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仙遊島) 기행 Photo 에세이 (선유도 선착장- 망주봉- 오룡묘- 선유도 명사십리 해수욕장-- 초분공원- 장자대료- 대장봉-선유대교- 선유동 선착장/ 일산 신도시 산악회 따라 홈 http://cafe.daum.net/goyangjayooro)
*. 선유도(仙遊島) 이야기 선유도를 향하고 있다. 한강의 선유도 아니라 군산시에 속한 고군산군도에 있는 선유도다. 선유도(仙遊島)는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의 4개의 섬이 다리로 이어진 작고 아름다운 섬이다. 선유도는 군산에서 47km, 뱃길로 2시간 정도의 거리지만, 우리나라 건국 이래 최대의 공사라는 그새만금방조제공사가 완공되는 2010년 이후에는 선유도 앞 신시도와 연도교(連島橋)로 연결되어 승용차로 이 섬을 찾을 수 있다고 섬 사람들이 꿈에 부풀어 있는 섬이다. 현재는 신시도까지 승용차로 올 수 있게 되었다.
선유도를 왜 고군산군도라고도 하는 것일까? 선유도(仙遊島) 는 본래 군산도(群山島)라 불리던 섬이다. 선유도 주변에는 망주봉(104.5m)과 남악리뒷산(155.6m) 그리고 선유봉(111m), 무녀도의 무녀봉(130.9m), 대장도의 대장봉(142.8m), 신시도의 월령봉(199m) 등 바다에서 무리 져서 쑥쑥 올라 오른 듯 한 산이 많다. 그래서 무리 '群(군) ', 뫼 '山(산)' '군산(群山)'이란 이름이 생긴 것 같다. 조선 초 왜구의 침략이 극에 달했던 무렵이었다. 조선 태조가 왜구를 방어 하고자 수군부대를 서해안의 전략 요충지인 군산도에 설치하였다. 그 후부터 왜구는 수군부대를 피하기 위해서 군산도를 우회하여 내륙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에 세종 때에는 아예 수군부대를 금강의 입구인 진포(현 군산시)로 옮기는 바람에 진포((鎭浦)란 이름 대신 '군산(群山)'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고 , 본래의 군산도는 옛 군산도이어서 고군산도(古群山群島)라 칭하게 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흔적이 선유도 진말 입구에 줄 지어 서 있는 수군절제사 선정비 5기가 그것이다. 이곳이 군사적인 요충지인 것은 진말에 있는 선유도와 이순신 장군의 입간판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임진왜란이 막바지로 치닿던 선조 30년 9월 충무공은 명량해협의 울돌목에서 단 12척의 전함으로 133척의 적 선단을 무찌른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선유도에 닻을 내린 곳이 지금의 우체국 인근의 진말이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장군이 선유도에 도착한 후 몹시 앓았으며그 와중에도 의주의 조정에 명량해전의 승리를 전하는 장계를 써서 올렸다. 선유도에서 12일간의 휴식을 취한 장군은 선유도를 떠난 지 14개월 후 선조 31년(1598) 11월 19일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이라고 할 수 있는 노량해전에서 54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오늘날의 고군산군도는 유인도 16 섬과 무인도 47개 총 63개의 도서를 말한다.
이 군산도(群山島)를 선유도(仙遊島)라 부르게 된 것은 섬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 신선이 놀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하여 온다.
- 선유도 북쪽에 있는 선유봉의 그 정상의 형태가 마치 신선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선유도(仙遊島)라 하였다.
선유도는 3구로 나뉜다. 선유1구는 통계마을, 2구는 섬의 중앙마을로 우체국, 보건소, 학교 파출소가 있는 진말, 선유3는 망주봉 주변의 샛터와 남악리뒷산이 있는 남악리다.
*. 망주봉(望主峰) 이야기
배는 우리들만이 타고 가는 전세 유람선이어서 선유도에 도착하기 전에 섬 일주하여 주는 바람에 거북바위, 독립문바위, 천공바위, 할메바위도 먼 발치로 볼 수 있었지만 선유도가 가까워 질수록 제일 먼저 우리를 맞는 것은 화강암으로 된 우람한 돌산 망주봉이다. 우리는 하선하는 즉시 선유 제2구 마을을 지나 선유동 3구에 있는 망주봉(望主峰, 104.5m)을 향한다. 옛날 송나라 사신 서궁이 이 망주봉을 보고 노래한 글이 전하여 온다. 군산정(群山亭)은 바다에 닿아 있고 뒤는 두 봉에 의지하고 있는데 그 두 봉은 나란히 우뚝 서서 절벽을 이루고 수백 길이나 치솟아 있구나 이 망주봉은 선유산을 대표하는 돌산으로 다음과 같은 2개의 전설을 갖고 있다. -옛날 선유도에 유배되어온 충신이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 북쪽 한양에 계신 임금을 그리워하여서 붙인 명칭이다. 그 바위 위에는 지금도 당시 충신의 발자국이 남아있다 한다. -옛날 젊은 부부가 이 봉에 올라서 기다리는 왕이 있었다. 조선 다음에는 정씨가 계룡산에서, 그 후에는 범 씨가 고군도에 천년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는 그 왕을 북쪽을 바라보며 기다리다가 지쳐서 굳어져 바위가 되었다 한다. 그래서 큰 봉이 남편이요 그 작은 봉이 아내라는 것이다. 정감록 같은 이야기다. 망주봉을 오르려는데 경고판이 있다. ''망주봉은 급경사로 인하여 추락사고가 발생한 산봉우리로 안전사고 및 인명 피해 발생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등산을 금지합니다.' 그러나 함께 한 분들은 전국의 큰 산을 누비는 사람들이어서 어찌 111m의 산을 두려워하랴. 벌써 저 멀리 로프를 타고 선발대가 오르고 있었다. 나도 그 중에 하나가 되었지만 로프가 끊긴 코스에서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균형감각을 잃은 고령의 나이에 더위 잡이 풀 한 포기, 나무 한 구루도 없는 바위산을 어찌 오르랴 해서다. 오금이 떨려온다. 더 이상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진퇴양란이다. 올라가기 힘든 암산은 내려올 때는 더욱 어려운 건데 어찌 한다? 하다가 오른쪽을 보니 여기보다는 쉬운 또 다른 길이 있지 않은가. 궁하면 통한다는 속담이 이런 경우를 위해 있는 말이로구나 하였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시야는 넓어지고 바다 속에 멋진 섬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정상에 이르니 어제까지 비가 온 뒤끝이라선가. 모자를 날리는 강한 바람이 식은땀을 거두어 간다. 산 전체가 하나의 바위라서 사방이 완전히 열린 곳이라서 동서남북 사방이 모두 바다다. 그 바다 가운데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들을 굽어볼 수 있는 것은 애써 땀 흘려 얻은 보람이다. 정상은 고군산군도의 거의 전부를 굽어 살필 수가 있는 곳이었다. 동에는 고군산군도에세 제일 크다는 신시도, 서에는 장자도, 관리도가, 남에는 무녀도가, 북쪽으로 방축도와 말도 등 무산12봉이 병풍 같이 둘러 있는 것이 적을 막기 위해 배치된 무사같은 모습이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탄성을 지르며 감탄하게 한다. 한 마디로 선유 8경을 거의 다 볼 수 있다는 곳이 망주봉이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망주봉에 여름철이 되어 큰비가 내리면 7~8개의 물줄기가 폭포를 이루어 '망주폭포'가 된다는 곳이 바로 내가 서 있는 망주봉인 것이다. 저 아래 활처럼 굽은 선유도해수욕장의 명사십리나, 여기서 보는 선유낙조 등이 선유 8경 중에 하나하나인 것이다. 오를 때 너무 놀라고 힘들어서 우리 일행이 다음으로 간다는 선유봉과 대장봉은 생략하고 그 대신 자전거를 빌어 타고 섬 일주를 하기로 하였다. *. 자전거 하이킹
자전거 대여소는 섬 내 곳곳에 있는데 임대료는 1시간당 3,000원씩으로 연도교(連島橋)로 이어진 3개의 섬을 둘러보는데 약 3시간이 걸렸다. 요즈음 들어서 시작하였는지 체인이 장착된 비교적 새것이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망주봉 뒷동네 선유3구에 들어서니 넓고 넓은 바닷가에 외딴 집 한 채가 있는데 늙은 노파가 파라솔 아래서 파란 콩 한 접시를 놓고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 전설의 '오룡묘(五龍廟)라는 입간판이 있다. 그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집 뒤 망주봉 기슭에 당집이 있다 한다. 거기도 바위를 오르는 로프가 있어 위험하다고 그냥 지나치려 했더니 노파가 반말로 입을 연다. "그 나이면 올라갈 수 있어." "할머니는 춘추가 몇이신데요?" "나, 2살 빠진 백 살야." 그래서 오기로 올랐더니 저 아래 흔들바위 같은 바위가 바닷가를 보고 서 있는데 망주봉 쪽으로 작은 오솔길이 나 있다. 그 길 끝에 오룡묘가 숨은 듯이 서있었다. 당집 문을 열고 보니 산신령 두 분에 종이로 만든 가화(假花)와 징, 초 등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신기한 전설이 전하여 온다. -옛날 선유도에 임씨 부부가 살고 있었다. 늦도록 자식을 두지 못하다가 딸 하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태어날 때부터 왼손을 꼭 쥐고 한 번도 펴지를 않았다. 임씨 부인은 아이가 불구인 줄로만 여기고 키웠는데 장성할수록 용모가 뛰어나게 아름다운 처녀가 되었다. 부부는 혼처를 구하여 혼인날을 받았는데 혼인 전날 밤에 처자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을 풀어 찾다 보니 망주봉 오룡당 안에서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오룡당이란 5 마리 용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신성한 당집이었다. 그런데 처녀의 죽은 시신을 보니 평소에 오므려 쥐고 있던 손을 펴고 있는데 그 손바닥에 '왕비'란 글자가 새겨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왕비가 될 몸으로 태어났는데 비천한 사람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죽은 것이다.' 그래서 오룡묘 뒤에 당집을 만들어 임씨 처녀를 제사 드리게 되었다. 그냥 지나칠 것을 안내 해 준 노파가 고마워서 2천원을 담뱃값이나 하시라고 드렸다. 두 해가 지나면 100살이시라니까. 산 기슭에 몽돌해수욕장이 있다는 남악리뒤산(155.6m)을 뒤에 두고 선유봉을 향하는데 그 해안가가 이 일대에서는 가장 유명하다는 선유도해수욕장이다. 파도가 모래를 실어 사구(沙丘)를 만들어 섬과 섬을 명사십리로 연결하여 놓은 천연사구해수욕장이다. 하얀 유리모래(硅沙)가 밀가루 같이 고운 모래였다. 항아리처럼 생긴 이 선유도수영장은 많은 섬들이 앞바다를 방파제처럼 둘러 있어 물결도 잔잔하였다. 그 남과 북 양끝에 갯벌 체험장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모래를 두드리고 다니다 보면 맑은 물이 나오는 곳에 소금을 부으면 맛살이 쑥 얼굴을 내민다는 신기한 체험도 할 수 있는 곳이다. 100m까지 바다로 들어가도 허리밖에 차지 않는다는 곳이라서 여름 해수욕장으로서 이 일대에서 최고로 치는 곳이 이 선유도해수욕장이었다. 가는 길에는 1인당 5천원이라는 관광 전동차가 수시로 다니고 있었다. 앞서 선유봉(111m)으로 향한 일행을 따라 가다 보니 왼쪽 언덕에 초분공원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 초분(草墳) 이야기 초분(草墳)이란 남서 해안이나 섬 지방의 옛 장례의식의 하나를 말한다. 조상이 묻혀 있는 땅에 송장을 묻을 수 없다는 전래 풍습 때문에 2~3년 간 땅위에 가매장하였다가, 육탈(肉脫)이 된 뒤에 땅에 묻는 이중 장례 형태다. 시체를 땅 위에 놓고 풀이나 짚으로 덮어 두고 썩기를 기다리는 장례 방식이었다. 무녀도에 초분공원이 있다는데 선유도에도 있으니 이들은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선유봉은 큰 길에서 0.9km에 있었다. 이를 오르기를 포기하고 직진하니 해수담수화 시설이 있다. 도서지역이라서 마실 수돗물이 없다. 이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닷물을 끌어다가 1~2 차 여과 과정을 거쳐서 해수를 담수로 바꾸고 소독하여 배수지를 통하여 가정에 배달하는 시설이다. 장자대교를 막 들어서기 전에 선유도 8경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선유도 명사십리 촬영소가 있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곱고 아름다운 백사장이 명산 연주봉을 배경에 두고 펼쳐있는 곳의 촬영 적지라는 사진, 촬영소였다. *. 장자도(壯子島) 이야기
장자대교(壯子大橋)를 지난다. 한국사람은 '大' 자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18년 전인 1986년에 완공되었다는 이 다리는 폭 3m, 높이 30m, 길이 268m로, 0.5t 이하의 자전거나 오토바이나 사람만이 이용할 수 있는 다리가 대교(大橋)라니 과장도 이만저만한 과장이 아니다. 젊은 시절 이 다리에서 낚시를 하던 기억이 난다. 저 밑에 낚시를 드리우면 커다란 뱀장어가 주렁주렁 올라오던 기억이다. 이 섬을 선유 8경 중에 하나인 장자어화(壯子漁火)라 한다. 장자도 일대에서 밤에 불을 켜고 고기를 잡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 무렵에는 다리 중간에서 포장마차 횟집이 있어 회를 팔았는데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장자도란 이름은 이 섬에서 잘 잡히는 '가재미'와 '장재미'를 합해서 장자도라 불렀다는 곳이다. 그렇다면 '가장도'나 '장가도'가 되어야 할 터인데 현지에는 그렇게만 써 있을 뿐이다. 장자도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보면 섬 모양이 뛰는 말 앞의 커다란 먹이 그릇처럼 장자봉이 우뚝 솟아 있는 형국을 선유도가 감싸 안고 있어 큰 인재가 많이 나오는 곳이라 한다. *. 대장도(大壯島) 이야기 옛날 어떤 도사가 이 섬을 한 바퀴 돌아보고 말하더란다. 훗날에 이 섬에 큰 다리가 생길 것이라고. 그래서 사람들이 대장도(大壯島)라 불렀다. 그래서 그런가. 장자도와 대장도를 잊는 33m의 장자교와 선유도와 장자도를 잊는 268m의 장자대교가 세워졌다. 대장도는 전형적인 어촌으로 여기서 볼 것은 섬 좌측 길로 오르는 대장봉(142.8m)과 우측으로 가면 있는 장자수석원이다. - 대장도 북쪽 끝에는 장자할머니 바위가 있다. 여기서 2km 떨어진 무인도인 진대섬에 갓을 쓰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바위가 있는데 그것이 할아버지 바위란다. 할아버지는 본인의 운으로는 과거에 급제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 태어났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위해서 수많은 세월을 백일기도와 천일기도를 하면서 오로지 남편의 급제만을 위해서 빌고 또 빌며 살았다. 그러나 계속 과거에 떨어진 할아버지는 한양에서 오갈 데가 없어서 어는 사대부집 외동 딸 글 선생으로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 집 딸과 눈이 맞아 데릴사위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할머니의 정성에서일까. 할아버지는 15년 뒤 과거에 급제하여 소실 부인과 함께 본가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장자할머니가 술상을 차려 마중을 나갔는데 소실과 함께 오는 모습을 보고 서운한 마음에 돌아 앉아 술상을 든 채로 바위로 굳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 전설을 말하기라도 하려는 듯 바위 왼쪽에 후락한 신당이 있다는데 아까 배위에서 본 바위가 할메바위 같다. 수석원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어서 가보려 했으나 갈 길이 급하여 발길을 돌린다. 이 장자수석원은 이 섬 이 고향인 윤연수씨가 이 일대에서 수집한 수석 1천5백여 점과 분재 1백 50여 점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선유도 4섬은 왔던 길을 되돌아 왔다리 갔다리 하며 유람해야 하는데 어느 곳이나 편도로 2km를 넘지 않았다. *. 무녀도(巫女島) 이야기 무녀도(巫女島)는 선착장이 있는 선유도로 다시 돌아와서 선유대교 다리 건너인데, 거기서 우뚝 서 보이는 봉이 무녀봉(130.9m) 이었다. - 무녀도에는 주산인 무녀봉 바로 앞 바다에 조그마한 세 개의 섬이 있는데 하나는 장구모양의 장구섬이요, 그 옆에 있는 두 섬의 모습은 더 작으마한 것이 술잔 모양을 닮았다. 무녀도(巫女島)란 이름은 무당이 상을 차려놓고 굿을 할 때 너울너울 춤을 추는 무녀의 모습 같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무녀교의 이 끝과 저 끝에는 전망 일품의 위치에 해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파는 가게가 있다. 무녀도의 무녀리(巫女里)는 2구로 나뉘는데, 서이드 1구와 모개미 2구다. 서드이란 이름은 무녀도의 원래 이름이라고 하는데 이는 '열심히 서둘러 일해야 살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무녀도에서는 모감주나무 군락지와 초분 공원 그리고 몽돌해변이 볼거리라고 하지만 이제 뒤돌아 가야겠다. 다리를 내려가서 한적한 환상적인 해안도로가 나를 유혹하지만 일행을 따라와서 단체 행동의 금기인 개인행동을 하는 사람이라서 최소한의 예의라도 지키기 위해서였다. *. 일산 신도시의 산악회 이야기 부지런히 페달을 밟아 아침에 도착한 선착장으로 왔더니 82명 전원이 등산을 마치고 뒤풀이를 위해 선착장 공터에 줄지어 앉아 있다. 선유도의 절경을 발로 눈으로 찾고 보았으니 이젠 그 바다에서 나오는 회로 바다를 먹고 마시자는 시간이다. 나도 그 속의 하나가 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는 산악회가 40여 개가 있다. 영리적인 단체가 아니고 산을 사랑하는 친목회의 모임이라서 산을 좋아하는 등산인을 행복하게 하여 주는 모임이었다. 일산에서 떠나서 일산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전국의 어느 곳 이나 저렴한 비용으로 갈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좋다. 영리적인 단체가 아니라서이지만 그보다 지역이 비슷한 곳에 사는 이들이어서 아는 얼굴들고 친 자매들 같아 나누는 정이 도탑다. 그중 하나가 '일산신도시 산악회'( 홈 http://cafe.daum.net/goyangjayooro) 인데 3년 전인가 월출산을 다녀오는 길에 나는 이 산악회에 큰 죄를 지은 적이 있다. 그 때 그 미안함을 돌아와서 산행기에 이렇게 쓴 일이 있다. -늙다리의 서글픈 귀향길 산에 가서 절을 만난다는 것은 보너스를 받는 것처럼 흐뭇한 일입니다. 도갑사 같이 이름난 절을 만난다는 것은 더 더욱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겨울이라 낮단밤장(晝長夜短)인데다가 도갑사 못 미쳐서부터 헤드랜턴을 켜야 할 정도로 어두워 졌습니다. 방금 터지기 시작한 핸드폰이 울려대기 시작합니다. 일행 모두가 너무나 늦게 내려오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가득이나 느린 사람이 산의 곳곳을 욕심내고 사진을 찍으며 다녔으니 모두들 저런 노인을 왜 데리고 왔나 하였을 것입니다. 낮은 천국 같은 황홀한 월출산의 하루더니 밤의 버스 속의 상경 길은 지옥 같은 천리 길입니다. 아무리 바삐 달려가도 나로 인하여 밤 12시 이전에는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있는 고양시 일산에 도착할 수 없으니 이를 어쩌지요? 상경 중 고속버스휴게실에서 먹거리로라도 미안함을 덜으려 하였으나 시간이 늦어 상인들도 철수한 지 오래입니다. 그렇게 늙다리의 서글픈 귀향길은 밤 12시를 차속에서 넘기고 있었습니다.
-월간 '문학저널' ( 2월호) '월악산 산행 Photo 에세이'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