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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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의 광주 지목구청 전경. |
목포에 성당이 세워진 것은 1897년이었다.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Gustave Charles Marie Mutel, 閔德孝)가 1896년에 전라도 지방을 사목 방문하면서 나바위본당과 목포본당을 설정하기로 결심한 결과였다.
당시 목포는 본당을 설립할 정도로 교우들이 많았던 것은 아니지만, 제물포(인천), 원산, 부산에 이어 개항되었으므로 당장보다는 앞날을 바라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1911년에 조선대목구가 서울과 대구 대목구로 분리될 때 목포는 대구대목구 관할이 되었다. 1933년에 전라남도 지역을 아일랜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관할하기 시작하면서 목포본당이 감목대리구좌 성당이 되고 아일랜드인 선교사들이 사목하였다.
그러나 1941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아일랜드인 선교사들이 연금되거나 추방되자, 목포본당에는 김재석ㆍ박문규ㆍ최덕홍 신부 등 한국인 성직자들이 부임하였다.
이 한국인 사제들이 사목하던 시기에 장모 신범사와 아들 성옥, 김금룡 부부가 세례를 받은 것이다.
김금룡이 성당으로 발길을 내딛기 전까지 비록 자신은 비신자였지만, 장모와 아들의 신앙생활에 전혀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1944년에 산정동본당 주임이었던 박문규(미카엘) 신부가 제주본당으로 발령받아 목포를 떠날 때 김금룡은 아들 성옥의 손에 10원을 쥐어 보냈다.
당시 교회는 본당 신부들이 발령을 받아 다른 본당으로 떠날 때 각자 형편대로 성의껏 갹출하여 전별금을 드렸다.
그러나 자기 가족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었지만 본인은 아니었고, 더구나 일제 말기의 극심한 경제난 때문에 장사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 어려운 시절에 소상인에 불과한 그가 10원을 선뜻 내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당시 목포에서 가장 유명한 평신도 유지가 전별금으로 낸 15원에 이어 그가 보낸 액수가 두 번째로 많은 돈이었다고 한다.
장모 앞에 손을 든 사위
이런 김금룡의 속마음을 헤아린 아들 성옥과 장모 신범사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김금룡 부부의 천주교 입교를 권유하기 시작했다. 해방을 전후해서 아들 성옥이 몇 번인가 정색을 하고 아버지에게 간청했다.
“아버지 성당에 다니세요.”
장모도 옆에서 거들었다.
“자네, 이제 그만 뜸들이고 그만 가세나.”
거듭되는 재촉에도 금방 응답하지 않고 기나긴 시간 심사숙고하던 김금룡이 마침내 손을 들고 말았다.
“그래, 성당 다니면서 천주님을 믿겠다.”
김금룡은 아내를 데리고 장모와 아들을 따라 어색한 발걸음을 성당으로 옮겼다. 당시 예비신자들에 대한 교리 교수 방법은 오늘날처럼 교회가 예비신자들을 따로 모아 일정 기간 교리를 이론적으로 가르치고 나서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었다.
천주님을 믿고 성당을 다니려는 이들은 복음의 인도자들을 따라 성당에 들어갈 때와 안에서 갖추어야 할 태도부터 시작하여 신자로서 제반 예절을 배우고,
‘십이단’이라고 했던 주요 기도문과 함께 154조목으로 되어 있는 ‘성교요리문답’을 능숙하게 줄줄 다 외울 수 있어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이 몸에 배었을 때 사제로부터 ‘찰고’(察考)라고 하는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이 과정을 다 마친 김금룡과 아내 박기남은 1946년 8월 14일에 훗날 대구 대목구장이 된 최덕홍(요한) 신부로부터 가이오(카이오), 간지다(칸디다)라는 세례명을 받고 주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세례를 받은 김금룡은 천주교 신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천성이 부지런한 그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나면 바쁜 일이 있건 없건 곧바로 집을 나가 해가 진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신자가 된 뒤에도 이런 그의 습관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일어나자마자 아내와 함께 조과(아침 기도)와 묵주기도, 그 날의 특별기도 등을 다 바치고 나서야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갔다.
세례를 받은 뒤 몇 해 동안은 그의 존재가 산정동본당에서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천성이 부지런하고 가만있지 못하는 그의 성격 탓에 신자들과 서서히 친해져 갔으며,
일상에서도 늘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아 쉬지 않고 움직였듯이 천주교 신자로서도 자기가 할 수 있고 꼭 해야 할 일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정치적으로 계속 혼란스럽고, 경제 사정은 날로 어려워지던 1950년 6월에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침하여 7월에는 목포까지 점령하고 말았다.
이해 여름 목포에는 인민군들의 총칼과 정치보위부원들의 매서운 눈길을 피해 산속 토굴이나 지하에 숨어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공산당원들은 자기들의 뜻에 반하는 이들을 찾아내어 단 한 번의 선동적인 재판으로 반동분자라는 낙인을 찍은 다음 죽창으로 무참히 찔러 죽였기 때문이다.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선전하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당시 광주 지목구청이 있던 목포 역시 벗어날 수 없었다.
양떼를 떠나지 않은 목자
위험한 목포를 떠나 피난가라는 동료 선교사들의 간곡한 권유를 제4대 광주지목구장 브레난(Patrick Brennan, 安) 신부는 단호히 거절했다.
“지목구장인 나의 사명은 나의 관할 지목구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사태가 급해지면 섬으로 피신할 터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악마의 발톱이 점점 그의 몸속으로 파고 들어와도 끝내 자기가 맡은 양떼를 떠나지 않았다.
산정동본당 주임 쿠삭(Cusak, 高) 신부, 보좌 오브라이언(J. O’Brien, 吳 )신부와 함께 인민군에게 끌려가 8월에 피살되고 말았다. 착한 목자인 그가 마지막으로 마실 잔에는 순교의 피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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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금룡이 산정동성당 십자가를 지킨 공로로 현 하롤드 신부로부터 받은 십자고상. |
공산당의 끊질긴 박해
공산당의 박해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십자가가 있는 성당이나 예배당은 미군 비행기들이 폭격하지 앉는다는 사실을 아는 인민군들은 산정동성당을 징발하여 막사로 사용했다.
교우들의 여론을 좌우할 원로 신자뿐 아니라, 인민군에 징발될 위험이 있는 젊은 남자 교우들도 그들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야 했다.
중학생인 성옥은 어느 날 아버지가 없는 집에 들어와 무심코 벽장을 열어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모르는 사람들이 발가벗은 몰골로 벽장 안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성당을 접수한 인민군들은 거추장스러운 물건에 불과한 성당 안팎에 있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몸체를 뽑아 산 속에 팽개쳐 버렸다.
성당에 들어갈 수 없어 숨어서 몰래 지켜보던 교우들이 밤중에 이 예수님의 몸체를 찾아낸 다음 서로 돌아가며 감추었는데, 자신도 쫓기는 처지인 김금룡이 자기 집 벽장에 모셨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집에만 모시고 있으면 위험했으므로 8월에 다른 신자의 집으로 십자가를 옮겼다. 김금룡은 또한 산정동 본당에 파견되었던 수녀 가운데 한 명을 한복으로 변장시켜 자기 집에 감춰 둠으로써 인민군 치하를 무사히 넘기도록 했다.
1950년 10월에 목포가 수복되자 광주지목구장 서리 겸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지부장에 임명된 현 하롤드(W. Harold Henry, 玄海) 신부가 산정동성당의 십자가를 지키고 수녀를 보호한 공로로 김금룡에게 아름답고 실용적인 십자고상을 수여하였다.
이 성물은 갈색 케이스 안에 야광 십자가가 들어 있는데, 금으로 도금된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혀 있다.
일정한 곳에 모셔 둘 때는 케이스 안에 있는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고, 케이스 양쪽 날개 끝을 촛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이 아름답고 고귀한 십자가는 김금룡 집안의 가보 1호가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