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플론(Hoplon)
최아영
자칫 넘어질 뻔하였다. 계단을 오르다 발치께에서 넉장거리를 놓고 있는 어떤 녀석을 만났다. 사뭇 고약스럽다. 저 때문에 위험했을 그 순간을 아는지 모르는지 딴청이다. 하긴 녀석 또한 적이 놀랐을지 그건 모를 일이다. 일순 야속함을 내려놓고 어디 다친 곳이 있나 없나 살펴보는 중이다. 좀 지쳐 보이긴 했으나 자칫 부러질 뻔했을 뼈라고는 하나 보이지 않았기에 다행하다 싶었다. 그런데 뼈마디 하나 없는 몸뚱어리가 진정 다행한 일이 맞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뭐 좀 도와줄 일이 있을까 싶어 살펴보는 중이다.
하나 결기에 가득 차있는 그를 내가 어쩌지는 못했다. 입은 옷이 투명해서라면 모를까 속살을 보고 만 내가 더 민망해졌다. 알몸으로 배밀이를 해가며 궁싯거리는 행보가 어쩐지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가야만 할 길이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또 어디로 갈 것인지. 내가 아는 종족들 중에는 그림책에서나 봄직 한 작고 깊은 동굴 하나씩 등허리께 어디에 꿰찬 것들도 있던데 이분께서는 달랐다. 그렇다면 이 분이 그 분인 걸까. ‘풍찬노숙도 마다않을 포복정진이 마치 해탈한 성자’ 같다고 했던 ㅊ 수필가의 바로 그 홈리스 민달팽이 말이다. 그들 종족은 본디 느리고 굼떠 공격도 방어도 그 무엇과도 친화가 이루어질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애최 경쟁을 포기한 생물체로 보인다. 오죽하면 해탈한 성자 같다 했을까.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피를 부르지 않고도 칼날 위를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와우, 정말 놀랍다.
사력을 다해 옴찔거리는 그를 내려다보니 수일 전 건물 외벽에 대고 살충제를 뿌려댄 일이 문득 생각났다. 하지만 별일 있으랴 싶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굳이 살아 꿈틀거리는 미물에 익숙하지 않아서라는 구차한 변명을 남겨 두고서 말이다. 한두 시간이나 지났을까 혹시 모를 그의 생사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걱정될 바에는 눈을 질끈 감고 긴 작대기를 이용해서라도 피신시켜주었어야만 옳았다. 만약 어찌되기라도 했다면 곡비哭婢가 되어 생명애호가 코스프레라도 할 심산이었던가. 참 못났다. 다행히 제갈 길을 가긴 간 모양이었다. 지르르한 듯 번득이는 족적이 암울했던 그 시절 울다 지쳐 말라버린 내 눈물자국 같았다. 길을 잃었을 때 내게 마음 써 주었던 분들이 하필 그때 떠올라 잠시 울컥하였다.
홈리스였던 적이 있었다. 선善도 잘못 베풀면 나락으로 떨어지기 쉬운 법, 빚잔치를 해야 했고 지켜오던 많은 소중한 것들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벼랑 끝 간 곳에서도 자존감을 상실하지 않을 용기와 배짱을 가졌다면 그는 천생 도인이었거나 그리 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나 세월은 내게 끊임없이 일러주었다. 삶은 누구에게나 위험한 것이고 공평한 것이라고.
집이 없다는 말이 내게는 어쩐지 영혼이 머물 공간이 없다는 말로도 들린다. 세상의 많은 홈리스들도 그들만의 방패 하나쯤은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호플론(Hoplon) 과 같은. 기원전480년경 스파르타 용병들의 강렬한 전투정신에 초강국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조차도 움찔했다고 전한다. 2.5m나 되는 기다란 창과 옆구리에 찬 단검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름이 1m에 가까운 호플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일이다. 하늘이 시커멀 정도로 쏟아지는 적진의 화살비로부터 수많은 용병들을 보호해 주었던 호플론이 아니었던가. 생뚱맞게도 나는 안전장치 하나 없는 홈리스 민달팽이를 보면서 한뎃잠을 자며 고단했던 그 삶을 기억하게 되었고 그때 나를 꿋꿋이 지켜주었던 마음 속 호플론을 떠올리게 되었다. “부지런한 자에게 세상은 침묵하지 않는다.”했던 선인의 말씀대로 운명 또한 나를 결코 배신하지 않았다. 무너지고 싶을 때마다 곧추 세워 주었던 나만의 호플론, 그것은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상용구처럼 희망을 잃지 않고 난관을 극복해 나가면 반드시 밝은 날이 오고야말 것이라는.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교과서도 호플론도.
언젠가 남해를 여행하던 중 예사롭지 않은 달팽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 바람개비가 빙글빙글 춤을 추고 있던 숲속 바람흔적미술관이라는 곳에서 백설 공주와 신데렐라로, 슈퍼파워 우먼으로 거듭나 있었다. 달팽이의 화려한 변신을 도운 K작가의 붓끝에는 왠지 들꽃향이 묻어날 것만 같았다. 옴파로스를 향한 신비의 안테나, 가녀린 촉수와 교감을 나누며 꽤 오랫동안 행복해했던 기억이다.
무채색 줄무늬에 파스텔 톤을 입혀 무지개를 쏘아올린 화가가 있었듯이 내게도 그런 사랑 하나있었다. 눈을 뜨게 하고 면류관을 씌워준 사람, 속살을 가려주고 방패가 되어준 사람, 바로 당신, 나 또한 한번쯤은 누군가의 호플론이기를 기도한다.
첫댓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의 호플론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에 잠기게 하네요.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호플론을 가지고, 누군가에게도 호플론이기를 기도하는 최아영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민달팽이를 보고 호플론까지 이끌어낸 작가의 참신한 발상이 좋습니다. 비록 집도 없는 민달팽이지만 야생에서 살아갈수있는 것은 그들을 지켜주는 호플론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민달팽이를 보고 호플론을 생각하는 개연성
누군가의 호플론으로 내가 회생했듯 누군가의 호플론이 되고 싶다는
따뜻한 작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