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28일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비상회의가 미국에서 있었다. 백악관에서 곧 바로 마틴 대사에게 전문을 보냈다. 오늘 모두 탈출하라! 헬기를 이용해 도심 속 사람들을 탈출시켜 탄손누트 공항에 대기 중인 대형헬기로 옮긴 후 바다로 간다는 계획이었다. 사이공은 브릿지 교전이 한창이던 때, 남베트남군은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갑자기 그 시각 몰려든 한국인 1백 여 명 ,베트남 드림을 아직 채 꾸기도 전 종말은 오고 있었다. 2시간 안에 철수를 하라. 수많은 문서와 통신장비를 파괴시켰다.
한국 대사관 공식 업무가 끝나고 대사관저로 향했다. 미국이 보내준 버스만 타고 떠나면 되는 상황, 그러나 오늘 비행기 편은 취소 됐다는 연락만 받았을 뿐, 28일 오후 공항 미군 식량창고가 약탈당했다. 이는 미군이 이미 떠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미 탄손누트 공항에 폭탄이 떨어졌다. 그 후 50여명이 마지막 비행기에 올랐다. 4월29일 새벽 탄손누트 공항이 다시 공격당했다. 그야말로 비상사태였다. 탈출을 위해 미 대사관으로 향했다. 미 대사관이 애초 주월 한국 공관원들과 교민들을 집결시킨 곳은 앞서 말한 포인트3 (국제 개발처 직원 숙소 근처). 김영관 주월 대사와 김창근 서기관 일행이 미국 측의 연락을 받고 포인트3로 향했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어 곧바로 미 대사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미 대사관의 상황은 일행에게 여의치 않았다.
미 대사관이 자국 국민을 먼저 분류, 헬기를 이용해 탈출을 시켰고 우리 대사관 직원 및 교포들의 탈출을 계속 뒤로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 미 대사관에 도착해 대사실로 들어갔던 김 대사가 먼저 떠났다는 이야기까지 들렸다. 이대용 당시 공사가 미 대사관에 확인하니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김 대사가 떠난 후 미 대사관측은 미국인을 우선 철수시키고 한국인을 월남인에 우선하여 철수시키라는 본국지시가 없었는데 왜 여기로 왔냐며 우리 공관직원들과 교민들을 탈출시킬 의사가 없음을 내비쳤다.
다음날 (30일)까지 미 대사관에 남아있으며 탈출을 모색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탈출 막바지 마지막 남은 헬리콥터를 타기 위해서 애써봤지만 경비를 서던 미 해병대 대원의 위협에 물러서야 했다. 미 해병대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까지 쏘았다. 마지막 헬기가 떠난 후 이대용 공사 일행은 일본대사관과 프랑스 대사관 등을 통해 탈출을 모색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역시 암흑뿐이었다. 그 상황 헨리 키신저는 우리는 큰 문제없이 탈출 작전을 완료했다고 말을 했다.
외교관들은 한국으로 비상 전문을 보냈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모두 탈출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비극적인 사태를 전혀 알지 못했다. 더 이상 탈출구도 없었고 북베트남 14만 명이 쳐들어오고 미 대사관까지 순식간에 약탈되었다. 시내도 북베트남에 의해 모두 점령당했다. 베트남 통일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남베트남은 오로지 미군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병력이 빠져나가자 한순간에 무너졌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북베트남이 시내까지 진입하자 한국교민들과 외교관들은 그랄 병원으로 향했다. 그랄 병원은 프랑스대사관에서 운영하는 치외 법권 지대였기 때문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한국정부는 망연자실했다.
현지에 남겨진 사람들은 북베트남의 공격보다 북한에 의한 납치가 더 걱정되었다. 미국무부 차관보 필립 하비브는 한국외교관들과 교민들의 탈출은 사실상 어렵다는 전문을 보내왔다. 미국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은 버려졌고 적진 한가운데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다행히 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포고령이 내려졌다. 절대 군인은 총을 쏘면 안 되고 만약 총을 쏠시 살인죄를 적용한다는 내용이었다. 탈출의 기회는 이때뿐이라고 생각한 이대용 공사는 배를 타고 싱가포르로 가자는 의견을 내었다. 하지만 모두들 공사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아서 계획은 무산되었고 해군출신 김창근 서기관은 자신이 총대를 메고 교인 몇 명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기로 했다.
이어서 김창근 서기관의 증언을 들어보자.
< (30일)까지 미 대사관에 남아있으며 탈출을 모색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탈출 막바지 마지막 남은 헬리콥터를 타기 위해서 애써봤지만 경비를 서던 미 해병대 대원의 위협에 물러서야 했다. 미 해병대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까지 쏘았다. 마지막 헬기가 떠난 후 일행은 일본대사관, 프랑스 대사관 등을 통해 탈출을 모색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역시 암흑뿐이었다.
이때 떠난 김 대사의 뒤를 이어 탈출을 지휘한 사람은 당시 탈출을 하지 못해 5년 동안 베트남에 억류되었던 이대용 공사였다. 이후 이 공사, 본인(김 서기관) 일행은 당시 사이공에 있던 프랑스 병원(Gaall Hospital)에 몸을 숨기며 다시 탈출 방안을 강구했다. 하지만 병원 측에서도 베트콩들의 위협에 한국인들을 보호할 수는 없다며 병원을 떠나라고 종용한다. 더욱 더 절망에 빠진 일행은 청산가리와 수면제 등으로 자살하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일단 병원을 떠나긴 했지만 그대로 탈출 의지는 포기하지 않은 일행이 현지에 있던 교민회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여기서 본격적인 독자 탈출방안을 교민들과 모색했다. 처음 나온 안은 서해안지역인 락차를 통해 태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공산군 소굴이라는 이유로 일행들이 반대했고 무산됐다. 그 다음으로 고려된 방안이 붕타우 북쪽에 있는 롱하이로 가서 탈출한다는 것. 하지만 일행은 또 다시 탈출을 포기했다. 탈출하다 잡히면 오히려 생명이 보장되지 않으니 앉아서 보호를 받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렇지만 본인(김 서기관)만은 예외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빠져나가야 겠다는 생각에 탈출을 결행하는 교민일행과 함께 하기로 혼자서 결심했다. 병원에서 이미 자결을 결심했기 때문에 두려울 게 없었다. 이렇게 해서 결국 공관 직원 중 본인(김 서기관) 혼자만 독자 출발하게 됐고 일행은 5월 3일 오전 11시에 사이공 탈출을 감행하게 된다. 이들은 오후 2시 롱하이에 도착하기까지 3시간 동안 6개의 검문소를 맞닥뜨려야 했다. 도중에 베트콩을 태워주기도 하는 모험도 감행했다.
5월 5일, 대만 배를 만났다. 그 배 선장과 타협해서 일부는 그 배에 타고, 나머지는 원래 타고 온 배로 대만 배를 따라가기로 했다. 5월 7일, 대만 선장이 다시 “기름과 물을 줄 테니 내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모두 우리 배로 옮겨 탔다. 5월 8일, 싱가포르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비정이 상륙을 불허했다. 결국 나 혼자 육지에 올라 현지 영사를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9일 나머지 일행도 상륙했고, 우리는 11일 무사히 서울로 귀환했다.>
이 기록은 “외교문서 공개에 관한 규칙”(외교부령)에 따라 생산한 지 30년이 경과하여 비공개 연한이 풀림에 따라 외교문서가 공개된 것이다. 이 탈출 기록 속에는, 김창근 서기관(이후 코스타리카 카자흐스탄 대사를 지낸 뒤 1996년 퇴임)이 외교관으로서 당시의 급속한 상황 속에서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당시 월남대사는 대사관직원들과 교민들을 두고 먼저 떠났다. 그는 유명 해군제독 출신이었다. 역사적으로도 이런 인물들은 많았다. 고려 왕실이 그랬고 조선 선조도 그랬고 6.25 때 이승만도 미아리고개에서 싸우고 있는 국군과 서울시민을 떼거지로 죽게까지 하면서 말로만 북진하고 있다고 녹음기 틀어놓고 도망치는 상황이 아니었던가. 아무튼 대사관 인원들은 미군이 제공하는 헬리콥터로 탈출하기로 하였지만 탑승 지점에서 헬리콥터를 타지 못했고 다시 미 대사관으로 달려갔지만 대사관 경비병은 밀려드는 월남인들을 막느라 아무도 진입을 하지 못하게 막았었다. 만약 월남의 교민들과 외교관들의 총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주월 대사가 책임감과 판단력을 가지고 사이공 철수를 지휘했더라면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지는 않았겠지만 그는 무책임하게도 먼저 헬리콥터를 타고 미 7함대 항모로 탈출해 버렸던 것이다. 이를 알게 된 박 정희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것은 당시 시중에 소문이 다 나있었다. 월남에 남겨진 외교관들 그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미처 탈출을 못하고 남게 된 사람들, 그들은 대사관에서 단체 생활을 했다. 돈이 떨어지자 정부에서 배급을 주었다. 공산국가가 된 베트남, 사이공이라 이름도 호치민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통일 된 4월30일을 해방 기념일로 정해 국경이로 삼고 있으며 4월30일 날짜를 따서 거리이름도 붙여 놓았다. 1945년 9월 2일, 이날은 호지민 주석이 하노이 바딘 공원에서독립을 선포한 날로 이 날도 국경일로 정해놓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호치민 주석이 서거한 날도 9월2일(1969년)이다. 아무튼 승전 축하사절단에는 북한 공산당도 있었다. 한국외교관들의 존재는 이미 북한에 알려졌기 때문에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중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들이닥쳐 안희안 영사와 서병호 총경을 데려갔다. 이제 그들의 납치가 시작된 것일까. 가장 불안한 사람은 바로 이대용공사와 김상우 목사 그리고 이규수 참사관이었다. 우려했던 일은 현실로 벌어졌다. 1975년 10월 3일 이대용공사가 체포되었다. 해가 바뀌자 정부는 한국 교민들을 하나둘씩 출국시켰다. 농자가 1순위, 많이 배운 사람들이나 돈이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출국도 늦어졌다. 외국인 가족들은 같이 출국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여자들이 찾아왔다. 공산화된 베트남에서 나갈 길은 한국교민들과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여인들과 출국을 해 한국에 있는 가정이 깨진 경우도 생겨 났다고 했다. 1976년 5월 한국공관원 6명이 귀환했다. 이제 남은 건 어디론가 잡혀간 3명의 외교관들.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서병호 총경과 안희완 영사는 치와 형무소에 1년 넘게 수감되어 있었다. 그것도 독방에 수감되어 햇살도 보지 못했다. 이대용공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몰래 밀서를 작성했다. 내용은 대통령 살려주십시오. 드디어 한국 북한 그리고 베트남 3자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순흥 사장은 출국할 수 있었음에도 감옥에 있는 외교관들을 뒷바라지 하고자 남았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줄 베트남 여인도 섭외했다. 그녀는 도와주는 대신 자신과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가 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이순흥 사장은 그녀와 위장결혼까지 감행했다. 그는 미간인 신분으로서 오로지 외교관신분들을 위해 희생을 한 것이다. 아마도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남은 외교관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 잇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던중 베트남과 캄보디아 전쟁이 일어났다. 북한 이 캄보디 편을 들면서 베트남과 북한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한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바로 12 12사태, 혼란 속에 기약 없는 세월만 흘러갔다. 드디어 1980년 4월 11일 남은 외교관 3명이 모두 한국으로 출국되었다. 5년만의 일이다. 그 사이 다시 돌아온 서울은 몰라보게 발전했고 그들은 눈물로 서울의 땅을 밟은 것이다.
한 국가가 스러져가는 순간 속에서 한국교민을 살리기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사선을 넘는 LST함대,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끝까지 남은 이대용공사외 베트남 한국대사관 직원들, 민간인 신분으로 도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귀국도 마다하고 남아 그들의 손발이 되어 준 이순흥씨, 대한민국 기자중 유일하게 베트남종전 일까지 사선에서 취재한 한국일보 안병찬 특파원 등등 .... 40년 전 한국인들은 투철한 조국애로 똘똘 뭉쳤고 용감했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그들이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얼굴이 아닌가. 그들의 모습으로부터 지금의 세월호가 다시 투영되는 것은 왜일까. 우리는 잘하고 있는 것인가.
이대용 공사는 어떻게 구출이 되었을까. 이 이야기는 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찌하 형무소에 수감된 이대용 공사의 쪽지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된 그날부터 비상이 걸렸다. “각하께서 눈물까지 보이시며 명령한 것이다.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김재규 정보부장은 차장, 차장보, 국장까지 몽땅 불러 회의를 열고 몇 차례나 이렇게 강조했다. 그러던 차에 하필이면 1979년 10월 26일 아침, 태국주재 대사관에서 전문이 날아들었다. 김인권 대사가 ESCAP총회 도중 구엔 코 탁 베트남 외교담당 국무상을 잠깐 만났는데, 그가 억류공관원 송환에 대해 “아이젠버그를 통하여 연락을 해주겠다. 시간문제이니 최대한 보안에 유의하여 달라고 했다”는 짧은 메시지였다. 나는 외무부에 전문배포를 중지시킨 뒤 즉각 윤일균 차장에게 보고했다. 윤 차장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밀봉된 봉투에 붉은 도장을 다섯 개나 찍어 김 부장에게 가지고 갔다. 하지만 바로 그날 밤 박 대통령은 서거했고, 그를 시해한 김 부장은 체포됐다. 정보부는 계엄사령부의 엄격한 통제 하에 들어갔다. 얼마 후 육군참모차장인 이희성 장군이 부장서리로 임명되었지만 나는 이 기밀사항을 보고하지 않고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때 보안사에서 최예섭 장군을 감독관으로 파견해 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사건건 전두환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12·12 사건 이후 사태가 다소 안정을 찾아가던 12월 말 어느 날, 나는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에게 사령관 긴급 면담을 요청했다. 나는 그간의 과정을 상세히 보고했다. 전 장군은 월남파견 연대장도 지냈기 때문에 이대용 공사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이 사업은 이대용 공사를 비롯한 대한민국 외교관의 생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현재 많은 사업이 중단된 상태지만 이 사업은 계속 진행하여 끝을 내야겠습니다.”답은 예상외로 빨리 왔다. 파일은 남산의 부장 침실 옆 서류함에 있고 자세한 사항은 비서실장 김갑수 장군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김 장군은 연금 상태였다. 나는 보안사 수사처장 이학봉 대령에게 면접허가를 얻어 김 장군을 만난 뒤 남산사무실로 가서 서류파일 일체를 찾아왔다. 파일에는 나의 보고서도 있었고, 김 부장과 아이젠버그 간에 오간 편지도 있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아이젠버그가 ‘상당히 자신 있게’ 공관원을 자기 비행기로 직접 데리고 나오겠다고 약속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나는 즉각 전 장군에게 보고하고, 이 공사 일행의 사기를 고려하여 우선 급한 대로 정부의 확고한 뜻을 전하는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그런데 외교관 출신인 최규하 대통령은 외무부를 통하여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는 박동진 외무장관에게 스웨덴을 통해 외교적 교섭을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베트남정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현명했다. 그들은 아이젠버그에게는 실질적인 성과를 약속하면서, 외부적으로는 중립국 스웨덴이 생색을 내도록 조치했다.1980년 4월 나는 전 부장에게 월남억류 공관원을 구출해 내는데 가장 공로가 큰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아이젠버그였음을 상기시키고 그를 초청해 공로훈장을 수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또 아이젠버그는 국제적인 기업인이니, 앞으로 우리나라 경제발전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물론 아이젠버그를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그가 60년대 외자도입을 알선해서 큰 재미를 보았고, 공화당(창구는 김성곤)과 거래하면서 정치자금을 헌납한 것 때문에 미 의회 청문회에서도 거명된 적이 있었다. 오스트리아 국적의 이스라엘 기업인인 아이젠버그는 한국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원전 건설에 캐나다의 캔두(CANDU)형 원자로 도입을 주선한 인물이기도 하다.그래서인지 최 대통령은 그에게 직접 훈장을 수여하는 것을 꺼렸다. 전 부장이 최 대통령을 대리해 그에게 훈장을 줬다. 그러나 아이젠버그는 전 장군의 훈장 수여를 더 반겼다. 이미 그는 한국정세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는 듯했다. 전 장군도 그를 환대했다.>
저는 글을 참 빨리 씁니다.... 이곳저곳에 자료들을 머리속에서 모았다가 단숨에 풀어헤치듯...하지만 예전 같지않네요... 기억력이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말이죠..... 믿기지 않는 것이 집 키번호를 까먹었다는 거죠. 어제... 그래도 용감합니다.... 책 낼 대상이 4권이나 있다는게.마눌님이 돈을 안줘서 미루고 미루지만 말입니다. 제게 자료 도움 주는 사람이 한 분 있습니다... 대개 논문인데 근무처 기줄정보팀 오박사님이라고 제가 좋아하는 아우입니다. 지난번 허난설헌하고 노천명 전혜린을 묶어 여류 작가들세계를 탐방하려 ... 자료 리스트가 엄텅나 미처 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방대한 자료는 어디서 구하시는지 궁금합니다~~지난 토요일 김진호대장과 대공원둘레길을 걸으며 나눈 대화의 일부입니당!
저는 글을 참 빨리 씁니다.... 이곳저곳에 자료들을 머리속에서 모았다가 단숨에 풀어헤치듯...하지만 예전 같지않네요... 기억력이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말이죠..... 믿기지 않는 것이 집 키번호를 까먹었다는 거죠. 어제... 그래도 용감합니다.... 책 낼 대상이 4권이나 있다는게.마눌님이 돈을 안줘서 미루고 미루지만 말입니다. 제게 자료 도움 주는 사람이 한 분 있습니다... 대개 논문인데 근무처 기줄정보팀 오박사님이라고 제가 좋아하는 아우입니다. 지난번 허난설헌하고 노천명 전혜린을 묶어 여류 작가들세계를 탐방하려 ... 자료 리스트가 엄텅나 미처 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아~~~그렇군요 도움을 주는 지인이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방대한 양이라 건강이 조금 걱정되었거든요 에이~~~로또만 되면 팍팍팍 내놓겠는데 말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