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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월에 뻐꾸기에 관심을
예쁘게 생겼어요
권혜경의 일생기& 마지막 그의 人生 여정길은 참 슬프다
참으로 오래전에 작품
어쩌다 찾아서 옮겨 봅니다
화려한 그 인생의 무대뒤엔
참으로 슬픕니다
권혜경 님의 산장의 여인을 좋아했던 그 시절 있었네요
특히 강원도 같은 고향 삼척입니다
상당히 부유한 집안서 그 당시 연예활동을
이해 못 하신 부모님들
그 사람의 노래 따라가는 인생인 듯합니다
산장의 여인으로 인기였던
권혜경 씨
노랫말처럼의 인생입니다
모든 재산을 환원하면서
그러나 그 이름 석자는 지금은 잊힌듯합니다,
안타깝네요
2026년 7월 29일에
양떼의 재 조명
참으로 비운의 여인
권혜경 님
권혜경(1931년 11월 12일 ~ 2008년 5월 25일)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항년 76세로 사망했다.
강원도 삼척시에서 세무서원이었던 아버지의 2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난
고인은 1956년 당시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전속 가수 3기로 발탁됐고,
57년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의 음반 데뷔곡인 '산장의 여인'을 발표하며 주목받았다.
가수 권혜경, 본명 권오명(權五明).
(1931년 10월 3일 삼척에서 출생, 2008년 5월 25일 사망)
1931년 10월 3일, 세무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2남 4녀 중 넷째 딸로 삼척에서 출생했다.
이후 의정부로 이사, 대문을 세 번이나 열어야 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부유하고 엄격한 가정에서 자랐다.
의정부보통학교를 거쳐 서울의 동구여상을 졸업한 후 부모의 뜻을 따라
당시 조흥은행에 입사해 사회에 첫발을 디딘 그녀. 스물여섯이 되던 해인
1956년, 당시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가수모집에 응시, 전속가수로 발탁된다.
산장의 여인, 이 노래는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그녀 나이 스물여섯에 발표한 데뷔곡이자 대표곡이다.
작사가 반야월 선생이 마산결핵요양소를 찾았다가 그곳에서 보게 된
한 환자복의 여인을 모티브로 해서 즉석에서 노랫말을 지었다.
그리고 이 가사에 '한국의 슈베르트'라 불리던 작곡가 이재호 선생이 곡을 붙였다.
음악생활 내내 지병인 폐결핵이라는 병마에 시달리며
43세라는 짧은 생을 살았던 작곡가 이재호 선생은 이 노래를 만들 즈음엔
폐 한쪽을 잘라내야 했을 만큼 악화된 상태로 특히
아름다운 이 멜로디는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는 이들의 눈시울을 젖게 만든 노래이기도 하다.
반야월 선생은 당시 의학으로는 쉽게 치료할 수 없었던 불치병,
즉 결핵을 노래로 치유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고인은 라디오 드라마 '호반에서 그들은'의 주제가인 '호반의 벤치
59년 개봉된 신상옥 감독의 영화 '동심초'의 주제가를 취입했다.
그러나 인기 가수 대열에 들어선 뒤 59년 심장판막증 판정을 받았고
이어 후두암 선고까지 받으며 병마에 시달렸다.
투병 중 작곡가 박춘석 씨와 손잡고 발표한 '물새 우는 해변'도 대표곡이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결국 가수 활동을 중단했다.
60년대 중반 이후부터 그녀는 전국의 교도소와 소년원을
수십 년간...
4백여 차례 봉사활동을 펼쳐 수인들 사이에서 '어머니'라 불리기도 했다.
생의 절반 이상을 봉사활동에 바쳤던 그는 제34회 세계인권의 날에
인권옹호유공표창을 비롯해 5백여 회 표창을 수상했다
1994년 충북 청원군 남이면의 한 농가에 정착했고 그 후
그녀는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 외로운 이 산장에'로 시작되는 그녀의 히트곡
'산장의 여인' 노랫말처럼 홀로 적적히 노년을 지냈다.
2008년 5월 25일 타계. 현재 청주 일원을 중심으로 '권혜경가요제', '
노래비 건립' 등 각종 추모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권 씨의 측근은 "충북 청원군 남이면에서 거주해 온 고인은
건강이 무척 안 좋은 상태였다"며 "몇 년 전부터 건강이 악화된 데다
최근에는 교통사고까지 겹쳐 2~3일 전부터
중환자실에서 투병하다 유명을 달리하셨다"라고 밝혔다.
말년까지도 배우자 없이 평생 독신으로 생활했다.
다음은 대중음악 평론가 박성서 씨의 글에서 따왔다.
필자가 권혜경 여사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4년이다.
원로가수 채록 작업으로 이어진 이 만남의 사진은 최광호가 맡았다.
권혜경 여사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몇 년 전,
'산장의 여인'의 작사자 반야월 선생과의 술자리에서였다.
술자리에서 '산장의 여인'의 노래비 또한 세워져야 하는 것 아닐까,
주장하다가 화제는 자연스럽게 가수 권혜경 씨의 근황으로 옮겨져 갔다.
문득 그녀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수소문 끝에 전화번호를 입수했다. 그로부터의 몇 년 간의 이야기.
1.
사는 곳은 충북 청원군 남이면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사는 곳의 위치를 알기 쉽게 설명하지 못했다.
바깥출입을 거의 안 하고 산지 오래이기 때문이라고도 했고
또 기억력이 자꾸 떨어지는 나이 탓이라고도 했다.
마음에 걸렸지만 무작정 주소만 가지고 길을 나섰다.
작업 때문에 몇 날 밤을 새웠기 때문에 핸들을 잡을 수 없었던 사진작가 최광호를 대신해
그의 아내 심옥련이 핸들을 잡았다.
서울서 멀지 않은, 그러나 처음 가보는 길을 셋이서 출발했다.
곧 맞닥뜨리게 될 가수, 권혜경 여사의 현재 모습이 쉽게 떠올려지지 않았다.
오래전 어느 신문에선가 웃고 있는 작은 사진을 본 것도 생각해 보니
무려 이십 년 전이다. 이따금씩 들어보는 음반 사진들도 사오십 년 전 모습들일뿐이다.
그 걸 걱정했을까, 권혜경 여사는 우리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빨간 옷을 입고 집 앞에 서있겠노라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나 권혜경은 이제 백발 할머니야'.
그렇게 찾아낸 그녀의 집은 산마을의 거의 끝자락에 있었다.
-백발, 빨간 옷, 눈 주위의 짙은 검정 색조 화장, 때문에 더욱 작아 보이던 얼굴.
주름살 가득한 웃음. 헐렁한 운동복 바지에 맨발에 신겨진 고무신.
이것이 우리가 만난 권혜경 여사의 첫 모습이었다.
2.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예쁜 집'이다. 열 평 남짓한 정원에 꽃나무들이 가득했다.
그 정원 한가운데에 움푹 파인 구덩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시간 날 때마다 스스로 혼자 팠다고 했다. 나중에 본인이 누울 곳이라고도 했다.
이 정도 크기면 혼자의 몸을 충분히 눕힐 수 있다고 했고 언젠가,
누군가 찾아와 줄 사람들과 되도록이면 가깝게 있고 싶어 일부러 지면에서 얕게 팠다고도 했다.
그 속에 풀이 몇 포기 자라고 있어 판 지 얼마간 지났음이 짐작되었다.
그녀의 꿈은 이 묘 앞에 '산장의 여인' 노래비(碑)를 세우고 싶은 것이라 했다.
거실은 널찍했고 벽에 걸린 각종 그림과 사진들, 표창장을 비롯해 상패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는 거실은 마치 개인 기념관에 들어선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벽면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사진들과 현재 그녀의 모습이 묘하게 대비되었다.
앉자마자 그녀가 먼저 여러 가지 얘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그저 묵묵히 듣고 있어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다.
최광호는 이곳저곳을 샅샅이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고 그의 아내 심옥련은 주방으로 갔다.
나중에 심옥련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냉장고는 비어있었고
바닥을 보인 커피, 설탕 등도 모두 굳어 있어 아무것도 내올 수 없었다고 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이 불청객들, 그러나 권혜경 여사는 우리를 향해
'마치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자식들 같다', 고 했다.
물을 마시기 위해 일어섰다가 냉장고 앞에 붙어있는 글귀에 순간, 시선이 멈췄다.
'(나) 죽은 후 연락처. 손성미 02) 907-xxxx, 019-xxx-0 xxx.' 자필 메모다.
이 메모 속 '손성미'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죽은 셋째 언니의 서울 사는 딸이라고 했다.
죽음을 거둬달라고 부탁할 이가 '언니의 딸'이라니...
이렇듯 권혜경은 이 집을 지은 이래 줄곧 홀로 이 '산장'에서 살고 있다. 1994년 5월부터다.
가수 권혜경, 본명 권오명(權五明).
1931년 10월 3일, 세무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2남 4녀 중 넷째 딸로 삼척에서 출생했다.
이후 의정부로 이사, 대문을 세 번이나 열어야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부유하고 엄격한 가정에서 자랐다.
의정부보통학교를 거쳐 서울의 동구여상을 졸업한 후 부모의 뜻을 따라
당시 조흥은행에 입사해 사회에 첫발을 디딘 그녀. 스물여섯이 되던 해인
1956년, 당시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가수모집에 응시, 전속가수로 발탁된다.
그러나 부모는 가수활동에 대해 완강히 반대했다.
심지어 '풍각쟁이 광대'는 집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해서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부모의 뜻을 거역했다는 배신감으로 그녀가 번 돈마저 바닥에 내동댕이쳤던
부모와는 그 후 쉽사리 화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점차 부친은 어느 정도 이해해 주기 시작했지만
정작 어머니는 끝내 용서치 않은 채 갑자기 타계했기 때문에 권혜경 씨 입장에서는
당시 받은 충격을 감당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스스로 대견하다
싶은 일이라도 생기면 먼저 어머니 무덤부터 찾곤 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권혜경은 KBS 전속가수가 된 지 얼마 후
발표하는 '산장의 여인' 단 한 곡으로 신데렐라로 부상한다.
이어 그는 당대 최고 작곡가들인 손목인, 이재호, 손석우, 박춘석 씨 등과 손잡고 노래를 발표했다.
59년, 신상옥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동심초'의 주제가를, 그리고
라디오 드라마 '호반에서 그들은'의 주제가인 '호반의 벤치'를 강수향 씨와 듀엣으로 발표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사랑의 길', 김화랑 감독의 '그림자 사랑'을 비롯해 송민도의 노래
'나 하나의 사랑'이 모티브가 되어 영화로 제작되었을 때 이 영화 주제가 또한 권혜경 씨가 취입한다.
우리나라 드라마 주제가 제1호인 '청실홍실' 역시 음반으로 취입될 때는
현인과 함께 권혜경 씨가 컴비를 이뤄 취입했다.
예명 '권혜경'은 본인 스스로 지었다.
특히 '벼슬 경(卿)'자를 이름에 선택했을 만큼 엘리트 의식 또한 강했다.
실제로 그녀는 그때까지 가요의 주류를 이루던 트로트 창법과는 다른 클래식한 발성으로
우리 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산장의 여인'을 시작으로 인기 가수 대열에 들어선 지 얼마 뒤인 59년,
그녀 나이 스물아홉 살에 심장판막증 판명을 받으면서 기구한 운명이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음반 취입과 지방 공연 등으로
당시 그의 허리는 '18인치까지 줄어들었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투병 속에 연예 활동을 하던 전성기의 권혜경은
또다시 후두암까지 선고받는 등 무려 네 가지나 되는 불치의 병마에 시달린다.
그녀의 또 다른 대표곡인 영화 '물새야 울지 마라'의 주제가인 '물새 우는 해변'은
작곡가 박춘석 씨가 투병 중인 권혜경을 배려해 호흡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원곡의 멜로디 일부를 개작까지 해 건네준 곡이기도 하다.
당시 치료차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지불해야 했던 치료비가 '자그마치 2억 5천 만 원 정도였다', 고 술회한다.
이러한 삶에 대한 집착의 대가로, 또 당시 매스컴의 보도대로 기적적으로 소생하는 듯했지만
또다시 병이 재발하는 등 몇 년간의 가수 활동 내내 사투를 반복했다.
그녀의 노래 '산장의 여인'의 끝부분, 한 구절처럼 그녀는 홀로 '재생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로
종교에 귀의하기도 했다.
본래 수녀가 되고 싶어 했던 그녀는 절에서 목숨을 건진 후 불자가 된다.
가톨릭에서 불교로 개종하면서 도선사의 청담(淸潭) 스님으로부터
하루 5천 배씩 절을 하라는 명을 받고 또 다른 힘든 고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비로소 '대명화(大明華)'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다.
스스로는 청신녀(淸信女)라 이름 지었다.
한 때 '산장의 여인'을 만들어 부르게 한 작사가 반야월 선생에게.
'하필이면 슬픈 노래를 내게 주어 이렇게 힘들고 외로운 인생을 살게 했느냐'며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적도 있다고 전해지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러한 시련을 딛고 일어섰다.
스스로 남은 인생 모두를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스스로 위로하며 자신보다
못한 이웃들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왔다.
권혜경 여사는 그때까지 근 50여 년 간 전국 교도소와 소년원을 돌며 사형수, 무기수, 10대 범죄자 등
재소자들을 격려해오고 있어 수인들 사이에서 지금도 '어머니'라는 칭호로 불리고 있다.
교도소 위문공연, 강연만도 4백여 차례. 이러한 공로로 권혜경은
제34회 세계인권의 날에 인권옹호유공 표창을 비롯해 현재까지 표창만도 5백여 회 수상했다.
한 때 그녀의 빨간 통굽 하이힐은 이제 고무신으로,
그리고 무스와 스프레이로 치장했던 화려한 헤어스타일은 어느덧 백발로 변했지만
아직도 가발을 네 개나 갖고 있는 '멋쟁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4.
밤은 깊어갔고 이윽고 그녀의 노래가 '동심초'로부터 시작되었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만날 날은 이득 타 기약이 없네...'
한 때 고음이 특히 고왔던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굵고 거칠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놀라우리만치 여전히 호흡이 길었다. 어느덧 세월의 한 '켠'을 지나
삼베처럼 거칠어진 권혜경의 목소리가 가슴을 헤집고 들어와 폐부를 훑고 지나갔다. 전율이 느껴졌다.
밤 11시 30분, 우리는 서둘러 일어나야 했다.
밤길이 위험하니 배웅 나오지 말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길 어귀, 차를 세워둔 곳까지 따라나섰다.
'나 권혜경은 뼈대 있는 집안의 양반집 딸이라서...'
그녀가 어둠 속에서 주름살 가득한 웃음으로 잘 가라, 손을 흔들었다.
차창 밖 어둠 속으로 이내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가 잔상으로 뇌리에 남겨져,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커져만 갔다.
- 이 글은 지난 2006년,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박성서의 7080 가요 X파일/권혜경‘의 내용이다.
이렇게 발표한 당시 이 기사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권혜경 여사는 이미 '치매'였다.
이후 병원진단까지 받아놓고 있었다.
때문에 보다 정확한 이야기를 듣거나 채록한다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리였다.
그런데 우연히 '아빠의 청춘', '고향무정'의 가수 오기택 씨 집을 방문했다가,
뜻밖에도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발신자는 권혜경. 수신자는 오기택. 지난 2000년도 초에 쓴 편지였다.
편지 내용에는 권혜경 여사로부터 정확히 듣지 못했던
'집에 대한 자신의 심경'이 비교적 소상하게 담겨 있었다.
편지 중 일부를 소개하자면, '시골에 이사 온 지 9년, 그 많은 병이 다 나았어요.
죽으러 왔는데 '암, 심장판막'. 뽕나무를 차 대신 마시고 살았더니 모든 암이 없어졌어.
모든 신이 날 살려주었어. -중략- 연예인은 죽음의 길에서는 집도 잘 지어야지. 집을 예쁘게 지었어.
내가 죽은 후 어려운 아이들에게 주고 싶고 땅도 많이 있는 것 아이들에게 줄 거야.
남이 하지 못하는 일도 많이 했어. 죽음으로서 나의 모든 것이 공개될 거야.
-바보 같은 누나, 혜경이가.'이다. 권혜경 채록작업을 하고 있었던 내겐 매우 반갑고 소중한 내용이었다.
굳이 외딴곳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이유가 그동안 궁금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치매가 그러했듯 어느덧 권혜경 여사는 집에 관해서 조차도 때때로 앞뒤 내용이 바뀌는 등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사진이다.
이 사진을 공개하겠다고 결정할 때까지 적잖이 고심했음을 밝힌다.
이 사진은 권혜경 여사 타계 4개월 전에 권혜경 여사집을 찾았던
오기택 씨와 20여 년 만에 만나는 첫 장면이다.
오기택 님도 고인이 되셨네요
처음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 날 만남에 대해서는 짧게 정리해 쓰기가 결코 쉽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둘 다 독신이다.
평생을 홀로 살았고 또 누구보다 서로를 위하고 걱정했기 때문에
오히려 만나기를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꺼려했다.
마음 아프게 하기 싫어서였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날 오기택 씨는, 권혜경 씨가 예전에 TV에 출연했던 영상들을 모아 DVD에 담아 갖다 주었다.
오랫동안 준비한 선물인 셈이다. VTR도 자신의 집에 있던 것을 떼어다가 직접 권혜경 씨 집 TV에 연결해 주었다.
이때 자신의 영상을 보며 노래를 따라 부르던 권혜경 여사가 갑자기 눈물을 쏟으며
흐느끼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마음이 아팠다.
[출처] 권혜경(1931년 ~ 2008년 )|작성자 초록별바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오기택가수의 방문
참으로 인생무상함입니다
눈물 나네요
생전에 좋은 일로 많이 베풀고 가셨으니
아마도 신의 축복이 함께 하실 겁니다
고통이 없는 곳에서 편안하신
영면을 빕니다
권혜경 님
오기택 님
양떼도 두 분의 팬이었습니다.
사랑합니다.

첫댓글 이른아침시간에 산장의 여인 노래가 왠지 구슬픈것 같아요
가수 권혜경님의 일생기 오기택씨도 보이는군요 좋아하는 가수지요
지금은 먼곳으로 떠나가신 오기택씨 조카 박우철(본명 오영록)이 삼촌뒤를
이어서 활동하고 있지요 글을 다읽지 못합니다 시간될때 다읽어야할것 같아요
지금흘러나오는 산장의 여인 먼옜날 텔런트 정혜선씨가 남편 박**님과
헤어지고서 방송에서 이노래 부르면서 울던일이 생각이 나는군요
권혜경님의 인생 말로가 넘넘 슬픕니다
어쩌면 노래따라 인생이 그려진 것 같기도요
그당시 아버지께선 삼척세무서에 세무사였건만
오기택님의 노랠 참 좋아했지요
저음이 묵직함이요
아...
오기택님의 조카도 가수로요
저는 오늘 알게 됩니다
정혜선님도 이혼의 아픔이요
참으로 인생사가
무상함입니다
폭염에 건강 하십시다
노래말처럼 그런 삶을
살아오신 권혜경씨였지요
저도 그당시 즐겨 들었던 음악이랍니다
양떼님 나눔 수고 하셨습니다
무거운 날씨에 건강 잘 챙기시고
알차고 소중한 나날 되세요
그러나요
저도 참 좋아했는데
삶의 일면을 보면서
참 슬픕니다
그러니요
많이 덥습니다
더위에 물 많이 드셔요
이 폭염에 건강 잘 챙기십시다
고맙습니다
기와집 능선이 참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ㅎ
권혜경님의 산장의 여인 기억합니다
이렇게 살아가셨군요
참 안타깝네요
가수들은 자기가 부른 노래대로 간다더니 정말 그런것 같습니다
혼자서 그 긴 세월을...
오기택씨도 혼자였었네요
참 슬픈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많이 더울것 같습니다
더위에 건강 조심하십시다
애처럽게 부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정말 애처럽고 슬픈 사연입니다
그러니요
어쩜 노래와 같은 인생길입니다
슬퍼요
맞아요
배호는 낙엽따라 가버리구요
아니 배호가 아니고
차중락가수지요 ㅎ
오기택님도 멀쩡한 남자가
우째 독신으로 외롭게 살았네요
옮기면서도 슬프다 했어요
네...
하루도 더위 잘 이겨내십시다
물 먹기가 힘들어서
요즘 포카리를 먹으니
좀 부드러워요
즐겁게 웃어 하루도 잘 살아요
우린...
우리 원주 친구는 8월달까지 입원해야 한다고 ㅠ
걷기도 조심 하 십시다
세월은 또~이렇게 흘러가나 봅니다
양떼님~넘~덥네요
건강 챙기시구요~
좋은하루 이어셧음 합니다
그러니요
그렇게 세월은 흘러 오닐인데
참 슬프네요
덥습니다
접사에 조심하셔요
일단 빙수 잘 먹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