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The attribute of God, who created heavens and earth, is LOVE. Thereby, it can be said that the purpose why God created the universe is to spread out the world of love. Such world of love cannot be established if there are only stars in the universe. Such world of love can be done only if there exist human-charactered beings. Jesus told us to pray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This guides us the fact that there is a society in a universe under heaven, where human-charactered creation live. This also tells us that there are other beings living under God’s will. Comparing heaven and earth, societies where God’s will has done or societies not done, Jesus told us to pray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God would be a simple being who maintains and watches the universe if God had created only material objects world like stars in the universe. Is this God’s will that God created such countless number of stars in the universe and own their world and watch them? Otherwise, accomplishing God’s will by creating numberless human-charactered beings sharing love in their world, is this God’s will that the whole universe is to be a massive plaza where they share love? The later should be closer to the truth.
Ⅰ. 들어가면서
밤하늘에 보이는 수많은 별들, 우리의 태양계가 속하여 있는 은하수에만 하더라도 약 1,000억개의 태양과 같은 별들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은하수 옆에는 안드로메다 대성운이 있는데 그곳에는 약 2,000억개의 별들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천문학자들은 이 우주에는 은하수와 안드로메다 같은 성운들이 약 1,000억개나 된다고 들려주고 있다. 특히나 우주에는 별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외계 행성들도 있다는 것이 속속 발견되어지고 있다.
“외계 행성들은 망원경의 장비들이 충분히 향상된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발견되었다. 그 뒤 발견은 줄을 이었고, 이제 4백 개가 넘는 외계행성이 알려져 있다.”[조 앤 베이커, 김혜원 역 「시크릿 유니버스」(서울 : 을유문화사, 2012), p.292.]
이런 대우주 속에서 우리는 ‘저 하늘 어느 별 아래에 혹시 우리 지구인들처럼 사랑하며 지내는 인격적인 존재들이 있을까?’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이로 인하여 이 땅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 외계인은 있다고 보는 사람들, 외계인은 없다고 보는 사람들, 외계인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고 보는 사람들로 갈라져 있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그 사람이 어떤 색안경을 끼고 외계인에 대하여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외계인에 대한 견해는 하늘과 땅 차이로 갈라진다. 천지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말하면서도 외계인이 있다면 진화론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외계인이 있다면 그들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해당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외계인이 있다면 구원론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강력히 옹호하다가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화형을 당했던 지오르다노 부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는 외계에도 우리와 같은 지적 생명이 살고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조덕영, 「과학과 신학의 새로운 논쟁」(서울 : 예영커뮤니케이션, 2006), p. 138.] 오늘날 우주 생물학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높아가고 있다.[Ibid., p.145.]
이 논문에서는 외계 생명체 중에서도 외계인의 존재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외계 생명체는 외계에 있을 미생물 같은 생명체까지도 포함하지만 외계인은 사람처럼 인격적인 존재가 외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필자는 외계인들 중에서도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외계인에 중점을 두었다.
외계인의 문제는 실질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추정하여 보는 것에 불과하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어느 부분을 만졌느냐에 따라서 각자 자신이 느낀 점을 표현하듯이 이 논문에서는 필자가 한 장님의 위치에서 “외계인은 우주에 있다”고 여기게 되는데 왜 그렇게 여기게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신학적인 측면에서 피력한다.
Ⅱ. 우주에 외계인이 없다고 보는 견해는 하나님의 속성에 위배된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무수한 별들의 세계를 바라보며 우리의 하나님께서 너무도 질서정연하게 우주를 잘 만드셨다고 감탄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넓은 우주에 수많은 외계인들을 만들어놓으셨을 것이라고 하면 거부 반응을 표한다. 우주 안에 하나님은 지구인만 만들어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에 외계인이 없다고 보는 견해는 하나님의 속성에 위배된다는 점을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하나님은 하나님 아버지(성부)와 하나님의 아들(성자)과 하나님의 영(성령)이라는 세 위격이 하나가 되어 서로 교제가 되는 관계로 존재하고 계신다. 그래서 그 자신 속에는 셋이 하나가 되기 때문에 사랑이 무한히 분출되고 있는 분이라고 할 수가 있다.
1. 창조자의 상태에 따라 피조물의 존재의 의미가 달라진다.
하나님이 어떤 상태의 분이신가에 따라서 그 분이 창조한 세계는 엄청난 차이가 발생한다.
(1) 일위일체의 하나님
만일 하나님이 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고독한 하나님으로 있게 된다. 고독한 분은 자기 스스로는 만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지만 스스로 부족증세가 발생되는 하나님이다. 그런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다면 그 만물은 조물주의 필요충족을 채우는 존재들에 해당하게 된다.
마치 우리 인간이 만들어놓는 모든 과학물품들과도 같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수많은 건물 등은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아니다. 인간의 필요충족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필요충족의 대상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고 새로운 것을 또 만들어서 사용하면 된다. 우리의 하나님이 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라면 그가 만들어놓은 피조물의 존재적 가치는 하나님의 필요충족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삼위일체의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면 다르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지만 한 분 안에 상이한 세 위격이 존재하신다.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은 구별되지만 분할되지 아니한다. 하나가 셋을 이루고 셋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토마스 왓슨 / 이훈영 역, 「신학의 체계」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p.198.]
셋이 하나를 이룬 상태는 고독이 아니다. 사랑이다. 사랑이 아니고는 셋이 하나가 되어 존재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내적상태는 사랑이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태는 스스로 만족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분이 만들어놓게 되는 세계는 그의 필요충족을 이루어놓기 위한 세계보다도 더불어 사랑의 세계를 이루어놓기 위한 세계가 된다. 필요충족의 세계는 편리하게 사용하는 것에 목적이 되지만 사랑의 세계는 서로 그 생명을 존중하는 터전에서 영원히 화목하며 지내게 되는 것이 목적이다.[일위일체의 하나님과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차이점은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통하여 알게 됨.]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신 목적은 사랑의 세계를 펼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세계는 무생물의 세계, 즉 별들의 세계만으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런 세계는 생물들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생물들의 세계에서도 인격적인 존재들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과도 사랑의 세계를 펼치게 되는 세계가 된다. 즉 우주에 인격적인 존재들이 없다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수준의 사랑의 세계는 존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우주는 사랑으로 만들어졌으며 사랑을 위하여 존재되고 있는 곳이라고 보아야 하나님의 속성에 합당하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주에 충만하게 퍼지고 그 사랑으로 흠뻑 젖은 피조물들이 서로 이웃을 사랑하면서 지내도록 만들어진 곳이 바로 우주일 것이다. 비록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지 않은 존재들이지만 저 하늘 어느 별 아래에 있는 행성들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생활하는 존재들이 있을 것입니다.
별들이란 물질이다. 물질이란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필요충족의 대상이다. 물질은 물질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질은 누군가에 의해서 그것이 사용될 때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있게 된다. 사람들이 없는데 수많은 건물들이 건설되어 있다면 그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주라는 물질세계가 있는 것은 우주의 세계를 누리고 있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에는 우주를 누릴 존재들도 창조하셔야 그 우주의 존재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3) 두 가지의 측면
만일 하나님께서 우주에 별들의 세계라는 물질적인 세계만 만들어놓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우리의 하나님은 그 물질들을 관리하시고 구경하시는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수많은 별들을 만들어서 그 물질들을 소유하며 관리하고 구경하는 것이 그의 소원이셨을까?
아니면 그 세계 속에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수많은 인격적인 피조물들을 만들어서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광장이 되게 하는 것이 그의 소원이셨을까?
후자가 하나님의 속성에 합당하다고 여긴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은 우주에 물적 존재들에 해당하는 별들만 잔뜩 만들어놓으시고 그 속에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외계인들(인격적인 존재들)은 만들어놓지 않았다고 본다면 기독교인은 자신의 하나님을 물적으로 만족을 추구하는 자로 규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지구인들을 너무 사랑하사 우주의 모든 세계를 만드셨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우주의 존재 목적이 지구인을 위하여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주의 세계를 너무 많이, 너무 크게 만들어놓으신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영화 “콘택트” 에서는 “이 넓은 우주에 우리만 산다는 것은 엄청난 공간낭비이다”라고 들려주고 있다.’[양승훈, 「생명의 기원과 외계생명체」 (서울 : SFC출판부, 2011), p.192.] “현재로서는 우주의 크기가 약 137억 광년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137억 광년이라는 것은 인류가 우주에서 모을 수 있는 정보의 범위를 뜻하는 것이다. 이른바 우주 지평선의 크기인 것이다.”[다케우치 가오루, 김재호 이문숙 역, 「한 권으로 충분한 우주론」 (서울 : 도서출판 전나무숲, 2010) p.26. 우주의 크기를 150억 광년, 200억 광년, 920억 광년까지 보는 보기도 한다. 필자는 단지 우주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뜻으로 137억 광년의 세계도 감당이 되지 않기에 그 숫자를 우주의 크기로 이곳에 기록하였다. 우주의 실제 크기는 우리가 모른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 넓은 우주에는 우리의 영역이 못 미치는, 우리에게는 쓸데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 어마어마한 우주의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데 지구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처럼 실제로 먹지 못하고 누릴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구인을 위하여, 그림의 떡을 보이기 위하여, 우주의 세계를 실제로 만드셨다는 것인가?
밤에 빛으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별들을 만드셨다면 약 6천개만 만들어놓으면 될 것이다.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은 그 정도 이라고 한다. 우주의 모든 세계는 지구인을 위하여 만들어놓았다고 소개하는 것은 마치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집들이 나를 위하여 있는 것은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 등등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집들은 나를 위하여 만들어져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의 증상과 같다고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곧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과학제품들 중에 그것이 필요 없다고 여기는 데도 만들어놓은 것은 없다. 별들의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 세계를 만드셨을 때에도 그는 그것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별들이 왜 필요하셨을까?
그것은 별들 자체보다도 하나님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들이 생활하게 되는 광장의 세계로 필요하셨을 것이다.
집들이 지어진 목적은 그 속에서 서로 정과 정을 나눌 수가 있는 가족들의 보금자리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인간의 보금자리뿐만 아니라 새들의 보금자리, 짐승의 보금자리, 개미의 보금자리, 꿀벌의 보금자리 등과 같이 모든 보금자리는 사랑을 나누며 서로 동고동락하기 위하여 있는 곳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우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면 우주는 사랑의 보금자리로 되어있을 것이고 사랑의 보금자리는 곧 수많은 지정의(知情意)를 지닌 존재들의 세계로 볼 수 있다. 별들만 있어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지 않는다. 우주에 외계인이 없고 별들만 잔뜩 있다고 보는 견해는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에 위배된다고 본다.
Ⅲ.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의 모양의 세계의 차이점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나누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무소부재 하듯이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하나님 자신은 만물이란 공간에 속하여 계신 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이시다.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가 만물보다 크시다고 말씀하셨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29-30).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도 만물보다 크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의 형성은 만물보다 크신 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만물보다 크신 분이란 만물을 초월하여 계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저 우주 어느 별들 아래에 창조되어진 외계인들이든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들이 있는 사회들은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지 않았다면 우주 속에서 한 구성원으로 있는 지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해당하는 한 행성으로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 물질보다 정신이 중요한가? 물질계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정신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신계에 있기 때문에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할 수가 없다. 물질계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양의 세계" 즉 “하나님의 나라의 자연계”를 나타내고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의 모양의 세계는 차원이 다른 세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자신이 함께 하고 피조물과도 인격적인 교류가 되는 세계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모양의 세계는 하나님의 작품의 세계가 이루어진 세계이며 인격적인 교류가 되기 어렵다. 이 차이를 설명하면 마치 우리가 정신력이 있는 갓 태어난 우리 아이와는 인격적인 교류가 되지만 정신력이 없는 자동차와는 인격적인 교류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세계와 관계가 있고 정신을 지닌 인격적인 관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없으나 물질계로 되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모양의 세계는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혹은 “이런 모양으로 되어 있다”, “저런 모양으로 되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알맹이의 세계이라면 하나님의 나라의 모양의 세계는 껍데기의 세계에 해당한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천국(장소적인 천국, 모양으로 있는 천국)이 우주 안에 있지 않고 우주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주의 모든 별들의 세계 속에는 천국이 없고 그 너머에 천국은 존재한다고 여긴다. 이런 사상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하고 있는 말인가? 이것은 마치 지구상에 아름다운 건물들을 많이 만들어놓았는데 사람들은 그곳에서 살고 있지 않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주에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들을 만들어놓으셨다. 우주에 별들의 세계가 많이 있다는 것은 인격적인 피조물들의 삶의 터전을 그렇게 많이 하나님은 만들어놓으셨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렇게 만들어놓은 삶의 터전을 무시하고 다른 곳에 천국이란 삶의 터전을 하나님은 있게 하셨다는 것은 모순이다. 우주 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별들의 세계를 터전으로 하여서는 하나님은 천국에 해당하는 아름다운 곳들을 만들어놓으실 수가 없단 말인가? 장소적인 천국 곧 모양으로 있는 천국은 파괴된 지역도 고쳐서 천국의 모습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지구는 우주의 세계 속에서 한 구성원으로 있다. 아담과 하와가 만일 타락하지 않았다면 지구도 우주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한 행성으로서 천국에 해당하는 모습으로 있었을 것이다. 지구인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백성이 되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생활하고 있는 사회를 이룩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구가 우주 안에 있고 우주 안에 있는 한 행성이 천국적인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내용은 우주 안에 장소적인 천국들은 얼마든지 하나님은 만들어 놓으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을 초월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모양의 세계는 공간에 속하여 있는 세계이다. 공간에 속하여 있는 세계는 우주에서 어느 공간이든지 얼마든지 몇 군데라도 상관없이 원하는 만큼 세워놓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어느 땅에든지 합당한 조건만 갖추면 자신이 원하는 아름다운 집들을 만들어놓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어느 별 아래에서 생활하는 인격적인 존재들이든지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지내는 사회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천국의 세계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실 때에 그 목적을 어디에 두셨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주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우주에 별들만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존재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가 설립되기 위한 첫째의 조건은 정신력을 지닌 인격적인 존재들이 있어야 한다. 그들이 있어야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립이 되는 것이다. 우주에 별들만 있으면 우주에 하나님의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Ⅳ.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생활하는 사회
예수님은 지구 이외의 세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생활하고 있는 사회가 있다는 것을 들려주셨다. 그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여기서 뜻이란 하나님의 뜻을 의미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란 의미이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는 누구를 의미하는가?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는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이루고 계신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란 곧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하늘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피조물의 세계가 있다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들려주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그 피조물들은 지구인들은 아니다. 즉 지구이외의 지대에서 생활하는 존재들이라고 보아야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격적인 존재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존재는 인격적인 존재이어야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존재들은 지정의(知情意)를 지닌 존재들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지내는 피조물들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늘이 엄청나게 넓음같이 그들의 모든 숫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란 "넓고 넓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수많은 피조물들의 세계가 있는 것 같이 조그마한 지구의 세계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회가 될지어다."라는 의미가 있다.
지구이외에 외계인이 없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는 자들은 지구에서 죽어서 하나님의 품에 들어간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이 가능할까?
예수님이 그런 기도를 하셨을 때에는 예수님의 구원의 소식이 지구에서조차도 아직 전파되지 않았을 시기이었다. 아직 사람들의 관심 속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정립 되어있지 않았을 시기이다. 예수님의 탄생 이전에 출생하였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보다도 하나님의 존재조차도 제대로 알 수가 없는 상태로 있다가 죽어간 사람들이 더욱 많았다. 그런 존재들이 모여서 거대한 하늘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완벽한 의인들로 존재하고 있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는 존재들이 되었을까?
지구에서 죽어서 간 존재들이 하늘이라는 어마어마한 세계를 점령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룬 존재들이 되었다는 것은 물 한 바가지로 태평양 바다를 만들어놓았다는 말보다 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라고 표현한 것은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은 피조물들이 의인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회생활을 하면서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들은 지구인이 아닌 다른 존재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을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우주에 있는 어느 별 아래에 있는 인격적인 존재들이든지 그들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에 포함이 된다고 보아야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지구)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하라고 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사회와 아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 지구의 사회를 비교하시면서 그런 기도를 하셨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늘과 땅이 비교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곳과 이루어지지 못한 곳이 비교되면서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처소로서 공간적인 차이점이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의 모양의 세계에 대한 차이점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사회와 하나님의 뜻이 아직 안 이루어진 사회에 대한 것은 정신적인 문제에 기초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다.
저 넓은 우주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고 있는 인격적인 존재들은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주 속에 있는 지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존재들이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지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구라는 한 행성에 살고 있는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다른 곳들에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라고 말씀하셨다. 땅이 아닌 다른 곳(하늘)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 있는 존재들은 지구인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외계인에 해당한다.
Ⅴ. 우주에는 죽을 수 없는 몸으로 활동하는 존재들이 있다.
성경의 내용을 읽다가 보면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들을 영원한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그의 뜻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도 처음에는 죽을 수가 없는 몸으로 만드셨다. 죽음은 그가 하나님의 규례를 어겼을 때에 생기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다른 행성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죽을 수 없는 몸으로 생활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즉 주님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하셨을 때에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회는 그곳에 있는 존재들의 몸이 죽음이 없는 몸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 속에는 우리와 다르게 영생하는 몸으로 있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장차 지구인들도 죽을 수 없는 몸으로 부활한다고 들려주고 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0).
성경은 우리에게 몸에는 죽는 몸이 있지만 죽지 않는 몸도 있다는 것을 들려주고 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3).
예수님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라고 표현한 내용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사회에 속한 인격적인 존재들의 몸이 썩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는 몸들로 되어 있다고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은 이 우주 속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죽을 수 없는 몸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존재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게 만든다. 이것은 우주에 우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의 생물들의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져 있음을 나타낸다.
“현재 지구상 전체 생물 종은 약 1400만 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중 175만 종(13%)만이 인간에게 발견돼 존재가 알려졌다.”[김윤종, 「지구촌 환경 화두, 지구온난화에서 ‘생물다양성 감소’로」(동아일보, 2012/5/9), p.27.]
지구에도 이렇게 많은 종류의 생물들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회 속에는 얼마나 다양한 생물들이 존재하겠는가?
우주의 세계는 하나님의 작품들(생물들의 세계)을 얼마든지 펼칠 수 있는 미술가의 화지와 같은 곳이다. 저 하늘 어느 행성에서는 지구의 생물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생물들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지구에서 이루어지는 생물들은 질적으로 낮은 품질의 생물들에 해당한다. 그래서 삶과 죽음, 병과 고통이 우리의 생물계에는 있다. 지구에도 아담이 타락하기 전 에덴동산에 있었을 때에는 지금보다 더욱 질 좋은 품질의 생물들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성서적인 견해이다.
저 하늘 어느 별나라에는 죽을 수 없는 몸으로 생활하고 있는 외계인들이 있고 그곳에 있는 자연계는 우수한 자연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Ⅵ. 백보좌심판장면이 외계인은 없다고 할 수 없다
혹자는 외계인의 존재 문제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묘사가 지구를 중심으로 한 전우주적으로 되어 있다면서 외계인은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고재형외 8명, 「궁금해? 궁금해!」 (서울: 한국창조과학회, 2002), p. 333.]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묘사는 지구를 중심으로 한 전우주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외계인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오히려 외계인들이 우주에 있기에 하나님은 전우주적인 심판을 하실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당하다.
우주에 지구인만 있으면 우리의 태양계만 심판하면 되지, 뭐 하러 전우주적인 심판을 하겠다고 하시겠는가?
심판은 인격을 지닌 존재가 잘못했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단지 별들이나 행성 같은 물질 그 자체를 대상으로는 심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백보좌심판을 하시는 날에 지구인을 중심으로 하여 각 종류의 외계인들은 물론 사탄과 마귀들 그리고 타락한 천사들도 같이 전우주적으로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심판은 인격적인 존재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계20:11).
마지막 심판이 지구를 중심으로 한 전우주적인 것이라면 그 심판을 거행하는 장소는 지구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 심판은 땅과 하늘 어느 방향에 있는 피조물이라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거행된다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땅이 중심이 아니다. 그러므로 백보좌심판장면이 외계인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Ⅵ. 구원받은 지구인들은 장차 우주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몸을 지니게 된다.
사람이 부활된다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이다.
사도신경에도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로 마지막을 표현하고 있다. [새로운 사도신경에는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로 되어 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은 부활하는 것이다. 죽음에서 부활된 몸은 다시는 죽을 수 없는 몸이 된다. 영원히 사는 몸으로 우리는 존재하게 된다. 영생하는 몸이 우리에게 이루어졌을 때에 우주의 세계는 우리에게 삶의 광장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게 되면 그들은 우주에서 생활하는 데에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활동하신 내용들이다. 이 내용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우주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장차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과 같은 수준의 몸을 지니고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21). 그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예수님의 부활한 몸은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24:42-43).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자연계에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8-39).
둘째, 예수님의 부활한 몸은 문들이 모두 닫혀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냥 벽을 통과하여 방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는 몸이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 문들이 닫혀있는데도 방 안에 들어오셔서 가운데 서서 말씀하실 수 있었던 몸은 자연의 법칙 너머에서 움직이는 몸으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죽을 수 없는 몸이라고 볼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이제는 십자가에 달려놓아도 그냥 통과하여 나올 수 있고 태양 속을 지나가도 타지 않고 그냥 통과하여 나올 수 있는 몸이다. 그런 몸은 블랙홀 속에 집어넣어도 그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한 몸은 순간이동이 가능한 몸이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눅24:30-31). 예수님의 몸은 떡을 떼어서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눈앞에 있다가도 순식간에 이동되어 볼 수 없게 되는 몸이기도 하였다. 떡을 떼어서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었다는 것은 자연계에서 생활할 수 있는 몸이라는 것이다. 우주는 자연계이다. 그 몸이 순간 이동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주적으로도 활동이 가능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주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몸은 죽을 수 없고, 순간 이동, 그리고 벽 통과가 가능한 몸이어야 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의 기능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장차 구원 얻은 성도들도 그런 몸을 가지고 있게 된다고 들려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20-21).
우리는 현재 낮은 몸으로 생활하고 있다. 미래의 우리의 몸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영광스런 몸이 된다. 그 몸은 자연계에서 생활할 수 있는 몸이고 영생하는 몸이며 벽도 그냥 통과할 수 있는 몸이고 순간이동도 가능한 몸이다. 이런 몸은 우주적으로 생활하는 데에 아주 적합한 몸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의 몸이 장차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성경은 들려준다.
Ⅷ. 지구에서 구원된 존재의 우주적인 가치는 엄청나게 크다.
라엘리언 무브먼트 창시자 클로드 라엘은 우주인들이 나타나서 광속의 10배 이상 빠른 UFO로 그를 그들의 혹성으로 데려가서 지구보다 2만5천년이나 앞선 과학문명을 체험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우주인들은 앞으로 인류가 그들을 진정으로 맞이한다면 그들은 2만5천년 앞선 과학기술을 전수해 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라엘리안 무브먼트 광고지]
이런 이야기는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배치된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각 생물들을 종류대로 각각 만들어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종류의 생물들은 자기 자신의 한계가 있고 그 한계 속에서 살아야 합당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과학제품들을 각 종류대로 만들어놓고 그것들은 각각 인간이 정해준 한계 속에 있게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자동차가 나타나서 자전거에게 “나에게는 너보다 더욱 큰 성능이 있는데 네가 내게 잘하면 내가 네게 그것을 전수하여 주겠다”고 말할 수 없다. 비행기가 나타나서 자동차에게 “나에게는 너보다 더욱 큰 성능이 있는데 네가 내게 잘하면 내가 네게 그것을 전수하여 주겠다”고 말할 수 없다. 자전거, 자동차, 비행기는 각각 인간이 그들에게 정하여준 한계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우리 인간은 원숭이보다 발달된 문명 속에서 있다. 우리가 아무리 원숭이에게 우리의 놀라운 과학기술을 전수하여 주고 싶어도 원숭이는 그것을 수용할 능력이 없다. 피조물은 하나님이 그를 어떤 존재로 만들어 주셨느냐에 따라서 각기 그 사고 능력과 활동 영역이 다른 상태에 있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소로 만들어놓으셨다면 우리가 아무리 사람처럼 비행기를 만들고 싶어도 불가능한 것이다. 비행기를 만드는 기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소는 그것을 만드는 기술을 수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별들을 만드는 하나님의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별들을 만드는 기술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꽃으로 만들어놓으셨으면 우리는 활동도 못하는 존재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제비로 만들어놓으셨으면 가을이 되면 우리는 바다를 건너서 강남으로 날아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참새로 만들어놓으셨으면 강남으로 날아가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각 생물들은 하나님께서 그 한계를 정하여 주신 수준에서 생활하여야 한다.
인간이 외계인으로부터 2만5천년 앞선 과학기술을 전수받는 것보다 더욱 귀중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존재의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그 존재를 어떤 피조물로 만들어놓으셨느냐 하는 문제가 더욱 귀중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천사로 만들어놓으셨으면 우리는 천사의 활동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2만5천년 앞선 과학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외계인으로 만들어놓으셨으면 우리도 그런 것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개미로 만들어놓으셨다면 우리가 인공위성을 우주에 만들어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존재의 문제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놓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 얻은 존재는 장차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를 지닌 존재가 된다고 한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존재의 실체는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그는 우주에 있는 어느 외계인보다 더욱 높은 수준의 피조물이다. 그는 천사보다 더욱 높은 수준의 피조물이다. 천사에게는 하나님의 상속이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상속을 받는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십자가에서 지구인도 아니고, 외계인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고, 그보다 더욱 높은 수준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를 지닌 피조물로 구원시켜주셨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일시적인 생명체는 인간이지만 우리의 영원한 생명체는 우주에 있는 어느 외계인들보다 높은 종류에 해당하는 존재로 있게 된다는 것을 들려주고 있다.
우리가 장차 영원히 해야만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영원토록 왕 노릇하는 것이다.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5).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6-17).
지구인은 장차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상속받은 부분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내용이다.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당신은 죽을 수 없는 육체를 지니고 순간이동도 가능하며 137억 광년이 넘는 우주의 세계를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우주의 어느 별 아래에서 생활하는 외계인들이든지 지구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로 구원받은 존재의 통치 아래에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6:3).
천사는 외계인들보다 높은 존재들이지만 장차 우리는 그들도 판단하는 존재가 된다.
진정한 왕은 예수님이시다.
그는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자로서 왕중 왕이시며 만유의 주이시다.
우리는 그의 지체가 되어서 왕 노릇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왕은 예수님이시지만 왕 노릇은 예수님의 지체들 중에서 한 요소로 존재하는 우리가 각자 상속받은 부분에서 왕 노릇을 하게 된다.
내가 예수님의 눈의 지체로 있으면 보는 데서 나는 왕 노릇할 것이다.
내가 예수님의 귀의 지체로 있으면 듣는 데서 나는 왕 노릇할 것이다.
왕 노릇하는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면 우리의 존재의 의미는 상실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이다.
그 지체가 본체에 해당하는 예수님을 떠나면 가지가 나무를 떠난 것처럼 멸망 밖에 없다.
왕을 떠나면 왕 노릇은 할 수가 없게 된다.
우리는 처음에 우주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간 존재로 태어난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를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피조물이 되게 하여 주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
지구에서 구원된 존재의 우주적인 가치는 굉장하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에 하나님께서 투자하신 것은 상상을 초월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인간이 되게 하여 죽여서 만들어놓은 생명체들이다. 하나님 안에 죽음이란 없다. 죽음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건널 수 없는 바다이다. 그러나 그 바다를 건너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다. 너무도 투자한 것이 크기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도 크다.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22:5).
지구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간 존재의 가치는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 중에 가장 크다고 볼 수가 있다. 그들은 죽음은 통하여 하나님께 소속된 존재가 되기 때문에 장차 하나님과 이웃을 목숨보다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존재까지 될 수 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다른 종류의 피조물들은 죽음을 모르며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수준에 도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존재들은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전5:17).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5).
◈ 하나님의 백성에 해당하는 외계인들.
◈ 하나님의 종에 해당하는 천사들.
◈ 하나님의 자녀에 해당하는 구원받은 사람들.
이들은 각각 하나님 안에 속한 피조물들이지만 다른 종류에 해당하는 피조물이다.
외계인들과 우리는 궁극적으로 레벨이 다르다.
피조물은 하나님이 그를 어떤 존재로 만드셨느냐 에 따라서 기능도 다르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원숭이로 만들어 놓으셨으면 우리가 아무리 연구를 하고 노력을 한다고 하여도 100층짜리의 건물이나 우주선을 만들 수 있는 수준에 있지 못하게 된다.
천사들은 영체로서 우주를 순식간에 이동할 수가 있다.
외계인들 중에는 비행물체를 만들어서 우주를 왕래하는 존재들이 있을 것이다.
지구인으로 있는 우리의 수준에서는 빛보다 빠른 속도를 내는 것은 불가능한데 어찌 우주를 왕래하는 비행물체가 있을 수 있느냐 하고 고민하는 수준에 있게 된다.
대우주를 무에서 유로 창조하신 분(하나님)의 수준 앞에서 우리는 아직 대우주를 왕래한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학문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자녀로써 왕 노릇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 창조자적 능력으로 우주에 있는 자연계도 변형시켜버릴 수 있게 될 지도 모른다. 우리는 행성들은 물론 별들도 변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피조물은 하나님이 그 존재를 어떤 존재로 만드셨느냐 에 따라서 활동할 수 있는 수준과 능력도 다르게 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5).
하나님께서 우주에 외계인들을 만들어놓으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우주에 그들이 있어야 왕 노릇하도록 만들어진 우리의 역할은 활력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우주에 은하수와 안드로메다 같은 성운들이 1000억 개가 있다고 하면 한 사람이 한 성운에서 왕 노릇한다고 하더라도 약 1000억 명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지구에 태어난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이 우주에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것을 생각하면 무척 신비로움을 느끼게 된다. 어떻게 나는 내가 되어 이렇게 존재하여 지구에서 살고 있는가? 내가 없으면 우주가 있어도 내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나는 내가 내가 되어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때로는 너무도 신비롭다. 그런데 진리는 이것이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태어나서 존재하게 되는 것보다 더욱 귀중한 일이다”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을 받지 못한 가룟 유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
우리는 장차 우주에 있는 어떤 외계인들보다도 귀중한 존재가 될 수 있지만 지구인보다도 못한 존재가 장차 될 수도 있다는 진리를 기독교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Ⅸ. 나가면서
이 논문에서 필자는 두 가지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첫째는 우주에는 외계인들이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주에 별들의 세계만 만들어놓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곳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피조물들도 만들어놓으셨을 것이다. 별들만 있어서는 우주에 하나님의 나라는 존재하지 못한다. 외계인들도 하나님은 만들어놓으셔야 우주에 하나님의 나라는 존재될 수 있다. 예수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알려주셨다. 저 하늘 어느 별 아래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생활하는 존재들이 있을 것이다.
둘째는 우주에 있는 외계인들과 우리는 장차 존재적으로 다른 종류의 피조물로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세세토록 왕노릇하는 것이다. 우리는 왕자의 위치에 있게 되나 우주에 있는 모든 외계인들은 백성들의 수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천사들은 우리를 섬기는 종들이 될 것이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1:14).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주는 사랑의 세계의 광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우주에는 별들만 있지 아니하고 인격을 지닌 외계인들도 별들보다 많이 존재하고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