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산성
장미산성(사적 제 400호)은 충주시 북서쪽에 자리한 장미산의 능선과 계곡부를 감싸는 포곡식 산성으로 돌로 쌓아올렸다.
보련과 장미라는 남매가 성 쌓기 내기를 했는데, 남동생인 장미가 이기게 되어 그 이름을 따 장미산성이라 불리게 되었고
산의 정상부에 오르면 남쪽과 동쪽으로는 한강과 합류하는 달천이 한눈에 보이며 서쪽과 동북쪽으로는 충주시가 보이고
주변에는 충주고구려비와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을 비롯한 충주 누암리 고분군 등이 있어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간의 치열한 싸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장미산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모습을 보이는데, 그 모양에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다. 전체 2,040m에 이르는 웅장한 성벽을 통해, 장미산성이 옛 중원지역에서 가졌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데 여러 차례의 조사결과 성벽과 치성, 배수로, 공격용 돌을 보관한 석곽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4세기 이후의 한성백제토기이다.
◎중앙탑
중앙탑은 1962년 국보 6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암 석재의 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높다.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불린다. 충주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였던 곳으로 삼국은 모두 이 지역을 전진기지로 중시해왔다.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로서 주변 경작지에서는 가끔
기왓장이 출토되고, 또한 석탑 앞에는 석등하대석(石燈下臺石)으로 보이는 8각 연화대석(蓮華臺石)이 남아 있어 이 일대가
신라시대의 절터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이곳 유적지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으므로 사찰명(寺刹名)은 알 수 없다.
중앙탑 주변에는 조각공원이 만들어져 있으며, 넓은 잔디밭이 깔려있는데, “문화재와 호반예술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국내 조각가들의 작품 26점을 전시한 충북 최초의 야외 조각 공원이다.
※6월 두번째 날 불금인 오늘 특별히 할일도 없기에 집사람 출근 배달 하고 중앙탑공원옆에 있는 장미산성을 둘러보고 싶어
네비에 '장미산성'을 찍으니 딱 17km..ㅎㅎ씽~하고 단숨에 달려 장미산성입구인 장천리에 갔는데 장천리부터 장미산성까지
2km인데 구불 구불 좁고 가파른 농로이기에 얼마나 조심 스럽던지...ㅎㅎ 장미산성내에 봉학사라고 하는 아주 작은 절이 하나
있는데 스님이오는 사람들을 무척 반갑게 맞아 주시고 아주 부처님 같으신 분이지요.ㅎ 봉학사에서 시작해 봉학사로 내려오는
장미산성을 한바뀌 돌고 봉학사 스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나누다 법당에 부처님께 문안드리고 나오니 스님이 불경책을 두권
주시기에 곱게 배낭에 넣고 중앙탑공원에 들려 조정경기장 중계도로 한바뀌 걷고 왔어요.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 였네요.ㅎ
봉학사 앞에는 유물을 발굴 하는지 많은 분들이 열심히 움직이더군요.
천막덮어 놓은곳은 장마에 성곽이 무너졌더군요.
장미산 정상에 뭐 특별한건 없어요.ㅎ
여긴 장미산 높이를 제대로 적었는데...
여긴 누가 했는지 한100m쯤 잘라 냈더군요.ㅋ
아무도 없는 장미산성 조금 쓸쓸 하더군요.
부처님께 세종대왕 한분 드리고 절 조금 올리고 왔어요.
스님이랑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다 나오는데 스님이 불경책을 두권 주시며 읽어 보라고 하시더군요.ㅎ
충주 중앙탑 정문?ㅎ
중앙탑 공원 잔듸 밭에는 25개의 조형물이 전시 되어 있어요.
입술에 앉을려고 했는데 얼마나 뜨겁던지...ㅎㅎ
조정경기장 중계길인데 야간에는 조명이 참 아름다워요.
물위에 떠있는 약 1.5km쯤 되는조정경기 중계 도로.
길옆에 뽕나무가 제법 많은데 요즘 오디가 한창 익었더군요.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어릴때 생각하며 한참 따 먹었어요.ㅎ
국보 6호 중앙탑
중앙탑공원에서 영화나 연속극 촬영이 종종 있어요.
저녁먹고는 마누라 손 잡고 충주 풍물 시장 한바꾸 돌고 왔어요.ㅎ
풍물 시장 입구에 대봉교
오늘 걸은게 22.000보가 넘었네요.ㅎ
첫댓글 장미산성과 중앙탑을 돌아 보셨네요.
또한 역사를 소상히 알려주심으로 좋은자료가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충주는 한반도의 중원지역으로 군사,경제,문화의 요충지로
크게 주목을 받은 지역 이었지요,
삼국시대때 백제,고구려 신라는 중원의 요충지인 충주를 찾이 하려고
군사적충돌이 많았던 지역 이기도 한데요
가장먼저 충주를 찾이한 나라는 백제로 충주를 점령한후, 근초고왕은 충주를 지키기 위해
장미산성을 쌓았는데 장미산성을 쌓을적의 보련과 장미 남매가 성 쌓기 내기를 했다는 여담이있고
여동생인 장미가 이기게 되어 그 이름을 따 서"장미산성"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 이지요,
그러나 백제 고국원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을 받아 사살당함으로 충주는 고구려 영토가 되었고
이를 기념하기위해 고구려비를 설치 했다 합니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통일을 시킴으로 충주는 신라영토가 됐고
당시의 중원경은 경주다음으로 제2도시로 등극했는데 이때가 충주역사상 가장 정성기 였지요.
중앙탑의 역사도 당시 한반도의 중심지역을 정하기위해 가장걸음이 빠른 두사람을
한사람은 북에서 출발, 한사람은 남에서 출발하여 마주친곳이 충주였고 이를 기념하기위해 중앙탑을 세웠다 합니다.
푸짐한 답글 감사합니다.
장미산성 봉학사 스님이랑 많은 이야길 나눴는데 장미산성이
충주8경인데 충주 사람들이 오질 않는다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