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 또 머리했냐? 돈도 많아..."
종혁이가 또 머리했다고 구박할 사람은 내 주위엔 오로지 한명뿐이다.
지난여름 나름대로 로또를 대히트 쳤다며 즐거워하던 녀석.
-김상혁.
"아-나 머리하는데 뭐 보태줬냐? 그냥 파마 푼거야~"
특유의 눈을 내리깔고 아랫입술을 삐죽이듯이 내미는 투정을 부린다.
"어? 호시~나 머리풀었어-너 저번 내머리 싫다고 그랬잖아."
"학교를 머리 자랑하러 다녀?"
나도 모르게 흐뭇하니 웃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칠 뻔해서 얼른 딴곳을 바라봤다.
김상혁의 그 까만 두 눈은 나를 향할때면 언제나 멍청하리만치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다.
마치-니 속마음따위는 벌써부터 알고 있어-라는 듯이.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체 니가 뭘 안다는 건데?
"호시야~우리 피자 먹으러 가자-"
"수업있어."
"나도 있어-째고 가자~응? 나 너 좋아하는거 알지?"
햇살이 얼굴에 닿으면 닿은 햇살이 무색해져 부서져 내리고 말듯한 그 웃음을 웃으면서,
전혀 어울릴것 같지도 않은 애교를 피우며 내 팔에 매달리는 상혁이를 떼어내버렸다.
"알았으니까 매달리지마. 더워-"
탈까봐 입고온 얇은 봄남방위로 상혁이 체온이 닿자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묘하게 말초신경을 긁으며 지나가는 짜릿함.
둔하게 그런 내 마음도 모르면서 시무룩한척 하지 말란 말이야.
작은 접촉에도 민감하고 두근 거리려는 바보같은 나한테 다가서지 말란 말이야.
피자한조각에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좋아한다는 말에 멍청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한테
그런, 내것이 될수도 없는 눈웃음도 짓지 말아.
젠장-
재수없어 김상혁.
"날씨 너무 좋다~우리 꽃놀이 가자~헤헤헤"
"주말에 바빠, 아르바이트 가야해."
"너 아르바이트 오후에나 가잖아~우리 벚꽃보러 가자 호시야-"
"호시라고 부르지마. 그리고 벚꽃은 학교앞에도 깔렸잖아."
"너, 가끔은 정떨어져."
그래-차라리 그랬음 좋겠다. 정떨어져서 나도 유치하게 너보면서 혼자 두근거리는 쇼같은거 그만했으면 좋겠어.
근데 그거 알아 김상혁?
넌.....뭘해도 미워보이지가 않아. 미운모습까지, 난 하나하나 기억하고 싶어져.
씨뎅-나 돌았나봐.
"꼭 눈같아-"
금방 아이처럼 풀어져서는 헤헤거리면서 날리는 벚꽃잎들을 맞으며 뛰어가곤 한다.
"이리와봐~호시~"
"나 뛰는거 싫어하는거 알잖아."
"피-이거 봄에 오는거니까 첫눈이잖아~너랑 나랑 첫눈 맞는거라고. 바보야"
첫눈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맞는 거라는데, 나 지금 너랑 같이 첫눈 맞고 있는 거라고?
핏...빈말이라도 기분 좋다.
빽빽하게 흩날리는 벚꽃사이로 드러난 하늘이, 조금전까지는 시리게 파랬는데 지금은 개운하게 푸른 느낌이다.
"여기여기~호시야 여기~"
덥지도 않은지 손잡고 붙어선 연석이형이랑 종혁이 옆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대는 녀석이 보인다.
그래도 난 뛰지 않는다.
천천히 걸으면서, 느긋하게 다가가면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나를 반겨주는 상혁이를 보고 싶다.
"그렇게 난리 피우지 않아도 다 알아봐-"
정말로 공원은 한산했고,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져 버릴듯이 잘 닦인 연석이형의 까만차는 멀리서도 알아보리만치 충분히 빛나고 있었다.
"에-사람무안하게, 얼른타 덥잖아."
봄치고는 정말 조금은 더운 날씨였다.
꼴에 신경써 주는 건가. 하긴-자기가 꽃놀이 가잡시고 사람 불러냈으니.
"봄 너무 좋아 개나리도 피고 진달래, 벚꽃 매화....."
"넌 일어는 안 하고 꽃 종류만 공부하냐?"
지금도 생각해보면 웃긴건, 베이스나 튕기는 이 녀석과 일본어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긴, 일어과라해서 안어울리기는 저 덤벙거리는 체육소년 오종혁 따라갈자도 없지-
과대항 체육대화라도 할때면 돈받고 경기뛰어주는 놈이니-_-;
"다왔다, 상혁아 여기 말한거 맞지?"
"응-"
멀리에 보이는 댐에 고인 파란 물은 호수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흐드러지게 펴서 흩날리는 벚꽃과 담이라도 쌓은듯이 늘어선 노란 개나리를 보자 이렇게 나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것봐-이렇게 한번쯤 나와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이마위의 썬캡 끝자락을 옆으로 휙-하니 돌리며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길에 뜨끔했다.
난 너정도는 다 알아-라고 하는 듯한 그 눈빛.
꽁꽁 둘러쌓고 있지만 사실 알고보면 별로 그다지 볼것도 숨길것도, 굉장할 것도 없는 나 유호석을 다 안다는 듯이- 마치 벌거벗은 나를 보고 있는것 같은 녀석의 눈빛은 대할때마다 괜시리 불쾌하기까지 하다.
속을 다 들켜버릴 것 같아서.
내가 녀석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아버릴 것 같아서.
저렇게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도 입술이 꼭 체리맛이 날 것같다는 생각을 하는 나를 들켜버릴 것만 같아서.
"또 안먹지-_-그러니 자꾸 마르지."
"그냥 내버려둬 나 원래 날 더워지면 뭐 잘 안먹잖아."
"아니까 그러지. 너한테 무관심한 저 두사람은 이미 자기들만의 세계로 빠졌잖아."
그러면서 턱끝으로 연석형과 종혁이를 가리키는걸 시선으로 따라가 볼새도 없었다.
방금전에 한 상혁이 말을 속으로 곱씹어 보느라.
그럼 넌 나한테 관심있기라도 한거냐-
묻고 싶은데 그 말이 입밖으로 나와주질 못하고 자꾸만 입속에서 되새겨지고만 있었다.
"핏...뭐야 그럼 넌 나한테 관심이라도 있는거야?"
끝은 거의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천하의 유호석이 흘끔-눈치까지 보면서 어렵게 물었다. 차마 똑바로 얼굴 바라볼 생각은 꿈이라쳐도 못하고, 괜히 파릇하게 솟아올라오는 땅위에 잔디를 뚫어질듯이 바라보면서 온 청각만 곤두세운채로.
"관심 안 가질래도 너랑내가 어디 하루이틀 친구냐. 너희 어머니보다 널 더 많이 알까 두렵다고-"
웃어넘기면서 그 좋은[친구]라는 말을 하는 상혁이를 한대 쥐어박아주고 싶었다.
내가 여태껏 김상혁 옆에 주욱 있게해준 그 친구라는 말이 정말 고마운건 사실이었지만, 그 친구라는 말때문에 숨이 막혀오고 묘하게 우울해지는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우린 오래된 친구지.
어릴때부터 홀딱벗은 꼴까지 다 보고 자란 친구지.
그런 너한테서 친구말고 다른 이름을 기대하는 내가 미친놈인거야, 그게 맞는거지.
우리는 좋은 친구.......
"뭐야-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안좋아?"
그러면서 내 앞머리를 걷어올리려는 녀석의 손길을 냉랭하게 툭 쳐내버렸다.
"뭐야-너또 탄다고 신경쓰여서 그러는 거구나? 썬크림 안가져 왔어?"
"놔, 만지지마. 아까 바르고 왔어. 3시간 정도밖에 안가니까 그시간 되면 나 갈거야."
"우리 저-기 그늘가서 앉아있자. 저기 가면 바람도 불고 별로 안 더울것 같아."
그러면서 내 손목을 쥐고 당기는 녀석은, 모습은 나를 조르는 아이 같았지만 분명 나를 생각해 주고 있었다.
이럴때면 녀석이 차라리 무신경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무의식중에 나를 이렇게 위해주지 말고, 차라리 무신경했으면 한다.
나에 대한 걸 아무것도 모르고.
그럼 내가 이 오래묵은 말도안되는 감정을 어쩌면 접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종혁이가 소개팅 시켜준다던데, 너도 할래?"
".......소개팅?"
너도 할래-라면 너는 한다는 거야?
"응-나이 많은 아는 누나가 졸라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고 제발 머리수좀 채워달래. 밥사준대."
"그런거 안해."
넌 할거야? 안하면 안돼?라는 물음이 목까지 올라와서 제자릴 찾지 못하고 맴도는 찝찝한 느낌을 억누르며, 날도 더운데 뭐가 좋은지 둘이서 손잡고 뒹굴며 좋아죽는 연석이형과 종혁이를- 정확히 말해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의 종혁이를 노려봤다.
잘났다 오종혁. 너만 행복해 죽으면 다냐. 니가 사랑하는 우연석 옆에 끼고 있으니 남의 감정은 보이지도 않는거냐. 하긴.....아무한테도 말하질 않았으니 너같이 둔한 놈이 알겠냐 만은.
결국은 또 내탓. 하루에도 수십번씩 돌아오는 나를 향한 나의 질타.
"하긴, 너 나가면 여자들이 전부 너 귀찮게 할꺼야. 잘생각했어-종혁이가 하자고 해도 안한다 그래-알았지?"
얼씨구. 지금 나 칭찬하는 거냐? 바보같은 놈. 너 나가면 여자들이 줄줄이 다 너한테 꿰여가지고 한동안 고생좀 할텐데? 그 우유부단한 성격에 또 꼴에 기사도랍시고 여자들이 한번더 만나자면 거절도 못할거면서.
"니 생각이나해. 너 나가면 여자들이 너 가만 놔둘것 같아?"
"내가 뭘...."
너 정도로 잘생기고 성격도 좋은데다가 남잘챙겨주고 매너좋은 남자면-내가 여자라도 안놓치겠다. 하긴...지금 내가 남자라도 상관없이 안놓치고 싶지만.
아....해주고 싶은 말들은 많은데, 정말 해줄수 없는 말로만 남고 만다.
답답하다. 바람은 제법 시원하게 부는데.
"나 아르바이트 가야돼. 먼저 갈래."
"어? 벌써? 같이가자-데려다 줄게."
"더 있다와. 꽃놀이 가자고 노래를 했던거 너잖아. 실컷 보고와. 혼자 택시타고 가면 돼."
"싫어. 저 닭들틈에 있다가 죽으려고. 있어봐. 간다고 말하고 올게."
그러면서 저만치 뛰어가버리는 뒷모습이 휑하다.
생각같아서는 콱 붙잡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 상혁이 뒷모습을 볼때마다 허리께로 손을 넣어서 꽉 끌어안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그렇게 항상 망상으로만 그치고 마는 생각.
유호석도....천하에 없는 소심하고 답답한 놈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피식-하니 한심한 웃음이 나왔다.
"어? 호시-니가 여기 왠일이야?"
역시나 어디서든지 나를 먼저 알아보는 녀석. 눈이 지극히도 좋은 모양이다.
"아..현곤이가, 자기 전공수업 갑자기 보강생겼다고 종혁이 너한테 좀 전해달라길래. 너 전화해도 안받는다고, 나보고 집에 가는길이면 좀 들려달래서..."
말은 종혁이에게 하고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아까부터 상혁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맞은편 여자를 노려봤다.
젠장...화장은 떡칠을 해가지고. 저것도 얼굴이라고. 차리리 우리 상혁이가 훨씬 예쁘겠다.
오종혁 저 인간은 뭐한답시고 이런자릴 만든거야.
"에-안돼는데...그럼 머릿수가 안 맞잖아."
곤란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이는 종혁이 녀석을 한번 째린후, 더 있다가는 기분이 나빠질듯 해서 등을 돌리기로 했다.
"그럼..즐거운 시간 보내. 난 가볼게."
"왜~그러지 말고 그 곤인가 하는애 대신에 쟤가 하면 되겠네. 쟤 너무 잘생겼다."
듣자마자 닭살이 확 돋아버릴 것 같은 간드러진 목소리가 내 전신을 훑고 지나가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앗-그럼 되겠다. 호석이 너 약속없이 집에 가는 길이랬지? 잠깐만 앉았다 가라-응?"
제발-이란 단어를 눈빛에 꽉꽉 눌어담아서 나를 바라보는 종혁이를 앞뒤 안가리고 패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상혁이만 없었다면.
"호시 넌 그냥 집에가. 집에 가던 길이라면서. 넌 이런자리 별로 안 좋아하잖아."
웃지도 않고 남들이 보면 카리스마라고 속음직한 표정으로 말하는 상혁이 얼굴이, 괜히 나를 오기에 차게 했다.
뭐야-너는 이런자리 좋아한다는 거야? 니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거야.
내가 있으면 걸리적거리기라도 한다는 거야?
"별일 없어. 그냥 앉아만 있다가 가면 되는 거지?"
"앉아 있다가 맘에 드는 상대 있으면 잘해보고 그런거지 뭐~"
맞은편 여자의 말을 흘려들으며 힐끗 바라본 상혁이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어 더욱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자-그럼 난 그만 가볼게 약속이 있어서~"
람쥐형을 만나러 가는건지 냉큼 일어서서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리는 종혁이의 뒷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괜시리 화가났다.
그래서 그만 가볼까 하는차에-
"그럼 우리 그만 짝지어서 찢어지자. 여기 너무 갑갑해"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날 보며 눈을 찡긋 하더니 말했다.
"저기 전 그만 가볼.."
"가긴 어딜가니~난 너 찍었는데."
덜컥-하니 내 손목을 낚아채는 맞은편 여자 때문에 기분이 팍 나빠졌다.
이여자들-자기보다 어린 남자들 앉혀놓고 지금 뭐하자는 거야.
집단 로리콤 환자들도 아니고.
"이 손 놓으세요-"
"어머 얘~너 튕기는 거야?"
"이 손 놓으-"
"야! 너 그손 안놔?"
갑자기 버럭-소리를 지르는 목소리는 분명 김상혁 목소리 였지만, 결코 내가 들어오던 김상혁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런순간에 상기시키기엔 좀 웃기는 일이지만- 나는 상혁이의 화난 목소리를 한번도 들어본 기억이 없는것 같다.
"어머-너 뭔데 소리를 지르고-"
"그 손 당장 놓으라고 했어!"
그러면서 뚫어져라 바라보는 통에 내 손목이 다 녹아 내릴 것 같았다.
"유호석-가자. 이리나와."
결국 난 그자리에서 한마디도 못하고 김상혁 손에 질질 끌려 나오는 신세가 되버렸다.
"어디까지 갈거야. 놔."
"........................."
씩씩대며 걸어갈 뿐 대꾸를 하지도 않는 익숙하지 않은 화난 상혁이 뒷모습.
"아파, 이거 좀 놔."
그제서야 얼른 돌아서며 손목을 놓아준다.
"아...미안해."
빨갛게 자국이 남아버린 내 손목을 바라보며 어쩔줄을 몰라하는 모습을 보자, 나도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제서야 내가 아는 김상혁으로 돌아온 것 같아 나오는 안도의 한숨.
"넌 그냥 가라니까 왜 그런자리에 눌러앉아서 이런꼴을 당하고 그러는 거야?"
"내가 무슨 꼴을 당했는데?"
자기는 뻔뻔하게 냉큼 나간 자리에 나는 못 앉게 하는 이유가 뭐야?
누군 좋아서 그런 줄 알아? 다 너때문에 든 욱하는 심정으로 그런건데....
"무슨 꼴-"
"막말로 그여자가 내 얼굴에 뽀뽀를 했어, 껴안기를 했어? 내가 무슨 조선시대 정절 지키는 여자라고 손목 잡힌거 가지고 왠 소란이야?"
"뭐?"
"자기는 앉아서 희희낙낙 하던 주제에 나보고 가라니 말라니 그러질 않나- 내 손목 잡힌건데 니가 왜 난리를 피워? 그정도는 나 혼자서도 알아서 할 수 있어. 나도 싫으면 싫다고 말할줄 알아. 왜 어린애 취급이야?"
말하기 전에는 한번씩 곱씹어보고 하자는 나만의 철칙을 깨부숴버린 순간이었다.
아마 그때문이었을거다.
저 녀석이 상처받은 눈을 하는건.
내가 한말을 후회하는건.
"그래...주제넘게 간섭해서 미안해."
그러면서 돌아서 가버리는 녀석의 뒷모습은, 이제껏 내가 봐온 모습중에서 가장 처량하고 껴안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나는 여전히 용기없고 소심한 유호석이니까.
"호석아-혹시 상혁이랑 연락 안돼?"
".......안돼."
그러고 가서는 일주일째 아무 소식이 없다.
핸드폰도 안 받고, 내가 몇번을 망설이다 누른 상혁이네 인터폰에서 흘러나온건 친구집 간다고 하고 연락이 없다는 상만이형의 걱정스러운 목소리 뿐이었다.
"니네...혹시 싸웠어?"
"싸우긴....내가 김상혁이랑 싸울 능력이나 되야 싸우지."
모든게 그런 자릴 만든 오종혁 니놈 탓이라며 소리라도 질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역시나 그것도 마음뿐이었다.
이번엔 그럴 용기가 없는게 아니라, 그럴 기운이 없었다.
그렇게 내 속을 답답하게 만들던 녀석이 안보이니, 나의 이 웃기는 감정이 정리되기는 커녕 햇빛을 잃어 광합성을 못하고 땅으로 꺼져만 가는 한줄기의 풀과 같았다, 나는.
"싸웠구나? 정말..."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되삼키는 종혁이의,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측은하다고 느낀건 내 착각일까.
혹시 내가 남이 보기에도 그렇게까지 안타까워 보이는 걸까.
사실-녀석이 일주일만 더 잠적한다면, 내 주변 사람들은 전례없던 몰골의 유호석을 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녀석이 사라져버린 내 주변에 공기조차 달라서 마시고 싶지 않다면 나는 웃기는 놈일까.
"어째 질투작전 이라고 주선해 줬더니만 역효관가."
그러면서 폭-하니 한숨을 내쉬는 종혁이 얼굴이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
"그런자리라도 생기면 질투심에 확-감정을 말해버릴까 했더니만은, 오히려 싸우고...으어어~"
짜증난다는 듯이 머리를 쥐어뜯는 종혁이 팔을 확 휘어잡았다.
"뭐야? 그럼 너 알고 있었던 거야? 어떻게?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응?"
"뭐야-혹시 상혁이도 알아? 응? 어떻게 알았어-언제 어떻게 알았냐고!!!!"
상혁이에게 쏘아붙인 이후로 또다시 곱씹어보지 않고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고 말았다.
또 누군가에게 상처주는 건 아니겠지.
"에-? 뭐야.....푸-풋.....푸하하하하하하-그,그렇게 된거란 말이야? 하하하하하하-"
"하여간에 웃기는 꼴이라니까-"
언제 왔는지 동아리방 문을 열고 들어서는 연석이형이 나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형?"
"너같은 얼음왕자 속을 우리가 알게 뭐냐-너 헛다리 짚은거야."
"뭐?"
"그러니까-우리가 알고 있던건, 상혁이를 향한 니 속마음이 아니라, 너를 향한 상혁이 속마음이었다~이거지."
"무슨....."
"모르는척 하는거야-아니면 믿어지지가 않는거야? 그것도 아니면 못알아 듣는거야? 김상혁 마음도 너랑 똑같다고-"
머리를 뭔가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뭐라고? 나랑 똑같은 마음이라고? 그럼........
"말..도....안.....돼......."
"하여간에 둔하다니까-둔팅이들....으하하하하하 너네 앞으로 나한테 무신경하다고 하지마 으하하하하-"
정신이 없는건지, 종혁이의 웃음소리조차도 희미하니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더 지나고, 마음을 알게 됐건 어쨌건, 나는 녀석이 보이지 않아 말라만 가고 있었다.
"애 새끼 하나 완전 산송장 만들겠네-좀 나타나지 그 자식 참...."
그러면서 내 머리를 쓱 만지는 종혁이 손길을 쳐낼 기운도 없었다.
"어라? 머리 만졌는데도 반응이 없네? 야-유프린스 너 이러다 죽어!!정신 좀 차려봐!!"
대꾸할 기운도 사라진건지 대답을 하려해도 입이 열려주질 않았다.
나 안죽어-
김상혁 그 잘난 면상보기 전엔 절대 못 죽어-
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다늘어져서 힘겹게 들어선 동아리방 안에서 나는 못볼거라도 본 사람마냥 깜짝 놀라고 말았다.
창가에서 봄햇살을 맞으며 환영같이 앉아있는 김상혁.
"김...상혁.."
"아-왔어? 오랫만이다~너...어디 아팠어? 얼굴이 많이 말랐잖아..... 또 입맛없다고 밥 안먹고 다녔구나."
애를 두고 며칠 어디 다녀온 부모마냥 보자마자 걱정을 해대는 녀석이 우습고도 얄미웠다.
이게 다 누구때문인데-
그래 아팠다 이자식아! 네녀석 때문에 여기가, 여기가 아파서 죽는줄 알았다- 라고 말하고 싶어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꽉 쥐었지만, 차마 목이메어와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왜그래...무슨 일 있었어? 쿡..나보고 싶었구나? 헤헤...."
어느틈엔가 내앞까지 와서는 다정스럽게 머리를 넘겨주는 손을 탁-쳐내버렸다.
울컥-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너, 잠적하기 전에 나랑 싸웠던거 까먹었어? 너 혼자 다 잊어버리고 오면 다야?"
쎌쭉하니 시선을 돌려버리자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시선이 땅을향해 떨어지는게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멱살잡고 너 정말 나 좋아하는 거냐-라고 물어보고 싶지만, 유치한 내 감정이라는 건 내가 마음고생 한만큼 저녀석도 좀 당해봐야 할꺼란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내가 먼저 널 좋아했을테니까.
그리고 넌 어디 하소연 할 때라도 있었을테니까.
"아....그거..미안했어."
"뭘?"
"응?"
"뭘 잘못했는데? 알고나 사과하는 거야?"
"너한테 소리지르고.....또...."
"또?"
"......................."
시무룩해지는 옆얼굴이 너무 귀엽다는 고약한 생각이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넌 그래서....평생-안되는 거야! 절대로 허락 안 할거야...."
"응?"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잖아-스스로 알아내. 절대로 말 안해줄거야."
팔짱까지 껴가며 느긋하게 내리깔린 눈으로 바라본 녀석은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서는, 눈은 이제 답답해서 눈물이라도 흘릴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유호석-"
불현듯 차분하게 내리깔리는 목소리가 나를 긴장시켰다.
"나...이젠 지쳤어. 나 그만 괴롭혀.."
그러면서 나를 지나쳐서 동아리방 밖을 나가려 문을 여는 녀석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내가 언제 널 괴롭혔어? 사람 마음도 모르면서...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 나한테 소리지르고 화냈던걸 잘못한게 아니라- 니가 소개팅을 나간 자체가 나를 화나게 한거야. 멍청아!"
"그런......"
벙쩌있는 표정과 가끔 보이는 진지한 표정. 어느게 진짜 저녀석에게 잘 어울리는 걸까.
나는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는 고민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틈에 나에게 다가와서 양 어깨를 꽉쥐는 녀석.
"무슨 소리야 똑바로 말해."
"몰라-"
시선을 피하며 내리깔아 버리자 녀석이 나를 흔들어 댔다.
"말해봐. 너 지금 한말, 나 괜히 기대하게 만들고 있잖아. 말해봐 무슨 뜻으로 한거야!"
"더이상은 손해안봐. 마음대로 생각해."
정말로 그랬다. 이정도도 봐준건데, 내가 먼저 말해버리기에는 왠지 속이 상하고 억울했다.
"유호석-좋아해. 사귀자."
"뭐?"
막상 녀석의 입에서 좋아해-란 소리가 나오자 기분이 매우 묘했다.
"나 그만 속태우고 그냥 나한테 와. 응?"
지긋이 내 눈을 바라보는 녀석의 두 눈이 정말로 애타게 보였다.
"흥-오긴 뭘 와....쳇..."
"으응? 호시야~나좀 살려줘~"
금새 장난스럽게 바뀌는 녀석은, 어쩌면-어쩌면 벌써부터 내 속을 다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연석이형-나중에 태형이 형이랑 같은 수업 있지?"
"어-오늘 경제학언론 같이 들을껄? 왜?"
"형이 복수 해줘! 아까 삼육구 해가지고 나 엄청 맞았단 말이야 이거봐~히잉..."
"앗-애를 이렇게 때려? 김탱 이자식-분명 너 아방하다고 너만 공격한거야! 내 이자식을.."
어째 노는게 저렇게 유치한지-
"바보커플. 흥-"
"뭐? 서로 마음도 모르고 멍청하게 굴었던건 누구시더라~"
"오종혁-말조심해!"
"좀 죽어가나 했더니 또 부활이구만...그놈의 성질머리는 하여간...형 우리끼리 가자."
그러면서 연석이형을 끌고 가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내 손을 감싸쥐는 상혁이의 손길이 느껴졌다.
"날씨가....이제 따뜻해졌네-"
"그래, 더워이젠. 그러니까 손 놔."
그렇게 속을 태웠지만, 이젠 녀석의 속을 태우고 싶은 내 이 이상심리는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나를 좋아해주는 녀석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는 자만심일까?
"어째 호시 넌 사귀자 그러고 나니까 더 쌀쌀맞아진 것 같아....정말..."
그러면서 뒷머리를 긁적이는 녀석을 보자, 전에는 혼자서 몰래 짓던 웃음을 녀석앞에서 지어버렸다.
"뭐야-불안한거야 김쌍? 쿡..."
그렇게 마주친 시선이 얽힌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차에-
"참! 유치하기라면 김상혁이 더해!"
라면서 분위기 깨고 달려온 종혁이 녀석. 정말 찬물끼얹는데는 타고났나보다.
"별이 뭐야 별이-정말....니 눈이 좀 예쁘다고 쳐! 그렇다고 별이 뭐-"
"야-조용히 안해? 가~람쥐형이랑 가란말이야 오정발!!!!"
별?
"잠깐 오종혁-그게 무슨 소리야?"
"김상혁이 널 별이라고 부르잖아-호시, ほし라고...."
"뭐?"
풋......그래도 꼴에 일어과는 맞나보네.
호시가 별이라는 뜻이었어?
멍청이, 바보....바보 김상혁.
"아, 호시야, 아니 호석아 그게 아니라......"
"멍청이....."
너....나 중학교때부터 호시라고 불렀었잖아.
그럼...우린 이 바보짓을 얼마나 오랫동안 한거야 정말.
그래도, 이건 나만 아는 비밀-
"바보 김상혁-"
그래도...내가 사랑하는 김상혁.
"오종혁, 너 빨리 안가지? 후회한다....."
"뭘? 나 꿀릴거 하나도 없-"
햇살이 노곤한, 인적이 드문 길가에서 처음 맛본 상혁이 입술은.... 상상했던것 처럼 체리맛이 나진 않았지만 따뜻하고 달콤했다.
"간다, 가...가면 되잖아. 우어-하여간 저자식은 모를 자식이라니까."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뛰어가는 종혁이 뒷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유호석 너....너....."
"나 뭐?"
"나 왠지 마녀랑 사귀는 기분이 드려는 중이야;"
"억울하면 물러. 물러줄수 있어."
칭찬에 대한 보답이야. 그리고 내 마음 받아준거에 대한 보답.
"바보 김상혁."
그리고....내가 사랑하는 김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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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해 볼려고 했는데 그냥 올려버려요;
오타는 필요악이구요;;;
한번쯤 응큼하고 조금 바보짓(?)하는 호시 속마음을 써보고 싶었답니다;
으허허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