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 초, 화물연대 파업 노동자들이 정권의 탄압을 피해서 서울
대학교로 들어왔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과도한 노동시간으로
인해 항상적 사고 위협 속에서 운전하면서도 기초생활조차 보전
하기 힘든 수임료를 받으며 일해왔다. 노동자들은 정부와의 대
화를 간절히 호소해왔으나 정부는 노동자와 성실히 대화하기는
커녕 애초의 합의사항마저 손바닥 뒤집듯 어기고 공권력을 동원
해 노동자들을 파업으로 내몰았다. 힘없고 빽 없는 노동자들은
우리 서울대학교에 잠시의 거처를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화물연대 파업 노동자들을 맞이한 것은 서울대 학생들
의 따뜻한 연대의 손길이 아니라 싸늘한 외면이었다. 일부 서울
대 학생들은 라운지 사용권을 침해당했다느니 더럽고 험악한 외
부인을 학교에서 보기 싫다느니 야멸찬 반응을 보였으며, 사이
비 진보론자들은 짐짓 합리적인 양 그럴듯한 평론을 늘어놓으
며 양비론을 펼치기도 하였다. 하기는 학생운동 조직들조차 상
당수 정파가 연대투쟁을 외면하고, 극소수의 학생들만이 노동자
들의 투쟁에 함께 했을 뿐이니 부끄럽기는 매한가지다.
이 일은 우리 서울대의 썩은 정신상태, 민중혐오증을 적나라하
게 보여주었다.
2년 전에는 농활도중 농촌의 한 마을청년이 술자리에서 자신이
행한 언어성희롱에 대해 마을에 공개사과대자보를 붙이지 않았
다는 이유로 농활대가 철수를 하는가 하면, 올해 여름에는 대학
에서도 쉽게 합의되기 힘든 정도의 성폭력 규약문을 만들고 이
를 농민회가 수용하지 않으면 서울대농활을 가지 않겠다는 사실
상의 ‘협박’마저 서슴지 않았다. 농촌출신인 한 친구는 그 소
식을 듣고는 “농민이라고 호구로 보는 거냐. 그래 서울대나 다
니는 대단한 분들이 무지랭이 농민들과 대화가 안되지”라며 힐
난하였다. 물론 여차여차한 과정을 거쳐 농활은 다행히 정상적
으로 진행되었지만 그때의 부끄러움이란 잊을 수가 없다.
서울대생에게 “민중”이란 무식해서 훈육할 대상인가.
심지어 얼마 전에는 한 학생이 김밥할머니에게서 산 김밥을 먹
고 배탈이 났다는 이유로 대학본부에 얘기해서 그 할머니를 쫓
아낸 낯부끄러운 일도 있었다. 도서관에서는 타대고시생, 지역
주민을 비롯한 비서울대생을 내쫓아내야 한다는 노골적인 이기
적 주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펼치는 이들도 있다고 하니 이곳이
사회로 열린 지성의 산실인지 가진 자들의 사유공간인지 의심
케 한다.
우리 서울대생들은 그저 제 앞의 권리 챙기기에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민중의 삶과 생활에는 조그만 배려조차 못하는 옹졸하
고 이기적인 인간군상이 되어버렸단 말인가. 김밥할머니, 비서
울대생을 학교에서 내쫓아야 직성이 풀리는 약자 위의 군림자
가 되어버렸단 말인가.
병든 서울대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2. 서울대에 '청년' 조영래는 없다.
서울대 학생운동가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대학생 친구를 가지고 싶다”던 전태일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
고 노동자 전태일의 투쟁에 함께 하려한 '청년' 조영래는 이제
서울대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대신 껍데기만 진보를 뒤집어쓰고 생태주의자입네, 페미니스트
입네, 좌파입네, 민족입네 거들먹거리면서 실상은 변호사, 정치
인, 기자, 교수, 기업가가 되려 아등바등 힘쓰는 현실적 출세주
의자만 잔뜩 늘어나고 있다. 노동자, 농민이 되어 살아가는건
능력없는 비현실주의자 취급을 받는 지경이며 지역단체, 청년단
체 등 민중을 위해 자그마한 힘을 보태는 것조차 쉽게 찾아보
기 힘든 지경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80년대 이후의 서울대 총학생회장들은 모두
들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김민석은 대통령이라는 야망
을 향해 온갖 추잡한 짓거리를 저지르더니 결국 오갈데 없는 가
련한 신세가 되었고, 누구는 사시에 합격했다 하고, 누구는 청
와대 비서관이 되었다고 한다. 회사를 거창하게 일으켜 청년재
벌의 반열에 오른 사람도 있다. 들리기로 총학생회장 출신 중에
서 단 한 명만이 민주노총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는데, 과연 이
걸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가!
3. 한국판 보보스족
요 몇 년간 서울대 학생들 사이에서는 페미니즘 등 이른바 “생
활진보”가 붐이다. 좀 된다하는 과에는 어디나 페미니즘 학회
한두 개쯤 존재하고, 페미니즘에 대해서 글줄깨나 읊지 못하면
진보운동권의 축에도 못 끼는 분위기가 되었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 고용차별 반대, 출산휴가 생리휴가 준수,
호주제 철폐, 성매매 근절과 같이 민중의 삶을 바꾸기 위한 진
지한 투쟁을 벌이는 것은 백번 지지해야할 중요한 투쟁이며 여
성운동의 발전은 사회 진보의 주요한 표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당수 페미니즘의 실제 진행과정은 엉뚱한 곳으
로 흐르고 있다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민중의 삶과 무관
하게 중상류층 지식인들의 문화운동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을
뿐 아니라, 심한 경우 민중운동과의 대결을 사명으로까지 여기
는 듯 하다. 노동자들이 소리높여 노래부르는 것을 두고 남근주
의라 손쉽게 비하하는가 하면, 몇 가지 단어를 물고 늘어져 민
중진영을 마초이즘이라 낙인찍어버린다.
언뜻 보면 날카로운 비판의식 같지만, 실은 지식의 권위를 이용
한 지식엘리트들의 민중혐오일 뿐이다. 이들의 민중관은 민중
을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던 계몽주의 지식인들만도 못하다.
특정 부분의 문제라기보다는 대학개혁, 진보정당, 지역운동, 통
일운동을 포함하여 서울대 학생운동 전체가 지식인운동으로 전
락해가고 있다. 작금의 서울대 학생운동은 민중과 함께 투쟁하
는데 사활을 걸기보다는 지식인의 문화개조운동에 우선적인 가
치를 두고 있으며, 의식은 진보적이라 자임하지만 삶과 행동은
민중의 것과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대의에 따라 투쟁하는 것
이 아니라 자파의 이익을 앞세워 입맛대로 골라가며 투쟁에 참
여하는 것을 이제는 별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민중의 삶과
무관하게 관념으로만 진보주의자를 자임하는 바, 마침내 졸업
할 때가 되면 별 저항의식 없이 출세지향적 미래를 선택하는 것
이 서울대 학생운동의 모습이다.
마치 서구의 새로운 지식엘리트·지식자본가인 보보스족처럼 새
로운 문화, 개혁적 정치의식이라는 보헤미안적 가치와 탈민중,
개인주의, 출세지향이라는 부르주아적 가치가 절묘하게 결합된
한국판 보보스족이 서울대에서 양산되고 있다. 이들에게 진보
란 그저 시대적 유행에 앞서간다는 자기과시욕에서 비롯된 전시
품의 일종일 뿐, 막상 민중들이 투쟁에 나서면 간단히 집단이기
주의로 몰아붙이고, 지식의 권위를 앞세워 민중을 훈육하려 든
다.
4. 다시 “청년” 조영래로!
민중이 어떻게 되든지 나몰라라 하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서울대
를 보고 민중들은 냉소와 불신, 때로는 분노를 보내고 있다. 서
울대가 민중 앞에 떳떳하지 못하게 된 책임은 다른 무엇보다도
서울대 학생운동에게 물어야 한다. 시대와 양심을 선도해야 할
서울대 학생운동은 자신의 임무는 망각한 채 일시적 인기에만
집착하여 출세주의에 영합하고, 개인주의를 조장해왔다.
오래 전부터 서울대 학생운동은 학우들로부터 불신을 받아왔는
데,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학생운동의 진심을 믿을 수도 없
고 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학우들도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다. 제아무리 입으로는 민중을 떠들고 진보를 외칠지라
도 정작 민중 위에 군림해 훈육하려드는 얼치기 진보주의자, 민
중과 함께 투쟁해야할 때 자파의 이익 개인의 이익을 앞세워 민
중을 외면하는 나홀로 개혁주의자를 보면서 장래의 썩은 정치인
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이런 상태에서 근
본은 그대로 둔 채 제아무리 다양성경쟁, 백색경쟁을 벌여본들
결국 마지막 승자는 완전한 백색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서울대인을 꼽으라
면 전태일평전을 써서 당시 학생들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준 조
영래 변호사를 들 수 있다. “청년” 조영래가 서울대인들의 존
경을 한 몸에 받은 것은 그 무슨 세련된 노선을 제시하거나 그
럴듯한 학설을 읊어서가 아니다. 단 한가지, 노동자 전태일의
외로운 외침에 귀를 기울였고 그러한 “청년” 조영래의 진심
을 서울대인들이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이론이 정확하지 않으면 방황하게 되고 참신함을 잃으면 역동성
이 무뎌지지만, 민중과 함께 투쟁하는 것을 망각하는 순간 학생
운동은 그 근본에서부터 무너져 내린다. 서울대는 민중과 함께
하는 “청년” 조영래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