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창과 홍랑의 연가
최경창이 35세 때 군 사령관인 함경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부관인 북도평사로 보직된다. 부관은 최경창처럼 활을 잘 쏘는 문관(文官)이 주로 맡았다.
경성에서 머잖은 또 하나의 변방 홍원(洪原)의 관기였던 홍랑洪娘(본명:애절(愛節 : 사랑의 절개)은 문학적인 교양과 재색을 겸비했는데, 그 일대 최고였으며 누구나 꺾을 수 있는 노류장화가 아니었다.
최경창은 그 무렵 이미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었다.
최경창의 부임을 축하하는 잔치에 차출됐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 기생의 창이 끝나고 홍원군수가 홍랑을 지목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노래보다 시를 더 좋아합니다.”
이에 옆에 있던 최경창이 물었다.
“누구의 시를 좋아하느냐?”
“고죽(孤竹) 선생님의 시를 좋아합니다.”
“내가 바로 고죽이니라.”
홍란은 기쁨에 젖은 눈으로
홀로 여겨온 정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부르고 불러 익숙한 고죽의 시를 읊으니, 고죽 또한 눈에 마음을 담아 따라 읊었다.
그날 부터 둘은 문학적 감정으로 시와 풍류를 나누다 특별한 정이 깊어져 관사에 함께 6개월여 살며 정을 나누었다.
1년이 되어 최경창이 서울로 오게되자, 홍랑이 천리 길 쌍성(현재 강원도 영흥)까지 따라와 눈물 범벅진 송별을 한다.
관기는 관할 도(道) 경계를 넘을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헤어진 것이다.
뒤돌아서 함흥을 지나 홍랑의 고향인 홍원(洪原)으로 넘어가는 함관령(咸關嶺)을 지나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우수에 젖은 홍랑은 임이 그리워 절절이 노래를 부르고 후에 최경창에게 편지로 보낸다.
함관가咸關歌(최경창이 훗날 함관가로 제목 정했음. 시조는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묏버들 갈히것거(가지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닙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소서'
조선조 문학사에 우열 가리기 어려운 황진이와 매창의 연정가 보다 가장 절절한 연정가로 꼽힌다.
고죽은 이 시조를 한문으로 옮겨
새로운 7언고시(七言古詩)
「번방곡(飜方曲, 시조를 한문으로 옮겨 재창작한 시)」으로 새 작품 '함관가咸關歌'로 만들었다.
서울로 돌아온 최경창은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었다. 직위는 정6품직으로 낮지만 출세가 보장된 청요직(淸要職)들이다.
정언(정원 2명. 고려·조선시대 국왕의 옳지 못한 처사나 과오에 대해 간관(諫官)들이 행하던 간언)으로 근무하면서 선조의 총애가 무척 깊었다.
정6품직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근무할 때 큰 병이 났는데 이 소식은 친구에 의해 먼 변방에 있는 홍랑에게도 전해졌고 홍랑은 곧바로 길을 나섰다.
홍랑이 7일간 이를 악물고 급히걸어 서울에 와서 병수발을 지극정성으로 몇달간 하는 도중에 쾌차했다.
이를 어쩌랴.
사헌부가 나서서 '양계兩界(함경도ㆍ평안도 거주자 한양 입성 금지)의 금禁'과 관기 관할 경계 월경 금지를 어기고, 명종 왕비 인순 왕후 국상 중에 중앙관료가 행실 문란죄를 지었다는 구실로 파직시켜야 한다고 선조를 괴롭히자 결국 파직시키니 또 다시 이별한다.
최경창이 떠나는 홍란에게 증별ㆍ송별이라는 한시를 지어 고마움을 더했다.
증별贈別
'玉頰雙啼出鳳城(옥협상제출봉성) 고운 뺨에 눈물지며 한성을 나설 적에
曉鶯千囀爲離情(효앵천전위리정) 새벽에 꾀꼬리가 이별 서러워 슬피 울어주네
羅衫寶馬汀關外(나삼보마정관외) 비단적삼에 보마로 관문 밖 물가로 나가니(선조의 총애로 하사받았던 보마에 수레를 달아 태워 보냄)
草色迢迢送獨行(초색초초송독행) : 푸른 빛깔만 홀로 떠나는 임을 까마득히 뒤를 쫒누나'
(푸른 비단옷으로 몸을 덮고 점점 멀어지는 뒷 모습)
송별送別
相看脉脉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
말없이 마주 보며 난초를 드리노라( 고사 공곡유란空谷幽蘭의 그윽한 난초)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지금 하늘 끝으로 떠나고나면 언제나 돌아올지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함관령에 올라서서 옛 노래(홍랑의 묏버들 시조)를 부르지 마오(임과의 사랑은 끝없이 깊고 넓으니 애태워 노래 부르지 않아도 되오)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지금은 구름과 비에 청산이 어둡구나
1576년 파직 후 곧바로 3단계 수직 승진 종4품(종4품부터 임금이 왕지로 임면)으로 지방 장관인 영광군수로 제수했으나 큰 성은을 입을 수 없다며 사직하니, 가난한 생활이 이어졌다.
다음해에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 평남 남서쪽에 있는 군의 임시 관리자. 종6품)으로 낮게 제수하자 복직했다.
변방 한직으로 6년여 떠돌다가 44세 되던 해에 두만강 가에 있는 종성(鍾城)의 부사(府使 지방의 장관직. 종3품)로 부임하여 영원히 못 만날 것 같던 홍랑을 다시 만난다.
세조가 그의 능력을 중히 여겨 종3품직에 파격적으로 제수, 홍랑과 재회하여 시를 나누면서, 청렴하게 근무를하고,유명 학자들과 교류하는 것에 참고 있던 배가 너무 아픈 나머지, 북평사에서 무고한 참소를 했고, 대간에서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 삼았다.
승진 품계가 부당하니 강등시켜야 한다고 상소하니, 세조는 할 수 없이 강등하고, 대신 성균관직강直講(정5품. 성균관 학사 총괄 업무, 보직기간이 제일 길다. 정원4명/38명)으로 제수하여 가까이서 능력을 발휘하며 근무토록 불렀다.
이로인해 1년만에 해임되고, 홍랑과 떨어져 임금 곁에서 근무하기 위해 한양으로 가다가 갑작스런 병(권력의 야비성과 홍란과의 이별 등으로 스트레스병?)이 발생하여 경성(慶城) 관아(官衙) 객관(客館)에서 45세로 사망했다.
동행하던 홍랑에겐 청천벽력,
시묘살이를 하며 살겠다는 홍랑의 진심어린 간청에 관기에서 풀어주자 마자, 홍랑은 고죽의 상여를 따라 파주로 와서 고죽의 묘에 시묘살이를 했다.
이 때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남장을 하고 얼굴에 칼자국을 내고 숯을 먹어 벙어리가 되었다.
시묘살이 9년째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홍랑은 그의 시문을 챙겨 고향으로 가서 숨어 7년을 지내다가, 난이 끝난 다음해 돌아와 최경창의 유작들을 문중에 전하고 묘소 앞에서 곡기를 끊고 최경창 묘를 어루만지다 삶을 마쳤다.
선조 임금도 기특히 여긴 사랑이고, 고죽의 부인도 둘의 연정이 숭고함을 여겨온지라, 문중에서
시신을 받아들여 최경창의 묘 앞에 묻어주고 '시인 홍랑 지묘詩人洪娘之墓' 묘비를 세웠으니 묘비명이 신의 한 수다.
충신불사이군이忠臣不事二君
성삼문이라면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
홍랑이다.
世世生生토록 변하지 않을
뜨거운 사랑!!!
이런 사랑!!!
못해보고 기생질만 하는 사람들이 시샘하여 위해받은 사랑!!!
청백리행 이조판서 최경창과 홍랑의 명복을 삼가 빕니다.
* 고사 ‘공곡유란(空谷幽蘭)’
공자(孔子)는 자신의 이상을 정치로 실현하고자 13년 동안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한다. 그러나 누구 하나 공자를 등용하지 않자 쓸쓸하게 고국인 노나라로 귀국한다.
귀국길에 어느 깊은 숲속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난초를 발견한다. 그리고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어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이후 공자는 정치에 연연하지 않고 교육과 저술에 전념한다. 논어의 첫 구절에 나오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는 구절 또한 이러한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