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로부터의 탈출을 꾀하며 (재편집)
세계를 열광시킨 2022 FIFA 카타르 월드컵축구가 막을 내리고 우리 모두 일상적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갈수록 격렬해지는 축구와 스포츠 세계를 보면서 나라들이 살상무기를 개발하여 서로가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보다 호박만한 축구 공 하나로 나라들이 서로가 선의의 경쟁을 통해 지구인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준다는 면에서 스포츠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평화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편 기독교 관점에서 볼 때 솔직히 스포츠는 오늘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또 하나의 우상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 도가 지나쳐 우리의 신앙을 약화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심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독일 나치의 개스실 공포로부터 살아남아 인간 삶의 의미와 목적을 말해주고 있는 빅터 프랭클 (Victor E. Frankl)은 왜 이렇게 현대인들이 스포츠에 열광하고 있는지를 신경정신과 교수답게 아래와 같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권태의 극점에 와 있다. 풍족한 사회는 구석구석까지 생계 수단을 제공했지만, 사람들은 살아가는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여가 사회에 살고 있다. 여태껏 가장 많은 여가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렇게 시간을 소비하는 의미를 갖지 못했다. 이런 현상들은 인간이 새로운 것을 향한 욕망과 긴장 없이 지내면서 그것들을 견뎌낼 능력을 잃어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결론을 가능케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극기(克己)할 줄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험이 도사린 곳에는 구원도 가까이 있다. 풍요로운 사회가 전혀 긴장을 주지 않는다면 인간이 만들어내야 한다. 인간은 풍족한 사회에서 미미했던 긴장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다. 자신의 요구를 해결하려 스스로 긴장을 불어넣는다. 일시적이지만 자발적으로 자신을 긴장 상황에 노출시킨다. 이것이 바로 스포츠가 해내는 기능이다. 우리는 걸을 필요가 없는, 차를 타면 그만인 시대에 살고 있다. 계단을 오를 필요 없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된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갑자기 산에 오른다. 이것이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이유이다. 현대에 있어서 스포츠의 의미는 바로 '풍요로움의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고행의 섬'이다."
예전 외항선 항해사 시절 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해주는 파나마(Panama) 운하를 무려 26번이나 통과했습니다. 어느 한 번은 태평양 쪽에서 대서양을 향해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던 중, 내가 타고 있는 3만톤 크기의 배 바로 뒤편으로 아주 작은 요트 한 척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다섯 명의 영국 청년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두 명의 여자만 사람 얼굴이지 나머지 세 명의 남자 얼굴은 거의 원시인에 가깝도록 얼굴이 온통 털로 덮여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배의 국적을 알리는 영국 국기는 바람과 파도에 날려 거의 반쪽만 남아 펄럭거리고 있었고, 남녀 공히 그들이 입고 있는 청바지는 모두 걸레처럼 너덜거렸습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청년들의 용기와 도전의 모험정신에 속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멋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그 모습을 시큰둥 바라보던 선원 한 명이 내게 지나가듯한 말투로 불쑥 말을 뱉었습니다.
"항해사님요, 정말 나는 저눔아들 맘을 알 수 없심다. 저눔아들 얼굴이나 옷 꼴 좀 보이소. 도대체 왜 저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정말 저 속을 알 수 없는기라요."
한 사건을 두고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게 달랐습니다. 나는 그들이 멋지게 보였는데, 내 동료는 그들의 모습이 한심스럽게 보였으니까요. 사실 나도 그 젊은이들의 무모한 항해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목숨을 거는 저런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지... 저들은 왜 저런 모험을 감행하고 있으며, 저런 모험을 통해 저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 계속 생각되어졌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되는 것은 그것이 권태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해석입니다. 오래된 전통과 관습 사회, 숨 막히게 질식할 듯한 그 사회구조로부터 마치 신세계를 발견하기 위해 닻을 올린 콜럼버스의 항해와 같이 생각되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들이 더 대단하게 보였습니다.
스트레스(stress)는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적당한 긴장(strain)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긴장을 유발하기 위해서는 모험이 필요하고 이에 대한 도전정신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더 나은 삶을 향한 모험과 도전이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와 경쟁심으로 인한 것이 될 때 그것은 스트레스가 됩니다. 그러나 상대방과의 경쟁이나 승리에 연연하지 않고 적당한 긴장감으로 그 자체를 즐긴다면 그것은 삶을 활기차게 만들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가 생기를 잃은 것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기독교를 표방하는 많은 것들이 고루하고 지루하고 그래서 권태롭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고,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 성경을 불변의 진리로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특히 규정화된 모든 것의 정형화를 과감히 쳐부숴 깨뜨리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는 진리의 틀마저 깨부수고자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다양화된 사회는 일관된 진리마저 답답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저들이 말하고 있는 정형화의 해체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관한 것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오늘의 사회에서 기독교가 당면한 문제들을 쉽게 풀어갈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불필요한 모든 헌 옷들을 벗어 버리고 신선하게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옷을 갈아입는 것이 몸 자체를 바꿔버리거나 나의 본질 대신 다른 몸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듯 말입니다.
그 당시 나와 함께 승선 생활을 했던 선장과 기관장 등 시니어 클래스의 고급 사관들은 일본 사람과 유럽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당직 시간 빼고는 항상 모여 술파티를 열었습니다. 그 넓은 바다에서 그들은 너무 외롭기도 했지만 그 삶이 너무 권태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거의 몸부림치다시피 술을 마셔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욱 권태에 찌들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때로 미친 사람들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어댔습니다.
나는 그 때 밤마다 태평양 한 가운데의 그 밤바다, 하늘 가득히 촘촘하게 빼곡히 박혀 있는 그 수많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동화의 나라,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곤 했습니다. 망원경 안으로 은하수의 별들이 내 눈 가득히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이 지구 말고 또 하나의 다른 세계를 꿈꾸기도 했습니다.
삶이 권태롭습니까? 권태처럼 큰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잠시 네온사인으로 현란한 도시의 불빛을 떠나 한적한 시골 동네에서 밤하늘을 살펴볼 기회를 가지십시오. 그리하면 나처럼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면서 마음이 동심으로 돌아가고, 새로운 환상의 세계를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나의 인생은 바로 그 시점에서 삶의 권태로움을 벗고 새로운 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2천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 그 초라한 마구간으로부터 시작한 바로 그 구원의 별 말입니다.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