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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보여주는 믿음 / 사무엘하 16:9-14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 간에 널리 알려진 말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동안 이 사상으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일단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인간에 불과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닮을 수 있겠느냐? 그리고 예수님은 집도 없고, 가정도 없고, 또 독신으로 사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셨는데, 인간이 그렇게 사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하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닮고자 한다면, 예수님의 인격적인 면만을 닮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의 행적,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의 이적 행하심도 닮아야, 실제로 그리스도를 닮는다고 말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바뀌게 된 이유는 세상이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있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 기독교 소설가 작품에서, 여객선이 침몰할 때 구명조끼가 없는 사람에게, 자기의 구명조끼를 벗어주는 신부님을 보고, 기독교 신앙에 귀의했다라는 그런 스토리를 기억하게 되면서, 한국의 기독교가 일본의 기독교와 대비되는 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사람들이 기독교에 귀의하는 동기는, 누가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뭔가 신앙을 통하여 소원을 이루었다거나, 문제를 해결했다거나, 병을 고쳤다거나, 이런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또 기복적인 이유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한국의 기독교가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졌는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에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고, 그렇게 열심히 믿었던 것이, 오히려 한국의 개신교가 타락하게 된 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말은, 어떤 비현실적인 것을 닮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하여, 직장이나 가정을 버릴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하여,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더 단순하고 평이합니다. 오히려 쉽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남을 위해 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는 것입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마음을 본받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태로 나타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본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초점을 다른 데 두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별로 우리에게 어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화려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예수님처럼 거룩하고, 결백하고, 완벽하고, 흠이 없는 분에게는 가능하겠지만, 나는 이미 인생에 실책이 많고, 흠이 많고, 이미 많이 더럽혀진 사람인데, 내가 이제 와서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한다는 것은, 마치 이미 더러운 칠판에다가 흰색 분필로 무엇을 쓰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내가 이제 와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하게 되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오히려 나를 조롱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건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입니다. 이제 와서 내가 이렇게 한들 특별히 의로워질 것 같지 않고, 나답지 않다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본문에 다윗의 모습을 우리가 참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다윗이 밧세바와 부정을 저지르고, 밧세바의 남편을 전쟁터에 보내서 죽여버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셔서, 그의 가정에 풍파가 닥친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에게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압살롬이라는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일시적으로 성공하고 아버지 다윗을 예루살렘에서 내쫓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자기의 왕자에서 쫓겨나서 도망가는 중에, 시므이라는 사람이 돌을 던지면서 다윗을 욕하는 장면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복과 함께 저주에 대해서도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은 저주가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내용인 것처럼 여깁니다.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기에, 자신은 저주와 상관이 없고, 복을 받을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지, 저주를 주시는 분은 아니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신명기 28장에 복과 함께 저주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위 성경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신 28장의 내용이 복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28장을 축복장이라고 이름 붙여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임을 알아야 합니다. 28장에서 말씀하는 복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가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이, 복을 받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지를 못하면, 복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도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신명기 28장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음을 선포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복을 받을 자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명령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라고 해서 인간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에서 멀어져 살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곧 지금의 인간도 하나님의 저주에 해당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성경에서 오직 복만을 끄집어냅니다. 조금만 잘하면 복을 받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거짓말로, 뭇사람들을 진리와 상관이 없는 길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선포되어야 할 저주는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저주가 없는 복음은, 복음을 가장한 헛된 소리일 뿐이며, 다만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사람의 소리일 뿐입니다.
예수를 말하면서 잊기 쉬운 것이 저주입니다. 마치 내가 처음부터 저주와 상관이 없는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안에서 복된 존재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저주와 상관이 없는 존재로 있다가 복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복과 상관이 없는 존재로 있다가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의 가치와 귀함은, 저주의 자리에서 명확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주는 생각하지 않고 복만 말한다면, 복의 가치와 귀함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보다는, 세상이 복이라고 여기는 복의 내용물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복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 설교 전에 저주에 대해 먼저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성도가 저주를 잊고 사는 것과, 저주를 받아야 할 자신의 존재성을 바라보고 사는 것의 차이를, 본문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는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타인으로부터 저주를 받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모르긴 몰라도 분노하면서 함께 욕하고 저주하는 것으로 반응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주하는 자보다 더 힘이 있다면, 저주하는 그에게 힘으로 복수하지 않겠습니까? 본문을 보면 아비새란 사람이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9절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아비새가 저주하는 시므이를 죽은 개로 표현하는 것은, 시므이에 대한 아비새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비새는 저주하는 시므이에 대한 분노로, 다윗에게 시므이의 목을 베겠다고 말합니다. 다윗과 함께 도망을 치는 상황에 있는 신하들도, 마음이 편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을 저주하는 말을 들었으니,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나 아비새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비새의 이러한 요청에 대해 다윗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0-11절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다윗은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하는 것은, 시므이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시므이에게 시키신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시므이에게 ‘네가 왜 다윗을 저주하느냐?’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호와께 ‘왜 다윗을 저주하십니까?’라고 원망하는 것과 같음을 다윗이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의 모습입니다. 다윗이 보여주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것이 어떤 것이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이 말은 오늘날 믿음을 말하면서도, 정작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날마다 일하고 계심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다윗과 같은 고백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시므이의 저주를, 단순히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알고 넘어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곧 시므이의 저주에 대해 분노가 있었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참고 넘어가는 차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을 누군가 저주했다고 할 때, 마음속에 분노가 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믿고 그냥 넘어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믿는다고 해서, 그 속에 있던 분노가 사라질까요? 아니면 분노는 여전히 있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로 믿고 참고 넘어가는 것일까요? 답은 후자가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믿고, 억지로 참고 넘어갈 수는 있지만, 그 속에 있던 분노까지 해소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느 쪽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분명 다윗은 분노가 있지만, 참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아예 저주하는 시므이에 대한 분노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까? 자신을 향한 저주에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저주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시므이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 것은, 시므이의 저주를 다윗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봤습니다. 곧 하나님이 자신을 저주하고 계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돌아볼 때, 저주받아 마땅한 자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던 우리아를 죽인 것이야 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악한 죄임을 깊이 통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집안에 재화가 일어나, 아들 압살롬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된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묻고 계심을 알았을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의 죄에서 저주 받아 마땅한 자신을 보게 되고, 그러므로 시므이의 저주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분노가 없게 된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자신이 저주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시므이의 저주에 대해 분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새처럼 시므이를 죽이고자 하는, 인간적 반응을 보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아비새는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에, 항상 자기중심적인 악한 본성으로 반응하는 것만 보이게 될 뿐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다윗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 갑니다. 다윗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자신이 저주 받아야 할 존재임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누군가가 나를 저주한다고 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현대 교인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의 중심에는, 복이 도사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교회가 할 일은,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만약 저주와 심판을 감춰버리고 복만을 외친다면, 그것은 교회로서의 바른 역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것입니다. 원래 복은 죄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인간은 복으로부터 단절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인간으로부터 감추셨기 때문입니다. 곧 생명에서 멀어진 존재가 된 것입니다. 복은 곧 생명입니다. 세상은 복의 의미를 모름으로, 돈 벌고 잘살고 성공하는 것을 복으로 여기지만, 진정한 복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인간이 거하는 곳은, 저주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저주로 끝나는 이 세상에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셔서, 저주를 담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담당해야 할 것을 예수님이 짊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저주는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리심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저주를 담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 안에서만, 저주로부터 해방되는 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은 자신의 저주를 바라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저주를 보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피의 의미와 귀함과 그 가치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은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신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하기에, 교회는 성도를 복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 그 역할이고,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의 귀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저주를 필히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저주를 말하지 않고 복만을 외친다면, 복이 무엇인가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고, 또한 복을 얻기 위해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함께 강조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은, 복이 될 행동을 전혀 할 수 없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으면서 복을 요구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저주의 상태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요구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고, 복을 받을 자격도 없음을 모르기에, 복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주를 보게 되면, 하나님 앞에 복을 받을 자격도, 말할 자격도 없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저주를 담당하시고 피 흘리신 구세주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눈이 뜨이게 되고, 세상에 오셔서 나의 저주를 담당하시기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에 마음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1:46-48절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자신의 비천한 자리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셨기 때문이고, 비천한 자신이 예수로 말미암아 어떤 복을 누리게 될 것인가를 내다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 복이 되시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왜 복이 되는가는, 비천과 저주에 처한 자신을 보게 될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으로 성도를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우리의 악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여호와가 하시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곧 여호와가 자신을 저주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다윗을 저주하신다면,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하나님의 저주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저주로부터 자유로운 자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저주가 우리를 어쩔 수 없는 복의 나라에, 성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복을 보지 않고 무엇을 바라보고 사시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안다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머리에 암기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비천과 저주의 자리에 있는 자신을 깊이 보게 될 때, 가능함을 알아야 합니다.
저주 받는 것이 마땅한 여러분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저주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린 악한 자일 뿐입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자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가 사랑을 입어서 저주에서 자유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자신을 보게 되면, 타인이 나를 욕하고 저주한다고 해도, 분노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당연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병들고 죽어가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모든 상황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저주 받을 자에게 당연한 것들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여러분을 이러한 모습으로 이끌어 가기를 소원하십시오. 믿음으로 이런 성도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하십시오. 분노할 때 분노하는 아비새의 모습이 아니라, 저주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다윗의 모습으로 만드는 믿음을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믿음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