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중종 때의 학자로 글씨를 잘 써서 조선 초기 4대 서예가로 꼽히고 효자로도 알려져 있는 자암(自庵) 김구(金絿)는 부제학까지 벼슬이 올랐으나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로 몰려 남해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자암은 남해에서 귀양살이를 하며 경관이 좋은 화전(현 충열사 부근, 또는 남해를 일컬음)의 풍경을 노래한 화전별곡을 지었다. 그의 자암집에 있는 경기체가에서 그는 남해섬을 ‘일점선도(一點仙島)’라 했고, 그 경관을 ‘산천기수(山川奇秀)’라 했다. 남해가 ‘한 점 신선의 섬’이며 ‘산천의 경개는 기이하고 빼어나다’고 한 것이다.
금산은 아름다운 남해 섬에 피어있는 한 송이 꽃이다. 이 꽃 속에서 장유선사, 혹은 원효대사가 도를 깨달으려 보리암을 지었고, 중국의 진시황은 서불을 보내 불로초를 구하려 했다. 또 조선조 태조 이성계는 여기에서 기도를 하고 왕이 되었다.
이처럼 금산(錦山·681m)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산이며, 진시황과 이성계와 연관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신비스러운 산이기도 하다. 한려해상 국립공원 안에 있는 유일한 산으로, 온 산이 우람하고 기이하고 빼어난 바위들로 덮여 있는 금산은 38경이라는 수치로 명소의 많고 다양함을 대변하고 있는데, 그 모양과 유래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으며, 그에 따라 재미있고 신비한 이야기들도 많다.
신비의 석각 서불과차문(徐過此文)
중국의 역사에서 춘추시대를 거쳐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진, 초, 연, 제, 한, 위, 조 전국 7웅이 극심하게 대립하여 서로 물고 뜯기는 싸움을 펼쳐왔다. 이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시황제는 한껏 영화를 누리게 되자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동방에 삼신산이 있고 거기에 늙지 않는 불로초가 있다는 이야기를 믿고 서불(徐)이라는 신하에게 동남동녀 500명을 딸려서 동방의 삼신산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명령했다.
동방은 곧 우리나라를 말한다. 그 서불을 동방으로 보냈다는 기록은 있으나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 중국에서 전설로 전하는 동방의 삼신산인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우리나라의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일컫는 것이 되었고, 이 삼신산에 서불이 다녀갔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러나 삼신산만이 아니라 남해의 아름다운 산인 금산에도 서불이 다녀갔다는 전설이 있고, 심지어 진시황의 아들인 부소(扶蘇)가 귀양을 살았다는 부소암까지 금산에 있다. 신비스러운 것은 이 부소암이 있는 양아리(상주면) 위 두모골에 한 평에 가까운 반반한 반석에 기이한 서화(부호, 또는 새발자국 같은 모양)가 분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판독이 안 되는 이 석각 서화를 서불이 금산을 다녀가며 그 증표로 새겨 놓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정식 명칭은 ‘남해 상주리 석각’인데도 사람들은 ‘서불이 이곳을 지났다는 증표의 글’이라는 뜻에서 일명 ‘서불과차문(徐過此文)’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어떤 학자는 무릎을 보호하는 헝겊이라는 뜻의 불(?) 자를 시장이라는 뜻의 시(市)와 혼동하고 있다. 더군다나 금산의 어느 바위에 한자로 새겨놓은 것을 본 것처럼 ‘산을 더터 오르다 보면 바위에 희미하게 새겨진 ‘서시과차’(徐市過此)란 글귀가 보인다’라고 쓰기도 했다. ‘불’ 자와 ‘시’ 자는 수건 건(巾)부의 1획과 2획의 차이가 있으며, 위 아래로 그은 곤() 자가 중간이 떨어졌느냐 안 떨어졌느냐의 차이다.
지난 가을 우리 일행이 당국의 허락을 받고 이 남해 상주리 석각을 보기 위하여 현장에 갔을 때 마침 지리산의 도인 몇 분이 현장에 먼저 와있었다. 그들은 이 석각의 내용을 이미 해석한 도인이 있으나 천기를 누설하지 않으려고 말하지 않고 있다며 자기들도 나름대로 해석해 보려고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석각의 왼편 위아래에 있는 두 글자가 입(入)과 천(天) 자, 즉 입천(入天) 같다며 이 근처 어딘가에 있는 선계(신선이 사는 세상)로 가는 길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섬진강 하류에 선계가 있다는 참언과도 일치한다는 것이다.
또 그들은 이러한 신비스러운 석각 서화가 여러 군데 있으며, 모두 바닷가에 있다는 것과 여기의 석각이 제주도 천제연폭포 근처에 있는 석각과 똑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들은 이 석각이 신선들의 기호, 또는 암호이거나 문자라고 믿고 있었다.
남해 문화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서포 김만중 기념사업회’ 회장 김성철씨에 의하면 위와 같은 서화 석각은 거제도와 제주도에도 있으며, 중국에도 많이 있고, 일본의 서복(徐福·서불을 서복이라고도 함. 일본 문화원에 문의했으나 서복이라는 지명은 확인하지 못함)이라는 곳에는 이러한 서화가 많아 상품화까지 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서불이 제주도, 남해도, 거제도를 거쳐 일본의 서복으로 간 것으로 추측해본다.
보광산이 금산으로 바뀐 까닭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금산은 불교와도 인연이 깊은 산이다. 금산의 당초 이름은 보광산이었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이 산에 보광사를 창건하며 산 이름도 보광산이라 불렀던 것 같다.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도량은 거의 바닷가에 세워진다.
원효대사가 관세음보살을 모시며 절이름을 관세음보살과 인연이 있는 보광궁을 생각하고 ‘보광사’라 했고, 따라서 산이름이 보광산으로 된 것이다. 현재의 보리암이 보광사의 자리는 아니라지만, 보광사의 후신임에는 틀림이 없다. 현재 보리암에는 보광전이 있다.
그 뒤 태조 이성계가 금산에서 기도하며 산신령에게 왕이 되면 이 산을 비단으로 덮겠다고 약속하고, 왕이 된 뒤 약속을 지키려고 온 산을 비단으로 덮으려 했으나 너무 많은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아예 산의 이름을 비단 금(錦) 자를 써서 금산(錦山)으로 했다 한다.
일출 장관과 두모골 석각도 본 산행
지난 늦가을 김영훈 기자와 나는 김태복 남해산악회 회장의 주선과 주지 영공 스님의 아량으로 밤 늦게 보리암까지 차로 오르고 요사의 훌륭한 방에서 하루 밤을 묵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 공양을 마치고 망대에 올라 오전 7시40분경 바다에서 떠오르는 황홀한 해돋이를 보았다.
우리는 이어 문장암 단군성전을 거쳐 보리암으로 다시 내려와 화엄봉, 천주봉, 제석봉, 일월봉, 저두암, 금산여관 좌선대를 거쳐 상사바위로 나아가 구정암, 팔선대를 보고 쌍홍문으로 내려가 장군암, 사선대를 보았다.
매표소에서 올라온 남해산악회 회장 김태봉씨, 회원 류재욱씨, 마산 창원 지역 산악회인 어울림산악회 회원으로 <낙남의 산>을 써서 화제가 된 홍성혁씨, 그의 산친구로 수염이 많아 신선 모습의 최인효씨 일행을 오전 11시 쌍홍문에서 만나 함께 보리암으로 올랐다.
큰 불사가 진행 중인 보리암에서 신비의 3층석탑이 서있는 탑대를 둘러보았다. 여기에서는 상주 앞바다와 상사바위 일대의 아름다운 경관이 잘 보인다. 그 무렵이 마침 점심 때여서 점심공양을 하고 고스락으로 올랐다.
우리는 고스락 일대를 둘러보고 단군성전을 거쳐 부소암으로 내려갔다. 부소암은 언제 보아도 좋다. 거대한 둥근 돔처럼 생겼고, 일대가 기암괴봉의 숲이며, 쇠다리로 암곡을 건너기도 해서 경관이 매우 좋다. 요즈음에는 부소암쪽 두모골이 출입 통제구역이어서 이 쪽은 사람의 발길이 뜸하다.
우리는 신비의 남해 상주리 석각을 보기 위해 두모골로 내려섰다. 부소암에서 두모골로 내려서는 바윗길이 또한 아기자기하고 좋았다. 큰 바위들이 깔린 너덜에서 작은 틈(구멍)으로 비집고 내려가야 길이 이어지는 고비도 있었다. 마치 별천지로 들어서는 기분이다.
일행 중 아무도 예의 석각을 본 사람이 없어 걱정했으나, 길 가까운 곳에 있었고, 마침 지리산의 도인 몇 분이 현장에 있어서 석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재미있고 뜻있는 이야기도 들었다.
미천 홍성혁, 그는 진정한 산꾼이다. 젊었을 때 그는 목적도 없이 그저 산이 좋아 그의 말대로 짐승처럼 산을 쏘다녔다. 지리산의 어려운 종주산행을 당일로 해치우기도 했고, 도봉산에서 벙어리 산행을 한 일도 있으며, 북한산에서 별빛을 보고 무작정 비박을 하기도 했다. 지리산 설악산을 혼자서 헤매고 다니다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산에 다니기 시작하여 큰 일을 해냈고, 더 큰 일을 위하여 지금도 꾸준히 산을 살피며 다니고 있다. 산행 전에 1:50,000 지형도를 펴놓고 산경표를 따라 마루금을 이어 개념도를 만들고, 산행 뒤 다시 그것을 고치는 일을 해왔다. 그것을 산꾼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산행 안내도 했다.
그러다가 낙남정맥 언저리의 산 100여 개와 지리산 32개 지역과 가칭 남강기맥(덕유산에서 진양호까지의 산줄기) 11구간을 답사한 내용을 정리하여 <낙남의 산, 그 언저리>라는 멋진 책을 펴냈다.
부인이 마산에서 큰 식당을 경영하고 있는 덕으로 마음 놓고 산에 다니며 뜻있는 일을 추어나가고 있다. 그러면서 또 틈틈이 지리산 설악산을 자주 찾았고, 2000년에 백두대간 구간종주를 마쳤고, 2001년에는 낙남정맥, 2002년 낙동정맥, 2003년에는 호남정맥 종주도 마쳤다.
종주방식은 고개에서 고개로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구간의 중간 잘록이에서 끊어 마을로 내려오고 다시 반대편에서 종주하여 1구간을 두 번으로 나누어 종주했다. 이러한 종주방식을 고집한 것은 마루금 자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미천은 마산 창원 지역의 산악회인 어울림산악회 회원으로 지금도 전국의 산에 대한 산행안내도를 만들고 있고, 낙동정맥과 그 언저리의 책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다.
해방동이인 그는 경남 소가야 땅에서 태어나 그의 말대로 지리산에서 가까운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것이 화근이 되어 지리 선생에게 이끌려 지리산을 찾았고, 졸업 뒤에는 일본 와세다대학 공학부를 나와 서울시청에서 근무하고 있던 그의 숙부를 따라 산을 쏘다녔다. 그의 숙부는 북한산에서 타계했다 한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소천(小泉), 큰아버지가 아천(我泉)이라는 아호를 가졌던 것에 견주어 겸손하게 아주 작은 샘이라는 뜻으로 미천(微泉)이라는 아호를 쓰고 있다. 그러나 아주 작은 샘에서 나온 물이 큰 내를 이루고, 드디어 바다에 이르듯 미천은 산을 다니며 넓은 바다를 꿈꾸고 있다.
보리암은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 서해의 석모도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으로 꼽히고 있다.
보리암은 금산 38경의 명소에 둘러싸여 있어 더욱 돋보인다. 위로 우람한 대장봉이 있고, 아래에 탑대가 받치고 있으며, 발치에 금산 제1의 명소 쌍홍문이 있다. 오른편에 화엄봉과 일월봉, 왼편에 삼불암이 늘어서 있고, 건너에 거대한 상사바위가 보인다. 뿐만 아니라 세존도 등 섬들이 점점이 떠있는 그림 같은 상주 앞바다를 굽어보고 있고 그 너머로 망망대해를 그윽이 바라보고 있다.
보리암은 불교 남방전래설의 예가 되고 있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의 삼촌이 되는 장유선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의 원효대사가 강산을 유람하며 다니다 금산이 방광하듯 온 산이 빛나는 것을 보고 보광사를 짓고 산을 보광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보리암 앞 탑대 위에 있는 3층석탑(경남 유형문화재 제74호)은 기이한 전설을 지니고 있다. 김수로왕비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바사석으로 김해 구지봉 아래 호계사에 세운 탑을 원효대사가 이곳으로 옮겨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부처님 사리를 모시려고 원효대사가 이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제로는 고려 후기 양식의 탑이라 한다.
이 탑이 신비스러운 것은 나침판을 놓으면 나침판 바늘이 남북을 가리키지 못하고 방황한다는 것이다. 밤에는 종종 이 탑이 빛에 싸인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