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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소득 2400만원의 의미
전라남북도에 이어 충청남도 서천에서 열리는 역사적인 제 3회 전국 귀농‧귀촌대회 참가자 여러분,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저는 어지간하면 이번 대회에 나서지 않으려고 했는데 주최측에서 이런 건조(乾燥)한 주제로 발표를 요청하여 시쳇말로 대략난감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몇년전 어떤 분이 제게 ‘독일 병정같다’고 하셨는데 귀농본부 박사무처장님도 저를 비슷한 이미지로 보시고 귀농‧귀촌 분야의 가장 현실적인 부문을 맡으라 하신듯 합니다. 그러면 농가소득 2400만원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요? 제 나름대로 제시된 주제를 풀어가겠습니다.
귀농 첫해 손익분기점을 맞추다
저는 1997년 9월 서울에서 충남 홍성으로 삶터를 옮긴 귀농 14년차 농부입니다. 98년에 첫농사를 지어 1천 6백만원을 벌었고 수입 모두를 지출하여 드물게도 첫해부터 손익 분기점을 맞추었습니다. 당시 논 2천 4백평, 밭 천평을 소량 다품종 방식으로 경작했는데 농업소득이 약 1천 백만원, 이자 ‧ 원고료‧ 품삯 등 농업외 소득이 5백만원 정도였습니다. 농사를 전업으로 하는 귀농일 경우 수지(收支)를 맞추는 기간을 통상 3년으로 보는 데 조금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지요.
농촌에서 농사로 돈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는 두말하면 잔소리일 겁니다. 그 즈음 기록을 보면 이듬해에는 2천백만원(농업 1천 9백, 농업외 3백만원)으로 20%가 늘었고, 임대농지를 돌려주며 옆마을로 이사한 3년차에는 2천만원(농업 1천 9백,농업외 1백만원)으로 약간 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년차는 논 3천 4백평, 밭 1천 6백평으로 5천평 정도 되었으나 농사와 병행한 집수리(3개월), 작목별 풍흉으로 소득이 꼭 면적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농사를 지은 지 14년이 되었지만 아직 한 번도 적자를 기록한 해는 없습니다.
귀농 6년차 전후에는 임대와 자경 포함 6천 8백평까지 늘려 전 농토를 수년간 유기농으로 재배하였습니다. 같은 기간 매출액이 4천만원까지 올라간 적도 있지만 면적이 늘다보니 풀을 매거나 수확시에 때로 사람을 사야하고, 아내가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아 몇 년전에 5천평으로 줄여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습니다. 귀농후 5년 동안은 사람사지 않고, 농기계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소량 다품종으로! 라는 모토를 지키느라 갖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일을 다 잊었는데 얼마전 아내말을 들으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제가 논일 하다가 아내가 너무 힘들어서 SOS를 치면 금세 달려와서 빠른 속도로 밭일을 돕다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어느새 다시 논으로 가버리더라는 겁니다. 이런 일이 한동안 반복되었답니다. 제 뇌리에도 아내가 “제발 사람 좀 사자” 라고 노래하던(?) 기억은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배우자가 농작업으로 힘들어 할 때 못이기는 체하고 청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 굳은 신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배우자의 건강이고 안녕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무사히 넘어갔지만 아내는 고된 농사일로 병이 나서 3년차 봄에 한 달을 누워지내기도 하고, 4년차에는 건초염으로 손가락 수술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아내가 ‘물 만난 고기같다‘고 할만큼 신나게 논밭을 뛰어다닌 통에 지금도 가끔 원망어린 말을 듣곤 합니다.
제게 좀 별난 구석이 있지만 시골에서 농사를 전업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대개 비슷한 과정을 거쳐야 할 줄로 압니다. 임대료를 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내 농토가 충분하거나 부가가치가 높은 작목에 대한 기술과 시설이 있다면 예외겠지만, 임대농이거나 소규모 자영농일 경우 처음부터 농사만으로 살림을 꾸려가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 점은 새내기 귀농인이나 귀농을 준비하시는 분들은 반드시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지금은 사전에 충분히 준비하고 다양한 교육과정을 거쳐 농촌으로 내려가기에 예전보다 덜 할 것으로 알지만 아직도 막연한 기대감에 농촌으로 오는 이들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여 저는 몇해 전 귀농매뉴얼을 쓸 때 어느 장의 프롤로그로 아래의 글을 썼습니다.
도시에서 무언가를 하다가 풀리지 않으면
‘시골에 내려가 농사나 짓지’라고 한단다.
농사는 그리 생각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다.
농사(農事)란 별의 노래,
해와 달의 리듬에 맞춰 농부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미래의 단꿈 뒤에 가려진
고단하고 땀내나는 농부의 일상은
누구나 시작할 수 있지만 아무나 이어갈 수 없기에,
꿈속의 농사와 시골 농사꾼의 꿈은
한 번도 맞닿은 적이 없이 평행선을 달려왔다.
묻고 묻고 또 물어 도달한 귀착지가 시골이 아니라면,
농사가 가슴속에 뜬 별이 아니라면,
단언컨데 더 이상 농촌에 구원은 없다.
농사가 꿈인 분들에게, 영농의 꿈으로 부푼 가슴을 안고 내려오시는 후배들에게 ‘농촌에서의 삶이 구원이 아닐 수도 있다’라는 말은 얼마나 서운하고 팍팍하게 들릴까요? 하지만 꿈은 그냥 꿈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농촌생활의 여러 부문을 모두 망라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농사수입이, 다른 이에게는 적응의 문제로 혹독한 현실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매년 어김없이 그런 분들을 만났고 또 들었습니다. 3억원을 쏟아부어 그림같은 집을 짓고 농촌에 뼈를 묻으러 왔다가 이웃과 싸우는 통에 이사를 고민하는 어느 귀촌인의 참담한 고백에서 농사 잘 지으려고 미발효 퇴비를 잔뜩 넣고 비닐을 씌워 배추를 심었다가 배추가 뿌리도 못잡고 노랗게 말라 죽어간 영농 실패담까지 여기에 기록하지 못한 새내기 귀농․귀촌인의 숨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습니다.
배추농사야 좋은 퇴비 준비해서 다음 해에 잘 지으면 되겠지만 농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흔들리는 분들의 어려움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농가소득 2천 4백만에 담긴 뜻은
이야기가 곁길로 갔으니 다시 바로 잡으려 합니다. 박용범 사무처장님의 기억에 이 수치가 남아있는 건 아무래도 숫자가 주는 상징성 때문이겠지요. 누군가 저희 부부에게 ‘연소득이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었을 때 늘 되뇌이는 말이기도 합니다. 2천 4백은 저희의 한 달 소득 * 열두 달(12)을 곱한 숫자입니다. 대략 이 정도 번다는 말이지요. 금융기관 출신인 아내의 계산 버릇때문에 나온 결과입니다. 한 달에 1백만원-이게 저와 아내의 각기 한 달 소득입니다. 귀농초기(5년 이내)보다는 많아졌지만 중기 이후 큰 변화없이 정체되어 있습니다. 전성기보다(?) 농토도 줄였지만 농산물 값이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내려간 이유가 큽니다. 이는 유기농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마다 다르지만 저희는 대략 생산물의 50~70%를 인근 생협에 출하하고 나머지는 택배로 직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연간 택배건수가 250건 내외이고 농업소득외에 원고료나 강사료같은 농외소득이 조금 있습니다. 벼농사는 3천평, 시설하우스 600평, 밭농사 1천 4백평에 번식우(새끼를 나면 계속 매매) 4두, 당나귀 2두와 염소․토끼․닭․오리 등 소동물이 몇 마리씩 있습니다. 당나귀는 체험용으로 아직 소득이 생기는 것은 아니고 연평균 송아지를 3두 정도 팝니다. 트랙터(68마력), 콤바인(3조 포대) 등 농기계로 농작업을 대행하여 약간의 수입이 있습니다. 일종의 복합영농이라 할 수 있지요. 하우스를 포함한 밭농사와 논농사의 소득비는 대략 65:35쯤 됩니다.
소량다품목을 하고 있으니 일은 무척 많습니다. 귀농초 50여가지에 비하면 많이 줄였는데도 아직 30여종은 될듯 합니다. 소량다품목은 노동력과 위험(실패)요인이 분산되기는 하지만 품목별 전문성이 떨어지고 농기계 작업을 포함한 노동강도가 높은 편입니다. 소비자와 직거래를 하거나 꾸러미를 하는 농가에 적합한 방법이지요. 14년을 하다보니 고생스럽기도 하고 어느 쪽에서도 전문가가 못되어서 후배들에게는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을 택하라 이르고 싶습니다. 부디 선배들보다 고생을 덜하시라는 겁니다. 저희보다는 진일보한 방법으로 나아가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정말 어떤 품목에 자신이 있으면 특화하는 것도 좋고, 저희와 비슷한 복합영농을 하더라도 차별화된 유통을 한다든가 가공을 더하는 등 무언가 부가가치가 더 높은 방향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도시에서 하던 일을 이사와 동시에 내려놓는 것보다 농가살림에 큰 충격이 없도록 단계적으로 줄여가거나 바꿔가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이런 예는 특히 귀농초기에 논밭을 합해 1천평 미만의 영세농일 경우 절실해집니다. 농촌에서 특별한 영농기술이나 시설하우스가 아닌 노지 논밭농사 1천평을 경작해서는 4인 가족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기가 어렵습니다. 5천평을 유기농으로 가능한 사람 덜 사는 방향으로 재배하는 저희 부부의 예(2천 4백만원)를 보면 짐작이 가실 겁니다.
영농면적이 적을 경우에는 저희는 예비 귀농인에게 두 가지 방향으로 권유를 합니다. 하나는 도시에서 하던 일을 줄여서라도 일정 기간 계속 이어가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수입이 끊어지고 영농을 위한 소비만 지속된면 심리적 불안감이 커져 위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던 일을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농사와 함께 다른 일을 권유합니다. 예를 들어 지역내 목수를 돕거나 향후 영농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업종을 선택해 돈도 벌고 경험도 쌓는 것입니다. 저는 첫해에 경작 면적이 충분함에도 얼마간 건축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당시 천정작업을 했기 때문에 수평(水平)을 잡고 특정 공구 사용법을 익혀 이 때의 경험이 향후 집을 고치고 짓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골은 오만가지 경험과 기술이 다 필요한 곳입니다. 특히 견축현장에서의 경험은 뒷날 집을 짓거나 비닐하우스, 축사 등을 지을 때 유용합니다. 저희 제의에 따라 초기 농토가 많지 않은 홍성의 귀농 후배들은 여러 사람이 건축현장에서 일했습니다.
두 세 가지 일을 병행하더라도 농사는 최소한의 관리가 필요
몇년전 홍성에 영상(映像)관련 일을 했던 귀농 후배가 귀농하였습니다. 아마도 그이는 전원속에서 농업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귀농 선배들의 삶과 일상, 신재생에너지, 지역의 문화와 축제, 마을과 지역의 현안 등을 주제로 쉬임없이 앵글에 담았고 고된 편집끝에 여러번 방송 채널에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인터넷 카페 닉네임에도 도시의 통제할 수 없는 빠른 속도에 대한 대안을 담았듯이 그이 가족의 삶이나 농사도 여느 귀농인들과는 달리 조금 느리게 흘러간 듯 합니다. 제가 별칭을 ‘저속 1단’이라 붙였듯이 농사는 늘 한 걸음 늦은 편이었습니다. 작물의 파종, 제초, 수확후 관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이의 성정을 감안하여 저와 귀농 동료들, 마을 이장님은 앞서의 권유처럼 도시에서 하던 일을 당분간 계속 이어가라고 조언했고 그이도 얼마간 영상작업외에 다른 일도 병행했습니다. 아쉬운 것은 영농면에서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점입니다. 후배 집에는 7백평 밭과 9백평 논이 딸려있었고 뒤에 논 750평을 더 짓게 되었습니다. 총 2천 3백평이 넘는 면적이지요. 이 정도 규모라면 귀농 초창기에 유기 전업농으로 직거래를 하기에도 부족하지 않은 면적일 겁니다.
아무튼 후배는 세가지 일을 병행하느라 무척 고생을 했는데도 논과 밭은 늘 풀과 작물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3년 가까이 풀과 지난한 싸움을 벌였지만 농사쪽은 지치고 힘든 모습을 더 많이 본 것 같습니다. 차라리 도시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고 텃밭 농사 정도만 이어갔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이에게는 나름대로 농촌에서의 꿈과 계획이 있었을 겁니다. 이웃의 귀농 선배라 하더라도 그걸 건드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저를 포함해 귀농을 실행하는 이들은 대개 남다른 고집이 있는데다 스스로 부딪쳐봐야 방향을 수정하는 까닭에서입니다.
옆에서 보기에 후배의 실패 원인은 작물이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 제대로 못해준 것입니다. 일단 경작 면적이 너무 많고, 또 필요할 때에는 사람이라도 사서 투입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사람을 사더라도 시골말로 ‘논밭에 풀이 산’이면 효율면에서 초기 투입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풀을 잡는 시기가 늦어지면 비용은 비용대로 나가고 손실은 기하급수로 커집니다. 더욱이 농촌에서의 영농실패는 도시와 같이 자기와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요 마을과 지역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이야기 거리가 되고 맙니다. 이 때문은 아니겠지만 후배 가족은 곧 다른 지역으로 삶터를 옮길 예정입니다. 가까이서 천여일을 지켜본 제게는 오랫동안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을듯 합니다. 부디 심성고운 후배가 다른 곳에서는 그간의 경험을 교훈삼아 꿈을 현실로 하나하나 바꿔가기를 빌겠습니다.
차 때문에 고민스럽다면
시골은 일반적으로 도시에 비해 대중교통 수단이 미비합니다. 따라서 도시보다 차를 쓸 일이 많습니다. 읍내나 면에 나갈 때 버스를 이용하려 해도 배차간격이 길고 생활이나 영농에 필요한 자재 등을 나르기가 어려워 트럭이 필요한 순간이 자주 있습니다. 일 년에 몇 번이면 모를까 때마다 빌려쓸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귀촌이 아니고 귀농이라면 승용차보다는 트럭을 권하고 싶습니다. 벼농사든 밭농사든 농자재나 수확물을 실을 경우에 승용차는 트럭에 비해 매우 불리합니다. 안전성에서는 떨어지지만 형편상 차를 한 대만 굴려야 한다면 농작업의 효율을 볼 때 선택의 여지없이 트럭입니다. 네 식구가 이동도 하고 농사에도 쓰려한다면 6인승 더블캡 트럭이 대안일 수 있습니다.
삶터나 일터가 경사가 심한 곳이거나 산골에 가깝다면 값은 좀 비싸더라도 4륜구동을 권하고 싶습니다. 트럭은 뒷바퀴 구동이기 때문에 전륜구동인 승용차에 비해 눈길이나 젖은 흙길에서 매우 취약합니다. 트럭을 새로 장만하실 때는 가능한 차동제한장치(LSD ; 진창 등 험로에서 탈출 용이)를 옵션으로 선택하시고 평소 좌석아래나 공구함에 견인 로프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좋습니다. 차는 한 번 바꾸면 등록비와 취득세, 감가 등 기회비용이 많이 나가므로 처음부터 농가의 상황에 맞는 차종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얼만큼 버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
농촌에서는 돈을 어떻게 버느냐도 중요하지만 지출의 시기도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도시처럼 매월 고정수입을 만들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꾸러미를 한다면 모를까 일반적인 농사는 수확시기가 곧 돈이 되는 때입니다. 하우스를 한다면 더 앞당겨 지겠지만 노지는 이른 작물인 완두나 감자를 심어도 최소 5~6월은 돼야 팔 수 있습니다. 충남 홍성을 기준으로 당근, 마늘, 양파 등 뿌리작물을 거두는 시기는 6월 중순 이후가 됩니다. 즉 전반기 6개월 가까이는 돈구경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농자재나 씨앗, 농기계 작업 대행, 농기구 구입 등으로 소비만 이어지는 시기입니다. 하반기도 곡류와 벼농사가 갈무리되는 10월 이후가 일반적인 수확기입니다. 역시 4개월 이상 수입이 없을 수 있습니다. 물론 사이사이 잎채소류나 익음때가 빠른 벼 등을 심으면 수확기를 앞당길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농가는 위 두 번의 순환주기에 맞춰 농사를 짓게 됩니다.
따라서 지출주기도 되도록 농사력에 맞추는 것이 좋습니다. 자동차 보험료 등 연납이나 반기납이 가능한 것은 가능한 수확기에 맞추고 친구들과의 상조계 등 정기회비도 연말에 한꺼번에 납부할 수 있도록 양해를 구합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겠지만 지역 협동조합 등은 대부분 농자재나 사료비 등 일정기간 무이자 외상제도를 실시하는 만큼 적극 이용하여 금융비용을 절약하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밖에 농업외 소득을 올리는 방법도 잘 찾아보면 길이 보일 것입니다.
제 경우는 귀농 7~8년차까지는 도심에 갈 기회가 있을 때 쌀과 잡곡 등을 미리 주문받아 배달하였습니다. 쌀은 산지와 소비지의 시세차이가 80kg 한 가마당 대략 2만원쯤 됩니다. 열가마를 매달하면 20만원이 떨어지므로 제사나 친구 모임에 빈차로 간적이 없습니다. 가을 수확기에는 서리태 등 잡곡을 더하여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쌀은 동네 방앗간에서 사고 잡곡은 동네 주민으로부터 시장가격에 조금 더 얹어드리면 양쪽 모두 만족한 거래가 되니 주민들과의 관계도 좋아집니다. 지금은 판로가 안정되어 그럴 필요가 없으나 귀농초에 다른 판매처가 없을 때 시도해볼만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운전에 자신이 있고 농사일이 많지 않다면 소유한 트럭을 이용해 배달 대행을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저는 일이 없는 한겨울에 3개월간 일주일에 다섯 번씩 풀무생협의 농산물을 대형마트에 납품한 적도 있고 작목반의 생강을 가공처에 직접 배달하기도 했습니다. 조합에서야 어차피 영업용 차를 쓰게되니까 그걸 대신하는 겁니다. 생산자가 직접 납품을 가면 조합이나 가공공장에서도 더 미더워할뿐더러 가공과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자신이 소속된 지역 협동조합이나 영농조합법인, 기타 배달수요가 있는 곳에 미리 귀띔을 해두면 부수입을 얻을 기회가 심심치 않게 찾아옵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지역에서 일거리를 찾아 열심히 하면 단순히 용돈외에도 평판도 좋아지고 기대하지 않았던 여러 가지 다른 기회를 만나거나 제의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생산보다는 투입을 최소화해야
경작면적이 7천여평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도 저희 농장의 연간 유기질 비료(유박)구입 비용은 한 해 7십만원을 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는 동료들과 일년에 두 차례 4~5일간 보령의 야마기시 닭장에서 똥을 퍼오고 인근 우사에서 쇠똥을 퍼다 썼습니다. 똥을 나르기 위한 기름값을 더해도 직접 비용은 아마 백만원 안팎이었을 겁니다. 평소 좌우명이 ‘무슨 일이든 내 손으로 직접 한다’였으므로 불가피한 일이 아닌 한 남의 손을 빌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임대농 시절에는 거름을 얻을 요량으로 한동안 날마다 낙농가에 가서 직접 젖소의 배설물을 긁어모으는 작업을 했을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어쩌면 돈을 받고 해야 할 일을 시큼한 젖소 물똥을 얻기위해 출근하다시피 했으니 지금 돌이켜봐도 귀농초의 열정이 새삼스럽습니다.
농기계 작업도 처음 5년간은 경운기와 관리기만으로 논밭을 휘젓고 ^^ 다녔습니다. 경운기 한 대는 아예 로터리를 붙여놓고 트랙터 가진 사람보다도 더 자주 모심기 전에 로터리 작업을 한 경험도 있습니다. 작은 관리기를 갖고도 동네 어르신들의 밭에 부지런히 드나들었지요. 때로 삯을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품으로 대신 받으며 지갑에서 돈이 나가는 걸 최대한 줄이려 애썼던 기억이 납니다. 이 시기에는 예비 귀농인들이 “일년 수입이 얼마나 되세요?”라고 물으면 “돈도 없지만, 돈 쓸 시간도 없다!”고 답했지요. 그저 일하는 게 좋고 재미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홍성의 귀농 동료들 역시 비슷비슷 했습니다.
비교적 돈이 많이 드는 벼수확 작업은 비용을 줄이고자 낡은 3조 포대형 콤바인을 세 농가가 공동으로 사서 운용한 적도 있습니다. 5대 필수 농기계(68마력 트랙터, 콤바인, 관리기, 경운기, 승용이앙기)를 모두 갖췄지만 과거 보행이앙기를 귀농 후배와 공동으로 산 걸 제외하면 모두 중고입니다. 그밖에 스키로더와 중경제초기(중고 공동구입)까지 영농에 필요한 농기계들을 두루 갖췄지만 농기계 투자금액은 2천만원을 넘지 않습니다. 신제품 중형트랙터 한 대 값도 못되는 금액입니다. 농촌에서 살아남으려면 중고품이 다소 불편하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는 차량도 마찬가지여서 아직 한 번도 새 차를 장만한 경험이 없습니다. 새 차에 붙는 고율의 취․등록세가 아까워서라도 새 차는 구입할 엄두가 안납니다. 이들 세금이 면제되는 경차라면 모를까 앞으로도 제가 소형차 이상 새 차를 사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귀농 십년후에 찾아온 변화들
귀농 십년을 넘기며 저희 부부에게도 작지만 많은 변화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사이 집과 게스트 하우스를 짓고 시설하우스를 6백평 지었습니다. 하우스를 손수 지으면서 아내의 몸에 무리가 되어 8백평 밭에 처음으로 목초를 심게 되었습니다. 저희로서는 굉장히 큰 변신이지요. 사람 먹을거리를 심던 밭에 소먹이를 심는다? 아직도 과거의 치열함이 누그러진듯해 많이 아쉽습니다. 귀농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밭을 늘려쓰기 위해 참깨와 고구마, 고추와 고구마순을 혼작하고 완두 ․ 감자->참깨->김장채소를 시기별로 심는 3모작을 금과옥조처럼 실행에 옮기던 날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소처럼 일하는’ 시기였지요.
2007년 이후에는 각종 귀농 ․ 친환경농업 교육 출강 횟수가 잦아지고 무슨 회의, 세미나 등에 자주 나가면서 농사현장에서 조금 멀어진듯 합니다. 올 한 해도 아내가 뒤늦은 대학공부를 시작하고 농촌진흥청의 교육농장으로 지정되어 시설 준비하랴 관련 교육받으러 다니랴 바쁘게 보냈습니다. 농사는 어땠냐구요? 썩 좋지 않았네요. 제 잘못은 아니지만 교육농장 사업준비로 바쁜 탓에 위탁한 모가 본논에서 키다리병 증세를 보여 수확량이 줄고 하우스 생강이 해충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상기후로 인해 하우스 생강을 심은 작목반원 대부분이 같은 피해를 입었지만 차분히 대응하지 못한 원인도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농사는 철저히 들인 정성에 비례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한 해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긍정적인 변화라면 과거에 비해 여유로워진 마음새입니다. 예전에는 목표가 너무 분명해서 정해진 시간에 반드시 해야 했다면 지금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고 해야 할까요? 아내는 더 이상 제게 ‘독일병정’의 이미지가 묻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가끔은 오히려 예전의 모습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자신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요 몇년간은 아내말대로 돈이 전혀 되지 않는 ^^ 귀농상담과 안내에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들였습니다. 시도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와 예기치 않은 방문, 이메일 문의 등으로 조금 고달픈(!) 게 사실입니다. 오늘도 동네에 귀촌한 화가 선생님을 위해 상량식 축문(祝文) 작성과 도시민 빈집 안내로 두 세시간을 보냈네요.
농가소득 2천 4백만원, 때로는 달성하고 싶은 푯대였기도 했고 때로는 땀흘린 댓가로는 불만스런 수치이기도 했지만, 몸도 마음도 조금 더 여유로워진 지금은 흙이 주는 월급 백만원을 아내나 저나 전보다 소중히 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걸 잘 쪼개야 귀농운동본부를 비롯한 시민사회 단체에 내는 몇푼 안되는 후원금도 지속할 수 있을 터이고, 우리 이십여 동물 가족들과 일년내 부비고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여태까지는 이 금액으로도 도시에서 두 배 이상 버는 친구들 부럽지 않게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그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後記
지금, 소나무 아래 언덕배기 축사에서 십자 미니 당나귀 당이가 수탉처럼 길게 울어 제끼네요. 태어나고 자란 몽골을 떠나 이국멀리 우리 집까지 왔는데 그런대로 잘 적응하는 것 같아 대견합니다. 얼른 가서 좋아하는 배추 한 통 던져주고 와야겠습니다. 곧 이 놈을 타고 다니려고 안장도 사고 마차로 개조하려고 4륜 자전거 한 대도 사놨습니다. 홍동천에 벚꽃이 흐드러질 무렵 당나귀를 타고 느릿느릿 면내를 한 바퀴 돌면 그보다 더한 흥이 또 없겠지요. 그 즈음에 저희 집에 한 번 놀러 오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