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봉 진달래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정석곤
봄의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돌, 돌, 시내 가까운 언덕에/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꽃/....../푸르른 하늘은/아른아른 높아만 가네.
시인 윤동주가 시 ‘봄’에서 노래하듯 진달래는 아주 오래 전부터 개나리랑 함께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나무로 사랑을 받고 있다.
점심 때 아중리 저수지 옆 태공산장에서 모임이 있었다. 끝나자마자 바쁘다고 헤어져, 혼자 기린봉에 올랐다. 예닐곱 길로 기린봉麒麟峰(271m)을 오르곤 했지만 아중리 저수지 쪽은 낯설었다. ‘생활권 기린봉 등산길’ 표지판이 고마웠다. 조금 먼저 출발한 사람은 보이질 않았다. 앞에서 떠들어대며 가는 젊은 아낙들이 기린봉 가는 길을 물었지만 대답해 주지 못해 죄송했다. 한참 가다 두 갈래 길에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마침 내려오는 등산객이 있어서 물으니 오른쪽으로 가라고 했다.
기린봉까지는 1.2km이었다.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등산객들이 많이 오르내려서 길을 빤질빤질하게 윤을 내놓았다. 소나무 숲을 지나가니 왼쪽은 소나무 사이에 띄엄띄엄 크고 작은 진달래가 피어 있고, 오른쪽은 거의 참나무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진달래와 철쭉이 헷갈릴 때는 마치 수학공식 외우듯 ‘잎보다 꽃이 먼저 핀 것이 진달래고, 잎이 다 핀 다음 꽃이 피는 것은 철쭉이다.’ 라고 되뇌곤 한다.
길 왼쪽 줄을 선 진달래는 가지에 통꽃이 두서너 송이씩 활짝 피었다. 꽃부리 끝이 다섯 갈래로 조금 갈라져 불그스름한 얼굴빛을 자랑하였다. 진달래꽃은 가운데 긴 암술 한 개와 열 개의 짧은 수술이 오순도순 솔바람과 놀고 있었다. 금방 필 듯 흩어져 있는 진달래는 꽃을 피우거나, 곧 피우려고 채비를 하였다. 멀리 있는 진달래꽃은 고개만 겨우 내밀고 나를 환영해주었다. 오른쪽 진달래는 혼자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가씨가 있는 곳에 총각들이 모이듯, 꽃이 있는 데는 벌과 나비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벌 한 마리가 꽃 위에 머물다 가더니, 바로 하얀 나비 한 마리도 다녀갔다. 부지런한 벌과 나비가 기린봉을 미리 답사하러 온 게다. 그냥 가기가 아까워 휴대폰 카메라로 진달래꽃을 찍었다. 참새들도 소나무와 진달래 사이에서 짹짹짹 노래하며 놀다 갔다. 내 눈은 꽃을 보느라 발 가는대로 따라가는 게 아닌가?
초등학교 6학년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진달래와 개나리를 비교해서 써 놓은 글을 가르쳤던 생각이 났다. 개나리와 진달래를 도시 새색시와 시골 새색시로 비유했다. 개나리의 밝고 샛노란 꽃잎 색깔을 활달하고 뽐내길 좋아하는 도시 새색시의 얼굴로 묘사했다. 또 진달래의 연분홍 색깔의 꽃잎을 수줍음을 잘 타 손을 가리고 빙그레 웃는 시골새색시의 얼굴로 묘사해 놓았다. 볼수록 알맞은 표현이어서 고개가 끄덕여 졌다.
불그스름하게 어우러진 진달래 꽃길은 멋있다. 거기다 등산객들의 빨강, 노랑, 파랑 등 갖가지 색깔의 옷과 모자가 더해지니 금상첨화였다. 초임 근무지에서 ‘진달래 꽃잎 꿀’이라고 해서 먹어보았던 맛을 생각하니 군침이 돌았다. 금방 기린봉에 온 것 같았다. 한낮의 해는 옅은 구름에 가려서 사방을 둘러보기에 좋았다.
중바위까지 다녀오고 싶어 0.8km의 길을 오르내리며 걸었다. 내 몸은 가벼워져 사뿐사뿐 발걸음을 내딛었다. 갑자기 푸드덕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다. 겨우내 몸단장을 한 장끼였다. 까투리 몰래 봄나들이를 와서 놀다 들키자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진달래꽃은 아까보다 못하지만 중간 중간에 우뚝 서 빙그레 웃으며 손짓을 했다. 산수유와 사촌쯤 된 나무는 진달래를 따라 노랗고 작은 꽃망울을 터트려 기린봉의 봄을 장식하고 있었다. 중바위 전망테크에서 망원경으로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봄 햇빛을 받은 교동의 한옥마을의 모습이 코앞에 다가와 중바위 둘레의 산과 예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던 길로 내려오다. 기린봉 꼭대기로 다시 올라갔다. 뾰족뾰족한 돌 위에 시내를 쳐다보고 서 있는 표지석標識石은 올해 처음 본 나를 진달래꽃처럼 반겨주는 것이 아닌가? 표지석을 세운 ‘인후 3동 주민자치위윈회 기린봉 사랑회’처럼 나도 기린봉을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전주 10경 가운데 제1경은 기린토월驥麟吐月이다. 바로 기린봉에 떠오르는 달맞이를 일컫는다. 기린봉의 진달래꽃 사랑을 느껴본 봄날 한나절이 즐거웠다. 기린봉의 연분홍 진달래꽃마냥 내 이웃들에게 향기로운 웃음을 전해 주고 싶다.
※ 진달래 꽃잎 꿀 : 진달래 꽃잎을 병에 흑설탕과 재워서 한 해 동안 묵혀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