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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9 /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시100:1-5)
유명한 작가인 도스토옙스키는 한때 술주정뱅이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로는 ‘이제부터 나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항상 예수님 편에 서겠다.’고 결심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말년에 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라는 작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그리스도의 희생 등을 암시하는 내용들이 곳곳에 배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지옥 얘기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가 단테도 하나님 사랑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인간의 속세와 운명을 그리스도교적 시각으로 그려낸 위대한 문학작품 중의 하나인 ‘신곡’을 저술했다고 합니다.
이들 외에도 역사 이래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자기의 생과 자기의 재능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산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도 예외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 중에서도 내면적으로는 솔직히 ‘하나님이 나에게 해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에서만 하나님을 믿는 경우가 다반사라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명색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드문드문일지라도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런 각오와 다짐은 순전히 우리 입장에서 생각할 일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우리가 하는 생각이나 행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언제든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실까?’만을 생각하고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딱 하나 빼고는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딱 하나는 뭘까요?
교회 잘 다니는 거? 예배 잘 드리는 거? 헌금 많이 하고 전도, 봉사 많이 하는 거?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그런 것들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뭘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그 딱 한 가지라는 게?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기에 ‘누구에게나’ 복을 주시지만 ‘아무에게나’ 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누구에겐 복을 주시고 누구에겐 복을 안 주신다고 할 때는 그에 상응하는 뭔가 기준이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세상을 향해 구원하심과 복 주심의 ‘대원칙’을 세우셨는데 그게 바로 ‘믿음대로’입니다. 따라서 복을 받음에 있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원칙이 ‘믿음대로’이기에 믿으면 복을 받고 안 믿으면 복을 못 받는 겁니다. 그랬기에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실까?’만을 생각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딱 한 가지가 하나님이 복을 주실 만한 우리의 믿음인 거고, 우리 역시 복을 받았네, 못 받았네를 논하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것도 우리에게 있는 복을 받을만한 믿음입니다.
누군가가 우상을 섬기는 나라나 공산 국가에 산다면 교회 다니고 싶어도 못 하겠지요.
직장 문제나 가정 형편이 여의치 못하면 예배드리고 싶어도 못 하겠지요.
돈이 없거나 형편이 안 되면 헌금은 물론이고 전도도 봉사도 할 수 없겠지요.
그렇더라도 믿음은 어떤 경우에서든 믿고자 하기만 하면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못 믿는 것에 핑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솔직히 안 믿으려니깐 못 믿는 것이기에 못 믿으니, 복을 못 받을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편에서는 어떠실까요?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실까?’만을 생각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직접 세우신 ‘믿음대로’란 원칙대로에 의해서만 행동할 수 있으시기에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8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좋아라 합니다만, 그런데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의 복은 ‘누구나’ 받을 수 있지만 ‘아무나’ 받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복 받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는 순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언제든 복 주심이 먼저시지만, 우리 편에서 보자면 복 받는 것보다는 믿음이 먼저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도 믿음대로 복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이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되는 것이 복 받는 것보다 우리에게 먼저 있어야 할 믿음이기에 여러분이시라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전에’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려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만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제 알아야 할 것은 방법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볼 때 몇 가지를 살펴보자면, 우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1절에서는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얼핏 보기엔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 같지만, 이 부분은 띄어 쓰기를 잘해야 합니다.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에서 띄고 그다음 ‘부를지어다.’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 놓고 전체적인 문맥을 보면 ‘여호와께 즐거운’이란 말은 ‘하나님이 듣고 싶으신’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뭘까요? 하나님이 즐겁기 위해 우리에게서 듣고 싶으신 말이?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신다는 ‘믿음’ 즉 ‘믿습니다.’와 하나님이 주신 복에 대한 우리의 ‘감사’ 즉 ‘감사합니다.’입니다.
더하여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드리옵나이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듣기를 원하시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감사하며 사는 자가 되려고 하면 ‘하나님이 나의 믿음과 감사를 들으시고 아시게 하라’는 말인데 그렇게 하는 방법이 ‘부를지어다’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노래를 부르라는 말이 아닙니다. 원어로는 ‘소리를 질러서 귀가 먹게 하다’라는 의미로, 예를 들자면 유명 가수의 공연장에 모인 그 가수의 팬들이 가수의 말 한마디나 일거수일투족에 공연장이 떠나갈 정도로 소리를 지르는 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한껏 기분이 고조된 가수는 또 뭐라고 합니까?
팬들을 향해 ‘소리 질러~’라고 하면, 팬들은 또 난리가 납니다.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열렬히 환호하는 ‘하나님의 팬’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도 ‘광팬’이 되어야 합니다.
아시겠지만, 최근 모 가수가 사회적인 물의를 빚어 구속되었는데 일부겠지만, 그의 팬이라는 분들의 행동이 어땠나요?
일 개인 그것도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사람인데도 그의 팬이라는 이유로 무조건적인 지지와 옹호를 보내는 판에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우린 하나님을 위해 무얼 하고 있나요?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지지와 신뢰와 감사와 기대를 보내는 것.
하나님의 팬이 되어 세상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보고 싶어 하시는 우리의 믿음이고,
이것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듣고 싶어 하시는 찬송인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실까?’만을 생각하고 행동하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듣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이런 거 저런 거를 해주세요.’라고 하는 우리의 믿음이자 기대와 기도인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주여. 이런 거를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여. 저런 거를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여. 이러저러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리할 때면 우리 역시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되는 것이기에 그 결과는 우리에게서의 모든 것도 합력하여 선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는다고 하면 결국엔 누가 기뻐하게 될까요?
양쪽 다입니다. 우리가 복을 받으면 복 주고 싶으셨던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 받고 싶었던 우리가 기쁘게 됩니다.
이렇듯 믿음을 매개로 하나님과 우리는 각기 ‘기쁨으로 윈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좀 생뚱맞지만, 전 시중 유행가를 들으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을 많이 배우곤 합니다.
예전 유행가 중에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사에서 진실은 뭘까요?
진짜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으셨던 걸까요? 아니면 어머니까지 먹을 짜장면 살 돈이 없었던 걸까요?
둘이 먹을 돈은 없었지만 자식이 먹고 싶어 하는 짜장면을 자식 입에 넣어줄 수만 있다면 어머닌 그것만으로도 기쁘고 만족하신 겁니다.
또 다른 걸로는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유행가 가사도 있습니다.
이 말이 ‘네가 원하는 일이 뭔지를 나에게 말해주기만 하면 난 너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면, 앞서의 어머니의 마음이든, 뭐든 해주고 싶어 하는 심정이든.
이런 게 바로 우리를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은 십자가에서 죽으실지라도 기뻐하고 만족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고.
이런 게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나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아니겠는지요?
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항상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늘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3절에서도 보세요,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라고 하면서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고백을 믿는 것에서부터 모든 믿음이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는 그의 양이로다.’라는 고백을 믿는 것에서부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모든 복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두 고백을 하나로 묶으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우리는 그의 양이로다.’가 되는 겁니다.
이때 목자의 입장에서 보면 양이 잘못되는 것은 목자에겐 큰 손해요 아픔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이라는 말은 우리의 잘못됨이 곧바로 하나님의 아픔이 되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잘못되게 그냥 놓아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신다면 이제부턴 여러분의 기도 말미에 이런 간절한 고백을 추가해 보세요.
“하나님. 나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이 아닙니까?”라고.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분명하게 믿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기뻐함을 잃지 않게 됩니다. ‘은혜받을 것’을 알기에 기쁘고,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알기에 기쁘고, ‘하나님이 다 잘되게 하실 것’을 알기에 기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앞서 복의 경우에서처럼 기쁨과 믿음 사이에서도 우리에게서는 기뻐하는 것보다는 믿음이 먼저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우리가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는 것을 믿기만 하면 무능한 건 양일지라도 목자는 전능하기에 양이 홀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일지라도, 또는 양이 혼자 힘만으로는 얻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목자는 해결해 주고, 목자는 얻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와 관련해서 요한복음 10장에는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시는 말씀이 나오는데, 본문 4절에서도 보면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임을 믿는다면, 그다음에 있을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주시는 복이고, 그다음에 있게 되는 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입니다.
만약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았다면 몸은 교회 문을 들어섰을지라도 하늘 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몸은 집 현관문을 들어섰을지라도 복의 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몸은 직장 출입문이나 학교 교문을 들어섰다 할지라도 기쁨과 감사의 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에, 엘리베이터에 갇힌 초등학생을 구해줬더니 감사하기는커녕 구조 대원이 자기 애한테 ‘나와!’라며 반말했다고 부모 자식이 떼로 시비를 걸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제가 못돼선지는 몰라도 뉴스를 듣는 순간 ‘구해주지 말지.’라거나 ‘다시 가둬버리고 나오지’라는 생각이 언뜻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올바른 생각은 아니지만, 앞서도 믿음은 믿으려고 해야 믿을 수 있다고 했던 것처럼 감사도 그러합니다. 감사도 감사하려고 해야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좋은 일이 생겼더라도 당연히나 또는 우연히 그런 일이 생겼다고 여기지 마시고 그리스도인답게 우선은 하나님께 감사부터 하시기를 바랍니다.
설사 감사할 조건이 별로 없는, 아니 전혀 없는 상황에서조차도 감사를 찾고 감사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기억해 주시고 이후에 그에게는 더 큰 감사할 거리를 주십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는 기준은 감사를 아는 삶과 직결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살다 보면 가끔은 혼자서 견뎌내야만 하는 일들이 있게 됩니다. 그럴 땐 보이진 않지만, 하나님의 손이 나와 함께 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라는 찬양의 가사처럼 앞에서는 주님이 보이지 않기에 안 계신 듯이 여겨질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상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면 예수님은 내가 다시 일어나 걷도록 나를 밀어주시고, 새 힘을 주시며, 나를 도우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렇듯 인생은 늘 혼자인 것 같은 때에도 결코 혼자가 아님을 감사하시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은 기르시는 양인 나를 절대 혼자 있게 하지 않으실 줄로 믿으셔서 목자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양 된 여러분의 인생이 더욱 살지고 기름지고 더 풍성해지며 더하여 여러분이 당대에 받은 복이 여러분의 후대로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