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04년 7월 24일 오후 2시 ~ 6시
♣ 주제 : 광주천 따라 역사도 사상도 흐른다.
♣ 장소 : 광주공원, 사직공원 일대
♣ 강사 : 박선홍(광주 일백년사, 무등산 저자/ 무등산보호협의회 이사장), 김영선 (생태해설가)
♣ 참가자: 이채연, 이경희, 현병순, 임현경(물흙회원), 박지영(모래톱 새 식구)과 아들 서정웅(8세), 고미리(환경연 회원, 중학교 재학 중), 조영미님과 아들, 김성우님과 아들 김푸름찬(초등6), 김세진(광주전남숲해설가협회 사무국장), 성숙희(숲해설가)
주제 말 그대로 광주천 주변 두 공원 일대 좁은 지역을 돌며 몇번 앉았다 일어서길 하며 광주의 근현대사를 넘나들다보니 어느새 약속된 일정이 끝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로부터 옛날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할까요.
박선홍 선생님은 위암 수술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불편하신 몸인데도 참가한 우리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해설을 해 주셨답니다. 우리들이 도리어 선생님 몸 걱정이 되고 뙤약볕에 지쳐서 그만 하시자고 말씀드릴 정도였습니다. 상황이 이해되시죠.
아마도 광주의 근현대사를 실감있게 들려주실 몇 안되는 분들 중 한분이셨을 것 같습니다.
먼저 선생님이 요즘 세상에 환경운동이라는 것은 의병활동 하듯이 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정치적 권력이나 재력을 두루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면 거기에 맞서야 하니 옛날 의병운동 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이죠. 유일한 무기는 시민들의 공감대와 그것을 표현하는 박수. 그래서 해설을 듣겠다고 이렇게 찾은 우리들에게 동지적인 친밀한 벗을 만난 듯 반갑다고 하셨습니다.
때로는 정자에, 때로는 그냥 바닥에, 또는 선채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추려서 정리해 봅니다. 여기 안 실은 이야기 듣고 싶으시면 저한테 직접 대화를 청해 주세요. 기억나는 데로 기꺼이 들려 드릴게요.
■■ 광주공원
1914년 일본이 지금의 현충탑 자리에 신사를 짓기 전까지 원래는 광주공원까지 향교 땅이었다지요. 광주공원에 얽힌 거북이 전설 다 아시죠. 거북이를 붙잡아 광주의 번성을 기원하며 등에 성거사를 짓고, 목부분에 서오층석탑을 지은 이야기 말이에요. 거북이는 위험을 느끼면 등딱지 속으로 움츠려 들지만 이 거북이는 사지를 쫙 벌리고 있으니 광주가 번성할 징조라는 겁니다.
광주의 이런 염원에도 불구하고 일제 때부터 최근에까지 여러 번에 걸쳐 광주공원과 공원 전설의 주인공 거북이의 몸이 훼손되어 온 아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① 1909년에는 거북이 머리 자리에 일본의 남한대토벌작전 때 죽은 일본인 묘지를 만들고, 일본군 충원탑(충혼탑?)을 세우기도 했답니다. 남한대토벌작전이란 1909년 봄 4월 한국병합결정 후 당시 교전이 가장 심각했던 전남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경기도와 일본에서 최신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내려보내 부락민 전원 학살/ 부락 전소/ 전 재산 약탈 이라는 삼강작전을 펼치며 전개되었던 대토벌 작전을 이릅니다.
② 1914년에 지금의 현충탑 자리에 신사가 들어서고, 무진회관자리에 신사관리사무소가 세워졌습니다.
③ 1940년에 일본 건국 2600년 기념으로 이 곳을 국가 관리로 승격시킨다고 하여 다시 신사가 새롭게 조성되었는데 이 때 광주공원의 원형이 거의 사라졌다고 합니다.
④ 일본은 일본 및 사할린, 대만, 몽고 등 동아시아 일대와 우리나라 각 지역마다 나무를 한 그루 이상씩 가져오도록 하여 광주공원을 조성하였는데 해방 후 관리 부재를 틈타 우리 나라 사람들이 함부로 가져다가 팔아먹었다는군요.
⑤ 자연경관이 훼손된다 하는 일부의 반대에도 결국 행정기관이 밀어 붙여 시민회관이 들어서고, 1982년에는 거북이 머리 부분을 폭파하여 그 곳에 전남체육회의 종합체육회관(수궁갈비집 터)이 들어서는 등 여러 가지 시설들이 많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광주공원은 근현대사 속에서의 아픔과 저항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또, 광주공원에 들어서 있는 아카시아, 메타세콰이어, 히말라야싯다 등의 나무들이 그저 서 있는 것이 아니군요. 일본제국주의의 동남아시아 정복과 궤를 같이 하네요.
이어 현충탑과 4․19 위령탑, 조지훈, 박용철, 김영랑 시인의 시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 어린이 공원 자리
어린이 공원 자리에는 현재 어린이헌장탑이 있지만 이전에는 1909년에 ‘조선금융조합창섭설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는군요. 이 조합은 조선총독부가 광주전남지역의 금융권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요, 설명에 의하면 금융조합을 광주에 최초로 세운 것도 남한대토벌작전과 같은 이유로 볼 수 있답니다. 가장 저항이 강한 광주지역에 설립하여 추이를 살펴본다는 것이죠.
‘어린이헌장탑’은 최상옥선생님께서 건설한 것이라고 하는데요, 이 분은 광주에서 최초로 유치원보모를 배출하는 기관과 유치원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분의 어머니는 우리 나라 최초의 여의사라고 하시구요.
■■ 사직공원
1924년 일본황제가 탄생기념으로 신공원으로 조성하고, 벚꽃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국상을 당했을 때 광주시민들은 흰상복을 입고, 사직단에 와서 망곡제를 지냈죠.
1970년대에는 사직단 자리에 동물원이 만들어졌었고, 그것으로 인한 인근 지역의 피해가 커서 동물원을 옮기고 사직단의 일부를 복원한 것이 지금의 모습입니다. 박선홍 선생님께서 어릴 적 보았던 것은 2단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방이라서 1단으로 복원했다고 하네요. (참고: 여단- 연고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영혼을 모시는 단)
아 참, 사직공원에는 광주 최초의 영아원 ‘충원영아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박순이 여사가 세운 것인데 6․25나 여순사건 때 등 전쟁고아들을 모아 수십년 동안 돌봐주셨다고 해요. 끝내 두 번씩이나 시민대상을 거부하고 돌아가셨다는데 묵묵히 숨죽여 소중한 일들을 하신 분이시죠.
■■ 광주천 주변 건물과 얽힌 이야기 하나
사직공원을 내려오면 양림파출소 자리가 있지요. 그 양림파출소 옆길 건너에 치과의 건물이 보입니다. 2층으로 올려다보면 앞벽면에 노란색 별 모양이 걸려 있습니다. 그 별과 관련하여 또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제와 관련되기도 하고, 광주지역의 체육과도 긴밀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 건물은 1931년에 김후옥이라는 분이 세운 광주 최초의 체육관 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 때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6개월 복역 후 나와 민족의 힘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도장을 만들었는데, 사범자격증이 없다 하여 인정 안해주자 일본인도장에서 6개월만에 자격증을 따고 지금의 그 자리에 유도, 역도, 레슬링 등의 도장을 세웠는데, 그 앞에는 눈속임으로 점포를 만들어 ‘거북선표 고무신’만을 팔았답니다. 그 상회 이름이 ‘녹성상회’이고, ‘평화와 희망’을 상징하는 녹색별을 만들어 부착한 것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그 자리에 치과를 개업한 사람이 그 별의 뜻을 모르고 지금의 노란색으로 칠한 것이래요. 아무튼 이 별 때문에 일제 때나 6․25 등 뭔가 큰 난리 때마다 특별하게 눈에 띄어 그 별의 의미가 무엇인지 캐려했기 때문에 수난을 당했다고 하네요.
김후억은 광주 최초의 체육관 설립자로서 광주 체육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 하나. 그 유명한 김두한은 김무억의 소개로 이 김후억과 형제의를 맺은 사이랍니다.
■■ 광주천 다리에 얽힌 이야기 하나 - 부동교
예전에는 부동교 작은 다리에 작은 시장이 열렸었데요. 이 작은 시장이 일제 때 만세운동 목소리의 집결지였다지 뭐예요. 1919년 3월 10일 광주의 작은 장날에 이 장터로 수피아여고, 광주농업고등학교,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이 집결하여 3․1만세운동을 벌였데요. 또 광주학생독립운동 때도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이 작은 장터에서 모여 우체국으로 행진했다니 광주천 따라 광주시민들의 도도한 기개가 새삼 느껴집니다.
박선홍 선생님의 힘있는 목소리로 공원과 광주천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니 옛날 이야기 들었을 때처럼 포근하기도 하고 괜시리 힘이 납니다. 광주 근현대사를 넘나드는 여러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선생님은 환경오염은 ‘문둥병’과 같다고 하시더군요. 왜냐구요? 문둥병자들이 손가락, 발가락 떨어져 나가는 것의 아픔을 못 느끼듯이 환경을 오염시키고 훼손하는 그 당시에는 그것이 우리들을 얼마나 아프게 할지 모른다는 것이죠. 참 적절한 비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멀리 보는 눈을 가지고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기 전에 움직여야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