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장흥의 몇 지명 유래를 살펴본다.
- 관산 장고도(장곶,長串) 애초 바다 쪽으로 길게 내밀고 있던 섬이었다. 그래서 ‘길고지,
질고지(질구지)’로 불렀다. ‘길다’가 구개음화되면 ‘질다’이다. 그런 ‘길고지’를 두고 “옛날 吉氏가 살던 길고도(吉庫島)” “吉하게 고치게
될 곳”이라는 엉뚱한 해석을 달기도 했었다. 바다 바깥으로 길게 내민 곳을 ‘곶(串,고지)’으로 부르는 사례는 ‘장산곶, 장기곶, 갑곶, 월곶,
대곶’ 등 전국적으로 많다, 솟아나온 ‘곶(串)’을 ‘꽃 花’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장흥읍 사자산 아래 花山 마을도 그렇다) 이에 장고도
지명 변천을 살펴본다. 처음엔 우리말 ‘길고지’와 한자어 ‘장곶(長串)’이었고, <정묘지> 남면(용산)방 편에 吉庫島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져있다. 해방 직후 1946년경에 ‘장환(長串) 분교’가 세워졌던 것, 곶(串) 발음이 꺼려졌던 것일까, 그 대신에 환(串)으로 받고
만 것. 그러다가 1963~1966년경 간척사업 때는 ‘장관(長串) 간척지’로 명명되었다. 같은 곶(串)을 이번에는 ‘꿸 관(串)’으로 받고 만
것.(하긴 연륙 간척에 성공했으니 ‘꿸 관’이라 말할 만 했다) 결국 하나의 ‘장곶(長串)’이 졸지에 ‘장환, 장관’으로 따로 불려지게 되었다.
<해동여지도, 대동여지도>에는 ‘장곶(長串) 소(牛) 목장’이었다. 하모 장어로도 유명한 곳, 1999년에 장환 초교는 폐교되었다.
현재 행정명칭은 장흥군 관산읍 고마리 ‘장환 마을’. 가로명은 ‘고마장환길’ 예전에는 김해 김씨가 상대적으로 많이 살았던 집성촌이었다.
- 안양 장재도(長載島) ‘장자골’ 명칭은 전국적으로 꽤 많다. 대개는 ‘큰 부자(富者)’ 또는 ‘원로
장자(元老 長者)’가 살던 곳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작으면서도 노루목처럼 펼쳐진 잣골(잔골)’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는 장구(長鼓) 형태의
지형에서 유래한 ‘장고도(長鼓島)’로 보기도 했다. 안양면 해창(海倉) 앞에 있는 작은 섬(小島) 하나를 두고서 여러 이름이 엇갈린다. 계서
백진항(1762~1818)은 “애초에는 ‘장고도’였는데, 정해군 백수장(1469~1543)이 정자를 짓게 되면서 ‘長者之所’로서 長者島가
되었다”고 <계서유고>에서 설명했다. 백수장은 세정(稅亭)을 둘 정도로 공신 세력가였으니, 정자는 물론이고 개인 창고도 있었을
법 했다. 같은 안양 사람 ‘기산 임홍의(1527~1607)’는 ‘장채도(長債島)’라 표기했고, <정묘지> 안양방 편에는
‘장재도(莊載島)- 해창 아래 세선(稅船) 정박처’라 했고, <해동여지도>에는 ‘장재도(壯載島)’로 나온다. 海倉 앞섬이니
세미(稅米)를 적재한 선창(船倉)이 있었을 수 있다. <조선지지(1911년경), 호구조사(1789)>에는 ‘장자도, 장재도’ 명칭이
안 나왔다. 여러 사정을 종합하면, ‘장재도’는 원래 ‘작다(잘다/ 잔, 잣)’에서 유래한 ‘장자도’였는데, 세미(稅米) 창고도 있던 곳이라
‘장재(載)도’로 굳어졌을지 모르겠다.
- 용산면 남포 소등섬 여러 가능한 견해가 있겠다. ‘크기가 작은 호롱불 소등(小燈)’이라는 게
통설이다. 여기에 ‘솥(鼎)뚜껑 모습 같아 솥등’, ‘기도처가 있는 작은 당(小堂)’, ‘작은 소(牛) 등짝 같은 소등’을 생각할 수 있겠다.
‘소등섬’ 지명 자체는 장흥 지역의 역사적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고교 시절에 장흥고등학교로 일시 전학을 왔었다는 ‘화가 박항률’은 ‘남포
소등섬 소녀’ 연작을 그리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