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 김중동 * 성별 : 남 * 생년월일 : 1974년 11월 30일 * 체험국가 : 캐나다 * 비자 발급일 : 2000년 * 출국일 - 입국일 : 2000년 6월 20일 ~6월 29일 * 주 체류지역 : 벤쿠버 3달, 벤프 4달, 토론토 2달, 여행 3달. * 출국시 초기자금 : CN$ 5,000 * 아르바이트 종류 : 베이커리 보조, 디시워셔, 공장노동 * 이 메일 : dongs@intizen.com * 홈페이지 : http://www.kebi.com/~meast01
귀국 후 2주가 되어갈 무렵, '워킹홀리데이 지원센터'로부터 체험기를 써보라는 제안을 받은 덕분에 나는 지난 일년간의 여행을 하나하나 정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알게 된 후부터 나는 반복되는 일상을 넘어서 내가 여태껏 살아 왔던 환경을 벗어나 해외에서 일도 하고 경험도 쌓으며, 무엇보다 그 나라 사람을 사귀고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워킹홀리데이의 기회를 언젠가는 꼭 잡으리라'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선택한 캐나다‥‥ 언젠가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지리산의 자연사 박물관에 갔을 때, 거기에 비치해 둔 캐나다의 한 국립공원에 대한 안내책자를 보고 우리의 자연과는 느낌이 다른 그 곳에 꼭 가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리고 캐나다 워킹홀리데이에 도전을 하였고 운 좋게도 100명중의 한 명에 선발되었다는 사실을 통보 받게 되었다.
벤쿠버의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 따갑게 비치는 햇살과 우리의 하늘보다 훨씬 낮게 느껴지는 캐나다의 하늘을 보았을 때 '드디어 내가 처음으로 외국에 나왔구나!'' 여기는 캐나다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도착한 첫 날 잘 곳도 정하지 못하고 시내로 어떻게 나가는지도 몰라 공항에서 두 시간 동안 무거운 짐을 끙끙거리며 돌아다니다 결국 벤쿠버에서 가장 불결하고 위험하다는 이스트 헤이스팅 스트릿의 한 중간에 있는 한 호스텔의 도미토리에 짐을 풀 수 있었다.
벤쿠버를 떠나다
벤쿠버에선 적응이 최대의 당면과제였다. 언어문제, 사고 방식의차이가 그것이었는데 한국에선 벤쿠버에서 학원을 다니면 조금이나마 극복될 줄 예상했으나. 학원수업을 한 달도 받기 전에 학원수업의 한계를 느끼고 그만두었다. 어느새 나는 캐네디언 식의 적응이 아니라 한국 주인 밑에서 일하며 한국사람들에게서 도움을 얻고 영어로된 정보지보다는 유학원이나 한국 신문들을 보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캐나다에서 한국식으로 적응을 하게 된 것이었다.
Tutor와 수업을 하면서 해외 각지에서 온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나와 같은 이방인 일뿐이었다. 당시의 나는 캐네디언 친구를 필요로 했기에 벤쿠버의 생활은 점점 매력을 잃어갔다. 벤쿠버의 생활이 두 달째 접어들면서 답답한 마음에 빅토리아 여행을 가면서 벤쿠버를 떠나 내가 한국에서부터 가고 싶었던 밴프로 떠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워킹홀리데이의 생활은 항상 직업과 맞물려 돌아간다. 돈이 많아 일자리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캐나다 어디든 못 가랴' 하지만 일을 통해 생활비를 벌어 이국 땅에서 자립해 우뚝 서야하는 워킹홀리데이기에 일자리 없이 다른 곳으로 옮기기는 힘들었다. 또한 안주한 곳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캐나다까지 와서 한 곳에 정착한다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은가?' 이역만리까지 왔으니 한번 멋지게 도전해서 하고 싶은 것 다 이루어 보자!' 라는 오기도 들었다. 여러 군데 Job search 사이트에서 정보검색과 함께 apply를 하던 중 밴프의 한 호텔에서 전화가 왔다. 당장 고용하고 싶으니 언제까지 올 수 있겠느냐는 말에 3일간의 말미를 얻고 급하게 벤쿠버 생활을 정리했다.
캐나다 심장부
열 시간이 넘는 버스 안에서 나는 긴장하였고 기쁘기도 하였다. 이제 드디어 캐나다의 심장부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라는 설렘이 들었고, 무엇보다 내가 캐나다에 오게 된 동기인 캐네디언 록키산맥 안의 국립공원 1호 밴프 국립공원 안에서 살게 된다는 기대도 컸기 때문이다. 먼동이 터 오고 버스는 어느새 그림 같은 바위산들이 펼쳐진 길을 달리고 있었다. 어느새 버스는 밴프의 그레이하운드 터미널에 도착하였다. 9월 중순이었는데 눈이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벤쿠버와는 달리 동양인이라곤 나 하나밖에 없는 듯 했다. 다음날 아침부터 일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하게된 일은 디시워셔였다. 지원은 하우스키핑분야와 같이 했지만 디시워셔로서 일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는 캐나다에 접시 닦으러 갔냐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차피 내게 일은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거기서 같이 근무하는 사람을 통해 배울 생활방식과 또 그들과 친구가 됨으로써 진정한 워킹홀리데이 메이커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밴프 생활의 장점은 워킹홀리데이메이커로서 일자리가 풍부하다는 점에 있다. 7000의 인구 중에 3000명 가까이가 Staff accommodation에 거주하는 직원들이라고 한다. 인구의 유동도 그만큼 활발하고 그런 이유로 누구나가 다 여기서는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모두들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고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말이다. 여타의 대도시에서 이방인으로 시작하여 그 사회에 동화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자리만구한다면, 회사의 전폭적인 지지 안에서 천혜의 자연 환경속에 여러가지 스포츠를 마음껏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필자는 생활하면서 하루라도 NHL이야기와 스노우보드 이야기를 안하고 넘긴 날이 없었다. 밴프에는 젊음이 있고. 모두들 마음이 열려있으며 즐겁다. 밴프는 캐나다 최고의 ,관광지인 만큼 여기를 찾는 사람들은 그들의 휴가를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한다. 산업자체가 서비스업인 만큼 직원들 역시 친절정신이 몸에 베어 잇다. 밴프에서는 좀체 기분 나쁜 사람을 보기 힘들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밴프에는 밴프센터가 있다. 인구 만 명도 안 되는 도시에서 세계정상급의공연이 펼쳐지고 세계정상급 컨벤션이 열리기도 한다.
다시 밴프를 떠나다
밴프 생활이 4개월째로 접어들 무렵 스키장 눈의 상태가 좋지 못해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삼분의 일쯤은 한국인의 틀을 벗고 캐네디언과 동화될 무렵이었다. 위니펙에 계신 한 한국분과 이 메일을 교환하던 중 한인회 홈페이지를 만들고 관리하는 일에 사람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외국에 와서 한국인으로서 한번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고 이제는 또 다른 체험을 할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에 밴프를 떠날 결심을 하였다. 밴프를 떠나기 전날 친구들이 이제껏 같이 마셨던 맥주 캔과 병을 팔아 파티를 열어주었다.
위니펙에 사는 친구는 부모님에게 연락해놨으니 처음 그곳에 가서 사흘정도 묵으라고 했고,리자이나에 사는 친구는 자동차 정비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거기서 차를 손보라고 말해 나를 기쁘게 했다. 또한 오랜 시간이 지나 밴프에서 일을 위해서가 아닌 휴가를 즐기기 위해 같이 방문하자고 모두 다같이 다짐했다. 아무튼 이런 저런 이야기들 속에 밤은 깊어져 갔고, 그들과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멀고도 가까운 친구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친구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밴프를 나왔다. 밴프 어느 곳에서나 친구들과의 추억이 서려있지 않은 곳들이 없었다. 차를 잠깐 정비하는 했지만 천불도 안 되는 고물 차로 겨울 고속도로를 수천 킬로 달린다는 것이 위험한 일이란 걸 알았지만, 짐들이 너무 많아 하는 수 없이 차를 몰고 갔다. 캘거리를 한시간 정도 지난 곳에서 차는 고장이 나고, 우여곡절 끝에 위니펙에 도착했지만. 여러 상황들로 인해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위니펙을 뒤로하고 토론토로 다시 떠나게 되었다.
밴프에서 토론토로 가는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지만, 너무나 고마웠던 사람들을 내 체험기에 쓰지 않을 수 없다. 도중에 차가 고장나 오도가도 못하고 있을 때 나를 3일간이나 공짜로 주유소에서 지내도록 해준 엄선주 사장님(한인 실업인협회 부회장), 사실 캐나다 시골 동네 허허벌판 위의 주유소에 한국인이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내 차를 수리도 끝나기 전에 사주고 대형트럭을 히치하도록 도와주고, 결정적으로 엄선주 사장님을 소개시켜준 고마웠던 여직원, 나를 거기서 리자이나까지 트럭을 몰고 싼 모텔을 찾아 같이 헤매준 고마운 트럭 운전기사 아저씨, 위니펙에서 영하 삼십도의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나를 태워준 고마운 캐네디언. 정말 너무나 감사한 분들이다.
세계를 향하여
버스를 타고 토론토에 도착하였다. 짐이 너무 많아 일단 락커에 일부의 짐을 두고 일부를 챙겨 유스호스텔로 갔다. 밴프에서는 창밖이 끝없이 눈 덮인 하얀 평원이었는데, 잠에서 깨어 본 토론토는 비가 내린다. 우선 유스호스텔을 잡고 공짜 정보지를 뒤져 집을 찾았다. 토론토 도착한지 하루 만에 다운타운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집을 구하고 토론토에 정착했다.
곧 귀국을 해야 했기 때문에 정식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이력서와 기타 정보들을 사설 임시취업소개소(Temporary job search center)에 맡기고 일이 있다고 연락이 오면 일을 하러 갔다. 공장에서 컴퓨터 모뎀을 포장하는 일이었는데 밤새 하는 일이어서 힘들긴 하지만, 하루를 일하면 백 불에 가까운 돈을 받았다. 매일 도서관에서 여행할 나라들의 자료들을 찾고 계획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었다.
저녁에는 아시아에 관심이 많은 토론토 사람들과 언어교환도 하고 친구도 되었다. 2학기 복학 문제로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했기에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환전을 했으며 컴퓨터와 아끼던 스노우보드를 팔았다. 예금을 인출해서 여행자 수표도 사고 가방도 샀다. 다음에 또 오리라 다짐하며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로서의 시간들을 뒤로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가끔 나에게 그곳에 가서 무엇을 얻어 왔느냐는 질문을 하곤 한다. 한국과는 다른 문화를 체험하는 동안 나는 그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끈끈하고 인간적인 정이 있고,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들 역시 표현하는 방법 말고는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피부색이 다르고 살아온 방식이 다르다는 것과 친구가 되는 것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그곳도 이곳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진리를 몸으로 느끼고 돌아왔다. 그것이 다른 문화와 국적의 사람들을 이해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세계인의 기본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만큼 주어진 시간동안 자기가 결정해서 행동하고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하는 좋은 기회를 가진 사람은 없다. 힘들면 힘든 만큼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정직하게 돌아오는 것은 그만큼의 성취감과 자신감일 것이다.
토론토에서 7시간가량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문득 대서양을 가로질러 도착한 암스테르담에서 나의 또 다른 여행은 시작되었다. 유럽 대륙과 중동, 아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중국의 천진에서 한국의 인천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석 달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누가 그랬던가? 캐나다에서 입국하기 전 한국에서 세웠던 불가능해 보이던 계획들까지도 모두 이루어 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