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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사절 대차왜(大差倭)와 표류왜선(漂倭船) 「장계(狀啓)」 2건>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에는 조선 통신사(通信使)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일본 정부의 대차왜(大差倭, 사절)가 바다를 건너온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 먼저 달려온 대마도 비선(飛船)을 조사한 「장계(狀啓)」와 경남 연안에 표류한 나가사키(長崎島) 소속 일본 대선(倭大船)의 문정(問情) 조사와 송환 과정을 보고한 「장계(狀啓)」 등 총 2건을 소개하겠다.
먼저 ①「1717년 조선 통신사(通信使)를 요청하려는 대차왜(大差倭)의 방문 소식을 알리는 장계(狀啓)」는 1717년 10월 17일, 정체불명의 왜선 한 척이 경상도 거제 지세포(知世浦) 근처에 나타났다. 거제 통역관이 조사한 결과, 조선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려는 대차왜(정식 사절)가 곧 조선에 올 것임을 알리려는 대마도 비선(연락선)이었다. 이는 당시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죽고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가 제8대 쇼군으로 즉위(1716년)한 것에 대한 축하 사절을 의미했다. 이에 한양에서는 접위관(接慰官)을 부산에 보내 일본 사절단을 맞이하면서 그들에게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한 후에 통신사 일행을 구성하겠다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두 번째 ②「1871년 9월23일 나가사키(長崎島)의 표왜선(漂倭船) 구호 및 송환 장계(狀啓)」는 1871년 9월23일 경상도 연안에 표류한 나가사키(長崎島) 소속 일본 대선(倭大船)의 문정 조사 결과와 송환 상황을 보고한 문건이다. 이 표류왜선은 처음에는 거제도 지세포에 정박해서 문정(問情)을 받고 구호 물품을 지급 받았는데, 다시 대마도로 향하다가 거센 바람과 비를 만나 통영 사량(蛇梁)의 공수포(供須浦) 앞바다에 정박하게 되어 또다시 문정(問情)을 받게 되었다. 이에 선원 한 명의 인명 피해 외에 배나 물건의 손상은 없었고, 처음 지세포에 머물 때와 인원 및 물품 구성이 동일함을 확인하여 표류왜선(漂倭船)을 대마도로 귀국하도록 조치했다는 내용이다. 당시의 외교 관례(표류민 송환 정책)에 따라 조선 정부가 조난 당한 일본인을 조사하고,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여 안전하게 귀국시킨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사료다. 이번 문건은 다른 표왜선 문건과 다소 다른 차이점이 있다. 대부분의 표류 왜선은 부산의 초량 왜관으로 인도하는데 거제와 통영에서 2차례 조사 후, 곧바로 귀국시킨 점이 특이하다. 당시 조선의 대일 외교 및 표류민 관리 시스템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 [대차왜(大差倭)와 소차왜(小差倭)] 차왜(差倭)는 조선 시대 일본에서 특정한 외교적 현안을 처리하기 위해 파견한 임시 외교 사절을 통칭하는 말이다. 정기적인 무역 사절인 '연례송사(年例送使)'와 달리, 별차왜(別差倭)라고도 불리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수시로 파견되었다. 차왜는 일본의 중앙 정부(에도 막부)나 대마도(쓰시마 섬)의 중대한 소식을 전하거나 실무 협의를 담당했다. 즉, 국가적 대사 알림으로 쇼군(관백)이나 대마도주의 사망, 즉위(승습) 소식 전달했고 조선 통신사(通信使)의 파견을 요청하거나 안내 및 호위 업무 수행했으며 해난 사고로 일본에 표착한 조선인(표류민)을 데려오고 이에 대한 사례 전달했다. 또한 외교 및 경제 교섭으로, 공작미(公作米, 공무역 지급 쌀) 등의 세금 문제나 왜관 내의 질서 유지 등 실무를 협의했다.
*조선은 차왜(差倭)가 가져온 서신의 수신인과 임무의 성격에 따라 대우를 달리했다. 대차왜(大差倭)는 쇼군이나 통신사(通信使) 등 국가적 중대사를 다루며, 예조 참판 앞으로 보내는 서계를 지참한 상급 사절이었고 두터운 대접을 받았다. 소차왜(小差倭)는 대마도주의 문안이나 단순 답례 등 비교적 가벼운 사안을 다루며, 예조 참의 앞으로 보내는 서계를 지참했다. 소차왜는 사안이 생길 때마다 수시로 파견되었으며, 대차왜에 비해 규모나 접대 수준이 낮았다.
차왜들의 접대 장소는 왜관(倭館)이었다. 차왜들은 부산에 설치된 왜관(초량왜관)에 머물며 외교 활동을 펼쳤다. 조선은 이들을 위해 연회(宴享)를 베풀고 필요한 물자를 공급했으며, 이들의 체류 기간과 인원수를 엄격히 제한하여 외교적 부담을 조절했다.
1) 「1717년 조선 통신사를 요청하려는 대차왜(大差倭)의 방문 소식 장계(狀啓)」
이번 문건은 《각사등록(各司謄錄)》 중 동래부에서 작성한 〈접대등록(接待謄錄)〉의 일부로, 1717년(숙종 43년, 강희 56년) 10월 22일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1717년(숙종 43년) 조선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온 일본 대마도 사절단의 도착 상황을 보고하고 이에 따른 후속 조치를 요청하는 대마도의 연락선(飛船)을 조사한 보고서다. 왜선 한 척이 경상도 거제도 지세포(知世浦) 근처에 나타나, 조사한 결과, 대마도에서 보낸 비선(연락선)이었으며, 조선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는 대차왜(大差倭, 정식 사절)가 곧 온다는 소식이었다. 이에 조선 조정(비변사와 예조)에서 취한 후속 행정 조치를 담고 있다. 결국 조정에서 "일본 측 사절(大差倭)이 오기로 했으니, 관례대로 접대 관리들을 미리 임명하고 통신사 파견 준비를 시작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 기록은 조선 후기 조일 외교의 핵심 이벤트인 '통신사 파견'이 어떤 실무 과정을 거쳐 결정되는지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자료다.
*내용인즉, 1717년 10월 17일부터 21일 사이 사건 개요. 10월 17일, 정체불명의 왜선 한 척이 경상도 거제 지세포(知世浦) 근처에 나타났다는 봉수군과 첨사들의 보고가 잇달았다. 거제 왜학(통역관) 양시웅이 조사한 결과, 이 배는 일본에서 보낸 비선(飛船, 빠른 연락선)으로 확인되었다. 우두머리 왜인 1명과 격군(사공) 7명이 타고 있었으며, 조선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는 대차왜(정식 사절)가 곧 올 것임을 알리는 문서(先文)와 노인(路引, 통행증)을 지니고 있었다.
*대마도에선 대마도주가 통신사 요청 문제로 에도(강호)에 갔다가 10월 6일 대마도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곧 정식 사절인 대차왜(평륜지 등)가 올 것이므로 준비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동래부에서 요청이 있었다. 정식 사절이 오면 관례에 따라 접대해야 하므로, 한양에서 내려오는 접위관(接慰官)과 차비역관(상당 및 당하 각 1명)을 미리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 일본 측에서 가져온 노인(路引, 통행증)을 봉인하여 해당 관청(예조)으로 보냈다. 결론적으로 "1717년 일본에서 통신사를 요청하는 사절단이 곧 도착할 예정이니, 조정에서는 이들을 맞이할 관리들을 미리 뽑아 내려보내 달라"는 내용의 행정 보고서다.
○ 통신사 맞이 행정 절차와 배경에 대해 일러주고 있다. 1717년 10월에 동래부에서 보고가 올라간 후, 약 보름 뒤인 11월 8일에 중앙 정부(비변사)에서 접대 관리(접위관 등)를 미리 뽑아두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718년 3월 기록을 보면, 영의정 김창집이 "관백(쇼군)이 새로 즉위했으니 통신사를 보내는 것이 관례"라고 언급했다. 이는 당시 도쿠가와 이에쓰구 사후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가 제8대 쇼군으로 즉위(1716년)한 것에 대한 축하 사절을 의미한다. 이에 무작정 통신사를 바로 뽑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려보낸 접위관이 일본 사절(평륜지 등)을 만나 정확한 상황을 다시 보고하면 그때 정식으로 통신사 일행을 구성하겠다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 덧붙여 이번 「1717년 10월22일 통신사를 요청한 차왜(差倭) 평륜지의 접대 장계(狀啓)」는 발신자가 동래부사(東萊府使)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동래부계록(東萊府啓錄)』이다.
**「1717년 조선 통신사를 요청하려는 대차왜(大差倭)의 방문 소식 장계(狀啓)」**
<각사등록 제○책(동래부 접대등록 평륜지)> 강희 56년(1717년) 정유 10월 22일. 강희 57년(1718년) 4월일, 통신사를 청하러 온 차왜(사절) 평륜지(平倫之)의 접대 등록.
*하나(一), 동래부의 장계 내용 : 이달 17일 신시(오후 3~5시)경, 황령산(荒嶺山) 봉군 서계명과 간비오(干飛烏) 봉군 박세창 등이 보고하기를, "조선 배인지 왜선인지 판별되지 않는 배 한 척이 물결을 타고 나왔는데, 우도(右道) 방향으로 떠내려가고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이어 도착한 부산첨사 이필익의 통문에 따르면, "왜소선 한 척이 대마도로부터 나왔는데, 우도 방향으로 떠내려가고 있다는 석성(石城) 봉군의 보고에 근거하여, 정박한 곳을 상세히 탐지하여 보고하라고 차례로 지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0일 미시(오후 1~3시)에 도착한 같은 첨사의 통문에 따르면, 가덕첨사의 전언과 다대포첨사의 보고를 인거하여 "17일 나온 왜소선 한 척이 18일 미시에 지세포(知世浦) 강구에 정박하여 수호하고 있다"는 내용을 차례로 전달하며, "신속히 관소(왜관)로 인도하도록 엄히 지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날 해시(오후 9~11시)에 작성하여 21일 자시(오전 0시경)에 도착한 같은 첨사의 통문에 따르면, 가덕첨사의 전언과 다대포첨사의 보고에 근거하여 "이번 지세포에 표박한 왜소선 한 척에 대해, 거제 왜학(통역관) 양시웅이 오늘 19일 진시(오전 7~9시)에 급히 도착하여 사정을 물으니(問情), 비선(飛船, 빠른 연락선) 한 척에 우두머리 왜인 1명과 격군 왜인 7명 등이 함께 타고 노인(路引, 통행증)을 지니고 나왔으나, 풍세가 좋지 않아 이곳에 표류하게 되었다고 답하였다"는 내용을 전해왔습니다.
해당 소선 한 척을 차례로 끌어 관소로 호송하라는 지시에 따라, 호송장인 다대포 이선장(二船將) 함무필(咸武弼)의 보고에 근거하여, 다시 훈도(訓導) 최상섭과 별차(別差) 한찬흥 등으로 하여금 사정을 묻게 하니 수본(보고서)에 이르기를, "비선 한 척에 우두머리 1명, 격군 7명이 타고 노인 및 통신사를 요청하는 대차왜의 선문(先文, 미리 보내는 글)을 가지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관수왜(왜관 관리)가 말하기를, "이번 비선이 온 것은 섬 안의 사신(私書)을 전하기 위함인데, 통신사를 청하러 오는 대차왜가 머지않아 나올 것이니, 서울의 접위관(接慰官)과 차비역관 당상·당하 각 1명을 미리 임명해 두었다가 차왜가 나오면 즉시 내려오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대마도주가 올해 봄에 에도(江戶)에 들어갔다가 통신사 요청 건으로 이달 6일 본도로 돌아왔다"고 하였기에, 소지한 노인(路引, 통행증) 1통을 받아 올려보낸다는 수본에 근거하여, 해당 노인을 전례대로 수송하였다고 통보하였습니다. 위 비선이 가져온 노인 1통은 봉인하여 해당 조(예조)에 올립니다.
관수왜(館守倭)가 이르기를 "통신사를 청하는 대차왜가 조만간 나올 것"이라 하니, 해당 차왜가 나온 뒤에는 전례에 따라 접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경접위관 및 차비 당상·당하 역관 등을 전례에 의거하여 미리 (관리들을) 차출해 두었다가, 차왜(일본 사절)가 나오면 즉시 내려보내는 일에 대해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품의하여 처리하도록 상세히 보고한다. 강희 56년(1717년) 정유 10월 22일.
*하나(一), 비변사에서 올린 보고(申目)에 따른 하관(지시 사항) 내용 : 통신사를 청하기 위해 보내는 대차왜가 조만간 과연 나오게 된다면, 경접위관 및 차비역관 등을 전례에 따라 미리 차출해 두었다가 임시로 제때 내려보낼 수 있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내용을 해당 조(예조)와 해당 원(승정원)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강희 56년 11월 8일, 좌부승지 이덕영이 왕의 승낙(윤허)을 받아 전교한 바에 따라, 전교하신 내용의 뜻을 받들어 시행하도록 하라. 강희 56년 11월 9일.
*하나(一), 비변사에서 참고할 만한 사안을 보고하여 내린 하교 내용 : 이번 2월 30일, 대신들과 비변사 당상들이 입궐하여 왕을 알현했을 때,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동래부사 조태억(趙泰億)의 장계와 예조의 보고 내용에 '통신사를 차출하는 일을 묘당에서 품의하여 처리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전부터 관백(關白, 에도 막부의 쇼군)이 새로 즉위하면 관례적으로 통신사를 청해왔습니다. 우선 접위관의 후속 보고를 기다렸다가 통신사를 차출하겠다는 뜻을 해당 조(예조)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왕께서 "아뢴 대로 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내려진 명령의 뜻을 받들어 시행하도록 하라. 강희 57년(1718년) 3월 6일.
[各司謄錄第○冊 (東萊府接待謄錄平倫之). 康熙五十六年丁酉十月二十二日. 康熙五十七年四月 日信使請來差倭平倫之接待謄錄. 一東萊府狀達, 本月十七日申時量, 荒嶺山烽軍徐戒命, 干飛烏烽軍朴世昌等進告內, 朝倭未辨船一隻, 水旨出來爲如可, 漂向右道是如進告是白齊. 追于到付釜山僉使李必益馳通內, 倭小船一隻, 自馬島出來爲如可, 漂向右道是如石城烽軍進告據, 止泊處詳探飛報之意, 次次申飭爲臥乎事馳通是白齊. 二十日未時到付同僉使馳通內, 加德僉使傳通據, 多大浦僉使馳通內, 十七日出來倭小船一隻, 十八日未時, 知世浦江口止泊守護是如, 次次傳通據馳通是乎等以, 從速領付館所之意, 申飭爲臥乎事馳通是白齊. 同日亥時成貼二十一日子時到付同僉使馳通內, 加德僉使傳通據, 多大浦僉使馳通內, 今此知世浦漂泊倭小船一隻亦中, 巨濟倭學梁時雄, 今十九日辰時馳到問情, 則飛船一隻, 頭倭一人, 格倭七名等同騎, 持路引出來爲如可, 風勢不順, 漂到此處云云是如問情傳通據, 馳通爲有旀. 同小船一隻, 次次領曳, 護送館所是如, 護送將多大浦二船將咸武弼馳報據, 更令訓導崔尙㠎, 別差韓纘興等問情後, 手本內, 飛船一隻, 頭倭一人, 格倭七名等同騎, 路引及請信使大差倭先文持來是如爲旀. 館守倭言內, 今此飛船之來, 得見島中私書, 則通信使請來大差倭, 不久當爲出來是去乎, 京接慰官及差備譯官堂上·堂下各一員, 預爲差出爲有如可, 差倭出來, 卽時下來亦爲有旀. 且對馬島主, 今年春間入往江戶矣, 以信使邀請事, 今月初六日還到本島是如爲乎等以, 所持路引一度, 捧上上送爲臥乎味手本據, 同路引依前輸送爲臥乎事爲等如, 馳通是白置有亦. 上項出來飛船路引一度監封, 該曹良中上送爲白齊。館守倭以爲, 信使請送大差倭, 不久出來是如爲白臥乎所. 同差倭出來之後, 則不可不依例接待是白去乎, 京接慰官及差備堂上·堂下譯官等, 依前例預爲差出, 差倭出來卽時下送事, 令廟堂稟處爲只爲, 詮次善達云云. 康熙五十六年丁酉十月二十二日.
一, 備邊司申目達下關內, 信使請送大差倭, 不久果爲出來, 則京接慰官及差備譯官等, 依前例預爲差出, 以爲臨時下送之地宜當, 以此分付于該曹該院, 何如? 康熙五十六年十一月初八日, 左副承旨李德英次知達依準敎事是去有等以, 徽旨內事意, 奉審施行向事。康熙五十六年十一月初九日.
一, 備邊司爲相考事節達下敎, 今二月三十日大臣·備局堂上引接入對時, 領議政金 所達, 因東萊府使趙 狀達, 禮曹申目內, 通信使差出事, 令廟堂稟處矣. 自前關伯新立, 則例請信使矣. 姑待接慰官更報, 差出通信使之意, 分付該曹, 何如? 令曰依爲之事, 下令敎是置. 下令內事意, 奉審施行向事. 康熙五十七年三月初六日.]
[주1] 평륜지(平倫之) : 당시 대마도에서 보낸 사절의 이름이다.
[주2] 비선(飛船) : 급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용하는 빠르고 작은 배.
[주3] 문정(問情) : 표류하거나 새로 도착한 외국인에게 그 사정을 묻는 조사 과정.
[주4] 노인(路引) : 일종의 통행 허가증 또는 여권이다.
[주5] 접위관(接慰官) : 외국 사절을 맞이하고 위로하기 위해 조정에서 파견하는 관리.
[주6] 대차왜(大差倭) : 조선 시대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보내던 사신. 주로 일본 측의 통신(通信) 요구나 통신사의 호위 문제를 논의하고, 관백이나 도주 같은 사람의 승습(承襲)ㆍ퇴휴(退休)ㆍ사망 따위를 알리는 일을 했다.
[주7] 관수왜(館守倭) : 조선 시대 동래(부산)에 설치된 일본인 거주지인 왜관(倭館)에서 실무와 관리를 총괄했던 대마도에서 파견한 일본측 대표직을 말한다.
2) 「1871년 9월23일 나가사키(長崎島)의 표왜선(漂倭船) 구호 및 송환 장계(狀啓)」
이번 장계는 승정원일기 또는 비변사등록 기사에 실려있으며, 1871년 9월23일 경상도 연안에 표류한 나가사키(長崎島) 소속 일본 대선(倭大船)의 처리 과정[문정(조사)]과 귀국 상황[송환 과정]을 보고한 내용이다. 기존에 6명이었던 일행 중 1명이 사망(익사)하여 5명이 남게 된 비극적인 상황과, 이에 따른 조선 정부의 인도주의적 배려가 잘 드러나 있다.
*내용인즉, 해당 표류한 일본 배는 처음에 지세포(知世浦, 거제)에 머물다가 1871년 9월12일 새벽에 일본으로 떠났다. 표류 사유를 보면, 귀국 도중 '수지(水旨, 대마도 인근 바닷길)'에서 갑작스러운 동풍을 만나 대양으로 밀려났고, 그 과정에서 선원 '구륙(久六)'이 돛 바람에 휩쓸려 바다에 빠져 사망(익사)했다. 이후 또 거센 바람과 비를 피해 13일 아침, 사량(蛇梁, 통영) 관내 공수포(供須浦) 앞바다에 다시 정박하게 되었다.
이에 문정(問情) 실태 조사가 시작되었다. 옥포 왜학(통역관) 이최수, 사량 만호 황종려, 고성부사 대리 조상린 등이 합동 조사했다. 선주 '우평(尤平)', 사공 '오조(五助)' 등은 "집을 떠난 지 오래되어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인데, 역풍을 만나 표류한 것이지 결코 일부러 머무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선원 한 명의 인명 피해 외에 배나 물건의 손상은 없었으며, 처음 지세포에 머물 때와 인원 및 물품 구성이 동일함을 확인했다.
*표류왜선(漂倭船)은 조선 측의 구호 조치가 끝나고 대마도로 귀국하게 되었다. 지방 관아(고성)에 지시하여 매일 먹을 음식과 특별 격려품을 넉넉히 제공하고, 불조심 및 외부인 출입 통제를 철저히 하도록 했다. 며칠 뒤인 21일 오전 10시(사시)경, 사량 만호의 호송을 받으며 다시 출항했다. 외해(外海)에 이르러 순풍을 타고 대마도 쪽(수지 절망처)으로 곧장 항해하는 것을 확인한 후 호송선이 돌아왔다는 보고다. 당시의 외교 관례(표류민 송환 정책)에 따라 조선 정부가 조난 당한 일본인을 조사하고,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여 안전하게 귀국시킨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사료다.
이번 문건은 다른 표왜선 문건과 다소 다른 차이점이 있다. 먼저 부산의 초량 왜관으로 인도하지 않고 곧바로 귀국시킨 점이다. 또한 조선 정부는 일본인 1명이 익사한 것에 대해 "참혹하다(慘惻)", "가련하다(矜悶)"는 표현을 쓰며 깊은 유감을 표했으며, 사고를 당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일반적인 규정보다 더 후하게 대접(拔例備給)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리고 이미 거제에서 40일 치 식량을 받았으므로 중복 지급은 하지 않는다는 실무적인 판단과, 호송 비용 절감을 위해 현지 만호가 안내를 겸임하게 한 점이 눈에 띈다. 이 기록은 1871년 9월 23일에 작성된 것으로, 당시 조선의 대일 외교 및 표류민 관리 시스템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 덧붙여 이번 「1871년 9월23일 나가사키(長崎島)의 표왜선(漂倭船) 구호 및 송환 장계(狀啓)」는 발신자가 통제사(統制使) 정규응(鄭圭應)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통제영계록(統制營啓錄)』이다.
**「1871년 9월23일 나가사키(長崎島)의 표왜선(漂倭船) 구호 및 송환 장계(狀啓)」**
승정원에서 (왕에게 보고서를) 올립니다. 거제 지세포(知世浦) 경계 내 구조라포(舊助羅浦) 앞바다에 정박했던 나가사키(長崎島)의 일본 큰 배 한 척이 떠난 뒤의 형편과, 통영 사량(蛇梁) 경계 내 공수포(供須浦) 앞바다에 일본 큰 배 한 척이 정박하게 된 경위를 앞서 차례로 급히 보고한 바 있습니다.
이번 달 1871년 9월17일 묘시(오전 5~7시)에 도착하였고, 16일 진시(오전 7~9시)에 작성된 옥포 왜학(통역관) 이최수의 보고서(手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량사(蛇梁使)의 전령을 받고 즉시 달려가, 사량 만호 황종려 및 지방관인 고성부사 유기동(병중이라 대리인 좌수 조상린이 참석함)과 함께 직접 확인하고 사정을 물었습니다.
해당 일본 배 한 척은 바로 전날 지세포에 정박했던 나가사키 선박인데, 본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맞바람(역풍)을 만나 이곳으로 떠밀려 온 것입니다. 선주 왜인 '우평(尤平)', 사공 왜인 '오조(五助)', 격군(사공 보조) 왜인 '병위(兵衛)', '우팔(友八)', '기장(幾藏)' 등이 진술하기를, “저희는 이번 달 12일 인시(오전 3~5시)에 지세포를 떠나 곧장 본국으로 향했습니다. 같은 날 낮 12시경 대마도 인근(水旨)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동풍이 크게 불어 큰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격군 왜인 '구륙(久六)'이 돛 바람에 휩쓸려 물에 빠져 죽었고, 파도에 떠내려갔습니다. 저희가 작은 배를 타고 좌우로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시신을 건지지 못했고, 바람에 밀려다니다가 날이 저물 무렵 이 섬(사량도) 앞바다에 이르렀습니다. 호송선을 만나 끌려오던 중 동풍이 계속 불고 비까지 내려 밤을 지샌 뒤, 13일 묘시(오전 5~7시)에야 간신히 이곳에 정박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인들에게 다시 캐묻기를, "너희들이 지세포에서 이미 바다를 건널 양식과 반찬을 받았는데, 지금 다시 이곳으로 밀려온 것이 혹시 고의로 표류한 것(故漂)이 아니냐?" 하니, 답하기를 "저희는 집을 떠난 지 여러 날이라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화살 같은데, 마침 역풍을 만나 이곳까지 떠밀려 온 것입니다. 어찌 감히 고의로 머무를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다시 묻기를 "표류할 때 배의 장비가 부서지거나 잃어버린 것은 없느냐?" 하니, "하나도 손상된 것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배에 실린 물건과 사람의 모습, 처음 표류해온 사정 등은 전날 지세포에 머물 때 조사한 내용과 똑같았습니다. 이에 지방 향리에게 지시하여 매일 먹을 음식과 특별한 대접을 후하게 준비해 주도록 하였습니다.
함께 도착한 사량 만호 황종려의 보고에 따르면, "관내에 정박한 나가사키 일본 배 한 척에 대해 왜학과 함께 조사를 마쳤으며, 불조심을 시키고 잡인의 출입을 막는 등의 조치를 철저히 시행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추가로 21일 미시(오후 1~3시)에 도착한 같은 만호의 보고에 따르면, "정박 중이던 일본 배 한 척이 오늘(21일) 오전 10시경 출항하였습니다. 만호가 직접 호송하여 앞바다까지 나갔는데, 일본 배가 순풍을 만나 돛을 달고 대마도가 보이는 곳(水旨 絶望處)으로 곧장 건너갔기에 만호는 부대로 복귀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작성된 고성부사 유기동의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절도사(상급 부대)의 지시를 받들어, 본 고을 관내인 사량(蛇梁) 지경에 표류해 온 나가사키 왜인 5명에 대하여, 지방 향리들에게 엄히 지시하여 매일 제공하는 음식과 특별 대접(別饋)을 각별히 정성껏 준비해 주었습니다. 이후 들어간 각종 비용은 명부(성책)를 작성하여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이번 사량도 지경에 정박한 일본 큰 배 한 척에 대해 관례에 따라 사정을 조사한즉, 이들은 바로 며칠 전 지세포에 머물렀던 나가사키 왜인들로서, 귀국하는 길에 바람을 만나 다시 표류한 자들입니다.
그들 6명 중 1명이 돛에 부딪혀 익사한 것은 매우 참혹하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아득한 바다에서 풍랑이 워낙 거세어 시신을 건져내지 못한 것은 상황이 그러하여 어쩔 수 없었다 하겠으나, 남겨진 5명이 만 리 타향에서 표류하게 된 처지가 더욱 가련하고 답답합니다.
이에 지방관인 고성부사 유기동에게 특별히 지시하여, 매일의 식사와 특별 대접을 평소의 사례보다 더 파격적으로 넉넉히 제공함으로써 조정에서 이들을 위로하고 보살피는 뜻을 보여주게 하였습니다. 다만, 바다를 건너갈 때 필요한 양식(越海糧饌)의 경우, 앞서 지세포에 정박했을 때 거제부사 이붕래가 이미 40일 치를 계산하여 지급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중복해서 줄 필요가 없습니다.
호송과 길 안내를 맡을 관리(차원)는 해당 진영(사량진)의 폐단을 고려하여 사량 만호 황종려가 겸임하도록 정했습니다. 이제 순풍을 기다려 이미 앞바다 대마도가 보이는 곳까지 호송을 마쳤습니다. 매일 제공한 음식 등의 비용 명부는 삼군부(三軍府)로 보냅니다.
이러한 전말을 급히 보고하오니, 차례를 갖추어 임금님께 잘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치 10년(1871년, 고종 8년) 9월 23일. 의정부에 베껴서 보고함.
[承政院開拆. 知世浦境舊助羅浦前洋止泊長崎島倭大船一隻, 離發形止及蛇梁境供須浦前洋倭大船一隻止泊緣由, 前已次第馳啓爲白有在果。本月十七日卯時, 到付十六日辰時成貼玉浦倭學李最修手本內, 卽到付使傳令內乙用良, 蛇梁境止泊倭大船一隻亦中, 卽爲馳往, 與該鎭萬戶黃鍾呂, 地方官固城府使柳箕東身病代, 座首諸尙麟, 眼同問情, 則同倭船一隻, 卽前日知世浦境止泊之長崎島倭船, 而入歸之路, 逢逆風轉漂此處是乎所, 同船主倭尤平, 沙工倭五助, 格倭兵衛友八幾藏等所告內, 俺等今月十二日寅時, 自知世浦境離發, 直向本國, 同日午時, 到水旨, 東風不時大作, 漂盪大洋, 格倭久六, 爲帆風所摶, 仍爲落水致死, 隨波漂流。故俺等乘汲水小艇, 左右周探, 未拯屍身, 從風轉漂, 及其日暮時, 到于此島外洋, 逢領護船, 領曳之際, 東風連吹。且値雨下, 逗遛經夜, 十三日卯時, 僅僅前進, 止泊此處是如爲乎等以。同倭等處, 更爲詰問曰, 爾們自知世浦境, 旣受越海糧饌, 今又漂到此處, 豈非故漂耶。答以爲俺等離家多日, 歸心如矢, 而適値逆風, 致此轉漂, 豈敢有故漂之理乎? 更問曰, 爾們轉漂之時, 或有船具傷失否, 答以爲一無傷失是如爲乎旀, 船中所載物件及船體人形, 當初漂越事情, 與前日知世浦境止泊時問情, 一般是乎等以. 申飭地方鄕色, 日供別饋, 從厚備給是如爲白有旀. 一時到付蛇梁萬戶黃鍾呂馳報內, 本鎭境止泊長崎島倭大船一隻亦中, 眼同倭學, 今已問情, 而愼火禁雜人看護等節, 着實擧行是如爲白有旀, 追于到付二十一日未時成貼同萬戶馳報內, 本鎭境止泊倭大船一隻, 今月二十一日巳時, 離發, 萬戶領護前進, 及到外洋, 同倭船逢順風掛帆, 直渡于水旨絶望處是乎等以. 萬戶仍爲還鎭是如爲白有旀. 一時到付同日同時成貼固城府使柳箕東馳報內, 節到付使關內乙用良, 本府地方蛇梁境漂泊, 長崎島倭五名亦中, 申飭鄕色, 日供別饋, 各別精備以給後, 所入各種, 修成冊上使是如. 爲等如馳報是白置有亦。今此蛇梁境止泊倭大船一隻, 依例問情是白乎則, 卽是前日知世浦境止泊長崎島倭, 而入歸之路, 逢風轉漂是白乎所, 彼人六名中, 一名之觸帆渰死, 殊甚慘惻, 而茫茫大海, 風濤迅急, 屍身之不得拯出, 其勢卽然是白乎乃, 其餘五名之萬里漂情, 尤極矜悶乙仍于, 別加關飭於地方官固城府使柳箕東處, 日供別饋, 拔例備給, 以示朝家慰撫之意是白遣, 越海糧饌段, 前於知世浦境止泊時, 當該地方官巨濟府使李朋來, 已有所四十日計給者。故今番段, 不必疊給是白遣, 護送指路差員段, 爲念鎭弊, 以該鎭萬戶黃鍾呂, 兼帶差定, 待順風, 今已護送於外洋絶望處爲白有等以. 日供別饋, 成冊上送于三軍府爲白乎旀. 緣由馳啓爲白臥乎事是白良厼, 詮次善啓向敎是事. 同治十年九月二十三日. 謄報議政府]
[주1] 지세포 / 사량 : 현재의 거제도 지세포와 통영 사량도 지역으로, 일본으로 가는 주요 해로였다.
[주2] 수지(水旨) : 대마도 근처의 바닷길을 의미함.
[쥬3] 고의 표류(故漂) :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의 접대를 받기 위해 일부러 표류하는 경우가 있어 이를 엄격히 조사했다.
[주4] 인도주의적 조치 : 사고로 동료를 잃은 일본인들에게 음식을 후하게 대접하고 안전하게 본국 해역까지 배웅하는 조선의 상호교린의 외교 관례가 잘 나타나 있다.
[주5] 시호등이(是乎等以) : 이두어, ─이온 줄로. ─이온 바로. ~인 까닭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