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에 심훈 선생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현대판 박동혁(윤병혁), 채영신(조희숙)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송악읍 오곡리로 향했다. 조용하고 편안한 시골 전원의 풍경을 즐기며 한진방향으로 가다보면 '조희숙의 상록수 밥상'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지금은 건강이 허락치 않아 향토음식 체험장을 운영하지 않지만 체험문의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집에 도착하니 전형적인 선비의 풍모를 지닌 윤병혁씨와 세련된 외모의 조희숙씨가 반갑게 맞아 주셨다. 송악읍 부곡리와 오곡리 사람들을 모아서 열정적으로 농촌운동을 하는 윤병혁씨의 모습을 보고 생전의 심재영 선생이 후계자로 부탁했다고 한다. 그 누구보다 농촌사랑에 진심인 두 부부의 모습처럼 집안 곳곳에는 소설 상록수 속 글귀들이 빼곡해 글귀를 읽는 재미도 솔찬하다.
두분에게 인연의 첫 끈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물었더니 정말로 소설같은 이야기를 들려 줬다. 조희숙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고 한다. 이후 학창시절 윤주혁이라는 친구를 만나 자연스레 당진을 방문했다고 한다.
조희숙씨는 낯설고 물설은 당진에서 농촌계몽운동 모임인 ‘에포트’의 회장을 맡아 새벽부터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주혁이의 오빠(윤병혁, 남편)를 보며 참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당시 운병혁씨는 부곡리와 오곡리 주민들과 함께 농촌운동을 하며 회원들이 쓴 글과 직접 쓴 글을 모아 '에포트' 창간호를 발행하며 문학활동도 병행했다고 한다. 또한 '노력회'를 조직해 보다 더 잘 사는 농촌을 만들기 위해 농촌운동을 하며 '노력지'도 발행했다고 한다. 조희숙씨에게 이런 농촌의 모습이 낯설면서 정감이 넘치는 신선한 충격이라서 당진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상경한 뒤 친구에게서 심훈 선생과 필경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상록수>를 읽으며 소설 속 실제 주인공인 심재영의 모습을 윤병혁씨에게서 보았다고 한다. ‘나도 채영신처럼 시골로 가서 농촌운동을 하면서 병혁오빠를 도우며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라는 생각으로 당진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서울토박이가 농촌에 와서 살 수 있겠냐며 걱정과 우려, 반대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천신만고 끝에 결혼을 허락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당진생활은 힘들었다고 한다. 농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자랑스러웠지만 농사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워 농촌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수많은 좌절과 실망을 맛보면서도 상록수 속 주인공 채영신을 떠올리며 ‘하면 된다’는 신념 하나로 남편과 논밭을 일구며 농촌운동을 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농촌생활이 어렵고 버거워 지쳐갈 즈음 조희숙씨는 당진시농업기술센터(당시 농촌지도소) 생활개선회원이 되면서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던 상록수의 꿈에 희망과 용기라는 날개를 달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생활개선 중앙연합회 6대 회장으로 당선된 조희숙씨는 농촌의 어려움과 농촌여성의 노고를 전국에 대변하는 삶을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다고 농촌을 등지고 도시로 떠나버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농촌을 지키며 가꾸는 생활개선회원이 제 2, 제 3의 채영신이었기 때문이다. 조희숙씨에게 생활개선회 활동은 활짝 펼친 꿈의 날개였고, 보석이자 주옥같은 시간이었다고 한다.
윤병혁, 조희숙씨는 자신의 삶을 담아 <대쪽 소년가장의 꿈, 하면 된다!>와 <상록수의 꿈> 자서전도 출간했다고 한다.
조희숙씨는 "심훈 선생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이 농촌계몽운동에 힘썼던 것처럼 농촌여성의 삶의 질 향상과 농촌을 바라보는 의식을 전환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삶이 닮았다는 생각에 자서전의 제목을 ‘상록수의 꿈’이라고 지었다"며 부족한 내 삶의 기록이 농촌여성들이 흘린 땀방울을 조금이라도 대변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자서전을 출간했다고 한다.
한편 조희숙씨는 생활개선회 회장직을 내려놓은 후 새로운 도전을 했다고 한다. 당시 생활개선회를 담당하던 당진시농업기술센터 심화섭 친환경농업과장이 농가 맛집 겸 향토음식체험장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고민 끝에 송악읍 오곡리 집에 ‘조희숙의 상록수’라는 향토음식체험장을 열고 심훈 소설 <상록수>에서 모티브를 얻어 소설 속 상차림을 재현했다. 상록수 정신이 깃든 향토음식을 선보인다고 생각하니 책임감이 크게 느껴져 눈앞의 이익보다 여러 사람들에게 농촌의 향토음식을 체험하고 맛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당진의 해산물과 해풍 맞고 자란 제철 농산물로만 만들어진 갯내음 가득한 향토음식으로 상록수 밥상을 운영했다. 특히 당진사람들만 먹던 무청을 소금에 절여 만든 향토음식 꺼먹지를 재해석해 당진의 대표 향토음식으로 선보인것은 체험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시나브로 인터넷에 체험장이 소개되고 KBS <한국인의 밥상>에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얻었다고 한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조희숙씨가 한용운의 인연설 한대목을 소개했다. 인연설 한구절 한구절 읽다보니 윤병혁, 조희숙씨의 삶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연설/한용운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 말고
잠시라도 같이 있을 수 없음을 노여워 말고
이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애태운다고 원망말고
애초롭기까지 한 사랑 할 수 없음을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말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 하지 말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렵니다
조희숙씨는 현재 건강 문제로 향토음식점 체험장 운영을 접었다고 한다. 하지만 향토음식 체험문의가 많아 당진시립도서관, 필경사 등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상록수 밥상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향토음식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고 한다. 당진의 향토음식 꺼먹지를 재해석하며 상록수 정신을 실천하는 윤병혁 조희숙씨의 멋진 향보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