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 용정, 풍운의 은진중학교 26년 역사의 의미
프레이저 선교사 (은진학교 4대교장)
프레이저 선교사 (Fraser, Edward James Oxley. 한국 이름 배례사, 1925년 10월 ~ 1929년 6월)가 4대 교장으로 봉직하고 있는 동안 용정의 학생사회는 공산주의 조직과 영향권 속에 들어갔다. 청년이 공산당 운동에 관여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이 어려울 지경이 되었고 미션스쿨인 은진학교에서도 교과서보다 공산주의 서적이 더 열심히 읽혔다. 1926년 1월 이주화, 여남수 등은 용정 ❰시대일보❱사 사장 이인구를 회장으로 하는 ❰동만청년연맹❱을 조직하였고 같은 해 2월 23일에는 이인구가 동흥중학교 이신애를 회장으로 하는❰간도여자청년회❱를 만들었다. 1926년 8월에 조선공산당중앙에서 파견된 조봉암 등이 조선공산당 동만구역위원회을 만들었으며 그 산하에 9개구를 두었고 그 아래 16개 지부를 두었는데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에 4개의 지부가 있었다. 1928년 9월 당시의 동만도 조직은 군간부(郡幹部)가 6개소였고 그 산하 59세포가 있었는데 회원수가 230명이었다. 용정촌 군간부에 19개 세포가 있었는데 동흥중학교에 두 개의 세포가 있었다.
1926년 10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동만도 조직이 창설되었다.
1927년에는❰제1차간도공산당검거사건❱이 일어나 용정과 연변일대에서 100여 명의 학생들과 교사들이 잡혀갔다. 1927년 4월 초에 이인구를 책임자로 하는 대성중학교 청년총연맹이 나왔고 4월 11일에는 이환을 책임자로 하는 대성중학교 소년회가 세워졌다. 7월에 조선공산당 동만구역국산하의 학교연합회지부가 대성중학교에서 구성되어 박재하교장이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8년 5월에❰제2차간도공산당검거사건❱이 일어났고 동흥중학교, 대성중학교를 비롯해서 연변에서 많은 당원들과 청년남녀학생들이 검거되었다. 그 중 72명이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대부분이 마르크스-레닌을 신봉하는 청년학생들과 교사들이었다. 1928년 동만의 첫 중공공산당
이었으며 용정 ❰민성보❱사의 문예편집부였던 주동교가 대성중학교 한어강사로 초빙되어 학생들에게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중국혁명투쟁사를 강의하였다. 1928년 엠엘파(ML파)의 성원 박윤서가 대성중학교에서❰간민교육연구회❱조직하고 중•소학교 교사 강습소를 운영하였다.
1926년 용정에서 조선공산당 동만구역국이 설립됨에 따라 은진중학교에도 허원규, 이영근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지부가 건립되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당의 지도를 받으며 교내 행사를 빌미 삼아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각종 행사를 주도하였다. 매년 10월 1일 단군절에 존일행사(尊日行事)을 거행하였는데 전교생들이 강당에 모여 공개적으로 조선 국기를 걸고 “애국가”를 부르고 연설자들이 웅변을 토하여 일제의 침략해위를 성토하였다. 학생들의 투쟁은 차츰 교육을 종교로부터 분리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용정 각 학교들에서의 반종교투쟁은 가장 먼저 대성중학교에서 일어났다. 학생들이 일제히 대성유교를 반대하여 학교를 공교회(孔敎會)의 예속에서 벗어나게 하여 학우회에서 자체로 운영해 나가게 되었다. 동흥중학교에서는 사회주의자 계열의 교사들이 교사단을 구성하여 천도교(天道敎)회로부터 학교를 인수하여 자체로 운영하였다.
은진중학교에서는 학교 개교 시부터 자발적으로 드리는 아침 예배와 성경과목의 수업을 사주 받은 학생들이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예배에 참가하지 않거나 참가해도 괴성을 질러 소란을 피웠고 성경 수업시간에 엉뚱한 질문을 하여 수업을 방해하였다. 이런 소극적인 항거가 차츰 대담해져서 예배당에 낙서를 하고 반대 표어를 붙이고 “성경시험”에 백지를 내는 행동으로 노골화되었다.7)
학생들의 반종교투쟁은 1926년 가을부터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반발로 터져 나왔다. 4학년 성경수업 시간에 목사가 로마서 13장 1절과 2절의 말씀 “무릇 권세란 하느님께서 준 것이니 누구나 그것에 복종해야 마땅합니다.”를 해석할 때 여창빈이 “그렇다면 일본 놈들이 조선을 침략하는 권세도 하느님이 준 것입니까? 우리 조선 사람들은 일본 놈들의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입니까?”라고 거세게 몰아붙이자 목사는 말문이 막혀서 머뭇거렸고 학생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질문을 한 여창빈은 문재린 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명동소학교 출신이고 부모님들이 명동교회 교인이고 그의 이름은 “여창빈”이 아니라 “여창부”이다. 갑작스런 질문에 말문이 막혀서 대답을 못하고 자리를 피해 나간 분은 이규숙 목사이다. 여창부는 훗날에 문재린 목사에게 “ 내가 은진에 다닐 때 공산주의가 마음에 파고들어 성경공부에 불만이 많았다. 졸업식에서는 내가 주동자 되어 행사를 못하게 하고 마음이 뿌듯하였다. … 성경의 교훈이 내 마음속에 뿌리내려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은진의 혜택이다.” 라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였다고 한다.8)
학생들은 이 목사의 성경수업을 거부하기로 결의하고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동맹휴학을 하겠다고 학교당국에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학교당국은 학생들의 요구와 사회여론(종교와 교육의 분리를 주장하는 사회주의 계열의 언론)에 밀려서 이 목사를 해임하였다. 학생들의 첫 승리 이후로 사회주의계열의 교사들은 종교와 교육의 분리를 지향하는 학생들의 각종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우는 학교❱는 종교를 아편으로 보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선언이나 폭동이나 요청이나 다수결의 법칙에 따르지 않기로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학생들과 학교당국의 갈등이 심해졌다.
1927년 3월 13일 제 5회 졸업식을 거행할 때 졸업생으로 예정된 최성희의 졸업이 취소되었다. 그가 성경 시험에 패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학교당국으로서는 그의 졸업문제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가 공산주의 세상이 되고 있는 용정사회에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성경과목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성희는 2월 4일, 4학년 졸업시험을 칠 때 답안지에 ❰졸업시험인데 문제를 이렇게 괴상하게 내서 학생이 해답을 쓰지 못한 그 점수를 선생이 가질 작정입니까?❱라고 써서 제출하였다. 학교 당국은 성경 점수 0점인 학생을 졸업시킬 수 없으므로 그의 졸업을 취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학생들과 그에게 동조하는 교사들은 ‘최성희가 학교당국을 모욕하였기 때문에 졸업장을 주지 않았다’며 투쟁을 벌였다. 그들은 사실 확인을 하지 않고 학교의 처사에 분개하여 무조건 최성희 편을 들었다. 다수의 졸업생들이 학교당국의 처사에 항의를 하고 졸업식장에서 나갔고 2,3학년들도 최성희에게 졸업장을 수여할 것과 성경과목을 교과목에서 제할 것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선포하였다.9)
학감 이태준을 비롯한 학교당국은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4월 25일, 명동학교 졸업생인 박기주, 김창걸 등 150여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자퇴하여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로 전학을 갔다.10) 외부의 사주를 받은 학생들의 종교와 교육 분리투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은진중학교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1928년 5월 은진중학교는 상가 집처럼 쓸쓸하고 적막하였다. 그러나 학교당국은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학생들을 추가 모집하여 개학을 하였다. 그럼에도 과거의 활기와 역동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성경 교과목을 포기하지 않은 결과로 은진중학교는 문을 닫지 않았으나 ❰하느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우는 학교❱로서 공산주의자들의 극성스러운 공세와 일본 제국주의의 핍박의 틈바구니에서 외로운 길을 걸었다. 1928년 정재면 목사가 교목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1919년 2월 ‘전로한족중앙총회’에 김약연, 이중집과 함께 북간도 대표로 참여하여 노령 공산당 원호와 이동휘로 대표되는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한 여호와의 분열된 싸움을 목격하고 기독교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자신과 레닌을 추종하고 있는 공산주의 진영과 많은 차이가 있으며 연합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바가 있어서 소신껏 은진중학교를 지도할 수 있었다.
1928년 3월에 최문환, 이준경, 등 11명이 졸업하였고 1929년에는 3월에는 고인수, 박원팔, 등 6명이 졸업을 하였다. 1929년 3월 15일 프레이저 선교사가 사직하고 브루스(Bruce, George Findlay, 한국 이름 부례수, 1929년 7월 ~ 1939년 )선교사가 5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11)
3부로 이어짐
브루스 선교사는 1929년 3월 16일 5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1939년까지 10년 동안 교장의 직무를 감당하였다. 공산당 항일유격대와 일본 제국의자 군경들의 쫓고 쫓기는 전투가 치열한 북간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우는 학교’가 가는 길은 형극이었고 브루스교장은 일제 폭압적인 통치를 온 몸으로 방어하며 격동의 시대, 폭력의 시대를 견뎌내야 하였다.
2026년 1월 13일 화요일 축시
우담초라하니 올리다
미 주
7) 김규철 편 ⌜룡정문사자료제 1집⌟, 46,47쪽, 룡정현문사자료연구위원회 편, 1986
8) 문영금, 문영미 편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165쪽, 삼인, 2006
9) 박청산 편집 ⌜연변문사자료휘집 2⌟, 274,275쪽, 연변인민출판사, 2008년
10) 호이전 외 ⌜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134쪽,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97
리태수 주필 ⌜륙도하⌟, 42쪽, 77쪽, 연변인민출판사, 2013
11) 박청산 편집 ⌜연변문사자료휘집 2⌟, 275쪽, 연변인민출판사, 2008년
참 고 서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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