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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마 27:27-31)
교회력을 의하면 지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수난에 동참하는 사순절기간입니다. 이때 고대교회에서는 부활주일 전 40일 동안 금식하며 근신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순절 기간동안이라도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의 성결을 지키는 기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 중에 독일의 화가 슈테른 베르그의 작품이 있습니다. 그는 교회의 요청에 의해 예수님의 여러 모습을 담은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러던 그가 돈을 벌겠다고 나체 모델을 그리고 있었는데 마침 그 화방에 그가 그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이 놓여 있었습니다. 모델 아가씨는 저 그림이 무슨 그림이냐고 물었고, 슈테른 베르그는 별 생각없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지금 죽으시는 장면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모델 아가씨가 얼른 말을 받아 "우리의 죄라구요? 선생님의 죄도, 나의 죄도 대신해서 죽으셨단 말입니까?", "그렇구 말구요" 그 순간 슈테른 베르그의 가슴이 철렁 내리앉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날 밤, 낮에 자신이 대답했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놓고 묵상했습니다. 두손 들고 기도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서 두 주먹으로 눈물을 닦아내야 했습니다.
그분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었고 그분의 고통이 나를 위한 고통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죠. 다시 한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립니다. 눈물로 먹을 삼아 그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그림이 바로 '에케이 호모 – 이 사람을 보라' 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 감동을 받은 프렌시스 헤브갈 양은 우리 찬송가 311장을 작사했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라는 유명한 찬송시를 썼고, 이 그림에 감동받은 진젤 돌프 백작은 평생 주를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뜻없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리고, 의미없이 말을 내 뱉던 화가 슈테른 베르그처럼 예수님의 죽음이나 십자가의 고통에 대한 아무런 느낌이나 감격이 없이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신앙의 행태를 향하여 토레이 신부는 "신앙인의 무감각 질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주님이 날 위해 죽으셨다고 하나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천하디 천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사실을 듣지만 아무런 감격이 없습니다.
어느 날 스펄전 목사님이 울고 계셨습니다. 부인이 의아해 물었습니다. ‘왜 울고 있어요? 힘든 일이 있어요? 아니면 슬픈 소식이라도 들었어요?’ 이 말을 들은 하나님의 사람 스펄전은 눈물을 그치고 차분하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지금 울고 있는 이유를 알고 싶소? 그것은 말이오, 오늘은 내가 십자가를 생각해도 아무런 감동이 없더란 말이오. 이 사실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느껴졌소. 나에게 십자가의 감격이 없고 이렇게 메말라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할 수 있겠소?”
오늘 본문은 예수의 십자가 형이 결정되고 그 형이 집행되기까지 예수께서 로마 군병들로부터 희롱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로마군병들은 예수님을 총독의 관저로 끌고 들어갑니다. 거기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낡은 홍포를 입힙니다. 머리에는 가시나무로 엮어 만든 관을 씌우고 손에는 갈대를 들린 다음 그 앞에 무릎을 끓고 "유대인의 왕 만세"를 떠들며 조롱했습니다. 이어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려쳤습니다.
그 조롱은 비열하고 또 한편 잔인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희롱은 즉흥적으로 꾸며낸 것이었지만 그 속엔 하나님의 계시적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벌거벗은 수치감은 창세기 3장 선악과를 따먹은 죄와 더불어 왔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긴다는 것은 수치며 곧 모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덮으시기 위해, 나의 허물과 수치를 감추시기 위해, 벌거벗기움을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당할 수치와 창피를 덮으시기 위해 당신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옷이 벗겨지시므로 장차 우리가 입게 될 흰옷, 영광의 옷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옷을 벗기움을 당했다고 하는 것은 신분, 자격이 박탈당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높여주시기 위하여 잠시나마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의 외아들 되심, 이 신분 자격이 박탈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홍포를 입으셨습니다. 곧 자색 옷입니다. 이는 왕들이나 황제가 입었던 옷입니다. 예수님의 홍포는 왕의 홍포가 아니라 죄인의 홍포였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1:18). 예수님께서는 입으신 홍포는 주홍같은 피를 흘려 진홍같은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희게 하셨다는 예표입니다. 이 시간 죄의 무거운 짐으로 괴로워하며 나오신 분 계십니까?
정죄의식에 시달리시는 분 계십니까? 영혼의 진통을 안고 이곳에 참여하신 분 계십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 주니라". 십자가 처형을 위한 예비적인 첫 번째 형벌은 잔인한 채찍질이었습니다. 로마의 채찍은 무서운 고통의 상징입니다. 채찍질당하는 사람은 옷을 벗게 됩니다.
손은 뒤로 결박당한 채 등을 구푸려서 채찍질당하기 좋은 자세로 기둥에 묶입니다. 그리고 채찍은 가죽으로 되어 있는데 긴 가죽 채찍에 간격을 두고 날카로운 뼈나 쇠붙이를 붙인다고 합니다. 채찍을 맞은 죄수의 등은 바둑판처럼 살갗이 찢기고 피의 고랑을 이루게 됩니다. 어떤 이는 이런 채찍을 맞으면 기절하거나 거의 미쳐 버리는 상태까지 간다고 합니다.
잔인한 망나니를 만나면 물 묻은 가죽 채찍을 옆구리 쪽으로 휘감아 내리쳤고 그러면 창자가 쏟아져 나오기까지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이 말씀을 이루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 박병지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김집사 당신이 나음을 얻었도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들리워 주었습니다.
갈대로 왕의 홀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조롱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무력한 존재라고 놀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영원한 왕이시며 반드시 모든 인류를 심판하러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그분을 재판하던 재판관들도 그분 앞에 두려워 떨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를 조롱한 자들도 그를 찌른 자들도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29절.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언다 하며". 예수님의 머리엔 가시 면류관이 씌워졌습니다. 면류관은 왕관이요 승리자들이 쓰는 것입니다. 그들은 금 면류관 대신 가시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이 시간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가슴졸이며 나오신 분 계십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핍박받으며 조롱받으며 살아오신 분 계십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주님의 고통은 우리를 위한 고통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나를 위한 십자가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예수님이 쓰신 가시관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이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쪽박도 왕이 쓰면 왕의 밥그릇 됩니다. 예수님이 쓰신 면류관 거기엔 크고도 분명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므로 저주의 면류관이 속죄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그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부귀, 영화, 존귀를 자랑합니다. 그 대신 저주와 고통과 아픔을 백성들에게 씌웠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왕,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저주의 관을 쓰시고 고통과 아픔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백성들에겐 구원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사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 우리라는 단어 대신 여러분 한분 한분의 이름을 넣어서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주님의 머리에 박힌 이 가시가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까? 이 가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의 표징으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7-18).
타락의 결과로 생겨난 가시는 인간의 영혼을 찌르고 말았습니다. 여기 가시 면류관은 곧 저주의 면류관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가시관을 쓰시므로 이제부터 이것은 속죄의 면류관, 구속의 면류관, 용서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아픈 가시관을 쓰셨고 내게는 속죄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당신은 저주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용서의 면류관을 쓰셨나이다. 당신은 고통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사랑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2. 주님의 머리에 상처를 주던 그 면류관이 이제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는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가시 면류관은 크고 작고 굵고 가는 가시로 만들어져 그것들이 예수님의 머리를 사정없이 찔렀습니다. 병정들이 막대기로 면류관을 내리치자 가시들은 더 깊숙이 찔러 들어갔습니다. 바로 주님을 찌른 이 가시가 우리를 치료하는 가시가 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상처, 굵고 가는 상처를 치료했습니다. 아무리 아픈 상처도 아무리 큰 상처도 혼자 움켜쥐고 있지 마시고 주님 앞에 상처를 들추어 내십시오. 주님 그 상처를 지금 이 시간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주님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피묻은 손으로, 못자국 난 손으로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 우리를 찌르는 가시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가정에도 직장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가시가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과거의 경험, 지울 수 없는 쓴 뿌리의 아픈 상처들, 용서받지 못했다는 정죄 의식들이 가시가 되어 매일같이 나를 찌릅니다. 사랑의 상처, 배신의 상처, 말 한마디, 눈짓 한번도 가시가 되어 서로를 찔러 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도 상처를 받고 충성하고 봉사하고 하나님나라의 일을 하다가도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다가도 가시에 찔려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옳은 일을 하다가도 찔릴 수 있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불만과 근심, 내적 갈등도 가시가 되어 내 영혼과 마음을 찔러 피나게 합니다. 인간들은 저마다 가시에 찔린 상처로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나 혼자 아픈 것 아닙니다. 나도 찔렸고 너도 찔렸습니다.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픕니다. 모두가 상처투성이, 이게 세상사요 인간사 아니었습니까?
이 상처들은 어떻게 고침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우리의 찢기고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 곳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흘리신 예수의 보혈의 피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그가 가시에 찔림으로 우리의 찔림을 치료해 주십니다. 주님 앞에 그 상처를 보이십시오. 주님께 위로가 있고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프다고 원망하며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때 주님앞에 나아와 주님의 손을 붙드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구세주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영원한 승리의 보장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 큰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 울며 돌아옵니다.
주님 손과 발 못박혔고 머리엔 가시관 박히셨네 내 모든 죄와 허물위해 말없이 피흘려 주셨네
오 예수님 나의 손 잡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 구주가 되옵소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 구주가 되옵소서
3. 가시 면류관이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죽으셨습니다. 마치 실패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 면류관은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도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가시가 있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 고난의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만들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찌르고 도전해 오는 고난이 반갑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시가 오는 것을 막아 주시지 아니하시고 가시를 허락하신 분명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엮도록 하신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고통이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이 은혜입니다. 십자가가 멸망을 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가시 면류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시가 괴롭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 바라보고 그 가시로 승리의 면류관을 함께 엮어 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 면류관은 이름 그대로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어 주는 능력이 됩니다. 성경에서 종종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제시되는 사도 바울은 남모르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육체의 가시’라 불렀습니다.
바울이 말한 이 육체의 가시가 찌르는 아픔이 너무나 괴로워 세 번씩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이 가시의 고통을 받으면 모르겠지만 바울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전적으로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 바쳐 헌신한 사람들이 복을 받아야지 왜 이런 가시의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가 부귀영화 만사형통은 없다 하더라도 주님의 일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그가 육체의 가시를 지녔다고 하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준 것으로 그의 많은 은혜로 인하여 교만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가시의 찌름이 없이 바울이 교만한 사람이 되었더라면 그가 받은 많은 은혜는 오히려 저주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허락한 모든 은혜가 천국의 면류관이 되도록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외쳤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넘치도다." 그가 이 땅에서의 보상을 기대했더라면 그는 넘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보상이 없습니다. 그는 하늘의 보상만을 기대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서 보상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기대했습니다. 가시를 통하여 면류관 삼아주시고 이 땅에 가시가 끝나는 그 날, 하늘 생명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줄 그 날을 바라보고 달려가십시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 날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나도 주님위해 가시 면류관 쓰렵니다. 그 주님 반드시 가시를 바꾸어 면류관 삼아 주실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가시, 내게 주어진 십자가,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가시관을 쓰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 고통의 가시관이 이루신 은혜가 나를 위한 것임을 받아 드립시다.
나의 죄악과 허물, 나의 더러운 욕심과 수치를 위해서 주님이 대신받으신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 가슴속에 있는 고통들을 숨기지 마시고 주님 앞에 들추어 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버렸던 십자가, 이제 다시 어깨에 맵시다. 가시에 담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믿고 인내하며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가시를 면류관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최후 승리 얻기까지 그 십자가 붙들고 함께 승리의 행진을 계속해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