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의 말'이란 영화감상과 '한창호'영화평론가와의 토크타임이 있다고 해서
이대 ECC빌딩 '아트하우스 모모'에 들렸다.
영화 '토리노의 말'을 감독한 '벨라 타르'. 세계 영화계를 놀라게한 헝가리의 영상시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잇는 이 시대의 유일한 시네아스트.
'구스 반 산트'와 '짐 자무쉬'가 격찬하고 전세계 영화평론가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는
현대 영화언어의 한계를 뛰어 넘는 압도적인 걸작을 감독한 '벨라 타르'
1994년 무려 7시간 15분 상영으로 유명한 '사탄탱고'를 감독한게 '벨라 타르'이다.
영화는 아래와 같은 나래이션으로 시작된다.
1889년 1월3일 이태리 북부 '토리노'라는 지방에서 있었던 일.
가혹한 채찍질에도 말은 움직이지 않았고, 마부는 분노하여 더욱 거세게 채찍질한다.
마부를 말리던 니체는 흐느껴 울다 쓰러져 집으로 들어간 뒤 입을 뗀다.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
이후 그가 10년간 누워 있다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다.
영화속의 나래이션에서 질문한다.
"그 때 그 말과 마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데까당스, 허무주의, 니힐리즘의 대표작가 '니체'를 언급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는
니체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벨라타르는 니체주의를 표방했으나
반니체주의 사고방식을 같이 주장하고 싶었던게 아닌가 생각도 든다.
2시가 30분간의 영화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라야 마부(야노스 데르지 분)인 아버지와
딸(에리카 보크 분) 그리고 말, 한 컷트씩 등장하는 마부의 친구 한사람, 그리고
두 마리의 말을 타고 온 여닐곱명의 집시들이 등장인물 전부이다.
그러나 영화상영 내내 마부인 아버지와 그의 딸 두명이 계속 반복해서 등장한다.
두사람간의 대사도 거의 없고, 흑백필름에, 롱테이크(한 장면이 4-5분이상 오래
지속되는 영화 용어)의 장면이 지리하게 계속된다.
'벨라 타르'식의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를 주장 하고픈 것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매우 단순하다.
부녀가 강풍이 휘몰아치는 황무지의 외딴 가옥에서 지내는 6일간의 모습을 그려낸다.
아주 노쇠하고 늙은 말을 키우며 살아가는 부녀.
해가 밝아오면 딸은 거친 바람을 뚫고 우물가에 가서 물을 길어오고,
한쪽 팔을 못쓰는 아버지에게 옷을 입히고, 벗기고
살을 에는 듯한 강풍은 계속 불어대고,낙엽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나뒹굴고,
식사 때가 되면 삶은 감자 하나를 죽지 못해 우기적 우기적 씹어먹고,
식사후엔 물끄러미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거친 모래바람에 휘몰아치는 황량한 황야를 무표정으로 쳐다보는게 그들의 일상이다.
BGM음악(장송곡 같은 음악)의주제 선율이 영화시작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음습하게 계속 연주되고, 강풍은 계속해서 불어대고, 장면은 서서히 멈추고 침묵으로 변했다가 끝내 사라지고, 무기력, 허무, 절망, 권태,잠식, 종말의 구도로 몰고 간다.
정지된 화면을 보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싼 소품과 풍경을 관찰이라도 하듯
한없이 오래 지리하게 보여준다.
삶에 대한 염세주위와 죽음, 그리고 인간에 대한 불신이 영화속에 뭍여있다.
'인간의 순수한 본성은 결국 파멸하고 타락한다. 인간은 무언가를 바쁘게 만들어서
그걸 취한다'라고 말하는 친구의 말을 헛소리라고 내친다.
아버지의 침상.
착취 당하는 말.
휘몰아치는 강풍.
장송곡 같은 음악.
마지못해 억지로 삶은 감자를 먹는 모습.
압박하고, 누르고,짓이기고,몰아치고,맴돌고, 옥죄고, 끝내는 사라지는 모습 들.
영화는 살아가는 것을 형벌과 다름 없다고 말한다.
변하지 않은 듯 변하는 삶은 결국 죽음을 향한 전진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먼지를 일으키며 끊임없이 부는 거센 바람은 삶의 풍파를 의미한다.
마부가 되풀이 하는 '먹어라'라는 말은 살아 있으니 살아가야 한다는 삶의
맹목을 은유한다.
영화를 보고나면 한없이 마음이 우울하게 느껴지지만 우울한 감정만을
생성시키지는 않는다.
삶에 대한,일상에 대한 성찰을 제공한다.
놀라운 이미지의 장면들이 단연 일품이다.
흑백영화에 롱테이크의 장면들을 구현한 장면들이 발군이다.
뉴욕타임즈가 격찬했던 '현존하는 최고의 영화 감독' '베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을 오래토록 잊지 못할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