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한 사람이 아니라, 부러운 사람이다 >
선교사 겸 간호사로 전남 목포에서 명도복지관 등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는 아일랜드 출신 제라딘 라이언(76) 수녀가 언론에 소개 됐다. 그는 이제 “내 고향은 목포”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 사람이 됐고, 목포 지역 장애인과 그 가족들을 돌보며 인류애를 실천한 공로로 호암상(삼성호암재단) 사회봉사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소개된 기사를 읽으면서 그 분이 한 말이 공감돼 얘기하는 것이다.
라이언 수녀는 '장애인들은 불우한 사람이 결코 아니다'라고 하며, 그들은 ‘부러운 사람’이라고 말 한다. 장애인들은 싸우다가도 다시 포옹하고 ‘사랑해’라고 말하기까지 1분이면 되지만, 보통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얘기다.
관련해서, 필자가 하려고 하는 얘기는 단순히 위로하기 위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라이언 수녀의 '장애인은 결코 불우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러운 사람들'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필자로서는 자랑스럽지 않은 얘기지만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이다.
필자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가 있었다. 60대 후반쯤 될 때다. 새벽 5시면 검은 작업복을 입고 강남지역 어느 전철역 출구에서 몇 년 동안 일한 때가 있다. 무료일간홍보지(메트로, 포커스 등)를 배부하는 일이다. 각 출입구에 배포대를 설치해 놓고 뛰어 다니며(경쟁) 홍보지를 올려 놓고, 사람들이 다 가져가면 또 다시 올려 놓기를 반복하는 일이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대로 눈비를 맞으며 일한다. 길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폐지로 가져가려는 젊은 사람들과 멱살 잡고 싸우기도 여러번 했다. 당시 나의 삶은 부정적이었고 도전적이었다. 일 자체를 비하하는 말은 아니지만 평생동안 이런 일은 해 본적이 없다. 물론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당시 나의 삶의 상황이 그러했었다. 그래서 유니폼을 입고 두터운 모자를 눌러쓰고, 코로나 이전임에도 마스크를 쓰고 일을 한다. 혹시 아는 사람이 지나간다고 해도 얼굴을 알아볼 사람은 없다. 작업시간이래야 3시간 정도, 받는 돈은 겨우 월 30만원이다. 먼동이 틀 무렵이면 일이 거의 끝난다. 한겨울임에도 모자를 쓴 이마와 등에는 땀이 흐른다. 그런데 그 때에 느낀 것이 있어서 하는 얘기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삶은 부정적이었고, 피곤하고, 부끄럽고, 절망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혀 그러한 생각이 들어가지 않았다. 신비스러웠다. 마음이 가벼웠고 편안했고 평화를 느꼈다. 부끄럽거나 절망감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설적이지만 비참했지만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선택된 느낌이 들었고, 그리고 감사함을 느꼈다. 진정 감사함을 느꼈다. 인간의 생각대로라면 부요하고 건강하고 부족함이 없을 때 그 때에 만족하고 평화로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물질과 건강과 세상적인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평화와 행복은 반드시 물질이 있을 때가 아니고, 권력이 있을 때가 아니며, 건강할 때가 아니라, 몸이 불편할 때, 병 들었을 때, 가난할 때, 절망스러울 때, 텅 비었을 때, 그 때에 진정한 마음의 평화와 행복과 만족을 느낄 수 있고, 신(神)이 버렸다고 생각 될 때에 신(神)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신비스러움이다. 자위하려는 말이 아니다.
몸이 불편하다는 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고, 버림 받은 것이 아니며 그래서 쓸모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는 것이다. 삶은 공평하다. 신(神)은 모든 삶에 대하여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공정하다. 머리가 좋으면 노래를 잘 못 부르고, 달리기를 잘하면 공부를 잘 못한다. 몸이 불편하다는 것은 또 다른 큰 이유와 보이지 않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불편한 몸으로, 아니 불편했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 이상으로 성공한 영웅들이 얼마던지 있다.
삶은 공정하다. 눈에 보이는 차이가 있을 뿐이고, 또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공정한 것이다.
부라운 수녀의 '불우한 것이 아니라 부러운 것'이라고 한 말은 진정 맞는 말이고, 필자는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이 기회에 필자의 삶의 느낌을 얘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