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에덴의 동쪽>의 감미로운 테마음악, 작곡가 레오나드 로젠만은 많은 영화음악을 작곡했지만 이 음악 외에는 별로 인상에 남는 음악이 없는 것 같아 소개를 생략하기로 합니다.
[ 존 스타인벡의 소설, 에덴의 동쪽 ]
영화 <에덴의 동쪽>은 존 스타인벡의 동명 소설 후반부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스타인벡은 성경의 창세기전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써서 아담 트래스크와 그의 두 아들 아론과 칼의 관계를 그렸습니다.
신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동생 아벨을 너무나 질투한 나머지 죽이고 마는 카인의 내적 갈등을 심리학적으로는 카인 콤플렉스라고 칭하는데, 부친의 사랑을 갈구하다가 좌절하자 급기야는 형을 사지로 내모는 칼 트래스크의 심리가 카인 콤플렉스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것입니다. 비뚤어지고 치우친 부성애와 그로 인한 형제간의 증오와 갈등이 이 작품을 끌어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에덴의 동쪽>에서 ‘동쪽’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신의 분노를 사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다는 동쪽 땅을 가리키는 말로 구약성서의 창세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 이후 인간이 사는 곳은 모두 ‘에덴의 동쪽’이며, 아담에게는 카인과 아벨 두 아들이 있었는데, 신이 아벨만을 편애한다고 느낀 카인이 질투심에 못 이겨 동생 아벨을 죽였다고 하여 인간은 모두 카인의 후예로 불립니다.
이 작품은 구약에서 아담의 총애를 받은 아벨을 시기한 카인의 살인을 테마로 1차 대전 중의 캘리포니아로 무대로 옮겨 스토리를 전개시키고 있습니다. 즉 이 작품의 주제는 사랑받고 싶은 인간의 영원불멸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영화 '에덴의 동쪽' ]
이 작품은 제임스 딘의 첫 번째 메이저 영화 주연작으로 그의 천재성과 줄리 해리스의 아름다움, 매음굴의 포주 생활을 하는 어머니 역의 조 반 플릿 등의 뛰어난 연기가 잘 어우러진 작품입니다. 1956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여주조연상과 남우주연상, 감독상, 각본상 부문 후보로 올랐으며 1955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극영화로 선택됐습니다.
스타인벡의 고향이자 원작의 배경이 되는 캘리포니아 주, 살리나스 계곡의 아름다운 농지와 당시 시대상을 충실히 담았다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고뇌에 찬 둘째 아들 칼 역을 맡은 제임스 딘의 연기는 아직까지도 비평가들 사이에서 이 작품을 꼭 봐야 할 이유로 꼽힙니다.
또한 <에덴의 동쪽>은 엘리아 카잔 감독의 첫 번째 시네마스코프 작품으로, 제임스 딘의 격렬한 반항이나 질투에 불타는 모습을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경사시켜서 격정적인 화면으로 빈틈없이 표현해냈으며 현악기의 멜로디와 목관악기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색의 앙상블을 이루어낸 테마 음악 역시 뛰어납니다.
겨우 세 편의 영화(에덴의 동쪽,이유없는 반항,자이언트)에서 주연을 했을 뿐이지만, 제임스 딘은 1950년대 영화계의 핵심적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남성미 영역에서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말론 브랜도의 뒤를 이은 그는 클라크 게이블이나 에롤 플린 같은 남성적 아이콘들에 비해 훨씬 민감하고 고뇌에 찬 스타일을 선보였습니다.
< 제임스 딘 이야기 >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여읜 제임스 딘(애칭 지미)은 늘 모성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친한 친구 하나 없이 10대를 보낸 그의 벗은 늘 고양이나 개 같은 짐승이었다고 합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법과에 입학했으나 법관이 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 볼 수 있는 연극에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대학 연극반에서 닦은 실력을 할리우드에 가서 발휘해 보지만 주어지는 역은 허구한 날 엑스트라였습니다. 단역만 하며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뉴욕으로 가 엘리어 카잔 감독이 운영하던 배우 양성소 액스터 스튜디오에서 본격적으로 연기력을 닦습니다.
지미를 유심히 지켜보던 엘리어 카잔은 자신이 감독한 <에덴의 동쪽>에 데뷔시키고, 지미는 이 영화로 일약 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이 됩니다.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제임스 딘 특유의 이미지 덕분이었을까요. 우등생인 형과 사사건건 비교되고, 개망나니 같은 놈이라는 욕설이나 듣는 열등생 지미의 초상에서 세상의 뭇 청년은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 비내리는 맨하탄 거리에서 제임스 딘
또한 집에 정을 못 붙이고 떠도는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세상의 뭇 처녀들은 동정심에 몸을 떨기도 합니다. 두 번째 출연작 <이유 없는 반항> 또한 그를 세계적인 스타가 되게 합니다.
[ 딘과 안젤리의 가슴아픈 사랑 이야기 ]
제임스 딘은 1955년, 에덴의 동쪽 촬영 당시 배우 폴 뉴먼의 소개로 피어 피어 안젤리를 처음 만나게 됩니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첫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무뚝뚝한 그가 피어 안젤리를 처음 봤을 때 마치 하얀 드레스를 입은 천사인 줄 알았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제임스딘 에게 그녀는 정말 특별한 존재였죠.
둘은 이후, 서로 없이는 모든 것이 무의미 할만큼 뜨겁고 열렬하게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종교 문제로 제임스 딘과의 교제를 극구 반대하면서 둘은 어쩔수 없는 이별을 하게 됩니다.
제임스딘과 헤어진 피어 안젤리에게 그녀의 어머니는 가수 빅 데이먼을 소개시켜주었고, 그녀는 차마 어머니의 강경한 요구를 거역하지 못하고 빅 데이먼과 교제를 시작하게 됩니다.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던 제임스 딘은 처음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이었기에, 그는 그녀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자신에 대한 울분과 상처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죠.
그리고 어느날, 청천벽력같은 그녀의 결혼 소식을 접한 제임스 딘은 망연자실한 채로 하루하루를 보냈고,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한 피어 안젤리 역시 제임스 딘에 대한 사랑을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피어의 남편인 빅 데이먼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제임스 딘의 영화 촬영장(자이언트)을 찾아 그에게 말했습니다.
"피어는 내 아내이니 그녀를 잊어주시오.그것이 그녀를 위하는 최선의 길이 아니겠소?" 그 말을 들은 제임스 딘은 빅 데이먼에게 피어를 반드시 행복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며, 그 길로 차를 몰고 뛰쳐나갑니다.
그리고 그날, 1955년 9월 30일 슬픔에 가득차 뛰쳐나간 제임스 딘은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차를 들이 받고 그 자리에서 사망합니다.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달리다가 일어난 사고였습니다. 불과 그가 영화 촬영장에서 나온지 정확히 20분 만에 벌어진 비극이었습니다. 다행히(?) 촬영 중이던 영화 <자이언트>는 거의 끝난 상태였고,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자이언트>를 온전히 볼 수 있지요.
* 제임스 딘 사고 현장
이후, 피어 안젤리는 자책과 최책감에 시달리다 마약중독자가 되는 지경에 이르고, 결국 남편과도 4년만에 이혼하며 39세의 젊은나이에 자살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자살 전 남긴 그녀의 유서에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제임스 딘 단 한사람 뿐이었다”라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 피어 안젤리,아들과 함께...
[ 영욕이 교차된 삶을 살았던 명장 엘리아 카잔 ]
<워터 프론트>의 명장, 미국의 엘리아 카잔 감독은지난 2003년 9월 28일,뉴욕 맨하탄 자택에서 28일 숨을 거두었습니다.
카잔은 브로드웨이에선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와 함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등 수많은 걸작을 만들어낸 연출자이자, 할리우드에선 말론 브랜도, 제임스 딘, 캐롤 베이커, 나탈리 우드 등 무명의 스타를 배우로 발굴하고 <신사협정>,<워터 프론트>,<에덴의 동쪽> 등 영화사에 남을 수많은 작품을 감독한 거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매카시 광풍이 몰아치던 1952년 미국 의회 반미행위조사위원회에 소환돼 자신이 1934~36년 공산당원이었음을 고백하고 8명의 당원의 이름을 댄 이후, 그에게는 평생 ‘배신자’라는 꼬리표와 논란이 따라다녔습니다. 카잔은 처음엔 이름 대기를 거부했지만, 당신의 명성을 무너뜨리겠느냐는 회유와 협박 속에 증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워터 프론트>(1954)로 재기에 성공합니다. “갑자기 아무도 내 정치적 관점이나 논란을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워터 프론트> 이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뭐든지 하게 됐다. 그게 할리우드다.” 그렇다 하더라도 평생 그 상처는 아물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인 부모 사이에서 1909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그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 예일대에서 연극을 공부했습니다. 브로드웨이의 활약을 거쳐 <브루클린에서 자라는 나무>(1945)로 데뷔한 그는 20세기 폭스 데릴 자눅 사장의 <명작 브랜드 정책>에 힘입어 승승장구합니다.
<신사협정>(1947), <거리의 혼란>(1950) 등 그의 초기작은 필름 누아르 스타일과 사회파 리얼리즘의 태도를 결합한 영화였지요. 그는 할리우드에 연극의 전통을 끌어들였고 스크린에 미국인의 거칠고 방황하는 삶을 옮겨온 장본인이자, 할리우드를 지배할 메소드 연기(배우가 역할에 몰입해 완전히 역할과 같은 성격의 연기를 하는 것)의 산실인 액터스 스쿨의 수장이기도 했습니다.
아카데미 위원회가 그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하던 지난 1999년 아카데미 식장은 카잔을 둘러싼 논란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임을 상징한 현장이었습니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과 배우 로버트 드 니로는 그에게 찬사를 보내며 기꺼이 상을 전달했지만, 에드 해리스나 아서 밀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박수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않고 차가운 눈길로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워터 프론트>에서 말론 브랜도가 맡은 퇴역 복서 출신 테러 멀로이는 부두 노동조합의 깡패집단을 정부에 고발한 뒤 밀고자로 몰리자 단신으로 깡패 두목 조니(배우 리 J 콥)를 찾아가 주먹싸움을 벌입니다.
“난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아”라고 외치는 테리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카잔의 자기 변명처럼 느껴졌지요. 한때 거대권력에 맞섰지만 끝내는 협력했던 자신의 고독한 처지를 웅변하려는 듯 보였습니다.
* 영화 <워터 프론트>에서...마론 브란도와 에바 마리 세인트
그리스인 출신으로 언제나 자신을 아웃사이더라 느꼈던 카잔에게 그 느낌은 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확신에 차 있었던 듯 보이던 카잔은, 한참 세월이 흐른 뒤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한 행동은 바른 것(correct)이었다. 하지만 정의로운(right) 것이었을까?”
첫댓글 짧고 굵은 인생을 멋있게 살다 간 제임스 딘의 강렬한 눈 빛 !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학창 시절의 그 옛날에 빠져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집착이 젊은 두 남녀의 비극을 불러왔지요.그냥 둘이 사이좋게 내버려두지...ㅉㅉㅉ
위에서 언급했지만 딘은 <자이언트> 촬영이 모두 끝난후 사고를 당했습니다.제작자 측에서는
가슴을 쓸어 내릴 뻔 했지요.후세의 우리도 명작을 놓칠 뻔 했고...<자이언트> 올릴 때 언급하
려다가 미리 썼는데,<자이언트> 올릴 때는 뭘 얘기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