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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에서 36장까지의 의미분석 | ||
선민의 열조와의 언약 | ||
12~20장 아브라함과의 언약 | 21-26장 이삭의 언약 계승 | 27~36장 야곱의 언약 계승 |
12-14장 가나안 땅 언약 15-16장 자손 번창 언약 17-20장 열국 통치 언약 | 21-23장 언약 계승의 준비 24-26장 언약 계승의 실현 | 27-28장 야곱이 받은 복과 언약 29-36장 야곱의 복과 언약 성취 |
21장부터 26장까지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을 계승하도록 하시는 섭리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언약을 믿지 못하여 계집종을 맞아들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사라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언약하실 때에도 그는 비웃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애굽이나 그랄 지방에 갔을 때에는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언약을 믿지 못하여 하나님께 불신앙적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세우신 ‘나라’에 대한 세 가지 언약을 그의 자손을 통해 이루어 주시려고, 언약을 계승시키실 준비로 아들 이삭을 출생하게 하신 후 그 아들에게 언약을 계승하게 하시는 섭리를 하십니다. 이는 그 언약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거이며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에 대한 확증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여호와께서 첫 아담에게 세우신 실체적인 나라에 대한 세 가지 언약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반드시 실체적으로 이루어 주실 것을 확증하여 주는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적 언약 섭리입니다. 이와 같은 언약 섭리는, 언약 자손들로 하여금 언약을 이루시는 여호와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경외하게 하시려는 데 근본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21장부터 23장까지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으로 언약을 계승하도록 준비를 하게 하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낳은 이삭을 보호하시고,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며 언약을 재확인하여 주시고 그리고 이삭의 어머니 사라를 죽게 하시고 이삭에게 언약을 계승하게 하실 준비를 완료하시는 섭리를 하십니다.
21장은, 17장 21절의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고 말씀하신 전능자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내용과 하나님의 언약이 계승되는 준비 내용인데, 먼저 1절에서 7절까지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이삭을 낳고 할례를 행하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손을 주신다는 여호와의 언약을 비웃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귓등으로 들렸고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1절) 사라가 임신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게 됩니다(2절).
1절과 2절에 연속하여 언급하는 것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리고 덧붙혀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시기’까지 거듭하여 드러내는 것은, 이삭이 태어난 것이 ‘언약하신 대로’였으며 그리고 그 시기까지 어김없이 이루어 주셨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늙은 아브라함에게’라는 말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아브라함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대로 사라의 배에 역사하셨고 그리고 그의 배가 점점 불러옵니다. 이때서야 아브라함과 사라는 여호와 하나님을 내면 중심에서부터 진심으로 믿게 되며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전능하심을 부정할 수도 없고(17:1) 부인할 수도 없는 전능적 사건이 자신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때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낳은 아들의 이름을 결코 뒤바꿀 수가 없는 이름 ‘이삭’으로 짓습니다(3절). 전능자 여호와 하나님의 명이시기 때문입니다(17:19). 여호와께서 언약을 이루어 주시니까 아브라함이 믿게 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라는 이름’을 부르고 들을 때마다 ‘자아’를 부정하게 만드는 절대적 능력이 됩니다. 오직 전능자 여호와 하나님만을 따르며 순종하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자손을 만들 수 있는 힘이 끊어진 99세 때에 자신 앞에 나타난 여호와의 언약을 비웃음으로 응답하였지만, 여호와께서는 이름까지 지어 명하셨는데 그 이름이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작년 이맘 때에 나타나셔서 자신을 ‘전능자’라고 소개하시며 ‘명년 이 기한’에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라 명하신 ‘전능자 여호와’ 하나님을 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명하심에 오로지 믿음과 순종으로 응합니다.
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도 부모의 의사는 없고 오직 하나님의 명으로 ‘이삭’이라 부르고, 또한 아들 이삭이 태어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하나님의 명대로 행합니다(4절).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십니다.
신약교회 성도가 땅 위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께서 천국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천국이 있다는 것도 천국에 가게 되리라는 것도 믿어지게 되며, 천국에 대한 소망도 분명해집니다.
택한 백성들이 지상에 머무는 동안에는 믿음이 온전하지 못하지만 천국에 가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언약대로 메시야를 보내어 주셔서 죄에서 구속하여 주시고 천국에 인도하여 주시니까 택함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이 믿어지게 되고 경외하게 되어 영원토록 찬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여호와께서 언약을 이루시는 섭리를 택자에게 깨닫게 하여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8). 아브라함과 사라도 여호와의 언약을 불신하였으나 그 언약의 말씀을 이루어 주셔서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하나님의 명대로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할례를 한 표적을 볼 때마다 다시 기억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5절)입니다. 이삭이 태어날 때에 사라는,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6절). 또 사라는 말하기를,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라고 합니다(7절).
*5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의 요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불가능’과 ‘전능’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다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백 세’라는 단어와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나라의 특징이 이렇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라의 죽은 몸에서 아들이 태어났고 그 아들은 곧 이삭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라로 하여금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17:16).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처녀의 몸에서 예수님을 탄생하게 합니다. 사라의 죽은 몸에서 이삭이 태어났고 처녀의 몸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십니다. 예수님으로 온 땅 모든 주의 택한 백성들이 만들어지는데 이들이 곧 교회입니다.
8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은 이삭이 출생하여 자라는 과정에서 계집종 하갈에게서 출생한 이스마엘에게 희롱을 당하는 내용입니다.
이삭이 자라매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풉니다(8절). 창16장16절을 기준삼아 나이를 확인하면 이삭이 젖을 떼는 나이가 3세입니다. 이때 사라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9절).
9절에서. 이삭을 희롱하는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을 ‘애굽 여인’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하갈이 택자가 아닌 이방 여자임을 드러내어 그 여인의 아들 이스마엘이 언약으로 난 택자가 아님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보다 훨씬 먼저 출생한 자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육체를 따라 난 자라고 하였고, 이삭은 약속대로 말미암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종인 하갈과 자유자인 사라를 두 언약으로 비유를 하였습니다(갈4:22~26).
다시 말하면, 이스마엘은 종인 하갈의 몸에서 육체를 따라 난 자이고, 이삭은 자유자인 사라의 몸에서 약속으로 난 자인데 이들을 낳은 두 여자들이 곧 종과 자유의 두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고 이스마엘은 종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율법의 종이 아니라 자유하는 여자 사라에게서 난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의미이며 그래서 유업을 이를 자라는 뜻입니다.
10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는 사라의 말을 듣고 근심하는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다 들으라고 명하시는 내용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10절)고 합니다. 사라의 요구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로 말미암아 몹시 근심합니다(11절).
*왜일까요?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왜 함께 살 수 없으며 기업을 함께 얻지 못할까요?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자녀이지만 육체적인 힘의 자녀이므로 본질이 다른, 이삭과 같은 자녀가 아니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명하십니다(12절).
사라의 요구가 맞다는 것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 둘 다 모두 아브라함의 자녀이지만, 이삭은 자유자의 자녀이며 이스마엘은 종의 자녀이므로 함께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조카 롯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져 가나안 땅을 떠나 갑니다. *왜일까요? 이는 가나안 땅의 주인은 아브라함의 후손들만이 거주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 시대 때에도, 바벨론(바사시대) 땅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피가 섞인 자들은 내쫓았습니다. 신령적인 것과 육적인 것은 결코 함께 하지 못하며 섞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12절하)고 선포하십니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씨 임에도 불구하고 이삭에게서 난 자만이 아브라함의 씨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이삭은 언약자손이요 믿음의 씨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지만 이삭은 아브라함의 육적인 힘으로 태어난 자가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 언약대로 태어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네 씨’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이삭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고 하신 말씀은 아브라함의 씨,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시겠다는 의미로 이해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주시고자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고 아브라함에서 이삭의 줄기따라 태어난 자들을 믿음의 자녀라고 합니다.
위의 내용들을 요한복음 1장12~13절 말씀에서 정리합니다.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여기서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은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지만 육의 힘으로 태어난 이스마엘을 가르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이삭을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혈육의 자녀가 아니라 영적 믿음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아브라함에게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13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세계사를 이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어 가실 일들을 계시하심입니다.
14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은 이브라함이 내어보낸 하갈이 이스마엘을 데리고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다가 가지고 간 물이 다함으로 방성대곡하는 내용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 이스마엘과 그의 어미 하갈로 하여금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주며 떠나게 하고 이들은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합니다(14절).
그리고 그들은 가죽 부대의 물이 떨어지는데, 이에 하갈은 이스마엘을 한 덤불 아래에 두고서(15절) 자신은 화살이 미치는 거리만큼 반대편으로 가서 마주 앉아, ‘내가 자식이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말하며 소리 높여 웁니다(16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이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 보내게 됩니다.
‘브엘세바 들’은 헤브론에서 서남쪽으로 약 45km 지점에 있는 곳으로, 그들은 거기서 이리저리 방황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화살 한 바탕 거리’라는 말은 활을 쏘면 화살이 나가는 사정 거리를 표현하는 말로서 길이로는 약 270m 가량 되는 거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갈은 아들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큰 소리를 내어 통곡한 것입니다.
하갈은 아들 이스마엘이 죽을 것만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죽을 아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하갈이 이스마엘을 잉태하고 사라의 학대를 피하여 도망을 갔을 때, 그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그 자손으로 번성하게 하여 주신다고 약속한 사실이 있고, 아브라함에게도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고 언약하여 주신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갈이 보기에는 이스마엘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17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이스마엘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을 언약하여 주시고 샘물을 내어 먹게 하신 후, 하갈이 애굽 여인을 취하여 아들의 아내로 삼는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7,18절)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에게, 앞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을(13절) 상기시키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스마엘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을 언약하십니다. 이스마엘과의 언약은 은혜 언약이 아니라 일반 언약입니다. 그러나 이삭과의 언약은 특별 은혜에 속하는 은혜 언약입니다. 두 아들에게 모두 언약하시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언약입니다.
이스마엘에게도 언약을 하셨으므로 이스마엘은 결코 죽을 수가 없습니다. 죽으면 하나님의 언약이 실행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눈을 밝혀 샘물을 보게 하시는데, 이에 하갈은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합니다(19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과 함께 하시는데 그 아이는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고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을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줍니다(20,21절).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스마엘이 자손 번성과 큰 민족을 이루고자 하는 출발입니다.
22절 이후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언약대로 변함없이 보호하시는 내용인데, 22절부터 34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아비멜렉과 서로 맹세를 하게 하시고 브엘세바에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섭리 내용입니다.
그 무렵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키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22,23절)고 말합니다. 평화조약을 맺자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힘이 없으나 언약대로 아브라함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주변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한 개인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아브라함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우리와 싸우지 말고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하고 그리고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맹세하라고 합니다.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한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요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생계를 위해 정처없이 그랄 땅에 왔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서도 당당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내를 누이라 속이며 거짓말까지 하여 자칫 죽을 수도 있었던 아브라함에게 화를 복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택자의 신분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되어 선으로 결과가 마무리되는 자가 바로 언약 자손입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의 요청에 아브라함은 맹세할 것을 말하고서(24절)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25절),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26절)고 할 때에,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웁니다(27절).
자기 자신은 아무런 힘이 없으나 자신과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므로 아비멜렉 왕에게 우물 사건에 대해 책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28절),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놓은 이유를 묻습니다(29절). 아브라함은 우물을 자신이 파 놓은 증거로 이 새끼 암양 일곱을 주고자 함이다고 대답합니다(30절). 아브라함 소유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거기서 맹세를 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합니다(31절).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운 다음에,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장관 비골은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갑니다(32절).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물이 귀하여서 우물에 대한 소유권은 대단한 재산이기도 합니다. 물이 귀한 들에서 사람에게는 물론, 목축업을 경영하는 데 있어서 소나 양에게는 우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재산을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의 언약에 의하여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아비멜렉과 군대장관 비골이 돌아간 다음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33절)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게 됩니다(34절).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고서 그랄 왕 아비멜렉으로부터 보호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에셀 나무를 심고서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성취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송축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거울로 삼아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했으면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세상에서 말하는 믿음과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의지에 의한 믿음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정성이 들어가서 의지력으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자아도취에 의한 것이요 자기 중심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한 결과로 믿음이 생성되어 집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의 중심은 메시야 예수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 보내실 것을 언약하셨고 그 언약대로 메시야께서 오셨는데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