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비(白碑) 민간인학살지 3차(칠곡)신동재학살지역 위령순례 원혼표식설치
주최: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칠곡유족회)
사회적공론화 미디어투쟁단
일시:2018년8월29일(수)오후2시
장소:칠곡군 신동재
후원단체: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통일WHO,사단법인우리민족.원불교대구강북교구.(사)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과거성찰비핵평화상생번영국민개헌추진전국순방단.서울의소리.국민주권개헌연대.전국농민회.
신동재 민간인학살지에 원혼비 목각표식이 69년만에들어섰다.
배일천 칠곡유족회장
백비민간인학살지 위령순례원혼비표식설치를 종료후 과거사기본법재개정을 촉구하는 유족들
경북 칠곡 신동재 학살지에 원혼비 백비가 설치되었습니다. 배일천 칠곡유족회장님, 이수철 칠곡유족회 부회장님, 박운희 칠곡유족회 총무님, 이일근유족님, 류유현 유족님, 이효일 유족님, 이효열 유족님, 대구KBS에서 촬영해 주셨고, 칠곡군 지천면사무소 장승현 면장님과 고희림시인께서 참석해 주셨습니다.
○ 칠곡 민간인학살사건
<형무소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경찰서 등으로 연행된 주민들이 국군 후퇴직전 지천면 연호동 ‘신동재’와 칠곡면 ‘안양동·아시동(아양골)’, 가산면 학산동 소재 유학산 기슭 ‘팟재고개’ 등에서 칠곡경찰서, 헌병, 방첩대(CIC) 등에 의해 학살되었다.
당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곳은 신동재였는데, 목격증언에 의하면 1950년 8월 10일 하루 동안만 300여 명이 학살당했다. 1960년 4·19 직후 언론 보도에 의하면 1950년 봄부터 8월말까지 최소 500~600명의 남녀가 칠곡군 지천면 연호동 신동재에서 학살당헀다.
당시 헌병과 경찰들은 같은 장소에서 20차례 이상 학살했으며, 연호동 동장 구자승과 동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최소 500명 이상의 시체를 마을 주민들이 묻어 주었다고 한다. 특히 주민들은 1950년 8월 10일(음력 6월 27일) 오후 3시 트럭 6대에 실린 사람들(대부분이 양복을 입었고 일부가 삼베옷 한복 혹은 수의를 입었음)이 집단학살 당했다.
당시 학살에 가담한 청년방위대 6지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6일 동안 50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하며 당시 국군 22연대 소속으로 대구형무소에서 근무했던 헌병의 증언에 따르면 대구형무소 재소자 200~300명을 트럭 7대에 태워 신동재에서 사살했다고 하였다. 이 증언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기록문서와도 일치된다.
칠곡군 지천면 신동재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헌병에게 사살되었다는 내용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미군의 극비문서가 발견되면서 이미 알려진 바 있다. 미 제1포병사단 소속 프랭크 피어스 중사는 “1950년 8월 10일 오후 3시에서 4시 30분 사이 대구에서 북쪽으로 약 13킬로미터(원문에는 8마일로 표기) 떨어진 야산 계곡에서 한국군 장교와 무장한 헌병들이 여성을 포함한 200~300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했으며 확인 사살을 하는 등 3시간 동안 학살이 자행되었다.”라고 보고하고 있었다.
칠곡군의 신동재와 더불어 대표적인 학살지인 아양골짜기는 현재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이다. 여기서는 4·19혁명 직후 언론보도와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200여 명의 희생자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웅동못 골작’, ‘밤나무 골작’, ‘외개골’에서 한국전쟁 이후 200여명의 사람들이 총살당했는데 무덤도 없이 뒹굴고 있는 시신들을 마을 주민들이 묻어주었다고 한다.
[팟재고개] 칠곡군 가산면 학산동 소재 유학산 기슭 속칭 ‘팟재고개’에서도 수의와 한복을 입은 남자 67명이 정·사복 경찰관들에게 집단총살당한 일이 있었다.
칠곡에서는 연행된 주민들이 아군 후퇴직전 지천면 연호동 ‘신동재’와 칠곡면 ‘안양동·아시동(아양골)’, 가산면 학산동 소재 유학산 기슭 ‘팟재고개’ 등에서 칠곡경찰서, 헌병, 방첩대(CIC) 등에 의해 학살되었다.
당시 북삼지서장 마씨에 의하면, 북삼지서는 8월 3일 왜관교 폭파 전에 사찰계 지시에 의해 북삼면 주민 30명을 트럭에 싣고 나가 총살했다.
1960년 4·19 직후 언론 보도에 의하면 1950년 봄부터 8월말까지 최소 500~600명의 남녀가 칠곡군 지천면 연호동 신동재에서 헌병과 경찰들에 의해 20차례 이상 학살되었으며 최소 500명 이상의 시체를 마을 주민들이 묻어 주었다는 연호동 동장 구자승과 동민들의 증언이 있었다. 특히 1950년 8월 10일(음력 6월 27일) 오후 3시 트럭 6대에 실린 사람들(대부분이 양복을 입었고 일부가 삼베옷 한복 혹은 수의를 입었음)이 집단학살 당했다.
당시 학살에 가담한 청년방위대민병대 6지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6일 동안 50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하며 당시 국군 22연대 소속으로 대구형무소에서 근무했던 헌병의 증언에 따르면 대구형무소 재소자 200~300명을 트럭 7대에 태워 신동재에서 사살했다고 하였다. 칠곡군의 대표적인 학살지인 신동재와 더불어 현재의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소재 안양동·아양동(속칭 아양골짜기)에서도 4·19 직후 언론보도와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200여 명의 희생자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웅동못 골작’, ‘밤나무 골작’, ‘외개골’에서 한국전쟁 이후 200여명의 사람들이 총살당했는데 무덤도 없이 뒹굴고 있는 시신들을 마을 주민들이 묻어주었다고 한다.
칠곡군 가산면 학산동 소재 유학산 기슭 속칭 ‘팟재고개’에서도 수의와 한복을 입은 남자 67명이 정·사복 경찰관들에게 집단총살당한 일이 있었다.
칠곡군 지천면 신동재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헌병에게 사살되었다는 내용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미군의 극비문서가 발견되면서 이미 알려진 바 있다. 미 제1포병사단 소속 프랭크 피어스 중사는 “1950년 8월 10일 오후 3시에서 4시 30분 사이 대구에서 북쪽으로 약 13킬로미터(원문에는 8마일로 표기) 떨어진 야산 계곡에서 한국군 장교와 무장한 헌병들이 여성을 포함한 200~300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했으며 확인 사살을 하는 등 3시간 동안 학살이 자행되었다.”라고 보고하고 있었다
<소개 피해>
1950년 8월 3일 왜관교 폭파 후 인근 왜관읍 왜관리 달오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졌으나 피난처를 지시받지 못해 뿔뿔이 흩어져 피난해야 했다. 그런데 이 때 거동이 불편했던 노인 7~8명은 피난하지 못하고 마을에 남겨졌다. 이후 마을에 미군이 들어와 집집마다 불을 질렀으며, 이 때 집을 빠져 나오지 못한 노인들이 모두 불에 타 사망했다. 불에 타 사망한 노인 8명의 시신이 수습되었고 2명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위 사건들과 별도로 각 지서에 의한 사건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북삼면에서만 확인되었다. 당시 북삼지서장 마씨(마근갑)에 의하면, 북삼지서는 8월 3일 왜관교 폭파 전에 사찰계 지시에 의해 북삼면 주민 30명을 트럭에 싣고 나가 총살했다.
<미군폭격 피해>
왜관교가 폭파되고 전선이 형성되면서 미국 폭격에 의한 주민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1950년 8월 5일 기산면 노석리 주민들이 미 전투기의 폭격과 미 지상군의 포격으로 최소 9명이 사망하고 마을 2/3가 전소되었다.
당시 칠곡지역에 주둔하던 국군 1사단은 후퇴하여 8월 14일부터 30일까지 미 27연대와 함께 칠곡 가산면 다부리 부근, 칠곡 수암산 부근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후 미 1기병사단이 9월 2일부터 9월 15일까지 전투했다. 칠곡 가산면, 팔공산에서는 국군 1사단이 8월 31일부터 9월 15일까지 전투했다.
이상 칠곡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다음 <표>와 같다.
구분 | 사건발생일 | 희생장소 | 희생자 수 | 가해조직 | 비고 |
보도연맹 | 1950. 7.~8. | 지천면 연호리 신동재 | 600 | 국군 등 | |
보도연맹 | 1950. 7.~8. | 아양골짜기 | 200 | 국군 등 | |
보도연맹 | 1950. 7. | 가산면 팟재고개 | 67 | 경찰 | |
보도연맹 | 1950. 8. 3. | 북삼면 | 30 | 경찰 | |
소개 | 1950. 8. 3. | 왜관읍 왜관리 | 10 | 미군 | |
폭격 | 1950. 8. 5. | 기산면 노석리 | 9 | 미군 |
첫댓글 무덤도없고ㅠ이름도없는 원한서린 신동재학살지에 원혼비표식과 천도재봉행위령추모행사를 하신 유족회에 뜨거운 박수힘차게보내드립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