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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몰트만(94) 박사
2012년 5월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강연한 ‘희망의 신학자’ 독일 튀빙겐대 명예교수 위르겐 몰트만(94) 박사가 전 세계 독자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자 한 이야기는 ‘영생’이다. 몰트만 박사는 최근 스스로 “내 마지막 저서” ‘나는 영생을 믿는다’(신앙과지성사)를 펴냈다. 20세기 후반 현대신학계를 개척한 인물로 꼽히는 몰트만 박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사회에 팽배했던 ‘실존주의 신학’ 대신 ‘희망의 신학’을 주창해 주목을 받았다.
그가 죽음과 영생, 부활을 깊게 성찰한 이 책을 펴낸 계기는 2016년 아내의 별세였다. 책은 자신처럼 가족 친지 등의 죽음을 맞은 이들에게 부활의 희망과 확신을 전하기 위해 썼다. 학술적 논문은 아니지만, 그간 주창해온 신학이론이 녹아있다. 그 역시 고령이기에 죽음을 신학적으로 고찰한 이번 작업이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몰트만 박사는 “보이는 이 세계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세계에 죽은 자들이 존재해 있다고 믿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후에도 우리는 계속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개인의 부활이 아닌,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날 사건으로 인식했다. 다만 부활의 형태에 있어선 예수와 다를 거라고 봤다. 예수는 그의 무덤에서 육체로 부활했으나, 인간은 죽는 순간 영생으로 부활한다는 게 몰트만 박사의 견해다.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낱알이 땅에서 썩어야 꽃이나 나무를 피워내듯이 우리의 신체 역시 죽음을 거쳐 썩지 않은 영생을 얻는다. 독일 나치정권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 역시 이런 영생의 소망을 품었다.
본회퍼 목사는 1945년 4월 9일 플로센부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당하기 직전 동료 수감자에게 “이것이 마지막이지만, 내게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고 말했다.몰트만 박사는 “우리가 ‘영혼의 어두운 밤’이나 육신의 고통 속에 있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 곁에 계신다. 그리스도는 겟세마네와 골고다 사이에서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저주의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며 “그리스도의 지옥행 이래 모든 희망이 사라진 곳에도 희망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홀로코스트, 핵전쟁, 기후위기 등 제2차 세계대전부터 지금껏 불거진 인류의 악을 열거한 뒤 “하나님의 아들은 모든 버림받은 사람들과 연대한다”며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부활을 고대한다.“인생은 온통 허무할 뿐이고, 죽음 후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도 오직 허무가 아닌가.
그러나 몰트만은 외친다. ‘아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해도, 희망만은 포기하지 말자!’”몰트만 박사의 제자로 이 책을 번역한 이신건 목사의 헌사다. 코로나19 시대에 죽음과 절망으로 쓰러진 인류에게 보내는 노신학자의 마지막 당부같다...몰트만의 신학은 한 마디로 세계를 바꾼 신학이다. 그는 세계 신학의 방향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바꾸었다. 1964년 등장한 『희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nung)은 세계를 바꾸는 신학의 태동이었다. 『희망의 신학』이 등장한지 50년, 정말 세계 신학은 엄청나게 바뀌었고 세계의 역사도 몰트만의 신학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바뀌었다.
그러면 몰트만이 발 전시킨 신학은 무엇이며, 무엇이 세계 신학을 바꾸고, 또 어떻게 세계 역사를 바꾸었을까? 1. 신학적 영역에서의 몰트만의 공헌 ..몰트만의 신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많이 알고 있지만 이천년 그리스도의 교회가 해결하지 못했던 신학의 여러 가지 심각한 난제를 해결한 학자라는 것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몰트만의 세상을 바꾼 신학을 언급하기 이전에 이천년 그리스도의 교회가 해결하지 못한 신학의 난제들을 해결한 그의 신학적 영역에서의 공헌을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몰트만은 이천년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에서 신학의 난제들을 거의 모두 해결하고 새 시대를 연 엄청난 신학자이고 그의 놀라운 새로운 신학으로 세계 역사를 바꾸었다. '
1. 예정론의 새로운 지평 몰트만은 1964년 『희망의 신학』으로 세계에 알려지기 전, 칼빈주의 신학을 연구한 학자였고 칼빈주의 신학을 가르치던 교수였다. 이 때 몰트만은 칼빈주의 신학의 가장 큰 신학의 숙제인 예정론을 해결하는 큰 신학적 업적을 남겼다. 이미 역사 속에 칼빈주의자들과 아르미니 우스주의자들과의 예정론과 관련된 논쟁에서 밝히 드러나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극난한 문제였다. 하나님의 예정이나 인간의 자유의지 중 하나를 포기하면 논리적으로는 답하기 쉬운 일이지만 이 둘을 모두 인정할 때는 이를 논리적으로 조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까닭에 신학의 흐름은 한쪽을 완전히 희생시키든지 아니면 한쪽을 다른 쪽에 종속시켜서 해결하든지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해결책은 바른 해결책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칼빈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의 싸움 이전에 이미 어거스틴 시절에 어거스틴의 신학과 펠라기우스주의 사이의 신학적 갈등이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갈등은 이천년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 계속된 갈등이었고, 이 갈등은 그 어떤 신학자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몰트만은 이 이천년 그리스도교 신학의 극난한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큰 업적을 남겼는데, 이것은 젊은 시절의 몰트만이 세계 신학에 끼친 큰 공헌이었다. 몰트만은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해치려는 교리가 아니고,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는 교리이고, 신앙의 우연성( Zufalligkeit)과 무상성(Hinfalligkeit)을 반대하는 교리라고 밝혔는데, 이는 매우 놀라운 발견이었다.
몰트만은 칼빈주의 예정론의 가치를 젊은 시절부터 알고 있었고 이 칼빈주의 예정론이 얘기하고자 하는 핵심정신은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총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 (Treue)이라는 정확한 답을 제시했다. 선행하는 하나님 사랑이나 신앙의 우연성에 대한 반대라는 개념을 개념적으로만 언급하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면, 겨울철 두꺼운 외투를 입고 사는 사람에게 따뜻한 봄 햇살이 비취면 두꺼운 외투를 벗는다. 이때 외투를 벗는 것이 벗는 사람의 자유의지인지 따뜻한 봄 햇살의 힘인지를 설명하라고 요구받으면 답은 양쪽 모두일 것이다. 따뜻한 봄 햇살이 비춰도 외투를 벗지 않고 계속 입고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외투를 입고 있는 사람의 자유이다.
그런데 외투를 벗었다면 그것은 분명 따뜻한 햇살 때문이다. 신앙의 우연성에 대한 반대라는 말은 죄의 외투를 벗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가볍고 자유롭게 사는 기쁨의 삶의 원인이 하나님의 은총의 햇살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외투를 벗는 믿음의 결단을 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자유 의지로 행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총의 햇살이 없었다면 전적으로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즉, 우리의 외투를 벗는 자유와 기쁨의 삶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은총의 햇살을 비춰주셨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예정론에 대한 몰트만의 공헌은 전통적 예정론의 기계론적 특징을 극복하고, 이를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매우 놀라운 신학적 공헌인데, 오늘의 시대적 정황에서 보면 그 공헌은 더욱 크다. 왜냐하면, 오늘의 인간의 자유가 극대화된 시대에, 인간의 자유를 반대하는 이론은 거의 예외 없이 거부당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몰트만의 예정론에 대한 이해는 성경의 매우 중요한 가르침인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의 교리를 현대인들의 거부감을 뚫고 바르게 전할 수 있는 신학적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 예정론은 신학의 깊이와 무게를 더하는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연약한 결단과 책임에 근거를 두면, 너무나도 허약하고 세상의 높은 파도와 시련에 붕괴될 가능성이 많다. 몰트만의 예정론은 신앙의 근거를 반석 위에 세우는 이론으로 이천년 신학의 난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자유의 시대의 거친 걸림돌인 예정론을 살아 움직이는 교리로 현대인들에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큰 공헌이 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론의 곤경의 해결--1972년 출간된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Der Gekreuzigte Gott)은 다양한 측면에서 큰 공헌이 있는 저술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론 이해에 새로운 지평을 연 귀중한 저술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론의 문제에 가장 큰 걸림돌은 참 하나님(Vere Deus)이 어떻게 참 사람(Vere Hono)일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참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참 인간은 전능하지 않고, 참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는데 참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론은 엄청난 모순된 개념을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시킨 교리이기 때문 에 논리적으로 이해가 쉽지 않고 모순되는 두 개념이 상호 충돌됨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이 교리가 크게 이성과 충돌되는 교리이기 때문에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참 하나님 되심을 희생시키고 참 인간으로서의 예수만 부각시키는 매우 단편적이고 편향적인 신학을 발전시켰다. 이 편향적인 신학은 결국 삼위일체론을 해체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반대하는 결과를 초래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의 존립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신학이었다. 예수를 하나의 인간으로만 생각하는 이 자유주의신학의 전통은 한국의 민중신학에도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민중신학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의 민중이고 예수의 죽음은 정치적인 억압의 산물로 귀결된 억울한 죽음이고 예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 아니고, 예수의 정신이 갈릴리 민중 속에 부활한 정신의 부활이다. 칼케돈(Calcedon) 신조의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시다"라는 교리는 매우 중요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이 교리가 갖고 있는 난해성 때문에 매우 편향적인 신학이 유럽과 한국에서 발전된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자이시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은 존재라는 말과 다른 말이다. 전통적 도성인신 (incarnation)의 교리에 따르면 성자와 역사적 예수와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영원 전부터 계신 성자는 인간의 육체가 없는데 역사의 예수는 육체를 입은 성자이기 때문이다. 성자는 신이시고 성자께서 입으신 육체는 인간성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참 신이시고 참 사람이라는 칼케돈신조의 복잡한 교리가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몰트만에 의하면 이 복잡한 교리의 배후에는 신성과 인간성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헬라 철학이 들어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성자이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자이시다. 신은 고난당할 수 없고, 죽을 수 없다는 전제는 헬라 철학의 전제이지 성경의 가르침은 아니다. 신은 고난당할 수 없고 죽을 수 없다는 헬라의 철학은 예수 그리스도 계시와 충돌된다. 십자가에서 성자께서는 참으로 죽으셨다.
이 죽으신 성자를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살리신 것이다.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성의 이해에 혁명을 요구하는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정확히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픔과 목마름, 하나님의 고통과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어 있다.칼케돈 신조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라고 얘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시다. 나사렛 예수 그분이 성자이시고, 그분이 하나님의 신성의 계시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라고 칭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인간성과 다른 신성이 들어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성자라는 뜻이다.
즉, 성자라는 말은 역사의 예수의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다.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신론의 혁명과 더불어 칼케돈신조의 두 본성론의 난제를 해결하는 매우 중요한 저술이었다. 나사렛 예수께서 성자이시지 나사렛 예수에게서 인성을 뺀 것이 성자는 아니다. 나사렛 예수는 성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다. 성자라는 말은 나사렛 예수와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다. 그리고 우리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자의 참 신성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성자의 신성은 아파할 수 없는 신성이 아니라 아파하시는 신성이었고, 목마름과 배고픔을 느끼는 신성이었고, 고난받고 죽으실 수 있는 신성이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이해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는 다른 낯선 어떤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인 것이다.
3. 악의 기원과 신정론에 대한 새로운 시각 -세상의 고난과 악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이천년 그리스도교 신학의 큰 난제였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의 역사 속에 왜 악이 존재하며 세상의 고난은 어디서 기인된 것인지의 문제는 수많은 신학자들의 난제였다. 이 난제는 이천년 동안 해결되지 않은 채 수많은 가설들만 쏟아 내었다. 칼 바르트 역시 악과 신정론의 문제의 근원으로 무(Das Nichtige)를 언급했지만, 이 무의 기원을 설명해 내지는 못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창조와 더불어 존재하는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어떤 것이 무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 무가 인격화된 표현이 성서적 표현인 마귀이다.
바르트가 무에 대한 깊은 인식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바르트의 훌륭한 점이지만 그 기원에 대한 답은 미흡했다. 1980년의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Trinitat und Reich Gottes)와 1985년 출간된 몰트만의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Gott in der Schopfung)은 이 무의 기원을 놀랍게 밝혀낸 탁월한 저술이었다. 몰트만은 유대교의 카발라 전통을 깊이 연구하면서 그의 천재적인 시각으로 무의 기원을 찾았는데,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그의 이삭 루리아(Isaac Luria)의 이론에서 발전시킨 침춤(Zimzum) 이론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제한하는 자기제한(Selbstzuruckhaltung)의 행위이다. 하나님의 자기제한과 더불어 창조의 공간이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이 이론은 처음 부딪치면 매우 사변적인 이론 같지만 사실은 엄청난 의미를 갖는 천재적 이론이다.
피조물의 자유는 하나님의 자기제한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자기제한은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큰 은총의 행위이다. 이 하나님의 자기제한을 통해 창조의 공간이 생겨났고 자유로운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자기제한과 자기철회를 통해 피조세계에는 절대 무의 가능성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르트가 답하지 못했던 무에 관한 몰트만의 해석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제한을 하셨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유로운 인간과 자유로운 창조세계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유와 창조세계의 자유는 서로 상응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바로 이 하나님의 자기제한 속에 하나님과 대립하는 절대 무의 가능성이 있고 창조세계의 자유는 무의 혼돈과 악의 가능성이 깊이 존재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과 자유로운 창 조세계의 창조는 분명 하나님의 큰 은총의 행위였지만 이 큰 은총의 행위 속에는 은총에 반역하는 무의 혼돈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유로운 인간과의 사귐을 원하셨기 때문에 자신을 제한하시고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한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인간과 세계의 타락이라는 엄청난 문제를 야기시켰다. 하나님께서는 이 가능성을 이미 창조사역의 시작에 알고 계셨다.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이미 창조 이전에 예비된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였다. “하나님의 창조는 창조의 결정으로 소급된다. 그렇다면 이 결정 속에는 구원의 고난을 위하여 창조자가 자기를 개방하시며 자기를 낮출 수 있는 각오가 들어 있다. 하나님이 그의 창조의 결정을 지킨다면, 이 결정은 죄와 죽음의 결과로 일어나는 피조물들의 자기 폐쇄에 직면하여 구원의 결정으로 된다.
태초에 일어난 ‘무로부터의 창조’는 구원을 일으키는 무의 폐기(annihilatio nihili)에 대한 준비와 약속이며, 이 폐기로부터 창조의 영원한 존재가 생성된다. 세계의 창조는 영원한 삶의 승리 가운데 일어나는 부활과 죽음의 승리에 대한 약속이다.(고전15:26,55-57) 그러므로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는 창조 자체가 나타내는 약속의 성취이다.” ( J. Moltmann, Gott in der Schopfung『창조안에 계신 하느님』) 하나님은 자신의 고난을 감수하고 창조사역을 시작하셨고 자신을 제한하시며 인간과 세계에 자유를 준 것이다. 몰트만의 신학을 깊이 들여다보면, 세상의 악과 신정론에 관한 질문을 계속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부딪친다. 몰트만에 의하면 신정론에 관한 질문의 답은 십자가이고 부활이고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은 창조 이전에 창조로 말미암아 발생할 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셨다. 그것은 무를 극복하기 위한 고난을 향한 결정이었다. 천지창조 이전에 성자의 죽음에 대한 결정이 있었다.
무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의 폐기를 위한 하나님의 준비가 있었고,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책임이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다. 부활은 무의 폐기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하나님의 자기 철회는 자유로운 인간과 세상을 만들었고, 하나님의 은총이 세상 속의 절대 무의 가능성을 없애고, 하나님과 피조세계 사이에 페리코레시스적인 사랑과 기쁨의 세계를 만든다. 일반적으로 신정론에 관한 질문은 하나님 없음이라는 무신론적 답이 나오든지, 아니면 엄청난 악을 허용한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 답이 나온다. 그런데 몰트만의 신학은 신정론에 대한 질문을 하면 할수록 말할 수 없이 깊고 깊은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 부딪친다. 몰트만의 신학은 세계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무신론에 대한 진정한 신학적 답이다. 이 신학적 답은 이천년 그리스도의 교회가 알지 못했던 답인데 몰트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 답을 찾아낸 것이다.
4. 사회적 삼위일체론 -1980년 출간된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는 20세기 후반 전 세계 신학계에 삼위일체론의 혁명을 일으킨 엄청나게 중요한 저술이었다. 이 책은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새 장을 여는 기념비적인 저술이었다. 몰트만은 이 책에서 서구 삼위일체론이 단일신론적 경향을 띠는 잘못된 삼위일체론임을 비판하면서 초대교회에서 발전된 삼위일체론의 본질은 사회적 삼위일체론이었음을 밝혀내었고, 그 근거 위에서 자신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발전시켰다. 삼위일체론이 교회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삼위일체론이 갖고 있었던 사변적 성격과 논리적 불가해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데 한 분이라는 삼위일체론의 주장은 셋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셋이 되는 (3=1) 이상한 논리적 모순을 만든다. 이 논리적 모순에 대해 전통적으로 교회는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는 주장으로 압박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삼위일체론은 이해는 되지 않지만 무조건 믿어야 되는 불가해한 교리가 되었고 이러한 불가해한 교리가 교회의 삶에 생동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몰트만은 이런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서구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단일신론적 전제 위에서 시작된 잘못된 삼위일체론이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시고 세 분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은 칼 바르트가 얘기한 것처럼 존재양태(Seinsweise)도 아니고 칼 라너(Karl Rahner)가 언급한 것처럼 실체의 양태 (Subsistenzweise)도 아니다. 칼 바르트나 칼 라너의 삼위일체론 모두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라는 단일신론적 전제에서 출발한 잘못된 삼위일체론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신약성경을 펼치면 세 분 하나님이 정확히 언급되어 있고, 세 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펼쳐져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은 사변이 아니고, 초대교회의 창작물도 아니고, 성경에 펼쳐져 있는 세 분 하나님의 역사를 정리한 이론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세 분 하나님의 공재(共在)에 관한 교리이다. 이것은 이미 다메섹의 요한이 언급한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개념 속에 잘 표현되어 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삶에 관한 교리이다. 페리코레시스는 둥글게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원무에서 나온 개념인데, 세 분 하나님께서 함께 천지를 창조하시고, 함께 화해의 사역을 하시고, 함께 세상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만드시는 것을 표현한 교리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안에 계신다는 표현은 예수께서 아버지와 동일인이라는 말씀이 아니고 예수의 사역 속에 아버지의 사역과 영광이 함께 빛나고 있다는 말씀이다.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단일신론적 경향을 갖고 있던 서구 삼위일체론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론이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상의 참된 삶의 원형과 이상이 된다는 의미에서 큰 파장을 불러왔다. 삼위일체론이 정치적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삼위일체론을 황제나 독재자의 단일 지배체제에 대한 거대한 도전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삼 위일체론은 사랑의 코이노니아적 삶의 원형이자 이상이 되면서 삼위일체론은 사회변혁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보프(L. Boff)의 삼위일체론은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이 해방신학과 결합하면서 사회적,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발전된 좋은 예이다.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20세기 후반의 세계 신학의 삼위일체론 부활의 기폭제가 되었는데 그의 영향은 미국 신학에도 라틴아메리카 신학에도 강하게 발견할 수 있다. 미국 신학자 라꾸냐의 삼위일체론은 거의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의 재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의 핵심적인 내용이 기초가 되어 발전된 삼위일체론이다. 해방신학자 보프의 삼위일체론 역시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이 없었다면 근본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초대교회의 정통 삼위일체론의 부활이자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터툴리안(Tertullianus)과 어거스틴(Augustinus)의 단일신론적 삼위일체론의 전통 위에 있는 많은 서구 신학자들은 그의 삼위일체론이 삼신론적 경향을 띠고 있다고 비판했고 이 비판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5. 만유 구원에 관한 새로운 지평 -만유구원론은 기독교 역사 속에 자주 등장한 이론이었지만 언제나 소수자의 이론이었고 정통교회로부터 거부당한 이론이었다. 20세기에 이 이론이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칼 바르트가 그의 『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에서 예정론과 화해론을 쓰면서였다. 칼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을 그리스도론에 집중하면서 만인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발견했고 십자가에서 만인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시고 만인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고 그 작정은 마침내 역사 속에 나타났다.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시고 만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였다.
바르트의 예정론과 화해론이 만인구원의 가능성을 여는 이론인 것은 틀림없지만 바르트는 만인구원론에 대해서는 언제나 거리를 두었다. 바르트는 인간의 믿음과 결단 역시 구원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믿음의 결단을 무시한 하나님의 만인구원의 의지의 구현에 대해서는 확실한 가능성을 열지 않았다. 결국 바르트는 만인구원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공존하는 신학이론을 발표한 것이다. 바르트가 그의 『교회교의학』 화해론에서 만인구원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공존하는 이론을 발표한 이후, 세계 신학계는 이 문제에 대한 찬반으로 양쪽을 갈려 토론만 계속 했지 이렇다 할 신학적 진전은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진전은 1995년에 발표된 몰트만의 『오시는 하나님』(Das Kommen Gottes)에서 이루어졌다. 몰트만이 『오시는 하나님』에서 언급한 중요한 신학적 논점은 다음과 같다.1) 성경은 만유구원론과 이중심판론이 공존하는 책이다.
성경에는 만유구원의 비전과 이중 심판의 심각성이 동시에 언급되어 있다. 2) 성경이 언급하는 영원한 형벌에 대한 이해에 주의가 요청된다. 성경의 영원에 대한 표현은 히브리어나 헬라어 모두 복수형이 있는 단어로 오래 계속되는 긴 시간에 대한 표현이다. 오래 계속되는 기나긴 지옥의 고통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기나긴 고통을 마감시킬 수 있다. 3) 죽은 자들의 세계에도 복음이 전파된다(벧전4:8). 죽은 자들의 세계에 전파되는 복음은 초대교회의 믿음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연옥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반대해서 연옥설을 잘라낸 것은 옳은 일이었지만 죽은 자들의 세계에 전파되는 복음에 관한 교의를 잘라낸 것은 잘못이었다. 4) 믿음 없이 죽은 자들에게도 희망은 있다.
왜냐하면 지옥의 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만 해결한 사건이 아니고 지옥을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 전파되는 복음은 지옥의 고통 속에 있는 자들에게 희망이다.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만유를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계시이다. 바르트가 예 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만인을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읽은 것은 옳은 발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만유는 하나님과 화해되었고 지금 지옥의 고통 속에 있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의 빛은 여전히 비취고 있다. 인간의 잘못된 결단이 하나님의 은총과 의지를 무효화시킬 수 없다. 십자가 사건은 바르트가 언급한 그대로 객관적으로 일어난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이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이 하나님의 은총의 결단을 무효화시킬 수 없다.6) 믿지 않는 자들은 바르트가 언급한 그대로 지옥의 고통 속에 있다.
이 고통은 끝없이 오래 오래 계속 될 수 있다. 인간은 끝없이 잘못 결단할 수 있고 끝없는 지옥의 고통 속에 머물 수 있다. 바르트의 신학은 여기에서 머문 신학이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구원의 객관적 의지와 인간의 끝없는 불신앙의 잘못된 결정까지 언급하면서 두 가지 가능성을 열었다. 만인구원의 가능성과 이중심판의 가능성이 바르트의 신학 속에는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몰트만에 의하면 이 두 가능성은 상호 대립하는 두 개의 축이 아니다. 이 둘을 공존시킨 것이 바르트의 오류라고 몰트만은 보았다.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는 같지 않다. 몰트만에 의하면 인간의 불신앙의 잘못된 결단이 끝없이 계속된다 할지라도 그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결단을 이길 수 없다.
인간은 끝없이 지옥의 고통 속에 머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신다. 인간은 끝없는 불신앙으로 지옥을 선택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불신앙이 그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효화시키지 못한다. 몰트만이 만유구원론이 우리의 희망의 교리라고 언급한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길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다. 역사가 열린 역사이기 때문에 기계론적으로 몰트만이 만유구원론을 언급한 것은 아니다. 아직 역사는 열려있고 수많은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역사의 마지막은 하나님께도 아직 희망이다.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만유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결단 이 구현되는 것이고, 이 일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희망하는 것이다. 7)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는 만유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의지이다. 바르트가 자연과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배경으로만 이해한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는 만유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다.
몰트만의 만유구원에 관한 신학적 지평은 매우 놀랍고 충격적이다. 그런 까닭에 이 이론은 큰 토론 속에 있다. 강한 반대도 존재하고 강한 찬성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 이론은 전통적 신학의 틀 속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새로운 지평에서 토론하고 해결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끌고 있다. 특히, 한국이나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즉시 일어나는 중요한 반론에 대한 답을 제공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아시아 신학자들에게도 주목의 대상이다. 예컨대, 석가는 지옥 갔습니까? 공자도 지옥 갔습니까? 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 질문에 대한 근본주의 신학의 답은 당연히 영원한 지옥불 속에 있다는 답이다. 그런데 이 답을 들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고, 또 수많은 사람들은 무례한 기독교라고 저항을 한다. 왜냐하면 복음을 접하기도 전에 선한 일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을 지옥불로 위협하는 것은 정말 납득이 안되기 때문이다.
몰트만의 만유구원에 대한 신학적 지평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 하나님의 은총의 빛 속에 있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 가슴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가톨릭의 연옥교리에 빠지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종교개혁의 위대한 신앙을 산 자와 죽은 자들 모두에게 강조할 수 있다는 점에 장점이 있다. 그러나 죽고 난 이후에도 예수를 믿을 가능성을 열기 때 문에 이 세상에서의 복음 전파의 절박성이 약해진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Ⅱ. 세상을 위한 몰트만 신학의 공헌 -몰트만은 제 2차 세계 대전의 역사상 유래가 없는 참혹한 비극의 역사를 배경으로 등장한 신학자이다. 이 비극 속에서 그는 비극의 원인을 깊이 숙고했고 역사의 희망을 찾고 찾았다. 몰트만은 십자가 속에서 마침내 이 비극의 원인에 대한 답을 찾았고,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역사의 희망을 발견했다. 몰트만의 신학은 또 다른 세계의 비극을 막는 신학이었고 세상과 역 사를 살려내는 신학이었다.
1. 희망의 신학 -1964년 출간된 『희망의 신학』은 20세기 후반의 최고의 신학저술이었다.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신학 저술 가운데 『희망의 신학』 이상으로 세계에 영향을 끼친 저술은 없다. 이 저술은 신학의 방향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저술이었다. 이 『희망의 신학』은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Der Romerbrief) 제 2판에 나오는 초월적 신학이나, 불트만(R. Bultmann)의 실존주의 신학이나, 판넨베르그(W. Pannenberg)의 보편사 신학과는 다른 새로운 신학이었다. 이 『희망의 신학』은 미래적 종말론이나 초월적 종말론, 실존적 종말론 등의 모든 신학적 구조와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도래(Adventus)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종말론이었다.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현재 이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온다.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현 역사 속에는 아직 약속의 성격을 띠고 있다.
몰트만은 성경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본질적인 구조가 약속과 성취의 구조 속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현재 속에 구현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 속에는 아직 약속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어두운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오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부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결단해야 하고 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해 나가야 하는 소명을 갖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현재적 종말론은 이 하나님 나라가 아직은 약속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 잘못된 종말론이고, 미래적 종말론은 이 하나님 나라가 역사 속에 도래하며 확장되어 나간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미래에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종말로만 이해한 데 큰 오류가 있다. 초월적 종말론은 이원론적 사고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이탈시켜 영원한 세계로 옮겨 버린 것이 큰 오류이고, 보편사 신학은 이 세상의 반신성과 어둠, 모호성을 간과하고 이 역사가 하나님의 간접적 자기계시라고 잘못 이해한 것이 오류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새로운 세계이지 모호한 이 역사의 발전과정은 아니다.모호한 이 역사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마귀의 역사를 계시할 가능성이 많다. 몰트만은 세계 제 2차 대전의 비극을 경험하면서 역사의 깊은 악과 무신성을 경험하면서 헤겔 (G. W. F. Hegel) 철학의 역사가 절대정신의 자기발전이라는 역사관과 결별했다. 이 헤겔 철학은 판넨베르그의 보편사신학 속에 신학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역사의 새로움이지 이 역사의 미래는 결코 아니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소명과 책임을 일깨운 저술이었다. 예컨대, 인종차별의 억압적 구조는 하나님 나라와 대립되어 있는 세상의 구조이다. 초월적 종말론은 하나님 나라가 영원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이 억압적 구조와는 직접적 관계 가 없게 된다.
실존적 신학의 현재적 종말론 역시 하나님 나라가 실존 속에 현재 하기 때문에 이 억압적 구조와 직접적 관계가 없다. 그런 까닭에 현재적 종말론을 가르친 실존주의 신학자 불트만은 히틀러(A. Hitler)의 폭정 속에서도 신앙적 갈등을 느끼지 않고 마부르그(Marburg) 대학교에서 신학교수직을 잘 유지할 수 있었다. 세계 역사가 절대정신의 자기발전이라는 헤겔 철학의 시각에서 보면 히틀러의 통치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극악한 인종차별의 역사도 하나님의 자기발전의 역사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히틀러의 통치나 인종차별의 역사는 악이고 타파되어야 할 어떤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악의 구조와 통치를 부수고 역사 속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어떤 세계이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은 이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을 전 세계에 가르쳤고,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결단하고 투쟁할 것을 가르쳤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20세기 후반 세계 역사가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1971년 등장한 구티에레츠(G.Gutierez)의 『해방신학』(Theology of Liberation)은 몰트만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신학이었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세계의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운동, 평화운동 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인종차별의 역사가 끝나고 만델라(Nelson Mandela)의 새 정부가 등장하는 배경에도, 1989년 독일의 베를린(Berlin)장벽이 무너진 배경에도 한국에서 군사독재가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등장하는 배경에도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의 위대한 정신은 숨 쉬고 있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깊이 관련이 있는 민중신학과 민중신학자들은 몰트만과 몰트만의 신학과 깊은 교류 속에 있었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신학자들의 상아탑에 있었던 신학이 아 니고, 20세기 후반 세계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저술이었다. 이 저술이 없었다면 세계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굴러갔을 가능성도 많다.
2. 메시아적 교회론 -1975년 출간된 『성령의 능력 아래 있는 교회』(Kirche in der Kraft des Geistes)는 교회론의 혁명을 예고하는 저술이었다. 이 저술은 부제에 메시아적 교회론이라고 붙어 있는데, 이 부제의 ‘메시아적’이라는 표현이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89년 출간된 몰트만의 그리스도론인 『예수 그리스도의 길』(Der Weg Jesu Christi)에도 메시아적 그리스도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러면 이 메시아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오랫동안 교회는 헬라철학의 영향을 깊이 받아서 교회를 영혼 구원의 기관으로 생각했다. 교회의 과제는 장차 망할 이 세상에서 영혼을 구원해서 구원의 방주인 교회에 태워 천성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이런 구원의 방주형의 교회론은 세상과 역사를 개혁하고 살리는 일은 교회 의 본질적인 과제로 인식하지 않았다. 교회의 주된 일은 영혼과 관련되는 일이었지, 육체나 세상과 관련되는 일은 아니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 때의 인식은 영혼을 구원하는 영혼의 메시아이지, 육체나 세상과 깊이 관련된 메시아는 아니었다. 몰트만에 의하면 이와 같은 메시아에 대한 이해는 성경의 메시아에 대한 이해와 충돌된다. 몰트만에 의하면 이와 같은 메시아에 대한 이해는 메시아에 대한 이해의 헬라화이다. 성경의 메시아에 대한 이해는 세상의 실질적인 구원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성경이 언급하는 메시아는 정의를 세우시는 메시아이고, 평화와 생명의 세계를 만드시는 메시아이다. 메시아 왕국은 이 세상 위에 도래하는 나라이지 결코 이원론적인 영원의 세계에 있는 영혼을 위한 나라는 아니다. 몰트만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꿈꾼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희망은 성경의 본질적인 시각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꿈이 아니고 성경의 본질적인 정신이다. 이 유대인의 꿈을 헬라화해서 영혼의 왕국을 만든 것은 헬라철학이 성경을 밀어낸 것이지 바른 발전은 아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꿈을 헬라인들의 꿈으로 바꾼 것이다.
성경의 메시아 왕국은 분명 정치적인 차원을 갖고 있고 세계 역사의 변화와 새로움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메시아가 영혼의 메시아이기 때문이 아니고 메시아 왕국이 도래하는 방법이 유대인들의 꿈과 달랐기 때 문이었다. 메시아 왕국은 분명 정치적인 차원을 갖고 있고 세계 역사의 변화와 새로움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종말의 선취적(Vorwegnahme) 사건이지 종말이 완성된 사건은 아니다. 유대인들의 꿈에 의하면 메시아가 도래하면 세상은 샬롬 (평화)의 세계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메시아가 왔는데도 악의 통치가 지속되고 있다면, 그는 메시아가 아닌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종말이 나타났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현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현재하고 있었지, 보편 역사의 형식은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분명히 하나님 나라의 현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보편 역사의 현실이 아니고,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선취적 사건이었다.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메시아이시다. 그의 나라는 정치적 차원을 내포하고 있고 세계 역사의 새로운 질서와 관련되어 있다. 그는 맹인, 귀머거리, 혈루병자, 나병환자들을 고친 육체의 메시아였다. 그는 인간의 개인적인 질병에서부터 사회 국가적 문제인 정의와 평화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구원하시는 진정한 메시아였다. 그런데 그의 메시아적 사역은 조금씩 역사 속에서 확장되어 나가고 있지, 이미 현존하고 있는 현실은 아니다. 몰트만에 의하면 교회가 바로 이 메시아적 사역을 계승해 나가야 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참으로 세상을 살려야 하고 세상을 기쁨의 세계로 만들어야 한다. 이 구원하고, 살리고, 기쁨의 세계로 만드는 메시아적 사역에 부름 받은 공동체가 교회인 것이다.
교회의 과제를 영혼의 영역으로 축소시키면 안된다. 몰트만의 메시아적 교회론은 세상의 악과 투쟁하는 교회를 지향하고 있고, 세상 속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교회를 지향하고 있다. 교회는 영혼이라는 사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과제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어 있다. 몰트만의 메시아적 신학은 영혼의 신학에 머물러 있던 전통적 신학의 패러다임을 근원적으로 바꾸는 신학이었다. 오늘날 신학은 영혼의 신학에 서 세상을 위한 신학으로 상당부분 변화를 겪고 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몰트만의 신학이 있었다.
3. 정치신학과 평화신학-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유럽의 정치신학 태동의 모체가 된 저술이었다. 1968년 등장한 가톨릭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J. B. Metz)의 『세상을 위한 신학』(Theologie zur Welt)은 유럽 정치신학의 태동을 알리는 중요한 저술인데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에 크게 영향을 받으면서 탄생했다. 몰트만과 메츠와 죌레(D.Solle)는 모두 유럽 정치신학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영혼의 기독교가 정치의 문제를 신학의 중요문제로 삼게 된 것은 몰트만 신학에 힘입은 바가 매우 크다. 1984년 출간된 몰트만의 『정치신학 정치윤리』(Politische Theologie Politische Ethik)는 동서 냉전이 극한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던 유럽대륙의 위기 상황에서 등장한 몰트만의 평화 신학이었다.
몰트만은 1980년대 유럽 평화운동의 신학적 지도자였고, 이 평화운동은 몰트만의 평화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몰트만의 평화신학은 산상수훈의 정신의 정치적 실천을 요구하는 신학인데, 이 신학적 요구는 유럽과 미국의 정치인들에게 큰 부담이 되는 요구였다. 몰트만은 산상수훈의 정신의 절정인 원수 사랑의 정신의 정치적 실천을 외쳤고 이 외침이 유럽 평화 운동의 정신이자 외침으로 발전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1990년의 독일의 평화 통일, 그리고 동서냉전 체제의 붕괴는 유럽의 평화신학과 평화운동과 깊은 관계가 있다. 몰트만의 정치신학과 평화신학은 유럽의 역사를 바꾸는 큰 흔적을 남겼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일부 미국의 보수 우파 사람들은 레이건(Reagan) 행정부의 동구권 압박 정책의 산물로 해석하는데, 이 해석은 매우 위험한 해석이다.
왜냐하면 레이건 행정부의 압박정책은 동서 양 진영의 군비 확산으로 이어졌고, 유럽이 몰락하고 세계가 몰락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당시의 유럽은 핵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위기 상황이었다. 베를린 장벽을 붕괴시킨 사람들은 동서 냉전을 극한적으로 몰고 갔던 정치인들이 아니고, 새로운 유럽을 갈망한 민중들이었다. 민중의 힘이 악한 정치인들을 몰아내고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것이다. 유럽의 평화신학과 평화운동은 동서 양 진영의 민중을 친구로 만들고, 하나로 묶는 위대한 촉매였다. ‘그들은 우리의 원수가 아니고 우리의 친구’라는 평화신학과 평화운동의 구호는 전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정치인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유럽을 만들었다. 사랑이 역사를 바꾼 것이지 전쟁 이데올로기가 역사를 바꾼 것이 아 니었다.
4. 공적 신학 .오늘날 세계에 공적신학(Public theology)의 열풍이 불고 있다. 이 공적 신학의 열풍은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독일에서도, 한국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오랫동안 기독교신학은 영혼의 문제를 다루었고 사적인 영역에 주로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왜 기독교신학이 사적인 영역에서 나와 공적인 영역으로 향해가고 있을까? 공적 신학의 맹아들은 20세기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R. Niebuhr)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는 미국의 공적신학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저술이다. 독일의 칼 슈미트(C. Schmitt)의 『정치신학』 (Politische Theologie Ⅰ,Ⅱ) 역시 독일의 공적신학 역사와 관련이 있다. 바르트의 ‘바르멘 신학 선언’(Barmer Theologische Erklarung) 역시 교회의 공적 책임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선언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의 공적신학의 본격적인 시작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희망의 신학』이 유럽의 정치신학을 태동시켰고 이내 평화신학으로 발전했고,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을 태동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의 공적신학이라 할 수 있는 민중 신학 역시 몰트만의 신학의 영향 속에서 발전했다. 미국의 공적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의 도전 속에서 발전했다. 마이클 노박(M. Novak)의 극우적 공적신학이나 스택 하우스 (M. Stackhouse)의 중도우파적 공적신학 모두 좌파적 성격의 해방신학과 대립하면서 이를 수정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발전했다. 미국의 공적신학은 몰트만이 언급한 교회의 공적책임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교회 개념에는 근본적으로 동의하는 신학이지만, 해방신학적인 좌파적 방향에는 매우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독일의 공적신학(Offentliche Theologie)에 매우 중요한 인물인 볼프강 후버(W. Huber) 역시 몰트만의 정치신학과 깊은 대화 속에서 자신의 공적 신학을 발전시켰다. 오늘의 공적신학이 몰트만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발전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되겠지만, 오늘의 공적신학 발전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신학자가 몰트만이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몰트만의 신학은 신학을 영혼의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교회를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끌 어내는 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신학이었다.
. 생명신학 -20세기 후반의 생명신학의 발전은 생태계의 파괴로 말미암은 지구의 위기 속에서 발전했다. 1983년 W.C.C.는 이미 창조 세계의 보전이 교회의 중요한 과제임을 인식했고,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개혁교회 총회는 창조의 보전(Integrity of Creation)을 총회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채택했다. 그런데 신학적으로 생명신학의 본격적인 발전은 1985년 몰트만이 출간한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Gott in der Schopfung)에서 이루어졌다. 몰트만의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은 종래의 인간 중심적 신학을 모든 피조물을 포괄하는 우주적 차원의 신학으로 신학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분수령이었다. 몰트만은 이 저술에서 피조물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임재에 대한 중요한 시각을 세계에 알렸고 창조 세계 전체의 구원과 완성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종국적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몰트만은 인권과 더불어 자연의 권리를 언급했고 그리스도 사역의 우주적 지평을 본격적으로 신학화했다. 1991년 출간된 몰트만의 『생명의 영』 (Der Geist des Lebens)은 그의 생명신학의 개요가 잘 드러난 중요한 저술이다. 몰트만은 이 저술에 ‘하나의 온전한 성령론’ (Eine ganzheitliche Pneumatologie)이라는 온 신학적 시각을 드러낸 부제를 붙였는데, 여기서 언급된 ‘온전한’ (ganzheitlich)이라는 형용사는 매우 중요하다.몰트만에 의하면 영혼의 중생과 성화에 초점이 있었던 전통적 성령론은 아직 ‘온전한’ 성령론이 아니다. 영혼의 깊은 곳, 곧 영혼의 순례의 꼭대기에서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가톨릭교회의 영성신학 역시 아직 ‘온전한’ 영성신학이 아니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은 생명의 영이시고, 불의와 폭력의 힘이 무너진 출애굽의 해방의 역사 속에서 경험되었고,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에서 경험되었다.
생명의 영은 병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치유의 영이고, 불의와 폭력에서 세상을 해방시키는 자유와 해방의 영이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 부활의 영이다. 몰트만은 『생명의 영』에서 하나님의 영의 ‘세히나’(Schechina)를 설명하면서 역사 속에 그리고 피조 세계 속에 강림하시며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언급했다. 하나님의 영은 역사를 살리고 피조세계를 살리는 메시아적 사역의 영이시다. 이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역사 속에만 계신 것이 아니고 모든 피조물 속에도 내주하신다. 몰트만에 의하면 이 생명의 영의 강림은 정의와 공의의 세계가 구현될 뿐만 아니라 황무지가 아름다운 땅으로 변하는 피조세계의 변화와도 깊이 결부되어 있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사 32:15). 하나님의 영의 강림은 모든 피조 세계의 새 창조를 지향하고 있다.
몰트만이 말하는 온전한 신학은 생명신학이다. 생명신학은 메시아적 신학을 의미하고, 정치, 사회, 역사의 변혁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의 새 창조를 지향하는 신학이다.하나님의 영의 강림의 목적은 인간과 세계 역사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피조세계에 깃드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사 55:12-13). 『희망의 신학』에서 시작한 몰트만의 세상을 위한 신학은 그의 생명 신학에서 절정을 맞고 있다. 몰트만의 생명 신학은 희망의 신학의 기본적 정신의 발전인 동시에 하나님의 영의 메시아적 사역이 모든 피조물로 확대된 신학이다.
결언 -몰트만의 신학은 신학역사의 크고 큰 분수령이다. 몰트만이 등장하기 이전의 신학과 몰트만이 등장한 이후의 신학은 분명히 큰 차이가 있다. 몰트만의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론의 역사에 큰 혁명을 일으켰고 헬라적으로 각인된 잘못된 신관을 고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입각한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몰트만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예정론과 신정론, 삼위일체론 및 그리스도의 두 본성론의 신학적 난제들을 그의 천재적 시각으로 해결했고 바른 방향으로 세계 신학의 길을 열었다. 또한 만유구원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지평을 열어 21c 세계 신학이 깊이 토의해야하는 새로운 신학적 과제를 남겼다.몰트만의 신학의 가장 큰 공헌은 『희망의 신학』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세계에 심은 것이다. 이 신학은 세상을 살리는 메시아적 신학의 시작으로 정치신학, 평화신학으로 발전했고, 마침내 생명신학 속에 찬란한 꽃을 피웠다.
이 신학은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및 라틴 아메리카 등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 거대한 흔적을 남기면서 세계 역사를 바꾸는 큰 기능을 했다.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운동, 인종차별 철폐와 평화 운동 그리고 환경의 생명을 위한 운동에 이르기까지 몰트만의 신학적 영향은 컸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새 역사와 한국의 민주화 속에는 몰트만의 신학적 영향은 뚜렷이 존재한다. 1964년 등장한 『희망의 신학』은 어두운 세계 역사 속에 희망을 심었고 마침내 이 희망이 역사의 현실로 드러나는 엄청난 기적을 일으켰다....[출처] 몰트만, 희망의 신학|작성자 SonK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