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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60
7월18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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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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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GTAq-ynwZ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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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의 악행에 대한 하느님의 단죄와 심판, 그리고 회복과 구원!>
미카 예언서는 12 소예언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소 예언서의 예언자라고 해서 이사야나 예레미야처럼 대 예언서의 예언자들보다 덜 중요하거나 덜 위대하다는 것을 결코 아닙니다.
소예언서란 칭호는 예언서의 길이가 짧다는 것 이상의 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열두 소 예언자들의 활동 시기는 기원전 8세기부터 5세기 사이 300여년간입니다.
미카 예언자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5킬로미터 떨어진 모레셋이라는 시골 출신 예언자였습니다. 남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로 유다 임금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에 걸쳐 활동했습니다.
미카 예언자는 시골 출신 예언자답게 서민 편에서, 서민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활동 장소도 왕궁이나 성전보다는 서민들이 많이 왕래하는 시장이나 도심 거리였습니다.
미카 예언자의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힘과 권위를 향유했던 예루살렘의 고관대작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지배 세력들이 주님께서 세워주신 규정들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사욕만을 추구하고 있다면서 그들의 악행을 신랄하게 고발했습니다.
미카 예언자는 왕과 지도자들이 가난한 백성들을 재물로 삼아 그들의 피로 예루살렘을 세우고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예언자들과 사제들은 자신의 직분을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삼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악행들과 죄악들은 주로 고대 근동의 주변 민족들이 채택한 왕정 제도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의 절대 군주들은 자신을 신격화하거나 자신이 왕으로 선택된 것을 주님의 뜻으로 돌리면서, 자신에게 부여된 왕권을 특권으로 여겼을 뿐, 봉사나 섬김의 직무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왕을 비롯한 주변 소수 특권층을 위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고, 그 정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이집트에서의 강제 노역에서 해방되면서 ‘이제는 삶이 좀 나아지겠지?’ 기대했었는데, 웬걸!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나서, 왕정 제도가 자리잡으면서 그 정도는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임금들은 앞다투어 자신의 임기내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짓기 위해 발버둥쳤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봉헌하고 경신례를 성대하게 봉헌하기만 하면 주님의 축복이 자동적으로 뒤따르리라 착각했습니다. 고대 근동의 풍산신(豐産神)들은 왕정 제도의 폐습을 정당화시켰습니다. 이런 그릇된 풍조를 거슬러 미카 예언자는 외친 것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평등과 정의입니다. 여러분들이 끝끝내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의 진노를 피할 길 없을 것입니다. 악행과 오만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지난 악행을 크게 뉘우치고 지금이라도 주님께로 돌아선다면, 그분께서는 여러분들을 죽음의 어둠 속에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이 족속을 거슬러 재앙을 내리려고 하니, 너희는 거기에서, 목을 빼내지 못하고, 으스대며 걷지도 못하리라. 재앙의 때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너희는 사람들이 너희를 두고서, 조롱의 노래를 부르고, 너희는 서럽게 애가를 읆으리라.”(미카 2장 3~4절)
미카 예언서를 읽고 묵상하다보니 하나의 사이클이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악행에 대한 하느님의 단죄와 심판, 그리고 회복과 구원! 주님께서는 공정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비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악인의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반드시 따지시지만, 결국 인간이 회개하고 당신께로 돌아와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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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옳은 말만 하는데 재수 없는 사람>
(유튜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TF_0uriC1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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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로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극도의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 용기를 드리려 해도, “당신이 나처럼 죽음 직전에 있나요?”, “당신이 나처럼 가난하나요?”, “당신이 나처럼 자녀를 잃어 보셨나요?”라고 말할 것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때조차 “그래도 용기를 내셔야죠!”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분들에게 재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말은 ‘끌어 올리는 말’이 있고 ‘밀어 올리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끌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밀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듀크 신학대학교에서 만난 앤지와 퍼시라는 커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해 말하다가 퍼시가 앤지에게 대학교 때부터 좋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앤지가 퍼시에게 “그러면 당신의 이웃은 누구야?”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후 몇 주간 퍼시에게서 앤지의 질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앤지와 퍼시는 아파트를 떠나 리치몬드 처치 힐 중심가에 있는 오래된 도심지로 이사했습니다. 처치 힐은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쇠퇴한 소위 할렘가였고 흑인들만 거주했으며 많은 이들이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하는 삶을 사는 그야말로 비참한 곳이었습니다.
퍼시와 앤지는 먼저 어린이들에게 다가갔습니다. 퍼시는 농구공을 들고 아이들에게 농구를 시작했고 아이들과 어른들의 이름을 외웠습니다. 조금씩 처치 힐 사람들은 그를 친구로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백인들처럼 그들을 범죄자로 보지 않고 이웃으로 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네 아이들은 퍼시의 뒤를 따라왔고, 퍼시와 앤지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고 비디오 게임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은 15명이나 퍼시의 귀가를 기다리며 문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은 퍼시와 앤지가 자신들의 숙제를 도와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퍼시와 앤지는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는 것이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믿고 집을 개방하여 아이들이 원할 땐 언제든지 그 집에 올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에게 파티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지역 주민들은 퍼시와 앤지를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백인 커플이 자신들의 동네에 들어와서 아이들에게 헛된 꿈을 심어주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 아이의 엄마는 퍼시를 자신들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사복경찰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러나 퍼시와 앤지는 굽히지 않고 자원봉사자까지 구해 더 많은 아이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2002년 CHAT이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CHAT은 상주직원 45명과 자원봉사자 수백 명, 운영예산 25억 원의 기관으로 성장했고 지난 13년 동안 아이들 공부방을 시작으로 처치 힐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참조: ‘유쾌함의 기술’, 앤서니 T. 디베네뎃, 유튜브 ‘책한민국’]
앤지와 퍼시는 소위 사회적 ‘루저’(Looser)가 되어버린 동네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고 있던 백인사회에 속해있으며 그들에게 설교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신들도 우리 백인들의 도시처럼 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세요.”
그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재수 없어!”
퍼시와 앤지 커플은 말은 자신의 위치에 따라 용기를 줄 수도, 재수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높은 위치에서 마치 밧줄을 내려주며 잡고 올라오라고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아래로 내려가 자신의 등을 밟고 올라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위에서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밑에서 하는 말은 힘과 희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부류의 말씀이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없애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그들의 박해에 대해 “감히 하늘의 왕에게 이런 대접을?” 하며 분개하지 않으셨습니다. 숨고 숨어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박해받는 분이 되셨습니다. 분명 올바름을 선포하셨지만, 그 말씀은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말이 아닌, 사람들을 떠받쳐 올려주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말씀은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저는 말을 많이 하므로 재수 없는 잔소리만 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핍박을 받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어떤 분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패치 아담스’(1998)는 의대의 엄격한 규율을 깨고 환자들의 눈높이를 맞춰 그들에게 웃음을 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결국 자신의 이상에 꼭 맞는 병원을 설립한 헌터 아담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아이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하지 않고 웃음을 주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여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나의 말이 잔소리가 되지 않고 누군가에게 힘이 되려면 내 목소리가 그들의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들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그들보다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말에 힘은 그 내용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위치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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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2,14-21 : 하느님께서 택하신 종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신다. 바리사이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의 손을 다른 손처럼 건강하게 해 주신 것을 보고 어떻게 예수님을 없앨까 모의를 했다고 한다. 악한 일을 모의하는 사람들은 빛을, 바른 길을, 생명을, 보물을, 진주를, 사랑 그 자체와 평화를 없앨 모의를 한다. 이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으로 물러가셨다고 한다.
그분이 물러가신 것은 그들의 모의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고쳐주시며 악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고쳐주시며,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셨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은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자랑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 즉 당신을 자랑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이어서 이사 42,1-4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어리석은 지도자들로부터 조용히 물러나신다. 그들 안에 있는 “부러진 갈대”나 “연기 나는 심지”와 같은 연약한 모습이라도 파멸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뜻이다. 그들이 언제나 당신께로 회개할 수 있도록 끈기 있게 참아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도록 하라고 하신 분이다. 우리 자신도 그렇게 참아주시는 분이다. 이로써 모든 민족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3) 이 말씀은 이것들을 쉽게 하실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온유함을 뜻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참아주실 수 있는가? 이는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참아주셨듯이, 그분의 구원업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이사야는 이것을 “그는 정의를 승리로 이끌리라.”(이사 42,3)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그의 이름을 신뢰하게 되리라.”(이사 42,4)
“정의를 승리로 이끌리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다 이루시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심판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때에는 터무니없고 모순되는 논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그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섭리는 믿지 않는 이들을 심판하는 데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위한 것이므로 “다른 민족들이 그의 이름을 신뢰하게 되리라.”(이사 42,4)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18절)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분은 당신을 사랑하시는 분의 뜻에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언제나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라는 선언을 주님께로부터 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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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이미 유다교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마음먹습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죽음을 넘어선 부활은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예언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고, 사람들은 그것에 희망을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 가운데에 오셔서 평화로운 방법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복음은 예수님의 활동을 통하여 더욱 잘 드러납니다.
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계셨고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분의 업적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자이고 희망이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거짓말쟁이이며 신을 모독하고 군중을 선동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그 말씀은 기쁜 소식이었지만, 들으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그 말씀은 그저 지나가는 말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하늘 나라를 드러내는 표징이었지만 말씀을 듣지 않는 이들에게는 선동일 뿐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은 이들의 결단입니다. 그렇기에 믿는 이들은 말씀을 통하여 위로를 받고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이미 우리는 결단을 통하여 믿음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분명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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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악의 현실은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나온다고 교회는 가르쳐 왔습니다. 하느님의 완전함은 악의 실재와 어울리지 않지만, 인간이 겪는 세상 속의 죄와 죽음 때문에 우리는 악을 생생한 현실로 느낍니다.
미카 예언자는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이 “하느님은 벌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없다!”라고 스스로를 기만하며, 세속에서 악과 타협하여 얻은 능력으로 약탈과 기만을 일삼으며, 불공정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지만, 언젠가 이 불의한 현실을 치유해 줄 메시아가 나타날 것을 기다립니다.
율법과 계명을 무기로 사람들과 차별된 인생을 산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걸림돌이었습니다.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시며, 사회적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병들고 소외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없애 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악에 타협하는 이들로 말미암아 십자가라는 운명의 길을 가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은 자기 탓 없이 율법의 굴레에 갇혀 살지만, 메시아의 도래를 희망하는 성경의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위한 대속의 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선택된 종, 그분께서 사랑하시고 그분 마음에 드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않으시고 당신의 방식이 아닌 아버지의 방식으로 인류의 십자가를 짊어지십니다.
인류는 그분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었고, 희망을 얻었습니다.사람들은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무엇이 바뀌었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고백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 너머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음을. 세상 것이 전부인 듯 악과 타협하는 이들이 결코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을 피해 갈 수 없으며, 결국 의인이 살고, 선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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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접속’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의 속도가 빠르지만 그때는 동영상을 볼 수 없었고, 음악을 다운 받는 것도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당시에는 천리안, 유니텔, 나우누리, 하이텔과 같은 접속의 창구가 있었습니다. 이런 창구를 통해서 동창을 만나고, 취미가 같은 사람이 만나고, 나이가 같은 사람이 만나고, 종교가 같은 사람이 만나고, 직업이 같은 사람이 만났습니다. 주인공들은 컴퓨터를 통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주인공들은 가상의 공간에서 만나다가 현실의 공간에서 만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났습니다.
당시에 저도 천리안이라는 통신을 이용해서 가톨릭 동아리에 참여했었습니다. 지금은 페이스북, 트위터, 카톡, 텔레그램과 같이 전 세계의 모든 이들과 연결이 되는 접속의 창구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접속’의 일상화인 것 같습니다. 자동차도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운전하기가 수월해졌습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이용해서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코로나19와 같은 상황에서는 영상으로 미사를 볼 수도 있습니다. 미주지역의 사제 모임도 화상으로 했습니다. 접속하기만 하면 서부에 있는 사제도, 남부에 있는 사제도, 동부에 있는 사제도 쉽게 얼굴을 볼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접속에는 부정적인 요인도 있습니다. 해킹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도 핸드폰이 해킹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번호로 광고 문자가 대량으로 발송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항의 전화를 받아야 했고, 본의 아니게 사과를 해야 했다고 합니다.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심어지기도 합니다. 원하지 않는 광고를 봐야하고, 잘못하면 금전적인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던 보이스 피싱도 있습니다. 저도 보이스 피싱에 속을 뻔했습니다. 다행히 마지막 단계에서 눈치를 챘습니다. 아이들이 게임에 접속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감당할 수 없는 요금이 청구되기도 합니다. 접속의 시대를 피할 수 없다면, 지혜로운 접속, 슬기로운 접속을 하면 좋겠습니다. 찾아보면 영적으로 도움이 되는 곳이 많습니다. 가톨릭 굿뉴스도 신앙에 도움이 되는 접속 창구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이끌어 주었던 ‘헨리 나웬’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고, 많은 보수와 명예가 보장되는 교수직을 제안 받았지만 장애인들을 위한 공동체로 가셔서 장애인들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사람들이 신부님께 어째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직을 포기하시고,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신부님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제가 높은 곳을 찾고 높은 곳에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낮은 곳을 향해 내려오니까 더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들은 어쩌면 엉뚱한 곳에서 진리의 보물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작은 마트에서 일하는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 역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제가 장사를 잘하고, 돈을 많이 벌었을 때는 하느님을 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이 힘들어지고 부도가 나니까, 사람들을 미워하고 자신을 원망하면서 오히려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물질적으로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마음이 더 편안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도하니까 미웠던 사람도 용서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권력을 향해서 날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욕망을 향해서 날아가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 미가 예언자도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악을 일삼는 자들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결코 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눈앞에 있어도, 진리와 정의가 눈앞에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보였고, 그들은 주님과 함께하는 참된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 기도로 접속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재앙과 재난을 보시고, 손수 나서시려 살피고 계시나이다. 힘없는 이가 당신께 몸을 맡기고, 당신은 친히 고아를 돌보시나이다.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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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박상병 루도비코 신부님]
<고요함과 소란스러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그래서 그날이 안식일이어도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면 서슴지 않으시고 당신의 일을 하신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눈엣가시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단순한 불평과 불만으로 끝나지 않고, 일을 확대시켜 논쟁과 논란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논쟁과 논란의 특징은 소란스러움이다.
물론 참된 발전을 위해서는 소란스러움이 늘 동반되지만, 그것이 참된 발전이 되려면 소란스러움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의견 충돌도 겪고,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을 때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느끼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과정에서 외적으로 내적으로 소란스러움을 겪게 된다. 이 소란스러움은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고,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마저 무너뜨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길은 소란스럽지 않고 고요히 나아간다. 그 결정적인 모습이 빌라도와의 대화에서 볼 수 있는 침묵이다. 침묵은 비겁함으로 드러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침묵은 그 어떤 훌륭한 연설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
나를 죽이려는 모함과 위협 속에서 당당히 올바름의 길을 가려 할 때, 억울함과 실망감으로 고요가 파괴될 때가 있다.
악을 선으로 대하고 싶으나, 내적인 에너지가 부족할 때 선이 아닌 악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하느님의 영만이 고요를 지키게 해주고, 깨어진 고요함을 되살려 준다. 올바름은 고요 속에서 들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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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골롬반외방선교회 김종근 도밍고 신부님]
<이방인들의 교회>
세계의 모든 국가나 민족 안에서 공통적으로 성대하게 지내는 중요한 행사가 있다면 그것은 곧 결혼식과 장례식일 것이다.
그런데 칠레 원주민인 마푸체 부족에게는 결혼식이 그리 큰 행사가 아니다. 물론 결혼의 중요성을 가벼이 여겨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결혼‘식’ 없이 어물쩍 그냥 같이 살림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열 번 결혼식 주례를 하면 처녀 총각의 결혼식을 주례하기란 한 번, 잘해야 두 번 정도다. 대부분은 이미 두세 명의 아이들이 있는 부부들이다. 게다가 손자·손녀까지 있는 이들도 열에 두세 쌍은 된다.
상황이 이러하니 각 마을을 돌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는 미사의 영성체 시간이 되면 좀 난감하다. 이미 세례는 받았지만 혼인성사 없이 자녀를 둔 부부의 경우는 차라리 양호한 편이다. 이러다 보니 교회법으로 따지자면 ‘간음한’ 이들이 공소에 수두룩하다.
이들 대부분은 영성체하기를 원한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어떡하란 말인가? 그래서 그냥 눈 딱 감고 성체를 준다. 언젠가는 눈뜨고 할 날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세례를 받지 않은 이들도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이고, 다른 문화를 가진 이들 역시 하느님이 주재하는 인류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교회법에 짜증이 난다.
사랑의 실천보다는 조직 보호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듯한 교회법의 한계가 안타까운 것이다. 교회가 ‘순진한’ 이들에게만 강요하고 큰소리치는 모습이 싫은 것이다.
세례를 통해 일단 우리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서 보자고 하는 편협에서 벗어나 사회 전체, 온 세상에 열려 있는 교회가 될 수는 없을까? 이방인들이 희망을 거는 교회, 이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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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좋은 관계 나쁜 관계가 있을 뿐이다.” 사람 자체의 질이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는 것이지요.언젠가 어떤 분으로부터 다른 누군가에 대한 비난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참 나쁜 사람이다.”라고 단정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난하는 대상은 제가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이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과 너무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저와의 관계 안에서는 아주 좋은 사람입니다.
관계를 맺지 않으면서 살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복잡한 것이 싫다며, 상처받기 싫다면서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또 관계를 맺지 않아도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큰 착각입니다. 이 관계의 단절을 통해 ‘좋은 사람’ 한 명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먼저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따지기 전에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나부터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관계를 만들지 못하면서 세상과도 단절되게 되고, 결국 주님과도 단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들어지는 것은 ‘나’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그 비결은 사랑하는 이, 그리고 내 마음에 드는 이로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투지도 또 소리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셨습니다. 그 결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주님께서 우리와도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요?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모습을 따르면 됩니다. 주님의 사랑하는 이로 또 마음에 드는 이로 살면 됩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면서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관계를 생각하기보다 내가 얻어야 할 것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얻는 것이 있어야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내가 얻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관계에 있을 때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그 관계에서 희망이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어떤 것 같습니까? 절대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지금 후회하고 있는 것은 함께하고 있지 않아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어떠어떠하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할 때, 그것은 실제 현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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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세계의 유명 대학에서 ‘행복학’ 강의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 강의에는 많은 학생이 수강해서 듣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행복에 관한 연구를 정리해보면, 행복의 비결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 행복은 우연히 얻는 행운이 아니라 훈련과 습관으로 얻을 수 있는 삶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운동하기, TV 안 보기, 감사 편지 쓰기 등, 자신의 생활 습관을 바꿔서 행복해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영국 BBC 방송에서 행복 실험을 통해 ‘연습할수록 느는 것, 행복은 삶의 습관’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둘째, 행복은 삶에서 만나는 고통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즐거움만을 추구할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스러운 것을 피하지 않고 제대로 받아들일 때 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행복은 사람의 훈련과 성장의 결과로 누리는 것이지, 뜻밖의 행운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행복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며 성장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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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종>
-예수님처럼 한결같이 삽시다-
“주님의 사랑 우리 위에 굳건하시고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시편117,2)
아침 시편성무일도시 마음에 와닿은 구절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갈 때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참나의 참사람에 참행복입니다. 제가 요즘 참 행복한 일은 예수님과 함께 형제자매들 사진을 찍어 당사자에게 전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진 찍고 은혜받으세요” 권고와 더불어 집무실에 면담차 들리는 대부분 분들에게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한결같이 걸려있는 ’십자가의 예수님’ 아래 서게 한 다음 ‘사랑의 사진사’가 되어 사진을 찍어 드립니다.
아주 예전 교대시절 친구가 교장으로 마지막으로 봉직했던 서울교대 부국 조그만 동산에 묘비석 비슷한 돌판에 새겨진 “한결같이”란 글자가 눈에 선합니다. 평생 많은 이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으며 한결같이 살아 온 삶임이 분명합니다. 우리 분도회 정주서원 역시 초지일관, 시종여일의 한결같은 삶을 목표로합니다. 바로 이런 삶이 가장 확실한 구원의 표지입니다. 얼마 전 써놓은 글이 생각납니다.
-“수십]년
평생을 함께 살아왔어도
덥든 춥든 흐리든 맑든 비오든 눈오든
일희일비一喜一悲
하는 적 한 번도 본 적 없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늘 한결같다
불암산!
주님의 종 예수님이 그러하셨다
나도 그렇다”-
늘 거기 그 자리 변화무쌍한 하늘 배경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불암산은 정주의 표상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일이 평범한 일상에 한결같이 성실한 정주의 삶입니다. 이런 삶자체가 이웃에겐 위로와 평화, 치유의 구원이 됩니다. 바로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셨습니다. 참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는 늘 적대자들의 사면초가의 위험속에 지내셨지만 한결같이 주님의 종으로서 그 사명에 충실하셨습니다.
정면 대결을 피하시고 잠시 물러나 기도로 충전하신후 지혜로이 제 길을 가시곤 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한결같은 모습에서 제자들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일 뿐 아니라 주님의 종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 한결같은 삶입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18-21)
그대로 예수님의 한곁같은 삶에 대한 묘사입니다. 결코 일희일비함이 없이 주어진 평범한 일상에 한결같이 조용히 소리없이 충실하신 모습입니다. 배려와 존중, 겸손과 지혜, 고요와 침착, 연민과 인내의 주님의 종 예수님의 한결같은 모습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참으로 이런 한결같은 삶이 있기까지 성령의 은총은 물론 얼마나 항구한 노력이 있었겠는지요. 무엇보다 간절하고 절실한 끊임없는 기도의 수행입니다. 저절로 주님의 종이 아니라 이런 한결같은 기도의 삶중에 주님과 깊어지는 일치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한결같은 주님의 종, 예수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이런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가 됩니다. 언제나 이런 예수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가능한 한결같은 성실과 진실, 절실의 삼실의 정주의 삶입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이런 궁극의 희망이신 주님을 잊을 때, 잃을 때 무지의 어둠, 절망의 어둠에 휘말립니다. 희망의 빛이 사라지면 절망과 허무의 어둠입니다. 탐진치貪瞋癡의 무지의 삶에 자기를 잃습니다. 바로 미카 예언자기 개탄하는 현실이 됩니다. 예나 이제나 계속되는 불의와 탐욕의 악순환입니다. 미카 예언자의 절규와 같은 다음 말씀은 저주가 아니라 회개의 촉구입니다.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 마자 실행에 옮긴다.”
‘행복하여라’라는 행복 선언과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필귀정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어김없이 재앙을 선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즉각적인 회개로 불의의 삶에서, 무지와 탐욕의 어리석은 삶에서 탈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무엇보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을 통해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주님의 빛속에 사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알려준 주님의 종 예수님처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과 함께 평범한 일상에 한결같이 충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한결같은 정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나무랄 데 없는 순결한 사람이 되어 이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에서 하느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빛을 내십시오.”(필립2,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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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복을 받기 때문에 좋은 일을 끊임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미움을 사기도 합니다. 아무리 어진 사람도 미워하는 무리가 있는 법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도 선망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견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봄비가 기름 같지만 행인은 그 진창길을 싫어하고 가을 달은 밝고 아름답지만 도둑은 그 밝게 비추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싫어하고 시기질투하며 심지어 미워합니다. 봄비처럼 꼭 필요한 것일지라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병을 고쳐주시며 당신의 소명에 충실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를 모의 하였습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봐 주면 좋으련마는 눈엣가시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사람, 사촌이 땅을 사면 배를 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대에 대응하지 않으시고 한 발 물러서는 지혜와 인내를 보여주셨습니다. 막무가내로 대드는 사람에게는 한 숨 쉬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며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용수철을 누르듯 참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니라 벼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품으셨습니다. 다투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손길로 버림을 받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상처 받은 사람들을 치유 시켜 주시고 낙담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시며 구원해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주면서도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공을 감추시고 결코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철저히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구원사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좋은 일을 해 놓고는 생색을 내다가 그 공을 다 잃고 맙니다. 선한 지향을 갖다가도 이내 시기와 질투심에 그 좋은 뜻을 놓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6,1)고 하셨건만 그 말씀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서로 기도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나의 능력을 자랑하고 싶을 때 침묵의 가치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어딘가 상하고 깨져서 할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되어지는 이들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공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마더 데레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시작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세상,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소리는 영혼의 울림으로 들려옵니다. 그래서 거리에서는 하느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청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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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어떤 일을 하는데 시간이 걸리면 게을러서이고, 내가 시간이 걸리면 철두철미하기 때문이다.
남이 일을 하지 않으면 게을러서이고, 나는 바뻐서이다.
누가 하라하지 않는데 하면 월권이고, 나는 진취의 기상이 있어서이다.
남이 강력한 주장을 하면 그 사람은 고집스러운 것이고, 나의 경우는 단호한 의견발표이다.”
그야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스캔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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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인간의 지도자들과 예수님과의 대비가 두드러집니다.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사회적 불의에 대한 주님의 노여움을 날 선 언어로 전달합니다.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미카 2,1-2)
이스라엘은 왕정이 들어서면서 차츰 계급적 구조가 선명해집니다. 야곱의 열두 형제에서 출발한 형제적이고 동맹적인 질서는 왕궁을 둘러싼 권력과 기득권, 재산에 따른 서열로 재편되지요. 그 과정에서 빈부의 차가 심해지고, 소위 부유층 지도자들은 약한 이를 착취하고 억압하여 가진 것을 더 불려나갑니다. 주님은 미카 예언자를 통해 이를 격렬히 비난하시지요.
우리는 복음에서 완전히 다른 모습의 지도자, 메시아를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마태 12,15)
예수님을 없애자고 모의가 시작되자 예수님께서 조용히 물러나십니다. 아직 그분의 때가 아닌 까닭이지요. 그런데 많은 군중이 굳이 물러나시는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은 왜 원래의 기득권 세력인 바리사이나 최고의회 구성원을 추종하지 않고 힘 없이 피하시는 예수님을 따를까요? 자칫 줄을 잘못 서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바로 예수님이 이런 분이시기에 힘 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 진리를 갈망하는 이들이 그분께 모여드는 것입니다. 제도적 정식 계보나 연줄도 없고 요란한 제스춰나 인기영합적 마케팅도 할 줄 모르는 분이지만, 가난과 연약함과 부족함을 포용하고 일으켜 주시는 분이기에 군중은 예수님께 끌립니다.
군중은 권력자나 부자들에게는 의무를 이행할지 모르지만, 예수님께는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드립니다. 인생사 산전수전 겪다보니 저 위에서 떵떵거리고 큰소리치는 이들에게 더는 희망을 걸 수 없다는 걸, 아프게 당하면서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군중은 그렇게 거두어들인 믿음과 희망을 새로 등장한 가난뱅이 설교가에게 쏟으며 간청하고 매달립니다. 그러니 외적으로는 권력자와 부자가 구원자처럼 보이지만 실상 민중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그들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이는 예수님이시지요. 바로 진정한 메시아십니다.
사회 계층 간의 격차는 오늘날이나 그 옛날 성경의 시대나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겠습니다. 세상에서 가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착취해 부를 축적하는 기득권 세력 또한 함께 이어질 겁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이 더 무게감을 가지고 다가오십니다.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복음 환호송)
먼저 우리 사이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상급자와 하급자, 남성과 여성,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등의 구분이 없어져야 합니다. 구분은 대립과 분열을 야기해 결국 서로 적대하는 문화를 만들고야 말지요. 그건 분명 악의 짓입니다.
우리 모두가 생명을 부여받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 하느님 모상으로 지음받은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반해 타인을 대하며 살아간다면 온갖 차별과 착취, 혐오, 무시 등의 악마적 자취는 우리 사이에 발을 들이밀 수 없을 겁니다. 우리가 서로를 조심히 대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마태 12,19)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에게서 배웁시다. 그분의 온유함, 평화, 자비, 인내는, 거친 고함이나 자극적 공격, 조롱과 비난 따위는 상상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조심스레 마음을 다해 미소하고 약하고 가난한 이를 돌보고 보호하시는 주님과 함께 우리도 서로를 포용하고 지켜주면서 함께 성장할 것입니다.
세속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이미 예수님의 온화하고 자애로운 사랑의 길을 걷고 있는 벗님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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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부활의 희망은 그리스도교적인 믿음의 핵심이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에 대한 희망을 그리스도교적인 믿음의 핵심으로 본다. “우리가 만일 이승에서만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야말로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가련할 것입니다.”(1코린 15,19)
그리스도교적인 믿음은 현생에서 그리스도께 희망을 거는 것, 즉 그리스도께서 나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좌절할 때 나를 일으켜 세우시리라고
신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 희망은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셔서 하느님의 영광으로 인도하실 그리스도를 지향한다. 죽음 앞에서도 굳건한 희망만이 진정으로 우리를 지탱할 수 있다. 예수의 부활은 환난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자신의 죽음 등 어떤 무엇으로도 파괴될 수 없는 우리 희망의 근거이다.
-안젤름 그륀, 「희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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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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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병자를 낫게 하신 일에 대한 바리사이들과 군중들의 반응에 대하여 취하신 두 가지 처신을 들려줍니다. 한편으로는 당신을 죽이려고 모의를 꾸미는 바리사이들을 피하고, 또 한편으로는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을 고쳐 주시면서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곧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과 측은히 여기며 자비롭고 신실하신 모습입니다.
이 사실에서, 마태오복음사가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봅니다. 곧 예언자 이사야는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위의 두 가지를 메시아의 특징으로 말해줍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마태 12,19-20)
이 말씀을 들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의 돌보심과 신실하심과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저 자신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사실, 저는 죄 있는 형제들에게 손을 뻗어 위로하기보다, 돌팔매질하기를 자주 했습니다. 형제의 짐을 져주기보다, 오히려 더 큰 짐을 얹어 짓눌렀습니다. 약한 형제를 못 본 척 홀로 두고서, 제 길을 가기에 바빴습니다. 형제를 존중하기보다 하찮게 여기며, 마치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렇게 저는 기 꺾인 이들을 짓밟고, 부러진 갈대는 꺾어버리고, 연기 나는 심지는 꺼버리기를 거리낌 없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제가 넘어지고 부러져 있을 때도, 저를 꺾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저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당신을 배신하고 거부할 때마저도, 결코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 영혼이 병들어 말라 갈 때 오히려 저를 택하여,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당신의 영을 부으시고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결코 제게서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저를 따라다니며 뒤를 처리해주셨습니다.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으로 돌보아주셨습니다. 참으로 선하시고 자비하신 모습으로 신실하셨습니다. 그토록 신실하신 사랑, 그 지치지 않는 사랑과 연민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진정, 주님께서는 제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저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배신하고 또 배신하며 거부할 때에도, 결코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부러진 갈대를 꺾어버리지 않으시고,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결코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저를 따라다니며 뒤를 처리해주시고, 신실하심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제 영혼이 병들어 말라 갈 때, 오히려 저를 택하시어,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는 제 갈 길을 가느라 약한 이를 홀로 두지 않게 하소서.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우고, 짐 진 이를 위로하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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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마태 12,20)
주님!
당신은 제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저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을 배신하고 또 배신하며 거부할 때에도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부러진 갈대를 꺾어버리지 않으시고,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도망질쳐도 언제나 동행하시고 제 영혼이 병들어 말라갈 때, 오히려 저를 택하시어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이제는 제 갈 길을 가느라 약한 이를 홀로 두지 않게 하소서.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우고 짐 진 이를 위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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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DbHXoE9vGw&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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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 21)
우리가
희망해야 할
희망이 여기에
있습니다.
유일한 희망이
우리를 살립니다.
가장 힘든 때
가장 절박한
희망을 만납니다.
희망은
모든 곳에
존재합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놓는
희망입니다.
희망을 힘차게
선포하십니다.
희망은
희망을 믿고
실천할 때
더욱 풍요롭습니다.
희망의 중심에는
나눔이 있습니다.
나눔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희망입니다.
다시 희망을
나눕시다.
희망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필요한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희망과 더불어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참된
희망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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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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