가를 들기 위해서 한푼 도 쓰지 않고 모았으나 이제 나이 오십삼세가 되었으니 이제사 장가를 간들 무슨 재미를 보겠습니까?"
"그렇다면 고맙습니다."하고 권선문에 백냥을 적고 조부자 집에 가서 곧 돈 백냥을 주어 절 중수를 곧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머슴보고 미쳤다고 비방하고 또 묘심이 그를 꼬여 뜯어 냈다고 헛 소문을 퍼뜨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머슴은 시주한 뒤 몇일 안 있다가 병(重風)이 나 일도 못하고 돈도 없으니 하루는 조부자 집에서 사람을 시켜 업혀서 절로 보냈다. 그래서 묘심은 하는 수 없이 방 하나를 정해 주고 정성껏 간호를 하면서 시주 한 공덕이 헛되지 않다면 결정코 나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백일 기 도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한지 몇일이 되지 않아 머슴은 병이 더하여 그만 죽고 말 았다. 하도 허망한 일이라 기가 막혀 말도 못하고 정성껏 화장하여 장례를 잘 치루어 주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니 부처님이 너무나도 야속한 것 같 았다.
"그 머슴이 평생동안 번 돈을 다 절에다 바쳤는데 병을 낳게하여 주지는 않고 병이 더하여 죽고 말았으니 부처님은 영험이 없다." 하고 도끼를 가지고 법당 에 들어가 부처님을 원망하면서 부처님 이마를 도끼로 내려쳤다.
그랬더니 도끼가 이마에 밖혀 빠지지 않는 지라 묘심은 그를 빼기 위해 온갖 힘을 다하 다가 민망하여 그대로 놓아두고 걸망을 싸서 짊어지고 절을 떠났다. 이산 저산 이절 저절 유랑하기 이십오년, 공부를 많이 하였으나 항상 심원사 부처님 생각 이 나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다.
"지금쯤은 절이 완전히 폐허되었으리라.-아니 혹 누가 들어가 도끼를 빼고 시 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이렇게 여러 갈래로 생각하다가 한번 찾아가 참배 나 드리고 와야겠다 하고 절을 찾아 왔다. 그런데 그 날사 말고 산청군에 새로 박정재라는 원님이 부임하여 심원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럴리가 있느냐? 내가 한번 가서 빼 보리라."하고 종자를 몇과 같이 절을 찾아 왔다.
과연 부처님 이마에 꽂힌 도끼를 보고 "이상도 하다" 하며 손으로 가 잡으니 그만 도끼가 쑥 빠지는데 "화주시주상봉"이라 한 푸른 글자가 도끼날에 쓰여 있었다.
그 때야 묘심이 원님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그 도끼의 내력을 이야기 하니, "참으로 신기하다." 하며 원님은 더욱 신심을 내어 절했다. 얼마 뒤 다시 부 처님을 쳐다보니 도끼가 빠진 곳에 상처가 금방 없어지고 더욱 이마에서 백호 광명이 빛났다. 원님은 묘심으 붙들고"나는 전생에 시주한 공덕으로 일자무식 이었지만 좋은 곳에 태어나 이런 벼슬을 하게 되었으니 스님께서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저와 함께 공부하게 해주세요"하고 사정하였다.세상 사람들은참 으로 보기 드문 일이라 놀래며 부처님을 받들기 옛보다 배는 더했다.
도화와 비형
신라 제 25대 진지왕은 굉장한 호색가였다.
왕은 어느 날 사량부에 사는 여인인 도화랑이라고 불리는 딸이 너무나 예쁘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 자신의 사애로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자가 지켜야 할 보물은 정조인데 그 보물은 어떠한 권세부터 빼앗길수 없을 뿐 아니라 더군다나 현재 자신은 남편이 있는 몸이기 때문에 왕의 말을 따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왕은 죽이겠다고까지 위혐을 해보았으나 그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왕은 이에 "그렇다면 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라고 물으니 "그때는 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한 뒤에 비로소 그녀는 왕으로부터 풀려 날 수 있었다.
그 해에 왕은 정난으로 말미암아 폐위되자 얼마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그 후 2년이 지나자 그녀의 남편도 병들어 죽었다. 남편이 죽어 백일째 되던 날 밤, 진지왕의 혼이 도화를 찾아갔다. 왕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도화의 방으로 들어가
"지금 네 남편이 없으니 옛날 약속한 것을 지켜라!" 하고 말했다.
도화는 이를 부모에게 알렸던 바 군왕의 명이므로 거역할수 없다는것이 부모들의 의견이었다.
그리하여 도화는 왕과 7일간 부부의 정을 맺었다. 왕이 머무는 동안 오색 구름이 지붕을 덮고 향기가 방에 가득하더니 7일이 지나자 왕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로부터 도화는 태기가 있어 달이 차서 해산하려는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한 남자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의 이름을 비형이라 했다.
진평대왕이 이 아이에 대한 사연을 듣고 비형을 궁중에서 길렀다. 비형이 15살이 되자 집사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매일 밤마다 궁중에서 밖으로 나가 귀신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놀다가 새벽에 절의 종소리가 들리면 귀신들도 흩어졌으며 비형도 궁중으로 돌아오는것이었다. 왕은 이 사실을 알고 비형으로 하여금 귀신들을 이끌고 신원사 북쪽의 개천에 다리를 놓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곧 비형은 귀신들을 불러모아 일을 시켜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다리(이 다리는 그 후 귀교라고 불리었다. 오늘날 경주의고적으로서도 손꼽히고 있다.) 를 놓았다.
진평왕은 이에 감탄하여 귀신들의무리중에 인간으로 현신하여 조정의 정사를 도울만한 자가 있으면 추천하라 하니 비형은 길달이라는 귀신을 천거하였다. 과연 그를 임용하고 보니 그는 충성되고 곧기가 비할데 없었다, 그리하여 왕은 크게 기뻐하여 자식이 없는 각간의 임종에서 주어 그를 양자로 삼게 했다. 임종은 길달에게 명령하여 홍륜사 남쪽에 문루를 세우게 하고 길달을 매일 밤 그 문류위에서 자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문을 길달문이라 했다. 어느날 길달은 여우로 변하여 도망하자 비형은 기신을 시켜서 잡아 죽였다. 이로 말미암아 귀신들은 비형을 매우 무서워하여 그의 이름만 들어도 달아났다 한다. 당시 이 사실을
성제의 혼이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비형랑의 집이었네.
날고 뛰는 귀신의 무리.
여기에는 머무르지 말라!.
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훗날 사람들은 이 가사만 적어 문에 붙여 두어 귀신을 물리쳤다 한다.
호국 귀의 사임
대력 14년의 일이다.
하루는 갑자기 김유신의 무덤에서 회오리 바람이 일었다. 그 바람 속을 보니 의관을 갖춘 한 사람의 장군이 있고 그 주위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가진자가 40여명 있었다. 그들은 태종대왕의 능인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그 능이 움직이고 우는 소리가 있는듯하고 무엇인가 하소연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신이 말하기를 "신이 평생 어려운 일을 구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사오며, 이제 혼백이 되어도 나라를 보호하여 재앙을 막고 어려운 일을 구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치 않았습니다.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죄없이 주살을 당하였습니다. 즉, 이는 임금이나 신하가 나의 공을 생각지 않는것이오니 신은 차라리 먼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하여 일하지 않을까 하오니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이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했다.
왕이 이에 대답하기를 "나와 공이 이 나라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어찌한단 말인가? 공은 다시 전과 같이 힘쓰도록 하라" 하며 장군이 세 번을 청하였으나 왕은 세번 모두 허락하지 않자 회오리 바람은 돌아가 버렸다.
혜공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즉시 대신 김경신을 보내 김유신공의 능에 가서 사과하게 하고 또 공을 위해 공덕보전 30결을 취선사에 내려 명복을 빌게 하였다.
[삼국유사]
뱀이된 비구니
옛날 홍재상이 아직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을 때 길을 가다가 소나기를 만났다.
비를 피하기 위해 자그마한 굴 속으로 달려 들어갔더니 그 굴 옆에 조그마한 암자가 있었고, 또 그곳에는 17,18세쯤 되어 보이는 아리따운 여승이 홀로 앉아 있었다. 그 연유를 묻자 원래 그곳에는 세 명의 여승이 있는데 지금 두 명은 양식을 구하러 마을로 갔다고 한다. 마침내 그는 여승과 정을 통하고 아무달 아무날 그대를 맞아 집으로 데리고 가겠다 하고 약속했다.
남자의 정을 처음으로 알게된 젊은 여승은 마냥 약속한 날만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이 지나도 그가 나타나지 않자 여승은 마음에 병이 생겨 죽고 말았다.
그가 나중에 남방 절도사가 되어 진영에 있을 때였다. 어느날 도마뱀같이 생긴 자그마한 뱀이 그의 이불 위를 지나갔다. 아전을 시켜서 내던지게 했더니 아전이 죽여 버렸다.
다음날도 조그마한 뱀이 들어오기에 또 아전을 시켜 죽이게 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도 들어오는것을 보고 그는 이상하다고 느꼈다.
비로소 지난달 여승에게 한 약속을 어긴 것이 화근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 위엄과 무용만 믿고 뱀이 나타나는 것마다 아주 없애 버리려고 잇따라 죽이게 했더니 그 뱀은 몸뚱이가 점점 커져서 마침내 큰 구렁이가 되었다.
그는 영내에 있는 모든 군졸을 모아 모두 칼을 들고 사방을 에워싸게 하였으나 여전히 뱀은 포위를 뚫고 들어왔다. 군졸들은 들어오는대로 다투어 찍어 버리거나 사면에 장작불을 지펴 놓고 보이기만 하면 다투어 불속에 집어 던졌으나 구렁이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는 할수 없이 구렁이를 함 속에 넣고 방안에 두고 낮에는 함 속에 가두어 두었다가 순행을 나갈때에는 사령에게 함을 짊어지워 앞세우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점점 정신이 쇠약해지고 얼굴 빛이 파리해지더니 마침내 병들어 죽었다. [용제총화]
외사촌의 한
기유라는 사람의 조부는 당대에 있어서 명재상이었다.
그런데 그의 조부가 죽고 난 다음부터 그 집에 이상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 훌륭한 저택도 어느덧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가 되고 말았다.
그 이상한 일이란 다음과 같았다.
예를 들면 어떤 아이가 문밖에 서 있는데 문득 그 아이 등에 어떤 무거운 물건이 붙어 떨어지지 않아 깜짝 놀라 집안으로 달려 들어가 그 집사람에게 무엇이 붙어 있는지 보아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등에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나중에는 무거운 것이 등에서 떨어져 나갔으나 그 어린아이는 온몸에서 땀이 흘렀다 한다.
그 뒤로는 괴상한 일이 자주 일어났다. 밥을 지어 놓으면 어느 사이에 그 밥이 뜰에 흩어져 있고, 또 밥을 지으면 솥뚜껑은 그대로 있는데 그 곳에 밥 대신 똥이 가득 들어 있곤 하는 것이다. 무언가 변괴를 부리는 귀신의 짓이라고 경계하면 어떤 때는 화분이나 책상이 공중으로 날아 다니기도 하고 또 큰 가마솥 뚜껑이 천정에 붙어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했다. 또 어떤때는 앞뜰에 있는 채소가 시들어 있어 조사를 해보니 모두 거꾸로 심어져 있기도 했다. 또 농안에 넣어둔 옷이 모두 나와 천정이나 대들보 위에 늘어져 있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때는 불이 없는 아궁이에서 불이 갑자기 일어나 그 불을 끄면 불이 문간방에 옮겨 붙어 다 태워 버리는것이다.
이와 같이 괴이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기 때문에 그 집사람들은 모두 이를 두려워하여 다른곳으로 옮겨 버리고 말았다.
기유가 분연히 말하기를 오랫동안 선조들이 살던 집을 빈집으로 만들어 황폐하게하는 것은 자손으로서는 할일이 아니다. 귀신 따위를 무서워해서야 어찌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라며 굳게 마음을 먹고 그 집에 남아 살기로 했다.
그러나 괴이한 일은 계속 일어났다. 때로는 사람의 얼굴에 똥과 오물을 칠하는 일이 생겨났다. 기유가 화가 나 요괴를 꾸짖으면 공중에서 너도 언제까지 버틸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요괴를 퇴치시키려고 있었던 기유는 처음에는 힘으로 버티어 나갔지만 결국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이 변괴는 기유의 외사촌 유계량이라는 자가 난을 음모하다가 처형당하더니 그 귀신이 이 집에 붙어 이와 같은 일을 저질렀다 한다
[용재총화]
귀복
옛날 양주땅 어느 정씨 집에 귀신이 내려 한 계집 종에게 붙어 수년동안 떠나지 않았는데 그녀는 화복과 길흉을 알아맞히지 못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를 두려워하였으나 누구 하나 믿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 계집종에게 붙은 귀신은 목소리가 굉장히 맑아서 늙은 꾀꼬리 혀와 같은데 낮이면 공중에 떠 있고 밤이면 대들보 위에 깃들었다. 정씨 집에 대하여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이웃대대로 명문의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의 매우 귀중한 비녀를 잃고 계집종을 의심하여 항상 그 종을 때리는 것이었다.
그 종이 괴로움에 이기지 못하여 정씨 집으로 달려와 신이 들린 아이에게 점을 쳤다. 그러자 귀신이 있는곳은 알고 있으나 너에게는 말하기 거북하니, 너의 안주인이 오면 말하겠다 하였다. 그리하여 종이 안주인에게 가서 알리니, 안주인이 친히 좁쌀을 가지고 점을 쳤다. 귀신이 그 안주인에게 있는곳은 알고는 있으나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내가 한 번 말하면 그대는 몹시 무안하리라하고 귀신이 망설이자 그녀는 노하여 꾸짖었다. 그러자 귀신이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아무날 저녁에 그대가 이웃 아무개와 같이 닥나무 밭으로 들어가지 않았느냐., 비녀는 그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고 귀신이 말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종이 가서 찾아오니 그녀는 매우 부끄러워했다.
또 이러한 일이 있었다. 그 집 종이 물건을 훔쳤는데 귀신이 물건을 춤친것은 바로 누구누구이고 어디어디에 숨겨놓았다라고 거침없이 이야기 했다. 그러자 종이 크게 꾸짖기를 어찌 감히 남의 집에와서 의지하느냐?라고 했다. 그리고는 그 종은 그대로 땅에 엎드려 한참있다가 다시 일어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붉은 수명미 난 장부가 내 머리털을 끌어당기니 눈이 아찔하여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이 귀신은 그 집 주인 정상국을 무서워하여 상국이 집에 돌아오면 달아나고 그가 나가면 다시 돌아오곤했다. 상국이 그일을 알고 귀신을 불러 말했다. 너는 숲으로 가라. 인가에 오래 모무르는것은 부당하다고 하자 귀신은 내가 여기 온 뒤로 집안에 복이 더 하도록 힘썼으며 한번도 재앙을 일으킨 일이 없다. 실은 이 집에 계속 있으면서 봉사하려고 하였는데, 물러가라 하는 대인의 명이 있으니 어찌 감히 그 뜻을 거역하리이까? 하고 마침내 통곡하고 떠났다 한다.
아버지 유언
아버지가 부인을 잃고 아들 셋과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나이는 많아 점점 늙어가는데 위로 두 아들은 결혼을 시켰으나 막내는 결혼을 하지 못해 늘 걱정이었다.
어느날 아버지는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아버지는 세 아들을 불러놓고,
" 내가 죽으면 목만 베어다가 웅덩이에 묻으라 ."고 유언을 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두 형들은 목을 베어 웅덩이에 묻을수는 없다며 아버지의 뜻에 반대하였다. 막내는 그래도 마지막 유언이니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형들은 필사적으로 반대하며 산에다 묻는다는 것이었다. 막내는 궁리를 하다가 헛간에다 불을 질렀다. 갑자기 불이 나자 식구들이 그 불을 끄려고 헉간으로 몰려간 사이에 막내는 아버지의목을 베어 명주로 싸서 도망을 나와 웅덩이에 넣었다.
아버지의 유언은 이행을 했으나 집으로 들어갈 수도 없어 무작정 길을 가다가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배도 고팠으나 인가가 보이지를 않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아도 불빛이 안보여 막내는 근처의 묘등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잠을 자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큰 기와집이 있어 그곳을 들어가게 되었다. 집안에는 아름다운 처녀가 진수성찬을 차려주고 귀한 술도 따라주었다. 막내는 음식도 잘먹고 처녀에게 도취되어 처녀와 함께 밤을 보냈다. 날이 밝자 쳐녀는 막내에게 금가락지를 주면서 자기는 김정승의 딸이니 김정승 집을 찾으라고 하였다. 막내가 서운한 마음으로 집을 나서자 집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자기는 여전히 묘등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일어나는데 손에 정말로 금가락지와 패물이 쥐어져 있었다.
막내는 그 길로 서울로 가서 김정승 집을 찾아갔다. 김정승을 만나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자 정승은 마구 화를 내며,
" 내딸은 죽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수 있느냐?"
고 도무지 믿으려 들지를 않았다. 막내가 증거로 가락지를 내보이자 정승은 자기 딸의 것이 틀림없다고 하면서 막내를 오히로 도둑으로 몰아 가두어 버렸다. 그런데 밤이 되자 막내가 갇힌 곳으로 처녀가 찾아왔다. 둘이는 서로 반가워하며 전날처럼 정을 나누었다. 날이 밝자 처녀는 떠나면서 저고리를 주었다.
막내는 김정승에게 저고리를 보이며 밤에 처녀가 다녀갔다고 하였다. 그러자 정승은 그 말을 믿고 막내를 귀하게 대접하며 그 집에 묵게 하였다. 처녀는 밤마다 막내를 찾아와 함께 지내다가 날이 새면 아쉽게 떠나가곤 하였다.
막내는 늘 처녀와 함께 살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낮잠을 자는데 꿈에 아버지가 용왕이 되어 나타났다. 아버지는,
"네가 내 말을 지켜준 덕분에 나는 용왕이 되었다. 내가 약을 세 개 줄테이니 이 약을 처녀에게 먹이면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사라졌다.
꿈에서 깨니 막내 옆에는 살살이, 피살이, 숨살이 약이 있었다. 밤에 처녀가 또 찾아오자 막내는 그 약을 먹게 하였다. 처녀가 살살이 약을 먹자 살이 돋고, 피살이 약을 먹자 피가 돌고, 숨살이 약을 먹자 숨이 돌아와 다시 살게 되었다.
막내는 처녀와 결혼하고 정승의 사위가 되어 잘 살았다.
지관의말
어느 가난한 부부가 사는 집에 지관이 며칠 동안을 묵게 되었다. 부부는 없는 살림에도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정성껏 양식을 마련하여 지관을 대접했다. 지관은 가난한 부부에게 은혜를 갚겠다며 새 집터를 잡아주고는 오막살이라도 좋으니 그 터에 집을 지으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당부하기를,
" 아무리 집터가 아까워도 십 년이 되면 반드시 옮겨야 한다."
고 하였다.
지관이 떠나고 부부는 새 집터에 조그만 집을 지었다. 새 집으로 이사하고 나서 부부는 무슨 일이든지 잘 되어 부자가 되었다. 집도 커다란 기와집으로 다시 짓고 자식도 많이 낳고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새 집으로 이사온 지 십 년이 되었다. 부부는 십 년이 되면 집을 옮기라는 지관의 말이 생각났지만 그 땅을 떠나기가 너무 아까웠다.
"이제껏 별일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 생길라구."
부부는 마음이 조금 불안했지만 설마 하는 생각으로 그냥 눌러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기운이 아무 없어 보이는 할머니가 이 집을 찾아왔다. 할머니는
"오갈 데가 없으니 하룻밤만 묵게 해달라."
고하였다. 부부는 먹을 것을 주고는 뒷방에서 하룻밤을 묵게 하였다.
다음날 아침 부인은 밥상을 차려서 뒷방으로 갔다. 그런데 방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를 않았다. 부인이 이상히 여겨 방문을 여니 할머니는 죽어 있었다. 부부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으나 연락할 곳도 없어 할머니의 시체를 뒷산에 묻었다. 할머니를 묻고 집에 돌아오니 웬 장정들이 몇 명 집에 와 있었다. 장정들은 이들 부부에게
" 어제 이 집에 들어온 할머니가 어디 계시냐?"
고 물었다. 부부가 할머니가 죽어 뒷산에 묻고 오는 길이라고 하자 장정들은
" 그럼 할머니가 가지고 온 보따리는 어디 있느냐?"
하고 물었다. 보따리 같은 것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부부는 어리둥절하여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장정들은 그 보따리 속에는 패물이 가득 들었다며
" 너희들이 우리 어머니를 죽이고 보따리를 감췄구나!"
하면서 집안을 마구 부수고 행패를 부렸다. 그리고는 부부를 살인죄로 고소하려고 하였다. 부부는 재산을 모두 줄테니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집과 땅을 모두 내주었다.
그후 부부는 옛날처럼 다시 가난해졌다.
수로부인
성덕왕때다.
늦은 봄날, 동해를 끼고 굽이쳐 나간 길, 그 길을 순정공은 그의 부인 수로와 그리고 종자를 거느리고 가고 있었다. 그는 강릉 태수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부임해 가는 도중이었다. 바닷가의 어느곳을 잡아 그들은 길을 엄추고 점심 자리를 벌였다. 그 곁에는 바다를 임해 병풍처럼 둘러선 선벽이 있어 높이가 천길, 그위에는 활짝 철쭉꽃들이 탐스럽게 피어나 있었다. 수로부인은 그 꽃은 갖고 싶었다. 종자들을 둘러보며 물어 보았다.
저 꽃을 꺾어다 줄 사람은 누구일까?
종자들은 그 석벽 위는 도저히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못할 곳이라 하여 모두둘 난색을 지으며 수로부인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한 노옹이 암소를 끌고 그 곁을 지나다가 수로부인의 말을 엿듣고서 천길 석벽 위로 올라가 부인이 탐내던 그 철쭉꽃을 꺾어 왔다. 그리고는 시가를 지어 읊으며 부인에게 꽃을 바쳤다.
자주빛 바위 끝에,
잡으온 암소 놓게 하시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 받자오리이다.
이렇게 헌화가를 부르며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쳐온 그 노옹은 어떤 사람인지 알수 없었다.
아직 임지를 향해 이틀 길을 더 가서 역시 바다를 임해 있는 어느 정자에 다다라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 때 홀연히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납치해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정공은 허둥지둥 발을 구르며 야단을 쳤으나 아무런 계책이 나서지 않았다.
또 한 노인이 지나다가 알려준다.
옛 사람의 말에 뭇사람의 입길은 쇠도 녹인다고 했는데, 이제 바닷속의 한 축생이 어찌 뭇사람의 입길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보오. 경내의 백성들을 모아들여 노래를 지어 부르며 막대기로 바닷물을 치노라면 찾을수 있으리다.
순정공은 노인이 일러준는 대로 했다.
남의 부녀 뺏아간 죄 그 얼마나 클까.
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사로잡아 구워 먹고 말테다.
뭇사람들이 모여 해가를 외치며 막대기로 물가를 쳤더니 그제사 용은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왔다. 순정공은 부인에게 바닷속의 일들을 물어 보았다. 부인은 일곱 가지 보배로 지은 궁전이 있고, 그 음식은 달고 부드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의 요리와는 전혀 다르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부인의 옷에는 일찌기 인간 세상에서 맡아볼 수 없었던 이상한 향내가 스며 있었다. 수로부인은 자태며 용모가 절세의 미녀라서 매양 깊은 산골이나 못을 자나다 이처럼 여러 번 신물들에게 납치되곤 했다.
서동과 선화공주
백제 제30대 무왕 그의 이름은 장이다.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였다. 그녀는 서울 남지가에 집을 짓고 홀로 살던 중 그 못의 용과 교통하여 무왕 장을 낳았다. 무왕의 아명은<서동-맛둥>, 그의 재능이며 도량은 넓고 깊어 헤아이기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 생활해 나갔다. 사람들이 거기에 착안하여 그의 이름을 서동이라고 부른 것이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세째 공주 선화가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왔다. 서울의 마을 아이들에게 그는 마를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호감을 가지고 그를 따랐다. 서동은 마침내 한 편의 동요를 지었다. 그리고는 마을의 그 아이들을 꾀어, 자기가 지은 동요를 무르고 다니게 했다.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밀어 두고(밀통하고),
서동을 몰래 밤에 안고 간다.
동요는 서울의 거리에서 거리로 마을 아이들의 입으로 번져나가 드디어는 대궐까지 알려졌다. 백관들은 동요의 내용을 사실로 믿고서 선화공주의 부정한 행실을 극력 탄핵하여 공주를 먼 시골로 유배시키도록 했다.
누명을 쓰고 공주가 유배의 길을 떠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선화공주가 유배지로 가는길, 서동이 도중에 나타나 공주를 맞았다. 그리고는 앞으로 공주를 모시어 호위해 가겠다고 나섰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어떤 정체의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어쩐지 미덥고 즐거웠다. 이리하여 서동은 공주를 수행하게 되었고, 그리고 둘은 몰래 통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공주는 서동이란 이름을 알고서 그 동요시가 사실로 실현되어 나타남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왔다. 선화공주가 그 모후가 주던 금을 꺼내어 놓고 생활을 계획하려 하자 서동은 큰소리로 웃어젖히며 물었다.
이게 무슨 물건이오?
이건 황금입니다. 평생 동안 가멸케 살아갈 수 있을거예요.
공주의 대답을 듣고 서동은 말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 이런 것들이 흙처럼 쌓여 있소.
공주는 듣고서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것은 세상에도 지극한 보물입니다. 그대가 지금 금의 소재를 아신다면 그 보물을 보모님 궁전으로 실어 보내는것이 어떨까요?
서동은 그러자고 했다.
이래서 그 황금을 모아 들였다. 둔덕만큼이나 하게 황금을 쌓아 두고 서동과 공주는 용화산(지금의 익산 미륵산) 사자사에 있는 지명법사에게로 가서 황금 수송의 방책을 여쭈어 보았다.
지명법사는 응낙했다.
내가 신통력으로 보낼수 있다. 금을 가져 오너라
선화공주는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지명법사에게 맡겼다.
법사는 신통력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그 황금과 그리고 공주의 편지를 신라의 궁중에 옮겨다 놓았다.
진평왕은 그 신묘한 변통이 경이로와, 무척 존경하게 되어 항상 글을 띄워 안부를 묻곤 했다.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잡게 되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서동, 즉 무왕이 왕비 선화와 함께 사자사로 거동하는 길에 용화산 아래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 3존이 못 속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수레를 멈추고 경계를 올렸다.
왕비는 왕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곳에다 큰 가람을 세우는것이 진실로 소원이노라고. 왕은 왕비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지명법ㅅ에게로 가서 그 못을 메울 일을 여쭈었다.
신통력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 못을 메워선 평지로 만들어 놓았다. 그곳에다 미륵상 셋과 그리고 그것에 부수되는 회전.탑.낭무들을 각각 세곳으로 세우고 이름하여 미륵사라 했다.
[삼국유사]
도깨비와 어느 시아버지
신문을 보니 남편을 군대에 보낸 20대 초반의 며느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소연을 하고 있다. 50대중반의 시아버지가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는 부엌에서 일하는 며느리의 등뒤로 다가서서 손바닥으로 며느리의 궁둥이를 더듬고 며느리의 귓가에 뜨거운 열기의 거친 숨을 내뿜는다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화들짝 놀라서 벌개진 얼굴로 자리를 황급히 피한다는 것이다.
며느리는‘저는 어찌 해야 합니까?’의 상담을 구하고 있었다.
상담자는 인륜으로서는 사람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개하면서,
첫째, 시어머니에게 사실을 즉각 알리라고 충고를 주고,
둘째, ‘남편에게 알리겠다’고 시아버지에게 최후통첩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착한 며느리는 자신도 그 방법을 알면서도 자칫 온 집안이 풍지박산이 날 것 같은 두려움에 애타게 혼자 속을 태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울분으로 유서와 같은 시를 남기고 음독 자살한 매천(梅泉) 황현(黃玹)선생의 저술인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보면, 매국노 이완용은 아들을 일본에 유학을 보내고 20대의 며느리와 정을 통하였다고 적혀있다. 이완용의 침소에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팔벼개를 하고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이 하녀들에 의해 종종 목도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있을 수 없는 내용의 신문을 덮고서 우울한 생각에 잠기는데 문득 1912년 경상북도 선산군에서 실제 있었다는 ‘도깨비’이야기가 생각나서 독자 여러분께 소개하기로 한다.
선산군의 어느 마을, 가칭 대성리(大成里)라고 해두자. 대성리에 40대 중반의 덩치가 크고 인물이 장 생긴 강중일(姜仲一)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강중일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가 많아 부농으로서, 솟을대문에 서너 채가 되는 고래등같은 기와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의 약점은 술과 여자를 탐하는 것이었다.
술에 대취하면 정신 없이 아무여자나 관계하고 싶어하고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돈을 팍팍 쓰는 것이 허물이었다.
그의 아내 (許)씨는 40대 후반으로서 인물 좋고 수완 좋은 여자였다. 그녀는 꾀가 많은 여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녀는 수년 전부터 중풍에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어 병석에 자리보전의 딱한 신세가 되었다.
강중일은 자리보전을 하고 있는 아내를 볼 때마다 측은한 생각 속에 겉으로는 걱정을 태산같이 하면서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병든 아내를 걱정했다. 그러나 그의 본심은 오래 전부터 병든 아내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내심 이렇게 투덜대고 있었다.
“아직도 젊은 마누라가 벌써 중풍이야? 언제까지 자리보전이야? 차라리 빨리 죽어 주었으면 좋겠네. 부부지간에 운우지정이 없고서야 무슨 부부야?”
특히 마누라가 병으로 쓰러진 이후로 똥오줌을 방안의 요강에 보기 때문에 방안에 들어가면 냄새에 골치가 아프고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는 시간만 있으면 핑계를 대고 호주머니에 두둑히 돈을 넣고서는 읍내 술집의 접대부를 찾아 나섰다. 그는 예쁘고 어린 접대부가 있는 술집을 찾아 나섰고, 접대부와 운우지정을 나누기 위해 돈을 팍팍 썼다. 그는 예쁜 접대부만 있으면 운우지정을 나누는 상상을 하면서 소처럼 웃어대었다.
또한 강주일은 술이 얼근하면,젊고 예쁜 여자와 재혼을 상상했고, 아니면 소실을 맞아들여야 하겠다고 작심하고 있었다. 그는 술에 취하면 이렇게 진심을 토로했다.
“여자들은 대부분 돈을 좋아하지. 돈냥이나 두둑히 주거나, 근사한 집을 마련해주고 전답이나 조금 떼어주면, 어느 여자가 마누라가 되지 않고, 소살이 되지 않겠어? 이 세상 어느 여자가 돈을 팍팍 쓰는 남자를 싫어할까? 엉?”
그는 사랑하는 여자한테 돈을 아끼지 않고 팍팍 쑬 줄 아는 사내가 진짜 사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쉽게 죽어주지 않을 것 같은 아내에 대해서 불만을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리로 했다. 읍내의 단골 술집의 접대부와 외박을 하면서도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잠꼬대를 하기도 했다.
그러한 남편의 작태를 환히 꿰뚫어 보는 허씨는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밤이면 병석의 자리보전 속에도 이를 부드득 갈고 눈을 무섭게 부릅떠 허공을 노려보다가 사람을 시켜 무당 천(千)씨를 불러 들였다. 천씨는 허씨에게 있어서 유일한 심복이며, 조언자이다. 천씨는 30대 후반으로서 대성리 뒷산 골짜기의 울창한 잡목 숲속의 음침한 바위 밑에 굿당을 꾸미고 사는 무당이다. 허씨는 남편이 외박을 하는 밤이면 가끔씩 속에서 열화가 치밀어 천씨를 불렀다. 하소연을 하고 돈과 쌀을 보시하면서 귀속 말하듯 나직이 소곤거리며 기도와 부적을 부탁했다.
천씨는 후리후리한 키에 빼어난 미모였지만, 눈은 안개가 낀 듯 흐릿해 보이기도 하다가 신명이 내리면 눈에 무서운 신광(神光)이 번뜩였다. 그녀는 결혼 초에 신이 지피자 남편은 이혼을 하고 떠나 버렸다. 남편이 떠나는 고별사는 매일 밤, 부부의 운우지정을 나누어야 하는데, 천씨는 남편과의 잠자리를 기피하고 오직 주야로 작은 징과 북을 울리며 굿만 한다는 것이다. 천씨는 자녀도 없이 외롭게 혼자 살게 되었다. 그녀는 시골사람들이 집에서 고사를 지내려고 청하면 언제나 작은 징과 북을 들고 나타나 북과 징을 두두리면서 고사를 지내주고, 큰굿을 할 때에는 굿당의 신전에 온갖 맛있는 제수음식과 함께 돼지 등을 잡아 바치고, 자신과 같은 무당과 박수를 불러 함께 북, 징, 새납을 불고, 무관(巫冠)을 쓰고 오색의 무복(巫服)을 입고서 악기의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밤새워 치성을 드렸다.
사람들은 천씨의 점과 굿이 영험하다고 입을 모와 칭찬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무당이라고 헌신짝 버리듯 그녀를 버리고 떠난 남편을 증오했고, 그 증오하는 마음이 세상의 남자를 증오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여자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남자에 대해서는 신광을 번뜩이며 이를 갈아 저주해 마지않았다.
강중일에게는 20세가 된 외아들 강송남(姜松男)이 있었다. 그는 허우대는 아버지와 비슷했지만,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닌 부족한 청년이었다. 그의 취미는 닭싸움이었다. 싸움닭을 안고서 마을마다 다니면서 닭에다 돈을 걸고 닭싸움을 시키고 다녔다. 그의 취미 때문에 그는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적었다. 동네에서는 강송남을 칠푼이라고 놀렸다. 강중일은 그러한 아들이 결혼할 적령기를 지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탄식하며 바쁘게 며느리 감을 찾아 나섰다.
어느 날, 강중일은 자리보전을 하고 있는 아내에게 강력히 이렇게 말했다.
“여보, 며느리 감은 얼굴이 예쁜 처녀를 뽑아야 하겠어. 우리 집이 부자니까, 서로 딸을 주려고 할거야. 얼굴이 예뻐야지? 안 그래?”
자리보전한 아내는 안면을 씰룩이며 어렵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얼굴만 반반하면 뭐 해요. 우리 아들이 부족하니 마음이 착한 며느리가 들어와야 해요.”
“호박덩어리 같아도 마음만 착하면 된다는 거야? 그건 안 돼.”
강중일은 아내에게 강력히 말했다.
“며느리감은 내가 선택해야 하겠어.닭싸움에 미친놈이 마누라를 알아 볼런 지….”
강중일은 마침내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며느리 감을 발견했다. 이웃마을에 사는 18세의 오미자((吳美子)라는 처녀였다. 오미자는 집안은 가난했지만 영리하고 빼어난 미모였다. 가난한 농부 오백준은 가족을 �아놓고 희망의 찬사를 늘어놓았다.
"우리 큰 딸이 부잣집에 시집을 가게 되었으니 장차 우리집의 형편도 좋아지리라고 생각한다. 미자야, 항상 친정을 잊어서는 안된다. 알겠느냐?”
어머니도 감개의 눈물을 눈으로 훔치며 특별당부를 했다.
“네 배 부르다고 배주린 친정동생들과 부모를 잊어서는 안된다. 알겠지?”
오미자가 부모를 향해 어렵게 생각을 털어 놓았다.
“소문에 듣자하니, 신랑될 사람이 허구헌날 내기 닭싸움에 미쳤다고 하던데 �찮을까요?”
부모는 똑같이 코웃음을 치며 똑같은 말을 했다. 영리한 것보다는 어름한 것이 너한테는 백배 낫다는 것을 생각해라. 시어머니는 중풍에 자리보전이요, 시아버지는 읍내 주점에서 상근하다시피 하고, 외아들은 장닭이나 품에 안고 집을 떠나 있으니 네가 그집의 진짜 주인이지 무엇이더냐? 친정을 많이 도와야 한다. 알겠지?”
오백준을 비롯하여 온 식구는 부농과 사돈을 맺는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조상에 감사해 마지않았다. 오미자 본인도 부농에 결혼을 하게 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면서 감격해 했다. 어린 남동생들은 부자집의 외동 며느리로 시집가는 누나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
초여름,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강중일은 외박을 했다. 밤이 이슥한 때였다. 허씨는 치미는 화를 이기지 못하여 사람을 시켜 뒷골 천씨를 불러들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허씨는 자리에 누워서 분노로 몸을 떨면서 말했다.
“자식놈 장가가는 것을 제 장가 들 듯 까다롭게 며느리 미색을 찾더니 핫바지 방귀 새듯 어디로 새버렸어. 세상에 자식놈 혼인식 이틀 앞두고 외박하는 자가 세상천지 어디 있겠어? 안 그래?”
“뻔하지요. 돈냥이나 들고서 정을 나눈 술집여자를 찾아갔겠지요.
제 눈에 환히 보이는 걸요. 신령님의 눈은 못 속여요.”
“정말, 눈에 보이는가?”
“예. 지금 바깥양반은 술에 취해 곱게 분단장한 여우같은 계집을 한 쪽 팔로 품에 안고, 다른 손으로는 술잔을 들어 입에 들이붓고 있네요. 그 여우는 손으로 안주를 바깥양반의 입에 쏙쏙 넣고….”
“저런! 쳐죽일 놈 같으니….”
“바람피우는 남자를 바람 못피우게 하는 기막힌 비법이 있지요.”
“그 기막힌 비법이 무언가? 어서 가르쳐 주게.”
“첫째는 다시는 바람을 피우지 못하게 가위로 남근을 싹둑 잘라 버리는 것이지요. 하나 그것은 자칫 살인죄로 몰릴 수 있고….
둘째는 남자가 잠잘 때 바지에 손을 넣어 애무하는 척 하다가 젖 먹든 힘을 다해서 부랄을 잡아 힘껏 훑어버려야 해요. 그러면 다시는 바람을 피우지 못할걸요.”
“음. 무서운 비법이네. 극약처방이라는 말이지? 알았네. 그런데, 그 놈이 내방에 와서 드러누워야 비법을 쓸텐데, 통 내 앞에 나타나지를 않는다니까.”
“신령님께 기도하세요. 저도 기도하겠어요.”
“고맙네. 기회를 엿보겠네. 정말, 내게 기회가 올까?.”
“신령님이 도우실 거예요.”
“돌아갈 때, 돈과 쌀을 가져가게. 자네는 언제나 기막힌 조언을 해준다니까.”
“그나저나 마님 병환이 분명 좋아졌는데 왜 계속 자리보전를 하시는 것이지요?”
“쉿!”
허씨가 손가락을 세워 자신의 입에 세우고, 주위를 살피며 속삭이듯 말했다.
“생각이 있으니 발설하지 말게.알았는가?”
강송남과 오미자는 부부로서는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루었다.
꿀맛 같은 신혼생활을 해야 할 강송남은 첫날 밤부터 술에 취해 신부의 옷을 벗길 생각은 하지 않고 신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혹시 싸움 잘하는 장닭에 대한 소문 못들었소?”
신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잘 모르는 데요.”
“도대체 당신의 취미는 뭐요?”
강송남은 짜증을 내고는 신부의 옷을 벗기지 않고 슬에 취해 코를 골고 잠에 떨어져 버렸다.
신부는 장래가 보이는 것아 훌쩍이었지만, 부모의 당부말씀을 생각해서 참기로 했다.
다음날, 강송남은 전북 전주지방에 독수리 같은 싸움닭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돈을 싸들고 행장을 꾸려 떠나더니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강중일은 읍네의 술집에도 나가지 않고 밤에 사랑채에서 며느리에게 술상을 봐오게 하여 며느리를 앞에 앉히고 자작을 하여 대취하더니 며느리에게 사과하듯 이렇게 말했다.
“못난 자식이야. 너같은 미인 마누라를 두고 닭을 사러 멀리 떠나다니... 이 시아비가 대신 사과하마. 응?”
강중일은 며느리를 맞이하고부터는 변했다. 웬지 읍내 주점에 발을 끊고 아들이 없는 밤이면, 며느리를 불러 사랑채에 술상을 보아오게 하였다. 시아버지는 술상 앞에 며느리를 앉혀놓고 술을 마시면서 탐욕스럽게 마치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려는 듯한 눈빛을 하여 며느리의 얼굴을 건네 보다가 취해 횡설수설하는 것이었다. 예쁜 신부는 신랑이 원망스러웠다. 누구보다도 신부를 보호해주어야 할 신랑이 아닌가. 그런데 신부보다는 오직 싸움닭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시어머니는 자리보전하여 말조차 못하는 신세이다. 이 집안에는 오직 시아버지의 권능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시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면, 당장이라도 내 쫓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한 친정식구들이 유일한 희망인 자신이 시아버지에게 미움받아 온갖 트집을 잡히고, 결국 작은 보따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상상해 보면, 끔찍한 일이었다. 가난한 친정에 돌아가기는 죽는 것만큼 싫었다. 신랑이 없는 신부는 머릿속에는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시아버지가 시키면 무슨 일이고 오직 복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강중일이 사랑채에서 며느리를 앞에 앉히고 술에 취해 횡설수설 하는 어두운 밤이면 박쥐같은 인간이 어둠속에서 사랑채 방문 근처에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왔다. 유령같은 인간은 허씨의 밀명을 수행하는 천씨였다. 천씨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사랑채 문 창호지를 뚫고는 구멍으로 신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방안 풍경을 엿보았다. 며느리가 제방으로 돌아갈 때 까지 한마디의 말도 놓치지 않으려 들었고,한 장면도 눈에서 놓치지 않았다.
보슬비가 내리는 어느 밤, 천씨는 안방의 허씨를 찾았다. 허씨는 자리에 앉아서 서늘하게 하문했다.
“어떠하든가?”
“큰일났습니다. 주인양반이 본색을 드러 내는데요.”
“아직 며느리에게 손은 안댔겠지?”
“손을 이미 댄 것도 같고, 아직은 안댄 것도 같고요.”
“며느리는 음탕한 년이든가?”
“며느리는 노골적으로 그러한 시아버지를 싫어하는데, 시아버지가 말을 고분고분 안들으면 당장 내쫓겠다고 협박을 하는 것 같았어요.”
“음…죽일 놈 같으니.”
돌연 허씨가 분노로 얼굴이 일글어지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허씨는 천씨의 귀를 잡아 소곤소곤 어떤 밀명을 내렸다.허씨는 무섭게 눈을 빛내며 단호히 말했다.
“빨리 작업을 하세. 자네의 역할을 믿네. 나는 그 일을 비밀히 성사해야 조상이 남긴 가문을 살리고, 자네도 팔자를 고치는 유일한 길이네.”
“시어머님이 치성을 드리라 해서 왔는데요.”
다음날, 오후, 굿당을 찾아온 오미자는 제수 물품을 바치고, 천씨에게 공손히 인사를 드렸다. 천씨는 싸늘하게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오미자를 굿당안의 만신전에 꿇어 앉혔다. 오미자는 아침에 시어머니로부터 집안의 복을 받기 위해서 굿당에 가서 치성을 드리고, 무녀로부터 예언을 들어오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다. 오미자가 처음 보는 굿당은 신비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굿당 앞 고목 나무에 펄럭이는 굿당의 깃발, 나무에 겹겹이 둘러싼 오색의 천들, 무서운 장군신장의 모습, 산신, 용왕 등…. 기가 죽어있는 오미자였다.
천씨는 오미자의 마음을 책 읽듯 읽었다.
천씨는 무관을 머리에 쓰고 오색의 무복을 입고서는 요란스럽게 방울을 흔들어대며 무서운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주문을
외었다. 이어서 장군도(將軍刀)를 뽑아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더니 갑자기 장군도의 칼끝을 오미자의 미간을 겨누며 사납게 호통을 쳤다.
“네 이년, 나는 오방신장(五方神將)이다! 내 너에게 재앙을 멸하고, 복을 주려고 하였는데 네 년의 몸이 부정하고 부정하다. 하늘과 땅이 놀라게도 큰 부정을 저질렀구나. 네 이년!”
“아이구머니 살려주세유.”
오미자는 겁에 질려 무릅을 꿇은 채 울상을 지어 천씨를 우러르며 두 손을 파리 앞 발 부비듯 부벼대면서 비명을 질렀다. 천씨는 한 손에는 방울을 마구 흔들고, 한 손에는 장군도를 잡고서 금방이라도 오미자의 목을 내려칠 듯이 겁을 주면서 온몸을 흔들며 호령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진실하게 네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당장 도산지옥(刀山地獄), 화탕지옥(火湯地獄)으로 끌고 가서 만년고를 받게 하고, 오대(五代) 눈먼 거지 봉사로 만들어 버린다. 네 이년, 솔직하고 진실하게 네죄를 고백해라! 네 이년!….”
“무엇을 고백하란 말인가유?”
“네 이년, 시어버지와 붙어먹은 네 년의 죄를 토설하고 참회하지 못하겠느냐! 신장님이 다 아시면서도 네 년의 진실한 고백과 참회를 바라시는 거야. 고백하겠느냐?”
“예. 예. 고백하겠어유. 제발 살려주세유.”
순진한 오미자는 진실을 고백하지 않으면 신장님의 칼로 목숨을 잃고, 무서운 지옥의 고통, 오대 봉사 거지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 같았다.살아야 했다. 살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잘못을 손바닥의 구슬 보듯이 꿰뚫어 보는 무서운 신장님과 무녀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미자의 고백을 쉽게 들은 천씨는 길길히 뛰면서 방울을 울리고 장군도로 허공을 베었다. 헤어질 때에사 혼백이 빠진 듯한 오미자의 등을 천씨는 토닥이며 귀를 잡아 신령님의 뜻이라고 계책을 속삭여주었다. 천씨는 눈을 무섭게 하여 오미자를 노려보며 다그치었다.
“네가 못된 짓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네 년이 살길은 내가 가르쳐 준대로 해야 살 수 있어. 알아들어? 그래야 그집 며느리로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게야.
오미자는 굿당을 다녀온 후로 혼백이 빠진 듯 사람이 변해 버렸다. 시아버지가 밤에 사랑채에서 불러도 오미자는 예전처럼 술상을 들고 찾아가지를 않았다. 시아버지가 찾아와 성난 목소리로 이유를 물어도 방문을 닫아걸고서 힘없이 몸이 아프다며 얼굴조차 보여주지를 않았다.
시아버지는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오미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몸이 아프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시아버지는 한의사를 불러 진맥을 하여 약을 짓는다고 부산을 떨었지만 며느리는 여전히 병을 빙자하여 시아버지 앞에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강중일은 천씨를 찾아가 며느리의 병에 대해서 점괘를 물어보았다. 천씨는 무서운 눈으로 강중일을 쏘아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 댁에는 왕도깨비가 쳐들어왔어요. 보통사람의 눈에는 안보이지요. 저는 환히 볼 수 있습니다. 며느리의 병은 왕도깨비가 준 병이에요.”
강중일은 깜짝 놀라서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뭬야? 왕도깨비 때문에 며느리의 병이 생겼다구? 어째야 하겠나?”
“신장굿을 해야지요. 오방신장, 팔만신장들을 모두 불러서 몹쓸 왕도깨비를 멀리멀리 내쫓아야지요. 그래야 며느님이 건강하고 행복하며 가문이 보존됩니다요.”
경비는 얼마나 들겠는가?”
“귀한 며느님이 사시는데, 경비를 따져서야 쓰겠어요. 며느님이 알면 무정한 시아버님이라구 슬퍼하겠지요.”
“그래, 굿을 하세. 그 몹쓸 도깨비를 영영 짐안에서 내쫓아 버려야겠어. 하지만 생각을 해보겠네.”
강중일은 경비 때문에 망설이며 두눈을 검벅였다.천씨는 속셈을 간파하고 순간 강중일을 향해 요사스럽게 웃고는 이내 정색을 하고 다그쳤다.
"하루빨리 굿을 해서 도깨비를 쫓아야 며느님이 시아버지께 효도합니다! 아시겠어요?"
이때부터 집안에 변괴가 터지기 시작하였다. 도깨비가 노골적으로 설치기 시작한 것이다. 칠흑 같은 밤이면 어둠 속에서 어디선가 돌멩이가 시아버지가 기거하는 사랑채에 날아들었다. 특히 시아버지가 며느리의 방문 앞에서 애타게 며느리를 부르며 문을 열라고 사정할 때는 어김없이 어둠 속에 돌멩이가 날아들어 인정사정 없이 강중일의 머리, 안면, 몸통을 가리지 않고 때렸다. 어둠 속에 날아온 돌멩이로 강중일의 얼굴과 머리가 깨져 피가 흘렀다. 앞가슴, 등짝 등이 돌멩이에 맞아 피멍이 들었다. 밤이면 강중일은 사랑채의 방안에 꼭꼭 숨어 있어야 했다. 며느리의 ‘며’자만 입에서 나와도 돌멩이가 날아드는 것 같았다. 어쩌면, 도깨비는 강중일의 며느리를 수호하는 것 같았다. 강중일은 무녀의 말대로 도깨비의 조화라고 확신해 마지 않았다.
도깨비의 장난은 커져갔다. 어느 날, 이슥한 밤에 강중일이 잠자는 사랑채의 지붕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마을 사람들 덕택에 사랑채는 전소를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2, 3일 후에는 다시 사랑채에 불길이 치솟았다. 사랑채를 향한 불길은 9차례나 치솟았다. 원인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강중일은 변괴가 닥치는 불행에 대해 마을 사람들에게 하소연을 했지만 아무도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마을사람들은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99세의 고노인에게 달려가 전후 설명을 드리고 조언을 구했다. 고노인은 가래를 힘겹게 뱉어내면서 조언했다.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분명히 하신 귀한 말씀인데, 집안에 밤중에 돌멩이가 날아들고 지붕에 불길이 연속적으로 치솟는 것은 모두 도깨비만이 부릴 수 있는 조화라는 게야. 그 집안에 천하에 나쁜 놈이 있으면 도깨비들이 정의를 위해 응징한다는 것이지. 그런데, 강중일의 집에 도깨비가 증오해 마지않는 나쁜 놈이 누굴 꼬? 고놈을 잡아 조져야 혀. 암, 그놈을 조져야지.”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고노인의 조언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온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강중일에게 이렇게 권유했다.
“신이든 성인이든 인간이든 귀신이든 일단 대접, 내지 향응을 받고서야 부탁을 안들어줄 수 없지. 신장 굿을 크게 하시게. 신장들이 얻어 먹고서 나 모르쇠 하겠어? 굿을 크게 하면 반드시 신장님이 도깨비를 내쫓고, 재앙을 복으로 바꿔 주실거야. 전화위복(轉禍爲福)말일세. 자네는 여자한테는 팍팍 쓴다는 소문이 파다한 사람 아닌가. 이참에 팍팍 써서 큰 굿을 하게나.”
강주일은 ‘전화위복’이라는 단어를 깊이 생각하면서 천씨에게 거액을 주어 큰 굿판을 벌이게 하였다. 천씨는 수많은 무녀, 박수들을 불러 강중일의 마당에서 도깨비를 내쫓는 성대한 굿판을 벌일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 날, 대형 차일이 쳐 진 성대한 굿판에는 큰 돼지를 세 마리나 잡고 온갖 푸짐한 제수 음식과 양조장의 술을 모두 가져오다 시피 했다. 초저녘 부터 북, 장고, 징, 괭가리, 새납은 신명을 울렸다. 무녀들이 번갈아 빙글빙글 춤을 추고 공수가 내리는데 모두 첫째, 도깨비를 나가라고 꾸짖고, 둘째, 강중일을 축복했다. 천씨는 오색의 무복을 입고서는 마치 주인처럼 큰 술잔에 술을 넘치도록 부어 강중일에게 권하며 말했다.
“이 술잔은 신장님이 도깨비를 내쫓고 복을 주신다면서 권하시니 마시세요.”
강중일은 연신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술잔을 비우면 천씨는 또 가득 술잔에 술을 부으면서 말했다.
“이 술잔은 왕도깨비가 떠난다는 뜻이니 마시세요.”
천씨는 산신, 용왕, 북두칠성, 일월성신 등의 이름을 빙자하여 술을 내린다고 연거퍼 강주일에게 술을 권했다. 심지어는 예쁜 며느리까지 불러서 시아버지의 큰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권하도록 했다. 예쁜 며느리는 웬일인지, 꽃처럼 활짝 미소지으며 공손히시아버지에게 술을 권했다.강중일은 며느리가 주는 술잔을 받고서 도깨비 쫓는 굿을 하기를 잘했다고 스스로 감격했다. 강중일은 크게 취해갔다.
천씨는 마을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왕도깨비님께서 여러분이 음식을 맛있게 잡수어야 이 집에서 떠난다니 많이많이 드세요.”
“옳커니!”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강중일도 마시대고, 마을의 남녀노소도 정신없이 고기를 씹고 술을 마셔대었다. 고기와 음식을 몰래 빼돌리기도 했다.
북, 장고, 괭가리, 징, 새납 등의 소리가 다시 신명나게 울렸다.
그때, 천씨는 술에 취한 강중일에게 무복을 입히고 무녀의 관을 쓰게 하고는 손에 대나무를 들게 하고서 템포 빠른 북, 장고 소리에 맞추어 신내린 무녀처럼 춤을 추게 했다.
와―,
‘잘한다!’
‘강중일에게 신이 내렸다!’
굿판의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강중일은 무악에 맞추어 신이 지핀 듯 정신 없이 무당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는 춤을 추면서 도깨비가 떠나면 며느리와 사이좋게 지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연속적으로 술을 들이키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춤을 추면서 활짝 웃으며 술을 따르는 며느리에게 나직이 말했다.
“예쁜 아가야, 이 시아버지가 너에게 돈을 팍팍 쓸 것이다 잉.”
강중일은 의식이 흐려갔다. 그는 무복을 입은 채 비틀거리며 간신히 사랑채의 방안에 들어가 쓰러져 정신없이 잠에 골아 떨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있는 힘을 다해 고기를 씹고 술을 마시고 뒷구녘으로 챙겼다.
그 때, 허씨가 있는 안채의 안방 문이 스르르 열렸다. 놀랍게도 자리보전해 있을 허씨가 지팡이를 짚고 조심조심 걸어나왔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굿판을 바라보았다. 취해서 무당의 복색으로 무당춤을 추고 있는 남편을 무서운 증오의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싸늘히 웃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천하에 나쁜 놈! 네 놈이 이 집에서 내쫓을 도깨비인줄 모르지? 내가 직접, 왕도깨비를 내쫓을 게야!”
다음날 새벽 3시쯤, 온 동네가 잠에 골아 떨어진 그 미명의 시간에 강중일의 사랑채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술에 취해 있는 마을 사람들은 불길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만취되어 있어서 제 몸도 가누기 힘든 처지에 어떻게 화재 진압에 나서겠는가. 강주일의 사랑채는 속수무책인 가운데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타올랐다. 방안에는 강중일이 무복을 입은 채 술에 골아 떨어져 있었다. 마침내 강중일은 정신 없이 코를 골다가 사랑채와 함께 전소되어 사라졌다.
“뭐야? 도깨비가 살인을 했다고? 그것을 보고라고 하나?”
1912년 9월, 경북 선산경찰서에서는 지서의 보고를 받고 지서의 경찰을 큰소리로 꾸짖었다. 형사대가 급파되어 수사를 실시했으나 사건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았다.
첫째, 무녀 천씨가 먼저 사랑채의 전소와 강중일의 사망은 굿을 통해 내쫓기는 도깨비의 원한이라고 한 치도 양보 없이 주장했다.
둘째, 며느리도 평소 으슥한 밤이면, 잦은 도깨비의 난동을 주장했다.
셋째, 마을 사람들은 강중일의 집에 평소 도깨비가 불을 지르고 돌멩이를 던지는 등 난동이 잦았다고 증언했다. 도깨비의 투석, 방화로 인해 단잠을 자다가 현장에 출동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어서 이제는 도깨비의 첫자 '도'자만 들어도 신물이 난다는 것이다.
넷째, 마을의 최고 원로인 고노인이 자꾸 형사들에게 나타나 도깨비를 증언하며 누군가를 조져야 한다고 가래침을 돋우며 주장하는 것이었다. 형사들은 고노인의 가래 돋우는 소리에 심한 구토증이 발생하여 피하기 바빴다고 솔직이 애로를 토로했다.
다시말해 온동네 사람들이 수사형사의 귀에 도깨비의 짓이라고 증언하고, 주장해대는 것이었다. 의견이 다른 유일한 사람은 강중일의 아들인 강송남이었다. 그는 도깨비에 대한 언급은 없고, 화재중에 비싸게 사온 독수리같은 싸움닭이 행방물명 되었다며 경찰에게 찾아달라고 횡설수설 수사를 의뢰하는 것이었다.
형사들이 수사한 결과 그 날 밤, 굿판에 참석한 사람들의 알리바이는 단 한 사람도 의심할 수가 없이 완벽했다. 그러나, 형사중의 한 사람이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반장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그날 밤 처음부터 보이지 않은 인물은 죽은자의 부인 허씨입니다.”
반장은 화를 버럭 내며 대꾸했다.
“중풍으로 몇 년채 자리보전 신세이고, 말조차 못하는 중환자에게 동정은 못할 망정 경찰이 의심해서야 되나!”
마침내 형사들은 돌멩이를 던지고 방화를 해대는 무서운 도깨비에 대한 공포감만 안은 채 손들고 철수해버렸다.
대성리의 도깨비 사건은 흐지부지 되다가 무심한 세월에 의해 사람의 기억속에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훗날 전해오는 이야기다. 그 날의 예쁜 며느리는 어느 날, 닭싸움의 취미를 버린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부족한 신랑은 싸움닭 보다는 예쁜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큰 보물이라는 것을 비로서 깨달은 것이다. 부족한 신랑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신부에게 뜨거운 사랑의 맹공을 퍼부었고, 그녀는 사랑의 결실로 아들을 3형제나 두었다.
손자를 안을 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며느리를 격찬하든 시어머니는 세 번째 손자가 무사히 분만되어 우렁차게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는 전갈을 듣고는 흐뭇한 미소 속에 세상을 떠났다.
오미자는 드디어 집안의 실세가 되었다. 수시로 친정붙이가 몰려와 고기와 식량을 축내도 언제나 웃음을 지었다.
천씨는 어디서 생긴 돈인지 무당생활을 청산하고 포항 쪽에 여관을 인수, 개업했다. 덩치가 크고 가슴에 털이 많은 사내가 간절히 구혼을 해오고, 마침내 냉정한 천씨는 재혼을 허락했다. 도끼로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는 없다는 속담이 증명된 것이다.
또, 예나 지금이나 혼자 사는 젊은 여관주인여자에게 구애하는 남자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집안에서 영구히 내쫓아 내어야 할 왕도깨비인지 깨닫지 못하고, 굿판을 벌여 며느리에게 돈을 팍팍 쓰겠다는 각오와 함께 무복을 입고서 불 속에 사라진 강중일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제아무리 생전의 잘못에 대해 오리발의 주장을 해도 염라대왕의 업경대는 속일 수는 없다.거울에 제얼굴이 모두 비추이듯이, 업경대의 거울 앞에 서면 생전의 죄업이 모두 비추이는 것이니까. 강중일은 인과응보법만 적용하는 지옥에서 우두나찰, 마두나찰로 부터 지금도 인정사정없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축생보를 받아 소, 돼지로 태어나 숙명의 고통을 받아 신음하고 있을까?
아니면, 천만다행히 인간으로 환생하여 참회의 길을 걷기 위해 나같은 수도승이나, 신부, 목사가 되지는 않았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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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을 토대로 재구성
러시아 비밀문서로 밝혀진 명성황후 최후의 날
1895년 10월 8일 새벽.일단의 일본인에 의해 조선왕궁이 습격당한다.
궁궐은 아수라장이 되고 명성황후는 잔인하게 시해된다.
조선왕궁에서 벌어진 이 참극을 기록한 보고서가 최근 러시아 에서 발견됐다.
백여년전에 작성된 명성황후 시해 사건 보고서다.
이 보고서엔 실로 놀라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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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베르보고서와 싸인(KBS 역사스페셜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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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찾아낸 명성황후 시해 사건 보고서.
백여년전 러시아에서는 명성황후의 최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을까? 러시아 대외정책 문서 보관소에는 재정러시아 시대의 외교 문서들이 총망라돼 있다.이곳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 보고서가 발견됐다.외교 관련문서가 소장돼 있는 이곳은 출입 통제가 엄격하다.
취재진은 촬영 요청 한달만에 취재 허가를 얻을 수 있었다. 170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의 외교 문서가 시대별 국가별로 분류돼 있다. 문서를 채운 선반을 모두 합치면 8킬로미터, 수백만장의 외교 문서가 문서고를 가득 메우고있다.이중 한국 관련 문건은 3천여건, 그 속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 보고서가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틀만에 사건은 러시아로 보고됐다.그뒤 6 개월에 걸쳐 보고된 문서는 3백여쪽에 이른다.문서작성자는 웨베르.당시 주한 러시아공사다. 한러 관계를 연구자인 보리스 박교수와 이곳의 발레리 쿠시펠 소장과 함께 웨베르 보고서를 분석해 보기로했다.보고서는 현장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 졌다.
주한 외교공사들의 회의록과 당시 신문자료등 다각도의 정보와 증거 자료도 첨부됐다.웨베르는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명확한 상황을 신속하게 그려냈다.
소장 인터뷰 "러시아 지도부는 당시 극동지역 및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이점을 입증해주는 사실은 당시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의 보고서에 대한 니콜라이
2세의 반응이다"
웨베르의 모든 보고서는 러시아황제 니콜라이가 직접 검토했다.보고서에 그려진 사선이 바로 그 증거다.니콜라이 황제는 중요한 대목에 사선을 표시해 놓았다.여기에 황제가 남긴 표시가 또 있다.보고서를 다 읽은 뒤 황제가 직접 쓴 친필이다.
황제가 표시한 부분은 지워지지 않게 도포 처리가 돼 있다.당시 러시아황제까지 격분했던 명성황후 시해 사건.보고서에는 명성 황후 시해상황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명성황후의 최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왕비 마마가 복도로 달아나자 뒤쫓아가 바닥에 쓰러뜨리고 가슴 위로 뛰어 올라 세 번 짓밟고 칼로 시해 했다' 이 보고서에는 현장에 있었던 러시아인 사바틴의 증언도 수록돼있다.그는 시해 직전의 상황을 증언했다.
보고서에서 흥미로운 문서가 또 눈에 띄었다.보고서 작성자인 웨베르가 자신의 견해를 황제에게 보고한 내용의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보고서 내용 중간에 표시돼 있는 숫자 - 이것은 암호다. 웨베르는 숫자 암호로 비밀 내용을 전달했다.
-박보리스 교수 인터뷰 "당시 왕비가 시해되지 않고 구출되어 도주한 것처럼 소문이
서울에 퍼졌다.그런 소문속에 왕비 신변에 대한 보고에 비밀을 유지해야 하무로 암호문으로
작성한 것이다"
웨베르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전말은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이다
-박보리스 교수 인터뷰 "웨베르는 ..사건 전개 상황 보고...진범 밝히기 위해 노력...
일본인에 의한 것 입증했다"
그런데 보고서에 한장의 신문이 발견됐다.1895년 발행되던 성 페테르부르그 신문이다.여기에 사바틴의 보고서를 전면에 그대로 싣고있다.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당시 러시아에서도 파장이 컸다.그렇다면 당시 여론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어떻게 보도하고 있을까?
당시 신문들이 보관돼 있는 러시아 국립 역사 도서관. 당시 러시아에서 발행되던 3대 일간지 신문 모음을 찾았다.명성황후가 시해 당한 1895년 10월8일 이후의 신문 기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 수도인 페테르 부르크의 최대 일간지인 루스코에 슬로보 신문이다.
이 신문은 며칠에 걸쳐 명성황후 시해 사건 기사를 다루고 있다. 러시아 신문은 조선왕궁에서 벌어진 사건을 어떻게 이토록 신속하게 보도할 수 있었을까. 모스콥스코에 베도 모스티 신문에 그 단서가 있다. 이 신문은 비밀문서인 웨베르의 보고서를 입수했다는 것을 보도하고 있다
. -박보리스교수 인터뷰 "한국의 정세라는 제목의 기사로서 러시아 외무부와 가까운 한 통신원이 웨베르 공사의 보고서를 인용 보도하고 있습니다. 민왕후 시해 후의 한국의 정세와 시해 관련 기사를 다루고 있다"
이 신문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저말을 상세하게 풀어쓰고, 그 사건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 특히 조선의 정세를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이 기사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바로 이 신문사가 입수한 웨베르 보고서였다.
박보리스교수 인터뷰 "이 신문 내용이 말하고 있는 점은 러시아 정부와 여론이 이
사건에 깊은 연민을 표시하고 일본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해현장에 있었던 러시아인 사바틴의 증언과 주한 러시아 공사 웨베르 보고서를 통해서
일본의 만행은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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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베르는 당시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을 주한 외교 사절들에게 알리고 이들 주한 외교 사절들과
더불어 사건의 진위를 캐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는데요,웨베르와 주한 외교사절들에 의해 일본의
만행은 세상에 드러나게 된것이죠.그런데 시해현장 목격자 중 한사람인 사바틴은 어떻게 궁궐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 경복궁에는 서양식 건물이 하나 있었 습니다.
서양관인데요 이곳은 궁궐 수비 책임을 맡았던 몇몇 미국인과 유럽인들의 생활 공간
이었습니다.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의 심한 간섭과 위협을 느껴 궁궐에 서양관을 짓고 외국
인들이 머물게 했는데요,왜냐하면 궁궐에 외국인이 있으면 그들의 눈을 의식해 일본이 함부로 위협을 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그날 숙직이었던 외국인이 없었다면 일본의 만행은 감쪽같이 숨겨졌을 겁니다. 그 증거가 러시아 보고서에 있는데요.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벌어진 뒤 각국의 공사관들이 일본 공사관에 찾아가서 사건의 진위를 묻는 내용입니다.
일본의 관련 여부를 추궁하자 일본은 무관한 일이라며 발뺌을 하며
일본공사 미우라는 이런 말을 합니다.
'불합리한 풍설을 퍼뜨리는 악의에 찬 조선인의 말보다
일본인들의 말이 더 신임할만하다'.
그러자 러시아 공사관 웨베르의 지적입니다.
일본 공사관은 그제서야 당황하고 다시 알아 봐야 한다며 회의를 끝내버립니다.
아마 목격자가 모두 조선인이었다면 일본은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을 겁니다.
러시아 공사관 웨베르는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보고서에 생생 하게
담았습니다.그 러시아 보고서의 내용을 따라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재구성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날 새벽 무슨일이 있었나?..
(보고서로 본 명성황후 시해사건)
지난 9월까지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에서 한러 외교사를 전공한 박종효 교수.그는 방대한 양
의 러시아 외교 문서들 속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 보고서를 발굴해낸 사람이다
. -박종효 교수 인터뷰 "거기에는 제 예상보다 훨씬 많은 한국관련 문서가 있다.그 문서는 수
십만건에 달한다.그 중에서도 특히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새롭고 생생
.
진실 밝혀야 겠다는 심정으로 수집했다"
박교수는 3백여장에 이르는 러시아 보고서 중 사바틴의 증언서에 주목한다.시해 현장의 목격
자인 사바틴은 보고서와 직접 그린 도면을 통해 일본의 궁궐 침입 경로를 밝히고 있다.
-박교수 도면 가리키며 인터뷰 "러시아 말로는/// 광화문이라는...명성황후가 계시던
건청궁까지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최초의 총성이 울린다.이것이 신호탄이었다. 대기하고 있던 일본 군대는 두갈래로 나뉘어 궁궐의 북서문인 추성문과 북동문인 춘생문으로 공격해 들어온다.
궁궐의 전방과 후방에서 예상치 못한 일본의 습격을 받자 궁궐을 방어하던 시위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 버린다.그렇다면 최초의 총성이 울린 광화문의 상황은 어떠했을까.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라 궁궐 점거와 명성황후 시해까지의 소요시간을 분석한 이민원 교수.그는 당시 광화문의 상황을 조명했다.
새벽 5시.광화문에서 궁궐시위대와 일본 군대와의 접전이 벌어지고 광화문은 15분 만에 일본군에 의해 장악된다.
#이민원교수 인터뷰 "일본이 광화문을 통해 공격해 들어가면서 최초의 총성이 울린
것은 5시.일을 저지르고 사태 마무리하는데 총성이 울린 시각으로부터 마무리 되는 시간까지
불과 사십오분 정도였다"
궁궐문을 뚫고 들어온 일본군대가 찾은 곳은 건청궁.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가 있는 곳이다.
-경복궁 관계자 인터뷰 "이 자리가 건청궁자리입니다 지금 빈터로 남아 있지만은 고종
께서 거처 하시던 장안당 자리가 바로 이 자리가 되겠고 명성황후가 거처하시던 곳이 옥호루
자리가 바로 이 자리가 되겠습니다"
곤령합 옆의 옥호루
건청궁은 경복궁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일본으로부터 위협을 느낀 고종과 명성 황후는 궁궐의 가장 깊숙한 건청궁에서 생활했다. 건청궁의 서편엔 왕의 침전인 장안당이, 황후의 침전인 옥호루는 그 동쪽에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 된 장소가 바로 이 옥호루다.시해 현장에서 명성황후 시해 행동대를 막닥뜨린 사바틴은 보고서와 도면을 통해 그들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옥호루로 통하는 두 개의 문들을 일본 보초들이 봉쇄했다.
제복 차림의 일본 장교들이 군사들을 지휘하고 있었고, 뜰 가운데엔 무기를 내린 40명의 조선 병사가 정렬해 있었다.일본 낭인들에 의해 처참하게 시해 당한 명성황후 - 시해범들은 증거 인멸을 위해 시신을 불태우고 건청궁 동쪽 숲속에 묻어 버린다.
보고서 작성을 마치며 웨베르는 이렇게 적었다.
'전쟁도 아닌 평황시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습격하고 한나라의 국모를 서슴없이
시해 한 사상 유래없는 만행' 러시아 보고서는 그것을 밝히고 있다
향원정 뒤의 복원 된 건청궁
고종과 명성황후가 따로 거처하던 경복궁 내의 건청궁입니다. 노란색원이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입니다. 이 곳 건청 궁 내에서 명성황후는 최후를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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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해 현장 목격자인 사바틴이 그린 도면과 증언서에 따라 복원한 시해 사건 현장입니다.
옥호루로 통하는 문들은 일본보초들이 지키고 섰구요,옥호루 안팍은 일본군 장교와 양복과 기모
노 차림의 일본 무리들이 명성황후를 찾아서 살기 등등하게 휘젓고 다녔습니다.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고 그 어떤 저항도 못한채 명성황후는 이렇게 무장한 일본무리들에게 잔인하게 시해 당해 버렸던 것입니다.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뜰 가운데 총을 내린채 정렬하고 있는 이 군사들입니다.현장 목격자인 사바틴의 보고에 의하면 이들 군인은 조선군이라고 했습 니다.조선군이 조선의 국모를 잔인하게 시해하는 이 현장에 어떻게 조선군이 있었던걸까요. 조선군이 시해 현장에 있었던 이유는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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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군대는 왜 그곳에 있었나
러시아 보고서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현장에 있던 조선 병사의 정체를 밝혀 놓고 있다.조선 병사란 훈련대 소속의 군인을 말한다.
훈련대는 1895년 일본의 건의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 군대다.
-강창일 교수 인터뷰 "첫번째 손을 덴게 조선 군대를 일본화 친일화 시키는 게 첫째
과제였죠 이때에 훈련대에 일본인 교관들을 집어 놓고..훈련대는 일본에 의해 조정받는
군대 라고 할 수 있죠"
조선 강탈을 국가 목적으로 삼았던 일본은 그들의 목적과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 확보가 필요 했다.일본은 훈련대를 통해 그것을 충족시키려 했다.조선 군사를 일본의 지휘 아래 둠으로써
군사력을 장악하고 그들의 목적에 따라 마음대로 조정하려고 했던 것이다.고종과 명성황후는 이러한 일본의 의도를 간파하고 훈련대를 해산 시키고자 했다.
시해사건하루 전 마침내 훈련
대 해산 명령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여기에 불만을 품은 훈련대가 명성황후를 시해할 목적으로 현장으로 간 것일까. 보고서는 훈련대가 전투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왜 그들은 실제로 사격하지 않았을까?
-강창일 교수 "당시 진압이라는 치안 유지라는 명목으로 동원이 돼가지고 가담
이사람들 총 쏠때.명성황후 시해 사건 모르고 있었다..만일 사태 대비...일본에 가담한다 이
정도의 역할이 부여 됐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이 훈련대에게 책임을 전가할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훈련대가 동원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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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경복궁의 대전인 강녕전입니다.새벽 5시 궁궐습격의 신호탄인 총성이 광화문에서 울
리고 경복궁은 삽시간에 일본군에 의해 점령 당합니다.그리고 새벽 6시를 전후한 시각. 명성황후는 옥호루에서 시해되는데요 바로 그 시각.이곳 강녕전에는 의외의 인물이 나타납니다.
바로 대원군입니다.대원군이라면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명성황후와는 정치적 라이벌 관계였는데요. 그렇다면 대원군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었을까요.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는 바로 시각. 대원군은 왜 궁궐에 온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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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왜 그곳에 있었나(대원군과 훈련대 주모 위장용)
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아소정자리에는 지금은 동도 중 공업고등학교가 대신하고 있다. 건물의
흔적은 사라지고 지금은 당시 우물가에 놓였던 디딤돌만 운동장에 쓸쓸히 남아 있다.
-교장 인터뷰 "여기가 아소정터인데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나오신 이후에 돌아
가실 때까지 여기서 기거하다 돌아 가셨어 건물은 아흔아홉칸짜리 묘소가 있어서 국태공원
이라고 불리었던 적이 있다"
대원군은 자신의 일생이 너무나 덧없음을 뒤돌아보고 스스로 조소한다는 뜻에 거처하는 집을 아소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당시 대원군의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말해 주고 있다.명성황후가 시해되던 당시 대원군은 사실상 이 아소정에서 외부와 차단된채 은둔 생활을 하며 말년을 보 내고 있었다.그런데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터지자 세상은 다시 대원군을 주목한다.
당시 프랑
스 신문 일러스트라시옹에서는 명성황후 시해 주범으로 대원군을 지목 하고 있다.정치적 대립
관계인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제거했다는 것이다. 당시 그들은 정치적 갈등 관계였을까.
-최문형 교수 인터뷰 "왕후와 대원군 계속 갈등 빚은 것처럼 이해를 하는데 그건 사실
아니다. 68년 처음 갈등 시작 73년 10월달에 대원군 실각 당하니까 4,5년간만 대립. 대원군
은 어떤 존재인가 결국 민황후가 청나라 거부 일본 거부하려는데 청나라와 일본에 의해 차례로 민황후를 견제하기 위한 견제용으로 이용 당했을 뿐이다"
러시아 보고서 중 뮤텔의 증언서에는 대원군이 일본에 의해 이용 당했음을 알게하는 단서가 있다.1895년 10월 8일 새벽 2시. 일본군대는 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에 침입한다.대원군이 방에서 나오지 않자 강제로 끌어내 가마에 태운다.그들의 목적지는 경복궁이었다.
일본은 강제로 대원군을 궁궐로 호위해 온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대원군을 데려다 놓는 것
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최문형 교수 인터뷰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그 책임을 대원군에게 전가시키기 위해서
대원군과 훈련대에다가 전가시키기 위해 끌고 갔죠.직접살해는 낭인들이 하고 대원군과 훈련 대는 끌고가서 앉혀놓고 나중에 시해 책임을 전가하려고 했던 겁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노스차이나 헤럴드지는 당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진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밝혔다.이 신문은 대원군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무관함을 보도하고 있다.대원군은 강제로 궁궐로 끌려가 죄수처럼 감금된 상태로 있었다는 것이다.
-이민원 교수 인터뷰 "이 자료로 볼 때 대원군은 이 사건의 주모와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 일본측에 의해 강제로 경복궁에 끌려들어가 나중에 이 사건의 주범으로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됩니다"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모자로 대원군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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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일,고종도 총과 칼로 무장한 일본 무리들에게 습격을 당합니다. 왕비
를 찾아 왕의 침전에 쳐들어 온 일본 무리들은 고종과 세자에게 심한 폭행을 가합니다.
고종은 옷이 찢겨지고 세자는 칼등에 맞아 의식을 잃습니다.고종은 중요한 목격을 합니다. 러시아 보고서에 고종이 목격한 증언서 있는데요 한번 볼까요.'짐의 눈앞에서 일본인들,오카 모토와 전 조선 군부의 고문 스즈끼,와타나베가 칼을 빼 들고 궁궐로 쳐들어 왔고 오카모토
와 스즈끼가 왕비를 붙잡았다' 현장 목격자 중 고종은 유일하게 범인의 이름을 거명했습니다.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 시해범들은 일본인이었습니다. 고종이 거명한 오카모토와 스즈키 와타나베 이들 외에도 명성황후 시해임무를 맡은 행동대는 이십여명이 더 있었습니다
. 그들은 군복을 입은 군인이 아니라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양복과 기모노 입고 총과
칼로 무장한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낭인이라고 하는데요, 군인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
사복을 입은 이사람들 - 직접 살해를 담당한 이 낭인들의 정체는 뭘까요
<한성순보사앞에서의 일본인 단체사진>
낭인들은 누구인가?
근대 제국주의와 열강에 관해 연구해 온 최문형 교수.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범을
수년째 추적하고 있다. 최교수는 시해범들의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던 중 중요한 사진 한 장
을 발견했다.명성황후의 살해를 담당했던 행동대의 단체사진이다.
시해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대로 양복과 기모노를 차려입은 이들이 바로 낭인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진에 주목할 것이 있다. 사진의 뒷배경,바로 한성신보사다.한국 신문의 역사를 한눈에 볼수 있는 신문 박물관.이곳에 백여년전의 신문인 한성신보가 소장돼 있다.한성신보는 구한말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발행하던 신문이다.4쪽 가운데 3쪽은 국한문혼용기사고 한쪽은 일본어로 기사를 썼다.발행 인이 일본사람인 한성신보사는 어떤 성격의 신문인가 낭인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걸까
-최문형 교수 인터뷰 "한성신보사라는 것은 창립부터 공사관에서 모든 운영비를 대고
뿐 아니라 창립기금까지...우리나라에 기자로 가장한 자들이 들어와서 정보 수집을 한 기관
입니다"
한성 신보사의 기자들은 대부분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행동대로 가담했다.한성 신보사의 사장
아다치 겐조.그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행동대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다.낭인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행동 지침을 하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최문형 교수 인터뷰 "이 낭인들 중에서 이 사람이 바로 시바 시로우 하바드 나왔다는
시바 시로우입니다"
낭인 지휘의 총책임자인 시바 시로우.일본공사 미우라가 계획한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작전
참모로 하버드 대학과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엘리트다. 이외에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들은 당시 일본의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낭인은 대륙침략을 위해
현지를 돌며 정보를 수집하고 행동하는 재야 정치인이었다.
#최문형 교수 인터뷰 "일반적으로 이들을 깡패나 무뢰한으로 알고 있는데 그건 사실과
전혀 다르다.이들중에는 하버드출신도 있고 불어를 회화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고 또 영어
를 하는 사람도 여러사람 있었습니다.
심지어 한선신보사 주필 구미모도 같은 사람은 아주 유명
한 한학자였습니다.이들은 지성을 갗춘 사람들이었습니다.다만 조선을 침략하고 만주를 침략하고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조선낭인, 대륙낭인들이라 불리는 극우분자들이었습니다.
강창일 교수는 최근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동원된 낭인들의 명단을 입수했다.40대전후의 조선
에서 거주하던 지식인들.그들은 조선의 현지 사정과 언어 역사에 정통한 인물들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대륙침략을 주장하는 극우분자인 이들 낭인들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주범이라고 했을까.
#강창일 교수 인터뷰 "낭인의 역할 근대 일본의 대륙침략의 낭인의 역할을 축소하고 왜곡시켜 놓는부분이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낭인들이 했다는 측면에서 일본의 책임을 오히려 희석시키는 부분이죠"
1895년 10월 31일자 노스차이나 헤롤드신문에 실린 보도는 낭인 역할을 축소하고 왜곡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다. 일본을 비판하고 범죄자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자 일본정부는 범인으로 지목된 48명의 용의자를 일본으로 소환한다.
사건을 히로시마 재판소에 넘기고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뒤 범죄자들을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석방한다. -강창일 교수 인터뷰-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석방되자 마자 전 일본에서 구국적 영웅으로 대접하는
분위기 연출 기차로 동경까지 오는데 모든 연변에서 이 사람들에게 박수 치고
환호하고 그랬다 도쿄 도착했을 때 천황이 시종 대신을 보내 수고했다고
노고를 치하했다고 하죠"
일본정부는 애처에 시해범들을 처벌할 의도가 없었다.왜냐하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일본 군관민과 일본 정부의 합작으로 저질러진 만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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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목격자가 있고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해범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석방되고
그 이후 출세가도를 달립니다.낭인의 핵심 인물이었던 시바 시로우는 정치 소설가로 더큰
명성을 얻고 국회의원에 수차례 당선됩니다.낭인 동원책이었던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조는
일본 내각의 내상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내무부 장관 자리까지 오릅니다
. 그
외에도 명성황후 시해범 대부분은 정치요직에 발탁되거나 사회적인 부와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사람은 주한 일본 공사관 미우라입니다.
일본 군대와 공사관 및 영사관 직원은 물론 일본 순사와 일본 낭인 들을 총동원하고 작전을 지시한
총지위자인데요, 역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정치계의 거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주목하시죠. 미우라 바로 전의 주한일본 공사관이었던 이노우에입니다.
당시 일본의 내상과 외상을 역임한 정치 실세로 이토우 히로 부미와 함께 일본의 정계를 움직이던
사람입니다.그는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기 위해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 문제에 관한 전결권을 위임
받고 조선에 왔는데요, 조선에 있으면서 그는 갖은 내정 간섭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던 이노우에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 한달전 돌연 사임을 합니다.
대신 외교경험이 전혀 없는 무장 출신의 미우라를 천거해 그에게 명성황후 시해 총 지휘 임무를
맡깁니다.그를 앞세우고 이노우에는 배후 조정을 한 것이죠.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이렇게
일본 정부의 결정권자였던 이노우에가 조작한 사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정부가 조작한
사건이었다고해도 틀린 말이 아닌데요,그렇다면 일본 정부는 왜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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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명성황후를 노렸나(대외 정책의 실권자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서 일본행동대와 맞닥뜨린 사바틴은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들은 내말은 듣지도 않고 왕비가 어디 있는지 왕비가 누구인지만 물었다' 시해범들은
왕비를 찾기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시해범들은 왜 그토록 왕비를 노렸던 걸까.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 교수,그는 명성황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규장각 관장으로 있을 당시 명성황후 국장과 관련된 의궤를 찾아내 해제를 붙여 재간행하는
작업을 했다. 성대하게 치러진 명성 황후의 국상은 의궤에 상세하게 기록돼있다.
고종이 직접 지은 명성황후행록.
이 행록엔 고종이 황후를 정치적 조언자로 평가하고 있음을 적고 있다.
-한영우 교수 인터뷰 "고종이 대원군으로부터 권력 이양...황후 독서량 많고 ...
고종이 황후의 지혜...고종을 찬조했다"
여기엔 명성황후의 외교의지를 알수 있는 대목이 있다.
수원 즉 먼나라와 편하게 지내라는 것이다.
-한영우 교수 인터뷰 "일본과 서양 세력이 들어오는 상황속에서 어떻게 판단했느냐
하면은 가까운 일본 보다는 먼나라인 서양이 덜 위험하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서양과 가까이 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래서 서양 중에도 러시아 미국.서방 세계와 친교를 갖고 서방 세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청일전쟁도회 -이것은 청일 전쟁 당시 일본의 승리를 그린 만화다. 일본이 그린 작품으로
청나라를 무찌르는 일본군의 모습이 잘 나타나있다.열강이 조선의 이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
던 때,청과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려다 싸운 전투가 바로 청일 전쟁이다.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이것으로 조선진출의 본격적인 발판을 마련하였다.뿐만 아니라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맺고 중국 요동반도 차지하게된다.그런데 일본이 요동반도로 진출하
자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이에 제동을 건다.
러시아는 왜 3국간섭을 일으켰을까?
당시 러시아는 1891년부터 장장 오천오백 마일의 대륙 횡단시베리아 철도를 착공 중이었다.
러시아는 이 시베리아 철도를 완공하여 대대적으로 남하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요동 반도를 차지함으로써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차질을 빚는다.러시아는 그래서 일본의 요동
반도 진출에 제동을 건다.
-이민원 교수 인터뷰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하고 있던 러시아가 역시 자국의
방어적 입장에서 프랑스와 독일 끌어 들여 일본을 요동반도에서 군대 철수시키고 조선의 자
주 독립을 존중하라는 의미로 간섭을 하게 된다 이른바 삼국 간섭을 한다"
명성황후는 이런 국제적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명성황후는 당시 강국으로 등장한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 철저히 견제해나갔다
. 조선의 외교관계에서 철저히 배제당한 일본에게 명성황후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
-최문형 교수 인터뷰 "정치의 주도 세력일 뿐 아니라 외교 일체 좌우 민왕후.특히 일본
거부하고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거부하겠다는 생각 민왕후...일본은 민왕후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자기 세력 부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러시아를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던 명성황후.그것이 바로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
한 이유다. 일본 세력에 의해 황후는 폐위된다.명성황후 시해와 폐위 사실이 알려지자 반일
감정은 극에 달하고 황후 복위를 요청하는 상소와 복수를 외치는 의병 운동이 전국에서
확산된다
-강창일 교수 인터뷰 "한국내에서는 반일 의병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게 되고 국제적
여론도 일본의 악랄한 만행이 공개됨으로 인해가지고 부득불 일본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 아니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되죠.그런 의미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전술적으로 실
패 한 작전이었다"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한다.친일 내각의 핵심인물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고종은 친일세력을 제거해 나간다. 고종은 명성황후 장례를 국가 과제로
삼았다.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고종이 명성황후의 장례를 수차례 연기한다는 것이
다.
2년 2개월을 끌고서야 고종은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치른다.
#한영우 교수 인터뷰 "장레식이 늦어진 이유는 일본의 을미 사변에 대한국민 각계 각
층의 반성과 자각과 국수에 대한 열기 합쳐지면서 자주적인 근대 국가로서 대한제국을 세우
는 과정이었다 그런 과정을 완수하기 위해서 장례식을 미뤘다 볼수 있다"
고종은 2년 2개월동안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끌면서 대한제국의 바탕이 되는 조칙들을 만들어
간 것이다.전국민의 요구와 합의에 의해 1897년 10월12일 마침내 대한 제국이 탄생한다.
그리고 한달뒤인 1897년 11월22일.일본의 강압에 의해 폐위됐던 왕후를 명성황후로 추존하고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른다.명성황후의 죽음은 나라와 국민의 하나됨을 이끌었다.황후의 죽음
이 최초의 근대국가인 대한 제국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2년2개월 동안 미뤄왔던 장례식을 치르기 며칠전 고종은 명성황후의 빈전에서 시호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는데요,고종은 여기서 명성황후를 잃은 슬픔을 토로했습니다.
'궁전의 사변은 너무나 불측스러운 것이어서 만고에 있어 본 적이없었다
.
원수를 갚지 못하고 거상 기간이 지났다.그래서 나의 슬픔은 끝이 없다'
비극의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지 백여년이 지났어도 사건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습니다.왜냐하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는 용의자만 있을 뿐 지금까지 범죄자에
대한 그 어떤 처벌도 그 어떤 규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
이제라도 우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상을 다시 가리고 규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역사의 진실을 숨기고 역사의 왜곡만 일삼는 일본에게 그 진실이 무엇이고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직시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명성황후 시해도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는 문구가 적혀있어,
당시 시해범들이 작전명을 '여우 사냥'이라고 붙였다는 이야기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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