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라합(수 2:6)
하나님이 약속한 땅을 눈 앞에 두고 광야로 돌아가 사십 년을 지낸 이스라엘이 다시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은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 들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먼저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로 보냈습니다. 가나안의 현실에 매몰되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결정은 황량한 광야 생활이었습니다. 사십 년이 흐르고 다시 보낸 정탐꾼에게는 여리고를 살피고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도록 했습니다.
사십 년 전의 이스라엘은 오합지졸의 유랑민이었지만 광야의 이스라엘의 소식을 들은 여리고는 그들을 경계해야 했습니다. 여리고는 이집트에서 나와서 광야에서의 행적에 간담이 서늘해지고 정신을 놓았기(11절 새번역) 때문입니다. 여리고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스라엘의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몰래 잠입한 정탐꾼들이 여리고를 엿보고 라합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정탐은 ‘드러나지 않은 사정을 몰래 살펴 알아내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라합이란 여인은 기생(창녀)였습니다. 그녀는 낮고 천한 여인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소외되고 분리되었던 여인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맞이하는 행운(?)을 맞이했습니다. 여리고 왕이 정탐꾼의 잠입을 보고 받았고, 즉시 사람을 보내어 라합에게 정탐꾼들을 데리고 오라고 추궁을 했습니다. 하지만 라합은 지혜롭게 그들을 지붕 위에 숨기고 왕의 추궁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오히려 정탐꾼에게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 부모와 형제와 가족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13절). 라합의 현실은 삶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여리고와 그의 백성들이 이스라엘에게 멸망을 직면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자신과 가족이 구원받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친일파 매국노와 같이 라합은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러나 여리고의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꾼을 영접하고,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망하지 아니하였다(히 11:31 새번역)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고백하며(10절) 하나님을 믿음으로 선포(11절)했기 때문입니다. 삶이 직면한 세상의 편견과 가치에 삶을 의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듣고 확인하면서 믿음의 결단으로 정탐꾼을 영접하고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마 1장)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시아버지에게 자녀를 생산한 다말, 이방 여인 룻, 기생 라합, 다윗이 부정하게 얻은 우리야의 아내(밧세바),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던 여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는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환대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더불어 식탁을 나누시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시고,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신분이나 귀천에 있지 않다는 것을 기생 라합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에는 백부장 고넬료(행 10장) 그리고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행 16장)의 믿음은 가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낳았습니다. 라합의 분별력과 믿음의 결단은 여리고의 멸망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 놀라운 은혜를 입게 했습니다. 혼란 가운데 있지만 믿음의 분별력과 결단은 우리와 우리의 가족의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천한 신분의 라합은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분별력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깨달았고, 믿음으로 정탐꾼을 돕는 결단을 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비단 지식과 힘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어리석고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도,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고전 1:27)이십니다.
라합과 같이 어리석고 약한 삶일지라도 하나님을 그리고 그가 하신 일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깨닫고 그의 일에 동참하는 바다교회 가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