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익필 (宋翼弼)
출생 연도 1534년(중종 29)
사망 연도 1599년(선조 32)
본관 여산(礪山)
조선시대 『구봉집』을 저술한 학자.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할아버지는 직장(直長) 송인(宋璘)이고, 아버지는 판관 송사련(宋祀連)이다.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이다.
할머니 감정(甘丁)이 안돈후(安敦厚)의 천첩 소생이었으므로 신분이 미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송사련이 안처겸(安處謙)의 역모를 조작, 고발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관에 올라, 그의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받았다. 송익필은 재능이 비상하고 문장이 뛰어나 아우 송한필(宋翰弼)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주2을 떨쳤고, 명문 자제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초시(初試)를 한번 본 외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하여 명성이 높았다. 이이(李珥) · 성혼(成渾)과 함께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논변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김장생(金長生)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86년(선조 19) 동인들의 충동으로 안씨 집안에서 송사를 일으켜,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지고 송익필의 형제들을 포함한 감정의 후손들이 안씨 집의 노비로 환속되자 그들은 성명을 바꾸고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1589년 기축옥사로 정여립(鄭汝立) · 이발(李潑) 등 동인들이 제거되자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되었다. 그 때문에 기축옥사의 막후 조종 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뒤에 또 노수신, 이산해 등 동인들을 비난한 조헌(趙憲)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李山海)의 미움을 받아 송한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되었다.
1593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일정한 거처없이 친구 · 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다 죽었다.
1586년 안씨의 송사 전까지는 고양의 귀봉산 아래에서 크게 문호를 벌여놓고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그 문하에서 김장생 · 김집(金集) · 정엽(鄭曄) · 서성(徐渻) · 정홍명(鄭弘溟) · 강찬(姜澯) · 김반(金槃) · 허우(許雨)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이산해 · 최경창(崔慶昌) · 백광훈(白光勳) · 최립(崔岦) · 이순인(李純仁) · 윤탁연(尹卓然) · 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선조 대의 팔문장가로 불렸다.
시는 이백(李白)을 표준으로 했고, 문장은 좌구명(左丘明)과 사마천(司馬遷)을 위주로 하였다.
자신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스스로 고대하게 행세하였다.
또한 아무리 고관 · 귀족이라도 한 번 친구로 사귀면 자(字)로 부르고 관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가 송익필의 미천한 신분과 함께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구봉집(龜峯集)』이 전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송사련 (宋祀連)
출생 연도 1496년(연산군 2)
사망 연도 1575년(선조 8)
조선전기 신사무옥과 관련된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아버지는 송인(宋璘) 또는 자근금(者斤金)이며, 어머니는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안돈후(安敦厚)의 서출(庶出)인 감정(甘丁, 安瑭의 庶妹)이다.
안처겸(安處謙)의 고종사촌으로 안씨 집 사람들은 송사련을 친자제같이 출입하게 하여 믿고 지냈는데, 성장함에 따라 자기 지위가 미천한 것을 한탄하고 안당(安瑭)의 반대파였던 심정(沈貞)에게 아부, 벼슬이 관상감판관에 이르렀다.
송사련은 사주(四柱)보는 법에 정통하여 1521년(중종 16) 자기의 사주를 보니 운수가 대통하여 부귀를 얻을 운이었고, 안당의 집 사람들의 사주는 죽고 망할 운수였다.
이에 엉뚱한 생각을 품고 처남 정상(鄭鏛)과 공모하여, 고모인 안처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의 조객록(弔客錄)과 발인(發靷) 때의 역군부(役軍簿) 등을 증거로 삼아 안처겸 등이 모역을 꾀하였다는 사실을 조작, 옥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의 조작으로 안당·안처겸 등 안씨 일문과 권전(權磌)·이충건(李忠楗)·조광좌(趙光佐) 등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다. 그 결과 고변한 공으로 선조대에 이르기까지 네 임금을 섬기면서 절충장군·시위대장 등 당상관으로 30여 년간 세력을 잡고 종신토록 녹을 받았다.
그리고 송사련의 딸도 종실에 시집갔으며 아들 5형제도 모두 명문 집안에 장가들어 송익필(宋翼弼)과 같은 쟁쟁한 학자가 나오는 등 집안이 한때 번창하였다. 그러나 송사련이 죽은 뒤인 1586년(선조 19) 안당의 종손인 안로(安璐)의 처 윤씨의 상소로 안당의 무죄가 밝혀지자 송씨 집안도 맞상소하여 싸우다가 결국 패하여 관작이 삭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