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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행의 응시 - 이하석 시인의 『희게 애끓는, 응시』(서정시학 2024)
근래에 단시가 새삼 회자되고 있다. 단시 쓰기를 구호로 삼고 있는 <채송화> 동인의 10행 이내 단시도 그렇고 디카시의 5행 이내 단시도 있다. 그리고 4행시 쓰기가 최근에 주목받고 있다. 이하석 선생이 얼마 전에 시조로만 이루어진 서사 시집 『해월, 길노래』를 출간하시더니 이번에는 4행 시집까지 출간했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짧은 시는 꿈이다. 가장 긴 시의 꿈이기도 하다. 짧아서 먼 응시도 있다. 눈이 먼 시는 아니다. 또렷한 시선이 한결 너를 드러낸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 시집 50여 편 짧은 시의 색깔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 이 “응시”라는 말에 주목하자. 일단 이 시집의 첫 부분에서 관심을 끄는 작품은 「시월」이라는 시이다.
세상에, 그 시월을 처형했네
그 다음 더 많은 시월들이 호명되지만
죽은 시월들은 부재라서 더 대답하네
지금 우리가 되캐서 그 이름들이 들키네
- 「시월 1」
우선 주목을 끄는 낱말은 “처형”이다. 시월을 처형하다니, 이런 말은 처음 들어보았다. 시월은 일 년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때이다. 그 한 달의 시간이 얼마나 아쉬우면 ‘처형했다’라고 표현했을까. 그리고 기왕 처형한 김에 지나간 시월들을 모조리 불러내었다. 그렇게 돌이켜보니 잊었던 사건, 사람들이 다 되살아난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이름들이 숨바꼭질처럼 숨어있다가 술레에게 잡혀 나온다. 단시는 생략이 생명이다. 그리고 독자는 그 생략된 언어 뒤를 짐작하며 상상의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흰수마자」라는 시에서 “저 물고기는 흰 여울 독서광/맑게 아른대는 그 세계의 숨바꼭질”을 음미해 보자. 맑은 여울 속을 헤엄쳐 다니는 흰수마자라는 잉엇과의 물고기를 밝음을 좋아하는 독서광이라 감탄하고 있다. 맑은 여울 속을 어른대듯 잽싸게 헤엄쳐 다니는 이 물고기들의 동작이 숨바꼭질이다. 짧은 한마디씩이 감탄스럽다. 「은행나무 카페」에도 “찻잔에 떨어진 은행잎을 차마 걷어네지 못하네”라는 구절과 그 이유인즉 “돌이킬 수 없는 가을 색으로 내몰린 증거”라는 구절이 있다. 노란 은행잎이 찻잔에 떨어졌는데 그것을 차마 들어내지 못한다. 돌이킬 수 없는 가을이다. 그래서 “뉘든 울컥하니 쫄쫄,/제 응시를 혼자 마시”게 되는 것이다. 아끼며 음미하며 마시게 된다. 작은 것들을 “응시”하며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다.
골목 끝에 내놓은 다리 다친 의자
너는
가고
내 불구의 그림자 풍경을 또 앉히네
- 「의자」
누가 내다 버린 다리 부러진 의자 하나가 서 있다. 골목 끝에 내놓은 보잘것없는 의자이다. 그렇게 그 의자는 가고 대신에 나는 나의 불구의 그림자를 앉힌다. 누구나 하나씩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불구라고 해석했을까. 도입 장치 역할을 하는 의자 대신에 그것을 앉히고 이윽히 바라본다. “너는/가고”라는 짧은 2행이 주는 울림이 애틋하다. 「쓰레기 줍기」도 독특하다. “깡소주로 비운 뒤 산골 물 담아/바위 우에 놓아둔 패트병”을 주목하고 있다. 깡소주를 다 마셔 비운 패트병에 물을 담아 바위 위에 세워 두었더니 그것이 넘어진다. 거기에 “투명한 아버지의 삶을 추가”한다. 산골 물 가득 담은 투명한 패트병과 술만 좋아하시다 돌아가신 너무나 깨끗하던 아버지의 삶이 넘어졌다는 점에서 일치된다. “쓰레기”라는 낱말이 미묘한 울림을 준다.
팔공산 정상 흰 눈 덮었네
남루한 나는 올려다 보며 미나리전을 먹자
그렇게 살자 저 팔공산 정상의 흰 눈 사무치며
봄 미나리처럼 푸른 떼 쓰자
- 「팔공산」
흰 눈 덮인 팔공산과 남루한 내가 대비된다. 그런데 시적 화자가 찾는 것은 미나리전이다. 막걸리 한 잔 곁들일 것이다. 나쁘지 않은 삶이다. 이렇게 살자. 그런데 이 시의 “하자” 명령체가 눈길을 끈다. 이것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백석이 쓰던 독특한 명령문이 아닌가. 그리고 “사무치며”를 음미해 보자. 흰 눈과 잘 어울린다. 게다가 미나리가 떼를 쓴다니 그 떼는 잔디의 떼를 연상하게도 한다. 하나하나 단어 선택을 보시라.
「고독」에서의 “기억으로 뭉친 바위와 이끼꽃//숲 뚫고 들어 그 돌 데피는 햇살”도 한번 음미해 보자. 바위와 이끼가 기억으로 뭉쳤다니 게다가 그걸 덥히는 햇살이 있다. 그것은 따뜻한 위로로 읽힌다. 나이가 들수록 앞날보다는 지난날이 길다. 그리고 그 지난날은 회한이 많다. 그것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햇살, 얼마나 고마울까.
비슬산 흘러내려 금호강 이르기까지
실버들로 청청 봄을 엮는다
누가 흐르는 물에 제 여정의 돌을 씻나?
누가 그 정한 마음의 징검다리를 건너오나?
- 「신천」
신천은 대구의 상징적인 하천이다. 지금은 거기에 도시 고속화 도로가 달리지만 옛날에는 정말 자연친화적이었다. 비슬산과 금호강은 신천의 처음과 끝인데 그 하천이 “실버들로 청청 봄을 엮는다”니 죽이는 표현이다. 게다가 “여정의 돌”을 씻는 물과 “마음의 징검다리”를 건너오는 나그네도 절묘하다.
짧은 시를 살리는 것이 바로 이런 감칠 맛 나는 표현들이다. 이런 것들이 단시를 살려 입속으로 음미하게 만든다. 그리고 「제비꽃 1」의 “날개는 제 응시의 그늘이다/제 낮은 키 내세우며 높이 씨앗 날리는”을 음미해 보자. 또한 「씀바귀」의 “노란 꽃들 지천이다/하늘이 뿌린 금화들을 줍는 이 없네”도 한번 맛보시라. 이것은 맛을 보라는 말 외는 적당한 표현이 없다. 소주 한 잔 쭉 마시고 고개를 터는 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타들어가는 애의 새싹
흐느끼는 기억의 심해에 뜬 부표
서로 사무치는 파도의 결
돌에 스미는 시선의 물빛
- 「시 2」
시에 대한 생각을 시로 정리하고 있다. 네 행 모두 하나씩의 절창이다. “타들어가는 애”의 싹이라니. 애가 탄다는 말이 있다. 애장이다. 그것의 싹이다. 바로 시의 싹이 아니겠는가. 기억의 깊은 바다에 뜬 부표라니, 시는 아무래도 그 기억의 부표를 취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3행의 “파도의 결”을 읽어 보자. 시는 사무치는 파도의 결이다. 그 결 하나하나를 읽어내야 한다. 마지막 행의 돌에 스며드는 은근한 물빛 시선. 절묘하다.
「나무 아래」라는 시를 또 읽어 보자. 이것은 4행시 둘을 써서 1, 2로 나누었다. 1은 “그늘에 컹컹/짖는 소리 묻어놓고/죽은 개 이름 부르네”이고 2는 “망초꽃 하얗게 피어나 바랜 곳/여자가 시선을 더 묻네/기억의 이름을 짓네”이다. 개 짖는 소리를 묻어놓고 그 개의 이름을 부르고 그 무덤에 여자가 시선을 주며 기억을 되새긴다. “나무 아래”라고 한 것은 그 아래 개의 무덤을 지칭한 것이다. 개를 묻었다고 말하기보다 컹컹 짖는 소리를 묻었다고 말한다. 거기에 개의 주인인 여자가 시선을 오래 두고 개와의 기억을 되새긴다. 이 단순한 사건을 표현하기에 따라 얼마나 감칠맛이 나는지.
이 시집에는 그 ‘감칠맛’의 덩어리가 곳곳에 있다. 「동백」의 “구름 속 먼 우레의 귀//아린 공중의 모닥불”을 음미해 보자. 상상력을 자극한다. 먼 하늘에서 우레가 들린다. 그리고 그 아픈 공중에서 모닥불이 피는 듯하다. 꽃이 피는 것을 모닥불이 피는 것에 비유했다. 절정은 마지막 행의 “내 허공 무너뜨리는 붉은 악다구니들”이다. 붉은 동백꽃이 뚝뚝 떨어진다. 계집의 악다구니와 같다. 내 허공이 무너지고 있다. 이런 경지를 보았나, 「사랑법」도 그러하다. “심연 읽은 물방개의 길을/가로 질러 쓰는 우렁이의 길”이라는 구절에서 물방개의 자유로운 움직임과 우렁이의 조용하지만 일관된 직선 움직임을 비교해 보자. 그런데 저 위에서 “수면만 긁는 오리들의 길”도 있다. 그리고 더 위 가마득한 허공을 떠가지만 “물에 비친 구름들”이 있다. 물속의 두 움직임과 수면의 두 움직임이 대비된다. 물속의 두 움직임은 서로 교차하지만 물위의 두 움직임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의미가 없다. 그냥 관찰한 바를 제시할 뿐이다.
노래는 언어로만 부르는게 아니다
바람에 날개를 터는 씨앗의 대답이 있다
말의 그늘이 띄우는 풍선의 편지 형식이며
문풍지의 연금술이기도 하다
- 「노래 2」
검은 미래로의 호명
제 상처 내다 말리는 털 짐승의 숨
달빛의 수채 핥는 고양이의 혓바닥
던지면 되돌아보는 돌의 응시
- 「노래 3」
<노래> 시편들도 앞의 <시> 연작과 유사하다. 시는 언어가 아니다. “바람에 날개를 터는 씨앗의 대답”이다. 그리고 “문풍지의 연금술”이다. 이것만 해도 이 시는 쇼킹한데, 상처 입은 “털 짐승의 숨”이며 달빛을 핥는 “고양이의 혓바닥”이고 “돌의 응시”이다. 하나하나의 이미지가 어찌 이토록 명징한가. 이것들이 단시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드러나고 돋보인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 시집의 시들에서도 ‘응시’라는 개념이 돋보인다. 세밀한 관찰이다. 하나씩 뽑아내기 위하여 얼마나 집요하게 바라보았을까.
「2월」에서 ”지상의 것들이 얼굴색을 바꾼다“라는 첫 행에 주목해 보자. 겨울의 마지막에 새로운 생명들이 움트고 있다. 땅이 얼굴을 바꾸고 있다. 부풀어 오른 꽃망울들은 세상을 “응시”하고 있다. 이 시의 마지막 행은 “겨울은 끝내 그 응시의 객혈 자국”라고 말하고 있다. 겨울의 응시와 그 객혈 자국, 매화 꽃망울이 터진다. 「후기」라는 시에도 “사랑할 땐 서로 해석 안 되던 말들//그대 가고 나서야 다시 파보고//자거라 자작자작 나무 아래 되묻었네”라는 미묘한 구절이 있다. 사랑할 때는 당신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당신 가고 나서야 되씹으며 이해하고 부질없다며 다시 나무 아래 묻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거라 자작자작”이라는 구절을 한번 음미해 보자.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그것을 되살린들 무엇하리. 그만 잊자 잊어를, 자작자작 소리로 표현하고 있다.
사랑은 자꾸 보고 싶은 거라며
바위같이 귀 닫은 채 눈으로만 보채네
내가 듣는 걸 네가 내다보는
이런 훤한, 도둑들의 마파람 거래
- 「보고 싶다면, 사랑이다」
이 시도 참 맛이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귀로는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바위같이 귀 닫은 채 눈으로만 보채”는 이 사랑을 어찌할고. 나는 듣고 있는데 당신은 보기만 하는 이런 뻔한 “도둑들의” 거래라니. 사랑은 이기적인 것이다. 상대방의 모든 것을 감싸안고 보듬으며 이해하는 측면도 있지만 나만을 보아달라며 보채는 것도 사랑이다. 하지만 그 날도둑 같은 이기심은 불쾌한 것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마파람(남풍)” 거래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어지는 연시 「헤어진 뒤」의 “네 어둡고 따뜻한 숲 헤집던 손으로/헤어진 뒤에야 자꾸 길 없는 이름을 적는다”도 유사하게 읽힌다. 너의 모든 것을 헤집고 더듬던 손이 이제는 허전해져서 낙서하듯 이름만 적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일련번호가 매겨져 “나의 창고 속에” 저장되고 잊혀진다. 참 허전하고 애련한 정이다.
단시의 매력은 그 여운에 있다. 앞의 시들이 다 그러했다. 「낙서」라는 시에, 어릴 때 누구누구 뽀뽀했네라고 낙서했던 벽을 어른이 되어 다시 보니 “벽은 꼭꼭 닫아놓은 창으로 맑게 닦여 있네/무성한 담쟁이 그늘 사이로 내다보는 눈이 있네”라는 구절이 있다. 그 어릴 때의 추억을 옛 학교 건물에서 찾았더니 벽이 다 창으로 바뀌어 있고 무성한 담쟁이덩굴 사이로 숨은 눈들이 내다보더라는 것이다. 벽이 거울로 개조되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없던 담쟁이덩굴로 덮여 마치 그 속에 누가 숨어서 보는 것처럼 옛날의 기억이 들여다보이더라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 애매모호한 설정은 참 감칠맛 난다. 「실연」이라는 시에서도 “실연은 뉘든 불멸로 만들지”라는 시니컬한 첫 행은 우리의 통상적인 실연의 아픔을 깨트리고 있다. 그런데 왜냐하면, 이라고 이어지는 구절에서의 “그대 빈자리를 끓는 말들로 채운/시”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자. 당신의 빈자리를 채운 끓는 말이라니, 실연의 괴로움이여 이는 시인에게 축복일까.
네가 내 부름에 꽃처럼 돌아보면
활짝 핀 게 또 내 안을 켜고 내다본다
바람을 세우는
먼 우레소리
- 「봄」
봄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다니. 내 부름에 꽃처럼 방긋 웃으며 돌아보는 봄, 그랬더니 내 안에서도 활짝 핀 것이 내다본다. 계절과 나의 호응이 연인과 같다. 그랬더니 저 멀리서 우레소리가 들리는데 그것은 바람이 불어오지 못하게 막는 폭발음이다. 봄이 봄 같으려면 바람이 따뜻하고 잔잔해야 한다. 그래서 강한 바람을 틀어막고 있으니 천둥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처음 보았다. 독특하면서 따뜻하다. 「이력」이라는 시에서도 바람이 보인다. 시인은 “나는 대가천의 아들/가야산 부는 바람으로 떠돌았지”라고 말하고 있다. 이하석 시인은 고령 태생이다. 즉 가야의 땅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람이다. 바람처럼 떠돌았다는 것이다. 바람의 시인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금호강의 딸을 취했는데/그 바람이 태풍 매미를 키웠지”에서 또 다른 바람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가야산의 바람처럼 자유를 사랑했다. 그런데 금호강의 딸을 아내로 얻었더니 그녀는 나의 바람과는 비할 바가 아닌 2002년도의 무섭던 매미 태풍이더라는 것이다. 하기야 바람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벽이 아니다. 햇볕 아니면 더 강력한 태풍이다.
이제 시인의 나이가 80을 바라본다. 그는 「또 다른 사랑」에서 “상처의 핏기 가셔서 분홍색을 띨 때 쯤/삶은 또 슬며시 앞을 여미는 응시이네”라고 토로하고 있다. 살다 보면 상처는 끊임없이 받는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면 그 상처들을 지혜롭게 덮을 줄도 알게 된다. “슬며시 앞을” 바라보게 되는 시기이다. 그런데 같은 시 마지막 행의 “바람에 말리는 몸 헤적여지는 게 아닐까”의 바람이 압권이다. 젖은 몸 바람에 말리는 몸짓, 이거야말로 노인의 지혜가 아닌가. 시인은 바람이다. 그런데 또 구름이기도 하다. 뭉게뭉게 웃음짓는 구름의 시를 읽어 보자.
구름의 속앓이 우루루루를
밖으로 내뱉으면 천둥이 되지
그러나 나는 뭉게뭉게로
말로만 이름 짓는 구름 시인일 뿐
- 「구름」
바람을 그리도 잘 써먹더니 구름을 시에 넣었다. 구름의 속앓이와 뭉게뭉게 이름지음을 다 알아볼 수 있는 시인이니 눈이 트인 모양이다. 젊어서처럼 우루루루 소리 지르기보다 뭉게뭉게 구름을 피우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면서 응시는 끊이지 않는다. 「소주」에서 술을 “제 응시만 지피는/물불의 모닥불”이라고 말하고 있음도 한 예다. 그것은 「돌」에서 정점에 이르고 있다.
1
돌은 속이 꽈악, 비어서
물처럼 결이 안고르다
그래서 나는 남겨져서 파도치지 않는다
애끓는 시선만으로 네게로 금이 갈 뿐
2
나는 무슨 돌로 응축되기만 할까
시나브로 나는 네 심연으로 가라앉을 뿐
너에게 돌을 던지면
떠난 돌의 응시일 뿐
- 「돌」
시인의 짧은 시 이론이 압축되어 이 시에 나타나고 있다. 돌의 “속이 꽈악, 비”었다니 기묘한 역설이다. 그리고 비웠더니 더 이상 “파도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빈 돌이 내게로 와서는 자꾸 응축되기만 한다. 그 응축된 무게로 너의 심연 속에 가라앉으니 “너에게 돌을 던지면/떠난 돌의 응시일 뿐”이더라는 것이다. 돌을 던지며 날아가는 돌을 응시할 뿐이라니. 여백과 울림의 최대치이다.
외에도 그냥 흘려보내기 아까운 것으로, 「가섭사 가는데」의 수런대는 산딸나무와 지저귀는 후투티가 이루어내는 “환히 핀 이 청 고요”가 있고, 「나방 같은」에서의 “한밤이 내뱉는/어둠의 흰 껍질”이 말하는 나방 한 마리와 그것을 “까맣게 붙잡았다간 화들짝 놓아”주는 모습도 들 수 있다. 둘 다 응시의 정수를 보여준다.
시집의 끝에 실린 산문 <짧은 시, 긴 응시>에서의 말들이 핵심이다. 우선 그는 4행시 시집의 기획에 참여하면서 설레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음을 토로하고 있다. “4행시는 전통이 긴 만큼 그 구조가 매우 잘 짜여져 있다.... (중략)....시가 강열하게 경험했던 시대적인 한 징표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4행시가 우리 전통시에 뿌리 두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 현대시에 보이는 짧은 시들 중에 4행으로 된 절묘한 것들을 눈여겨본다. 그것들은 굳이 4행을 의식하지 않은 가운데 4행이 된 듯하다”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4행시야말로 진짜임을 말하는 것이다. 자유시를 쓰다가 4행으로 맞추는 것이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짧은 시는 긴 시의 꿈이며, 여전히 우리 생의 섬광들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짧은 시가 정말 시다운 시라는 말로 들린다. 아마 이 시집을 엮으면서 시인 스스로가 느꼈던 말인 듯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필자도 그것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