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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요한을 가장 높은 자라고 칭찬하시는 예수님
눅7:19-35 요3;22-30
한 해의 마지막 달 12월을 맞이하면서 벌써부터 백화점이나 상가는 크리스마스트리로 성탄분이기를 내면서 고객들을 유치하고 지하철역 곳곳에서는 구세군의 자선남비가 등장하면서 크리스마스시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탄생에 대해서는 복음서에 자세히 나오는데 성경어디에도 예수님이 12월25일 탄생하셨다는 곳은 없는데도 대부분의 교회들이 기독교 전통이라는 이름하에 태양신 탄생일인 12월25일을 예수님이 탄생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기이한 일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 해본다. 예수님이 탄생할 장소는 미가서를 통해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5:2). 그런데 예수님을 낳았던 마리아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았는데 그들은 미가서를 몰랐는지 출산일이 다가와도 베들레헴으로 되돌아올 꿈도 꾸지 않고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성취하시고자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를 통해 칙령을 내려 온 세상이 조세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저마다 자기 고향으로 가매 요셉도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와 베들레헴에 이르렀다. 미가서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는데 그 날짜는 바벨론 태양신 니므롯(담무스) 탄생일인 12월25일을 예수탄생일이라고 하니 이는 무지의 극치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며 기독교 300년 동안 예수님 공생애동안이나 초대교회에서 예수님탄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탄생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12월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은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 오시기 이전 수백년동안 12월22일 동지날 해가 죽었다가 3일후 25일에 해가 다시 살아났다하여 바벨론 태양신 탄생일에서 온 줄도 모르고 태양신 축제날에 그리스도인들이 성탄절이라고 놀아나는 실상을 보면, 무지함을 금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12월 25일은 어디에 그 연유를 둔 것이냐 하면 성탄절이 로마의 국가 공인을 받은 것은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례를 받은 직후이며, 교회가 공식적으로 예수 성탄일을 12월25일로 정한 것은 354년 로마의 리베리우스 주교는 12월 25일을 성탄으로 로마 축일표에 기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진짜 탄생일은 언제란 말인가? 누가복음 2:8에서 천사가 베들레헴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었던 때는, 목자들이 들판에서 양떼들에게 풀을 먹였으며, 밤에 들에서 양떼들을 지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겨울은 밤에는 상당히 추운 계절이므로 11월 이후에 목자들이 들판에서 양떼들을 먹이고 지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3월 하순이나 4월 초순경부터 양떼들을 들판에 방목하다가 10월말 경 추위로 인해 양떼를 집 우리 안에서 겨울을 나게 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예수님 탄생일이 늦어도 10월말 또는 11월초 이전임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 탄생 시기에 출산이 임박한 여인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직선거리 170km인 이렇게 먼 거리를 여행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이 탄생하던 날 밤에 목자들이 들녁에서 양 떼를 지키고 있다가 구세주 탄생의 고시를 들었다는 기록이나 만삭의 여인이 이 장거리를 여행한다는 것은 주님의 탄생이 12월 한겨울이 아니다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고 하니 12월 25일은 정말 아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 반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죽음은 유월절(1월15일)로 확실한데 그렇다면 탄생은 유월절보다 6개월 뒤인 초막절(7월15일)이라는 단순한 계산만 하여도 예수님은 초막절에 탄생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한 구주가 나셨으니, 곧 주님이신 그리스도시니라(눅2:11).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는 12만 명쯤 되었는데 조세등록, 초막절을 지키러 중동에서 모여든 유대인들로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묵을 여관도 없어 예수님은 구유에서 탄생하셨다는 것이다. 장막절을 숙곳(Sukkot)이라고 하는데 요1장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셨나니 라는 말씀에 거하셨다는 Dwell은 tabernacle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성육신을 입으시고 장막절에 탄생하신 것이다. 그 초막절 끝날 8일째날 할례를 받으심으로, 완전하게 장막절 절기를 성취하셨다(눅2:21). 아멘. 이렇게 임마뉴엘로 오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는 이사야를 통해 예언되었듯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기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모든 골짜기가 돋우어지며 모든 산이 낮아지고 구부러진 곳이 곧게 되며 험한 곳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이룬자가 침례요한이었다(사40:3-4). 예수님이 등장하기전 까지는 침례요한은 유대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니 유대와 요단지역 사방에서 요한에게 와서 물로 침례를 주는 사역을 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시점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고 40일간 금식기도 후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신 후 고향에 오신 후에는 관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 서시니 회당관리자로부터 이사야 두루마리책을 넘겨주거늘 예수님께서 그 책을 펼쳐서 이렇게 기록된 되를 찾아 일렀으되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그분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며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눈먼 자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상처입은 자들을 자유롭게 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희년의 해를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사61:1-2,눅4:15-20). 예수님이 공생애 삶을 시작할 때에 예수께서 침례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가버나움에 와서 거하셨다고 합니다(마4:12-13). 여기서 ‘요한이 잡혔다’는 것은 침례 요한이 헤롯 안디바의 간음 사건을 비판함으로써 헤롯이 요한을 투옥했던 일을 말합니다(마14:3). 즉 당시 갈릴리 지역을 통치하던 분봉왕 헤롯 안디바는 이복 동생이던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했는데, 침례 요한은 이러한 불의를 성경이 금하는 근친상간의 죄(레18:16)로 비판하니 헤롯은 이에 노하여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때가 바로 침례 요한이 투옥된 시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침례 요한의 투옥으로 광야에서 외치던 자의 소리가 멈추게 되자 드디어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며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1. 시기심을 극복하는 침례요한
(요3:22-26)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침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침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이 말씀을 통해 요한에게 생길수 있는 시기심을 생각해보자. 나도 고통스럽고 상대방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시기심입니다. 우리는 임진왜란 때 원균이 이순신 장군을 시기함으로 이순신 장군이 옥에 갇힌 후에는 백의종군 했지만, 원균 자신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많은 군인을 죽게 하고 자신도 전사하였습니다. 시기심은 결국 자신도 망하게 하고 남도 망하게 합니다. 지금까지는 요한이 침례를 베풀자 온 유대 지방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 사방에서까지 나와서 침례를 받았을 당시 사람들은 요한을 그리스도 엘리야 같은 선지자로 생각할 정도였으니 요한의 인기는 대단했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침례를 베풀매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하면서 시기심을 부추겼습니다(요3:26). 여기에 대해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얼마나 멋진 대답입니까? 시기심을 극복하면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잠언에는 건전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한다(잠14:30). 평온한 영혼에게는 기쁨과 감사가 있으나 시기심은 뼈를 썩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인기를 시기하다가 악령이 그에게 임하여 고통당하다기도 하였고 그로 인하여 다윗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나중에는 사울 자신도 자신의 세 아들도 한날 전쟁에서 죽게 되었으니 시기심은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할 뿐아니라 자신을 망하게 합니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시기심을 극복하지 못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요한은 시기심을 극복했는데 시기심의 뿌리를 알면 우리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시기심의 뿌리는 첫째, 비교 의식입니다. 내와 비교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시기심이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에 대해서 목자는 양들에 대해서 시기하지 않습니다. 둘째, 시기심의 뿌리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 드러내고자 하면 시기심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이런 시기심을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요3: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한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침례받으러 가는 것은 하늘이 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바톤이 이제 요한의 시대에서 예수님의 시대로 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을 통하여 만민 구원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으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불신하면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은 아벨을 시기하여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것은 바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시기질투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시기질투심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둘째,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해야 한다.
(요 3:28)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의 정체성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자신은 예수님의 선구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릴레이 경기에서 요한은 예수님에게 바통을 넘겨주고 떠날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요한에게서 예수님에게로 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높아질수록 요한도 높아집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발견해야 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얼굴에는 입과 귀와 코와 눈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시기하지 않고 서로를 도와줍니다. 귀로 잘 듣고 코는 냄새를 맡고 눈은 보아야 입도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비교하므로 시기의 대상이 되어선 아닙니다. 나는 나의 역할에 충실하면 되고 상대방은 상대방의 역할에 충실하면 됩니다. 상대방이 잘되는 것이 나에게도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알고 각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다른 사람이 잘할 때 박수를 쳐주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시기심은 죄악 된 본성입니다. 시기심은 자신의 뼈를 썩게 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며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시기심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시기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시기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2. 침례 요한의 사역
(요3:19-23)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하니라.
침례 요한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으로'써 였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모든 것의 끝이다. 요한복음은 창조 이전부터 영원한 존재이셨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하는데 서론에서 침례 요한도 예수님의 증인으로 등장한다. 종교 지도자들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높았기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을 침례 요한에게 보내 그가 혹시 메시야인지 물었을 때 요한이 그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나는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해 증언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요1:6-8). 그래서 그는 간명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1:20). 나는 물로 침례를 주지만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침례를 주실 것이다(요1:26, 33). 나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요1:27). 그리스도께서 나보다 앞서신 것은 그가 먼저 계셨기 때문이다(요1:30).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신은 그분을 증언할 뿐이라고 하였다(요1:34). 침례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미리 보내어진 자라고 말하였다. 마치 길이 울퉁불퉁하고 돌이 많던 시절에 왕이 행차하기 위해서는 종들은 길을 평평하게 하고 굽어진 길을 바르게 하여 왕의 행차를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 왕보다 앞서 보내지기도 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같은 일을 하기 위해 침례요한은 예수님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 왔다고 했다. 침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말한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 때에 침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일렀으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마3:1-3).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면서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눅3:1-3).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로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총독으로 헤롯은 갈릴리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요한이 요단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각 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하나님은 수세기 동안의 침묵을 깨시고 요한에게 임하여 당신의 말씀을 대언케 하셨다. '회개'는 요한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으로 모든 죄악을 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침례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그는 심판이 임박했음을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 안나스는 A.D.6년 로마 황제 구레뇨에 의해 대제사장에 임명되었다가 A.D.15년 로마 황제 발레리우스그라투스(Valerius Gratus)에 의해 해임되었다. 그 후 안나스의 조카 요셉이 그 뒤를 계승했는데 이 대제사장이 바로 가야바로 A.D.18-36년까지 대제사장직에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원래 대제사장직이 종신직이었으나, 로마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통제되었으나 유대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에서는 로마정부에 의해 해임되었지만, 유대인에게는 여전히 대제사장으로 추앙되는 대제사장과 로마정부에 의해 새로 임명된 대제사장이 함께 남아있게 되었다. 안나스는 봉직 기간이 길었고 권력과 영향력이 산헤드린에 강력하게 미쳐, 그는 이스라엘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가야바는 또한 안나스의 사위이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공식적으로는 가야바가 대제사장이었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은 안나스가 행사했다. 예수님 체포당시 상황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요18:13-29)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더라 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28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3. 예수님의 사역
눅가복음 7장을 통해 예수님의 인간적인 속성을 볼 수 있다. 누가복음7장1-10절까지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신 일과 두 번째로 과부의 죽었던 외아들을 일으켜 세우신 이 두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긍휼함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암시 받을 수 있다. 세 번째로 누가복음 7장18절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린다고 묘사되고 있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침례 요한의 순교당하는 것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18절부터 35절 사이에서 요한을 격려하는 말씀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는 백부장의 죽게 될 하인을 고쳐주신 일과 그 후 나인성에 찾아가셔서 과부 외아들의 죽음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바꾸신 예수님께서는 침례요한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으신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다. 마치 요한을 잊어버리고 요한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무덤덤하게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암시받을 수 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은 옥중에 갇힌 침례 요한에게 종종 찾아가서 저 죽어가는 백부장의 하인을 살리신 일과 나인성의 과부의 죽은 독자를 살린 것을 이야기함으로 침례 요한이 마음속으로 의문과 궁금증을 갖게 하지는 않았는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 무슨 일조차도 하시는 분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침례 요한을 위해서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하여 마음상했던 요한이 그 제자들 중 두 사람을 주님께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분이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하니(눅7:19-20). 여기서 침례자 요한의 말은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이까라는 얘기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의심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큰 이적과 표적과 기사를 베푸시는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는 자신을 위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제자들을 통해서 전하게 함으로 옥중에 갇힌 자신이 구출 받도록 예수님께 의도적으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장 26절부터 36절까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셨다고 강력하게 소개하고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장면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의 간음행위를 규탄하는 언행으로 감옥에 갇혀서 곧 죽게 될 운명에 처한 자신을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구출해 주신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해주시기를 기대하였다는 것을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많은 일을 행하셨지만 침례 요한을 위해서는 그 어떤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는 일 때문에 요한은 실족될 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눅7:23). 이것은 누구에게나 요한과 같은 상황에 처해진 자는 이와 같이 실족될 위험이 있을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침례 요한과 같이 실족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다고 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과 전혀 연관이 없는 백부장과 그 아무 간구나 요청을 전혀 하지 않은 나인성 과부를 위해서는 놀라운 일들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서 일한 침례 요한을 위해서는 그 어떤 아무것도 하시지 않은 것을 보고 이 침례자 요한은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예수님께서 행하시도록 애쓴 것이 두 사람의 제자를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이르시되 (눅7:22-23) 22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다리저는 자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정결하게 되며 귀먹은 자들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선포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침례 요한을 염두에 두고 주신 말씀이 지금 우리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본다는 것이나 앉은뱅이가 걸어다닌다는 것이나 죽은자가 살아나거나 문둥병자가 깨끗이 치료된다는 것은 오직 메시야만이 그런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 라는 분명한 증거를 요한에게 전해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서 35장 5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수 있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은 지극히 높으신 자인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자만이 그 일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구원 안에서 가장 먼저 행하는 것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그분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소경의 눈을 보게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동행하기 위해서 영적인 눈을 보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절름발이에 대한 얘기도 주님께서 동행할 수 없는 절름발이를 걷게 하는 것이 요한복음 5장 8-9절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세우는 것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요5:8-9). 또 귀머거리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주신다는 요한복음 10장 27절 말씀인 것입니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그리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과부의 아들처럼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죄들로 죽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후 그들은 거듭난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통을 나눌 수 있도록 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가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물질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아무것도 없는 자는 세상에 그 어떤 아무런 소망도 없는 사람들을 상징한다고 에베소 2장 12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아무것도 없는 자가 유일한 소망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그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이 저의 것임이 될 것이라고 마태복음을 통해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런데 여기서 제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침례자 요한과 같은 심성을 가지고 주님을 대한다는 것은 아닌지요?
4. 태어난 자 중에서 침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자가 누구일까? 한번 생각해보면 언뜻 예수님이 침례요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광야에서 낙타털옷을 입고 회개의 침례를 전하는 침례요한을 보려고 나가지 않았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이룬자가 침례요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침례요한을 가리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마11:11, 눅7:28). 하나님께서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미리 사자를 보냈는데 그가 바로 침례요한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침례요한은 태어낳기 전에 천사가 나타나서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요한이라고 듣기도 했습니다. 너는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아직 노부부로서 자식이 없었는데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으며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는 말씀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높은 자가 아닌가요! 하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이제는 자기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침례자 요한처럼 그러한 의문을 가지고 제자들을 통해 자신이 구출 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에게 문의하기를 선생님이 오실 그분이니오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오리이까 하도록 묻는 것이 침례 요한이었듯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모습이 이와 같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대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말 중에는 이런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내가 백부장 하인을 고친 것을 제자들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주님 내가 나인성 과부를 불쌍히 여기셔서 주님께서 죽은 그 독자를 살리신 것을 내가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해서 보게 하시고 걷지 못한 앉은뱅이를 걷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 와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태에서는 그 좋은 소식이 나에게는 별개의 것들입니다. 나는 귀머거리가 아니며 나는 소경이 아니며 나는 죽은 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주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실지라도 내가 지금 처한 이 문제를 위해서는 주님께서 그 어떤 아무것도 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여전히 이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는 감옥이라는 곳에 갇혀 있어서 지금 꼼짝달싹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포로된 자들에게 희년을 선포하고 놓임을 전파하였다면 주님께서 옥에 갇혀 있는 나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옥에서 구원해 주셔야 될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들은 지금 주님께 그러한 의문과 궁금증을 가지고 주님께 기도로서 토로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듯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한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침례자 요한을 의식하여 말씀한 것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님~ 주님께서는 수많은 소경을 보게 하셨는데 나는 소경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수많은 절름발이를 걷게 하셨는데 나는 절름발이가 아니거든요.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셨는데 나는 문둥병자가 아니에요. 주님 나의 문제는 바로 이 물질, 물질좀 주세요. 나는 지금 질병 가운데 처해서 꼼짝달싹도 못하는 비통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주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응답하여 주시는데 주님 나를 위해서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그 일이 아닌 다른 일만을 해주셨습니다 라고 기도를 드림으로 주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에게도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한 자는 복이 있도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침례자 요한이 승리하도록 그를 위하여 정하신 길을 가도록 그를 위로하시고 매우 격려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죽어야 됩니다. 순교해야 됩니다. 이 세상에 큰 빛이신 예수님과 작은 빛으로 나타난 침례 요한이라는 두 등불이 공존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큰 빛이 됐던 작은 빛이 됐든 세상의 빛이 두개로 나타나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그 적은 불에도 집중 할 수 있기 때문에 침례 요한의 사역을 중단시켜서 생명의 큰 빛이신 자신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옥에 가두고 순교하도록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침례자 요한이 죽음의 길을 취하도록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했지만 너 요한을 위해서는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 그런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요한 너를 위하여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빛이 두개로 나타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네가 말했듯이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듯이 너의 사역은 다 끝나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함으로 옥에 갇힌 그가 곧 자신의 목이 짤려지는 순교 당함을 대처할 수 있도록 요한의 믿음을 강하게 하는 주님의 격려의 말씀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한 자는 복이 있도다 라는 말씀을 듣고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신데 나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내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침례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칭찬을 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들 가운데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대언자가 없도다고 하셨습니다(눅:28). 이렇게 침례요한에 대해 격려의 말씀을 하신 후에 누가복음 7장 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들을 어디에 비유할까?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그들은 마치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를 향해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사들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칭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어린아이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 안에서 아는 것이 많지만 주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철부지에 불과한 어린 아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통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는 천국 복음을 전파했지만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구원의 즐거움으로 인한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선포함으로 회개를 안했을 때는 지옥에 간다면 슬퍼서 애곡할 수 밖에 없다는 회개의 침례를 전했지만 그들은 울지도 않았습니다. 다시말하면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때로는 피리를 불어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함으로 구원의 즐거움을 나타냈지만 그들은 이 구원의 즐거움으로 인하여 기뻐하지도 않았다는 것이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복음은 만약 회개를 안한다면 심판 받을 것이라는 두려운 말씀을 듣고도 그들은 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공의로운 의는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그들은 복종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그들에게 들려주었지만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의 춤을 추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3절에서는 침례자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함에 너희 말이 마귀 들렸다 하더니 그리고 34절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는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침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전하면서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자신의 삶을 유지한 것을 보는 것은 바로 자신이 선포하는 그 회개의 복음을 통하여 그들이 죄로 부터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색다른 방식으로 먹고 마시고 색다른 것을 입음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앞으로 돌아오게 하였지만 반대자들은 그를 마귀 들린 자라고 비난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자신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으로 친히 느끼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잔치를 배설한 가운데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을 통하여 구원받은 죄인들이 자신 안에서 기뻐하게 하는 모습을 이렇게 나타내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장터에 앉아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았고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않았다는 말씀을 통하여 그 세대 유대 백성들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 뿐만 아니라 지금의 세대까지 포함한 모든 세대를 한꺼번에 포함하여 꾸짖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을 통하여 희년을 선포하셨다는 것은 구원의 참 복음을 선포하는 피리가 예수님을 통해 친히 연주하였던 것인데 그 세대의 사람들과 또한 이 시대의 사람들 모두는 주님이 부는 피리소리에 춤추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침례자 요한은 회개하면 천국에 간다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다면 지옥에 간다는 애곡의 소리를 외쳤을 때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들을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 라고 결론 지으십니다. 이 지혜는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 의로와진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심을 미리 알리면서 광야에서 외치는 침례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높은자라는 말씀은 우리들도 다시오실 예수님을 세상에서 전할 때 누구보다 가장 귀하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다시오신다는 나팔을 불면 우리들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지 않고 지옥에 간다면 이런 슬프고 두려운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 믿으며 더욱 우리주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 되기를 바랍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