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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옛 수도이자 아름다운 호수와 수목 공원이 있는 잘 어우러진 도시
양곤은 미얀마의 옛 수도이자 아름다운 호수와 수목 공원이 있는 잘 어우러진 도시이다.
(현재 미얀마의 수도는 네피도로 2006년 수도로 지정되었다.)
면적 598.75Km2, 인구 약434만명(2010년)으로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랑군(Rangoon)이었으나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변경하면서 랑군에서 양곤으로 도시명이 변경되었다. 또한 2006년에는 미얀마 정부가 공식 수도를 양곤에서 네피도로 옮기기도 했다
1755년 미얀마의 알라웅파아(Alaungpaya)왕이 몬족의 다곤 마을을 정복하고 그곳을 전쟁의 끝이라는 뜻의 양곤으로 개명하며 다곤 주변에 정착지를 세웠다.
이 도시의 상징은 매년 수만명의 순례자들이 다녀가는 쉐다곤 파고다이다. 이 탑의 역사는 2,5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며, 부처의 8가닥 머리카락을 모셔두기 위해 건립했다.
현재 저렴한 노동력으로 많은 기업들이 현지에 공장을 세우며 투자를 하고 있으며, 특히 양곤은 많은 다국적 기업들과 해외 공관이 있다. 그러나 아직 폐쇄적인 정책으로 인해 양곤을 제외하고는 편의시설을 찾아 볼수가 없다.
양곤은 미얀마의 전(前) 수도로 우리에게는 랭군(Rangoon)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1755년 알라웅페야 왕이 남쪽의 ‘다곤’이라는 지역을 정벌하면서 건설된 도시로, ‘분쟁의 종식’이라는 뜻의 ‘랭군’을 영국인들이 영어식으로 부른 것이 ‘양곤’이다.
아시아의 진주로 불리는 양곤 시는 북부에 있는 제2의 도시 만들레이와 더불어 미얀마를 지탱해 가는 도시이다. 2005년 행정 수도를 네피도(Naypyidaw)로 옮기기 전까지 미얀마의 수도였으며 행정, 경제, 교육의 중심 도시였다. 양곤의 현재 인구는 약 700~750만 명으로 양곤에 체류하는 한국인 수는 약 1,500~2,000명에 이른다.
양곤은 80% 이상이 녹지, 나무, 숲으로 뒤덮여 있어 ‘숲의 도시’라는 느낌이 든다. 시내 중심부에 깐도지라는 거대한 인공 호수가 자리하고 있으며 북쪽 지역에도 거대한 인야 호수가 있다. 양곤 강이 시 주위를 휘돌아 안다만(Andaman) 바다로 흘러든다. 안다만 바다와는 30km 떨어져 있으며, 옛날에는 항구 도시로 해상 물류의 큰 축을 차지했다.
양곤은 20~30년이 넘은 오래된 차량에서 나오는 매연으로 오염이 심했었는데 최근 들어 오래된 차량의 신형 교체로 공기가 많이 좋아졌다. 또 다른 커다란 변화는 최근 몇 년간 차량의 급속한 증가로 양곤 시내에도 교통 정체 현상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양곤의 주요 도로 위로 고가 도로가 건설 중이며, 완성되면 교통 체증도 어느 정도 해결될 전망이다. 또한 양곤 도심에서는 고층 빌딩과 주상 복합 아파트의 건축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양곤
날씨:구름많음 25℃/34℃ 2017.11.18
인구:약600만명
▦ 양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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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폭파사건의 현장인 아웅산 추모탑 경유(차창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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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미터 길이의 수려한 차욱타지 와불
▶미얀마의 역사와 문화의 상징인 99M 황금대탑 쉐다곤 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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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어 pagode에서 유래한 동양에서 볼 수 있는 탑으로, 특히 불탑(佛塔)·사원(寺院)을 가리키는데, 미얀마 양곤 시내의 웅대한 쉐다곤파고다가 대표적이다.
쉐지곤 파고다
미얀마 바간. 바간왕조의 아나우라타 왕이 짓기 시작하였으며 부처의 앞머리뼈와 치아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파고다는 특히 불탑(佛塔)·사원(寺院)을 가리키며, 포르투갈어 pagode에서 유래한다. 페르시아어 부트 카다(butkadah:신이 사는 곳), 또는 산스크리트의 바가바트(bhagavat:聖者·신)가 전화(轉化)한 것이라고 하나 명확한 어원(語源)은 밝혀지지 않았다. 미얀마에서는 보통 구미인이 불탑·사원을 호칭할 때 사용하며, 버마어로 파야(phaya:神·佛), 제디(Zedi:塔·塔廟:산스크리트의 chaitya와 같다)라고 불리고 스투파 (st後pa:塔)와 마찬가지로 불타와 제자의 유골·의복 등을 넣어 두는 것과 불교경전·불상을 넣어 두는 것이 있다. 금박으로 덮인 미얀마 양곤 시내의 웅대한 쉐다곤파고다는 대표적인 것이다.
쉐다곤 파고다-시가지 북쪽의 언덕 위에는 광대한 정사각형(둘레 426 m)의 기단 위에 높이 100m의 황금색 탑 쉐다곤이 빛나는데 이는 불교 나라 미얀마의 상징이며 평일에도 참배자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거바예 파고다-미얀마 양곤. 1954년~1956년에 개최된 제6차 불교경전대회를 위해 1952년에 세워졌다.
아난다 파고다-미얀마 바간. 1091년에 지어졌으며 부처의 끝없는 지혜를 대표하는 파고다로 알려져 있다.
틸로밍로 파고다미얀마 바간. 난타웅마(Nantaungmya)왕이 이곳에서 왕위 계승자로 지목된 것을 기념하여 1218년에 지었다.
차욱탓치 파고다
차욱탓지 파고다 와불상미얀마에서 네번째로 큰 와불이다.
파고다 안에는 길이 67m, 높이 18m 의 거대한 와불이 있다. 미얀마에서 네번째로 큰 와불이다. 1907년에 만들었으나 파괴되어 1966년에 다시 만들었다. 발쪽으로 가면 거대한 와불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도록 계단이 마련되어 있다. 그 위에서는 와불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분홍색의 부처님 발바닥을 칸칸이 나누고 그 안에 금색으로 부조를 새겨 놓았는데, 이는 부처의 108번뇌를 의미한다고 한다. 옆에는 각각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다. 파고다 내부의 벽에는 글자가 빼곡히 써 있는데, 이는 헌금 한 사람들의 이름이다. 한국인의 이름도 찾아 볼 수 있다.
차욱탓지 파고다 와불상-미얀마에서 네번째로 큰 와불이다. 거대한 와불이 있는 곳이다.
차욱탓지 파고다 내부-미얀마 양곤. 벽에는 헌금을 한 사람들의 이름이 써 있다.
차욱탓지 파고다 와불상 발바닥-발바닥에는 부처의 108번뇌가 새겨져 있다.
차욱탓지 파고다의 불교 신자-미얀마 양곤. 와불 앞에서 기도를 하는 불교신자의 모습.
로카찬다 파고다
미얀마 양곤. 세계 최대의 옥불을 모시고 있다.
이곳은 세계 최대의 옥불을 모신 곳으로 유명하다. 옥으로 만들어진 불상은 유리상자에 고이 모셔져 있는데, 유리에 빛이 반사되어 불상을 자세히 보기 어렵다. 이 옥불은 불상을 조각하는 일을 하는 우마웅지라는 사람이 기증했다고 한다. 옥불을 만달레이에서 양곤까지 이동시키는데 11일이 걸렸는데, 이 기간 동안 미얀마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옥불을 이동하는 모습과 옥불을 기증한 우마웅지가 군부들에게 환영받는 모습 등을 그린 그림을 파고다의 계단에서 볼 수 있다.
로카찬다 파고다 옥불-미얀마 양곤. 세계 최대의 옥으로 만든 불상이다. 세계 최대의 옥불을 모시고 있다.
로카찬다 파고다 그림-미얀마 양곤. 옥불을 기증한 우마웅지가 군부에게 환영받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로카찬다 파고다-미얀마 양곤. 계단으로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만달레이에서 양곤까지 세계 최대의 옥불을 옮기는 모습의 그림이 보인다.
까바예 파고다Kabar Aye Pagoda
미얀마 양곤. 1954년~1956년에 개최된 제6차 불교경전대회를 위해 1952년에 세워졌다.
'거바예'라는 말은 '세계 평화'를 의미한다. 즉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파고다라는 의미이다. 이 파고다는 1954년~1956년에 개최된 제6차 불교경전대회를 위해 1952년에 세워졌다. 파고다 안에 들어가면 불상들이 줄지어 있다. 특히 신자들이 기증한 다양한 모습의 불상이 많다. 거바예 파고다에는 '세계 평화 파고다'라는 이름에 걸맞에 세계의 불상들이 모여있다. 한국의 불상은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불상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까바예파고다 불상-미얀마 양곤. 금도금을 하여 매우 화려하다. 거바예파고다에는 불교신자들이 기증한 다양한 불상들이 많다.
까바예파고다 세계의 불상-미얀마 양곤. 세계 각국의 불상이 전시되어 있다.
까바예파고다 한국 불-상미얀마 양곤. 거바예파고다에는 세계 각국의 불상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의 불상은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불상을 재현하였다.
깐도지 호수.깐지도 국립자연공원 Kandawgyi Nature Park, Kandawgyi Garden
깐도지국립자연공원
미얀마 양곤. 넓은 호수와 잘 꾸며진 정원이 있는 곳으로 양곤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많이 이용된다.
넓은 호수와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는 곳이다. 이 일대는 국립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미얀마인은 무료로 들어갈 수 있지만 외국인은 입장료를 내야 한다. 깐(Kan)은 호수, 도시(Dawgyi)는 왕실이라는 의미이다. 1917년에 영국 식민지 정부에 의해서 만들어진 유럽식 정원이다. 호수에는 거대한 새 모양의 배가 떠 있다. 이것은 힌두신 비슈누가 타고다니는 새인 커러웨익(산스크리트어로 가루다)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공원 내의 조형물이 아니라 고급 레스토랑이다.
깐도지국립자연공원-호수를 비롯해 넓은 정원이 있는 곳으로 1917년에 영국 식민지 정부에 의해서 만들진 유럽식 정원이다. 거대한 새 모양의 배는 힌두신 비슈누가 타고다니는 새인 커러웨익(산스크리트어로 가루다)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웅산 국립묘지
양곤 북부 쉐다곤파고다(Shwedagon Pogoda) 북문(北門)의 정면 언덕에 있다. 미얀마의 독립영웅 아웅산(Aung San)이 1947년 7월 19일 양곤의 회의실에서 행정참사회 회의 도중 동생을 포함한 6명의 행정참사원과 함께 암살당한 뒤 모두 이 곳에 묻혔는데, 묘지 이름은 아웅산의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다.
이후 미얀마의 국가 요인이나 유공자들이 묻히는 묘소로서, 매년 이 곳에서는 공식적인 헌화 행사가 열린다. 또 미얀마를 방문하는 외국의 국빈들도 방문 도중 반드시 참배하는 국가적인 장소이다. 그러나 이 묘지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1983년 10월 9일, 당시 한국의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일행이 이 묘소를 참배하던 중 북한 테러분자가 장치한 폭발물이 폭발하면서 한국인 17명, 미얀마인 7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을 당하는 대참변, 이른바 아웅산묘소폭파암살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로는 일반인, 특히 외국인의 참관은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다.
아웅산 묘소 폭파암살사건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 있는 아웅산묘소에서 한국의 외교사절 다수가 북한 테러분자의 폭파암살로 사상(死傷)한 사건.
이 날 대통령 전두환의 서남아 ·대양주 순방의 첫 방문지인 이곳에서 대통령의 아웅산묘소 참배행사를 위하여 미리 대기중이던 부총리 서석준 이하 여러 정부요인, 취재차 수행했던 기자 등 17명이 북한 테러분자가 장치한 폭발물의 폭파로 사망하고, 합참의장 이기백 등 13명이 중경상을 입는, 세계 외교사상 유례없는 일대 참변이 일어났다.
화를 면한 대통령 전두환 내외는 모든 방문예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하였다. 국내외의 비분과 비탄 가운데 미얀마정부는 한국에 조문사절을 보내는 한편, 주범 2명을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북한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984년 10월 미얀마정부는 아웅산사건은 북한의 소행이라고 국제연합에 보고하였다.
버마(현재의 미얀마)의 수도 랭군(현재의 양곤)의 아웅산묘소에서 한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북한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폭파사건.
1983년 10월 9일에 발생했으며, 이 사고로 대통령 공식 수행원과 수행 보도진 17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한 현장에 있던 미얀마인 3명도 사망하였다. 사고 당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했다.
희생된 17명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서석준(徐錫俊), 외무부장관 이범석(李範錫), 상공부장관 김동휘(金東輝), 동자부장관 서상철(徐相喆), 대통령 비서실장 함병춘(咸秉春),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심상우(沈相宇),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김재익(金在益), 재무부차관 이기욱(李基旭), 주 버마대사 이계철(李啓哲),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하동선(河東善), 대통령 주치의 민병석(閔炳奭), 농수산부차관 강인희(姜仁熙), 과학기술처차관 김용한(金容澣), 청와대 공보비서관 이재관(李載寬) 등의 공식 수행원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동아일보 기자 이중현(李重鉉), 경호원 한경희, 정태진 등도 사망하였다.
부상자는 합참의장 이기백(李基百), 공보비서관 최재욱(崔在旭), 외무부 의전국장 최상덕(崔尙德), 한국일보 기자 윤국병(尹國炳), 중앙일보 기자 송진혁(宋鎭赫), 동아일보 기자 최규철(崔圭徹), 연합통신 기자 김기성(金基成), 코리아헤랄드 기자 김기석(金基石), 연합통신 사진부장 최금영(崔琴煐), 문화공보부 직원 임삼택(林三澤)·김상영(金相榮), 경호원 김상태 등이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을 순방중이었으며, 첫 방문지에서의 이같은 사건에 따라 나머지 순방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는 비상경계태세를 결정했으며 10월 13일 희생된 17위에 대한 국민장 거행 후 연일 벌어진 북한만행규탄대회를 고비로 대북보복론까지 대두되었다.
그러나 10월 20일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한 대북한 경고와 더불어 자제론이 천명됨으로써 고조되었던 남북한간의 위기국면은 진정되었다. 한편, 미얀마 정부는 사건발생 즉시 5인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고 암살범 추적수사에 총력을 기울여 10월 11일과 12일 사이에 북한에서 온 강민철과 진 모 등 2명을 체포하고 1명을 사살하였다.
뒤이어 미얀마 정부는 외무장관을 진사조문사절로 파한했으며, 10월 17일 이 사건이 북한의 특수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것임을 공식발표하고, 11월 4일 북한에 대한 외교단절 및 정권승인 취소조처를 취하였다.
이 조처에 따라 미얀마 주재 북한공관원들이 이틀 뒤 미얀마를 떠났으며, 다음날인 11월 7일 일본 정부가 대북한 제재조처를 취했으며 잇따라 미국 등 우방국들의 대북한 제재조처가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이 암살사건과 무관함을 강변했으나 11월 22일 미얀마 검찰당국에 체포된 범인들이 죄상을 밝힘으로써 북한에서 전대통령과 수행원들을 살해하기 위해 인민군 장교들로 구성된 암살단을 애국동건호에 탑승, 밀파했다는 사건전모가 공개되었다.
그 뒤 12월 9일 랭군지구 인민법원 제8특별재판부에서 두 테러범에 대해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국제여론의 비난 속에 제3세계의 지지기반이 동요되었으며, 우리나라는 남남협력(南南協力)을 내세운 제3세계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진척을 보게 되었다. 이후 2007년 4월에 이르러서야 북한과 미얀마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아웅산Aung San(1915.2.13 ~ 1947.7.19)
독립운동가
미얀마의 독립운동 지도자.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C.애틀리와 아웅산 간에 ‘애틀리-아웅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미얀마독립을 위한 제1보를 내디뎠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9일 양곤의 회의실에서 행정참사회 회의 중 암살당하였다.
중부 미얀마의 마구에현(縣) 나마우시에서 출생했다. 1932년 양곤대학에 들어가, 1936년 동맹휴학을 지도하였다. 같은 해 미얀마 전국학생연합의 초대 서기장에 뽑혔고, 1938년에는 독립을 표방하고 나선 급진정당인 타킨당에 입당, 서기장이 되었다.
영국 당국의 체포령이 내리자 1940년 8월 일본으로 탈출하여 미얀마 공작기관의 스즈키[鈴木] 대좌(大佐)의 원조를 약속받고 하이난[海南]섬에서 미얀마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얀마독립의용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에 침입, 바 마우가 이끄는 임시정부(1943~1945)의 국방장관이 되었다. 1944년 8월 반(反)파시스트 단체인 인민자유연맹(AFPFL)을 조직, 1945년 연합군의 반격에 호응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후 AFPFL의 총재가 되어 총독의 행정참사회에 참가하였고,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C.애틀리와 아웅산 간에 ‘애틀리-아웅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미얀마독립을 위한 제1보를 내디뎠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9일 양곤의 회의실에서 행정참사회 회의 중 형을 포함한 6명의 행정참사회원과 함께 암살당하였다.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1945.6.19~)
양곤출생,노벨평화상(1991),유네스코인권상(2002)
미얀마의 정치가. 199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으며, 2015년 총선 승리를 이끌어 미얀마의 오랜 군부 집권을 종식시켰다.
양곤에서 출생하였다. 미얀마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아웅산의 딸로 15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학 등을 공부하였다. 1988년 영국에서 귀국하여 반독재 시위에 참가하였고, 민족민주연합(NLD)을 결성하여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군사정변으로 가택연금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을 계속하여 1990년 5월 다당제 선거 실시의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총선거에서 NLD가 친군부세력인 민족통일당(NUP)을 물리치고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내란을 선동하였다는 이유로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0년간 가택연금과 해제가 반복되었다. 군부 독재에 비폭력 저항을 지속해 온 공로로 199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군사정부의 귀국 방해를 우려하여 영국인 남편과 아들이 대신 수상하였다. 1999년 남편이 암으로 사망할 당시에도 가택연금 상태로 출국 할 수 없었다.
2012년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득표율로 국회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제도권 정치 생활을 재개하였다. 2015년 11월 총선에서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연합(NLD)이 압승을 거둠으로써 미얀마의 군부독재를 종식시킬 수 있었다.
외국인을 배우자로 둔 경우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미얀마 법 조항으로 인해 2016년 3월 수치 여사의 운전자 출신이자 측근인 틴초(Htin Kyaw, 1948년 1월 4일생)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2016년 10월 현재 수치 여사는 외교부장관과 대통령 자문역을 맡으면서 실질적인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다.
아웅 산 수 치 민주국민연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사무총장은 1945년생으로 미얀마 건국의 아버지 아웅 산(Aung San) 장군과 도 킨 치(Daw Khin Kyi) 전 인도 대사의 딸로, 양곤(Yangon)에서 출생하였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72년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 본부에서 근무하였다. 1990년 5월 총선에서 아웅 산 수 치가 이끈 민주국민연맹이 압승했으나 선거 무효화로 집권하지 못하였다.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1995년 민주국민연맹 사무총장이 되었다. 1989년 7월 ~ 1995년 7월, 2000년 9월 ~ 2002년 5월, 2003년 5월 ~ 2011년 11월 세 차례에 걸친 가택연금을 당하였다.
아웅 산 수 치에게 있어서 1988년은 운명의 해였다. 15살 때부터 시작된 30여 년에 이르는 외국 생활 동안 그녀는 학자로서, 평범한 주부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운명의 1988년 어머니 킨 치 여사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영국에 머물던 아웅 산 수 치는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8월 버마에서는 8888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버마의 국민들은 건국의 아버지 아웅 산의 딸 아웅 산 수 치가 자신들을 위해 행동해주기를 소망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그녀의 운명이자 의무였다. 그저 ‘평범한 여자’의 인생을 살고 싶었을지도 모를 40대 중반의 아웅 산 수 치는 안온했던 삶을 뒤로 한 채 가시밭길 같은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웅 산 수 치는 버마 국민에게 희망의 이름이자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다.
군부정권에 의한 14년의 가택연금
그러나 1988년 8월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이후 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아웅 산 수 치가 직접적으로 정치 일선에서 활동 한 것은 불과 7년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14년 세월 동안 그녀는 버마의 군부정권에 의해 가택연금 되어 자유를 박탈당했다. 최근에는 그마저도 불안했던지 군부는 그녀를 버마에서 악명 높기로 유명한 인세인 교도소로 옮겨 수감하고 있다. 현재 버마의 정권을 잡고 있는 군부세력이 말하는 아웅 산 수 치의 명목상 죄목은 내란죄이다. 그녀가 획책한 내란이라는 것은 바로 군부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이다. 버마 전체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아웅 산 수 치가 한번 움직일 때 마다 군부정권은 위협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군부는 쿠데타라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자신들과 다르게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는 아웅 산 수 치의 존재는 그 존재만으로 치명적이다. 그러기에 군부는 아웅 산 수 치가 자유롭게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을 내버려 둘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웅 산 수 치를 여타 정치범처럼 함부로 죽일 수도 없다. 아웅 산 수 치는 버마 건국의 아버지이자 군대를 창설한 국민 영웅 아웅 산의 딸이다. 군부 내에서도 아웅 산 장군에 대한 존경심은 드높다. 군부정권 자체의 뿌리이자 명분일지도 모르는 아웅 산의 딸 아웅 산 수 치는 군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자유롭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제거할 수도 없는 존재, 아웅 산 수 치는 그렇게 버마 군사정권에 의해 정치활동 기간의 2/3를 감금당한 채 보내야 했다. 감금은 그러나 그녀의 정치 인생의 끝이 아니다. 아웅 산 수 치의 감금은 그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버마 국민들의 더 강한 지지와 세계적인 명성을 이끌어 내고 있다.
영웅의 딸, 그러나 평범한 인생을 살고자 했던 여인
아웅 산 수 치의 아버지 아웅 산장군은 버마 국민들에게는 국부와 같은 존재이다. 버마는 1824년부터 영국과의 세 차례 격렬한 전쟁 끝에 패배하여 1886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아웅 산은 버마의 독립투사로 영국과 일본에 무력 항쟁하여 버마의 독립을 이끌어낸 사람이다. 그는 1940년대 영국을 몰아내기 위해 30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일본과 손잡고 일단 영국 세력을 버마에서 몰아낸 아웅 산 장군은 이후 다시 연합군과 손잡고 버마에 세력을 뻗친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을 획득했다. 그는 60여 년에 걸친 버마의 식민지 역사를 끝낸 버마 건국의 아버지였다.
아웅 산 수 치는 1945년 6월 19일 아웅 산과 그의 아내 킨 치 사이에서 세 번째 아이이자 고명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아버지 아웅 산의 이름과 할머니 수 그리고 어머니 치의 이름을 골고루 딴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버마의 독립을 획득한치 산은 채 정부가 구성되기 전에 정적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32년이라는 짧은 인생 동안 오로지 버마를 위해 살았던 아웅 산은 그 투명한 삶과 업적으로 인해 버마의 국민 영웅이 되었다. 아웅 산의 유족들은 영웅의 유족으로 추앙 받았고 영웅의 유족답게 살아야만 했다. 1962년 네 윈에 의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아웅 산의 미망인 킨 치는 중앙 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아웅 산 수 치는 1960년 인도 대사로 부임하게 된 어머니를 따라 인도로 건너갔다. 이때 시작한 외국 생활은 그녀가 1988년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버마로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1962년 아버지의 동료였던 네 윈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조국은 버마식 군부사회주의 독재정권으로 바뀌었고 아웅 산 수 치는 망명 아닌 망명상태로 외국을 떠돌았다. 그녀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와 경제, 철학을 공부하고 뉴욕에 있는 유엔에서 일했다
아웅 산 수 치는 국적을 미국으로 바꾼오빠 아웅 산 우처럼 떠나 온 조국 버마와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갈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녀는 버마인이 아닌 ‘영국인’ 아시아 연구자 마이클 에어리스와 결혼하면서 조국 버마에 대한 아웅 산의 딸로서의 부채의식을 완전히 벗어버린 듯 했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부탄과 영국에서 살았다. 아버지 아웅 산에 대한 책을 쓰려고 자료 조사차 일본 교토에 머문 1년 외에 그녀는 영국인 남자와 결혼한 아시아계 주부로 두 아들을 키우며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을 가꾸어 나갔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평범한 여인이 가질 수 있는 행복 따위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어머니가 쓰러지고 조국 버마가 그녀를 불러 들였다.
1988년 8월 8일 아침 8시, 8888항쟁
당시 버마는 26년간 계속된 군부독재와 이에 따른 경제파탄과 인권유린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아웅 산과 함께 독립 운동을 했고 독립 후 군부의 수뇌가 된 네 윈은 1962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군부정권의 최고 권좌에 앉아서 젊은 날의 순수한 의기를 잃어버리고 탐욕스러운 독재자로 변했다. 네 윈과 그를 둘러 싼 군사 독재정권은 식민지 기억에 대한 지나친 강박증으로 1960년대 새삼스럽게 대외적으로 쇄국 정책을 폈다. 온전한 사회주의라기보다는 동양적 가치관과 불교가 습합된 버마식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표방하였으며, 서방사회를 적대시하며 제 3세력의 중립외교정책을 표방하였다. 시기 적절하지 않은 정책들과 독재 권력의 부정부패는 경제 파탄을 가져왔다. 버마의 국민들은 폭압과 가난 속에서 질식사할 상태에 이르렀다.
대학생들이 먼저 나섰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 영국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하던 때부터 자유와 인권과 독립의 상징이던 공작새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군부는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많은 학생들이 군부의 총칼아래 희생되었다. 꽃다운 젊은이들의 희생에 그 동안 잠자코 있던 버마 국민들은 분노했다. 1988년 8월 8일 8시 수도 양곤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불교 승려와 시민들이 대거 참여한 8888항쟁이 일어났다. 군부는 언제나처럼 이들을 총과 칼로 진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진압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시민들의 분노는 그 이상으로 강해졌고 시위대의 규모는 커져갔다. 시민과 학생, 승려들까지 수 천 명의 사람들이 군부의 총칼 앞에 죽어갔지만 시위는 진압되지 않았다. 사태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누군가 나서 잔혹한 군부에 경종을 울리고 선량한 국민들의 대변인이 되어 주어야만 했다.
그 해 4월 버마로 돌아와 오로지 어머니의 간호에만 힘쓸 뿐 정치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아웅 산 수 치는 8888항쟁을 지켜보면서 더 이상 자신이 버마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중들은 그녀를 원했다. 국민영웅 아웅 산의 딸이 나서 군부를 꾸짖고 새로운 세상을 국민들에게 가져다 주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8월 15일 아웅 산 수 치는 정부에 국민들의 요구에 응할 것을 촉구하는 ‘화평안’을 제안했다. 그리고 8월 26일 희생당한 시민 시위대의 시신이 안치된 양곤의 종합병원 앞에서 몇 십만의 남녀노소 버마 국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민주화를 위한 연설을 하였다. 이로써 버마민주화의 상징, 아웅 산 수 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선거에서의 대승리, 그러나 오지 않는 봄
아웅 산 수 치가 정치 일선에 나서자 버마 국민들은 열렬히 환호하며 그녀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군부도 국민들의 민주화 의지에 어느 정도 양보를 하는 듯 한 제스처를 보였다. 일당 독재를 폐지하고 다당제 정치와 선거를 약속했다. 시민들이 승리한 듯이 보였다. 아웅 산 수 치는 군부정권에 맞서 민주지사들과 함께 민주민족동맹(NLD)를 창설하고 사무총장직을 맡았다. 그녀는 전국을 돌며 새로운 버마에 대한 희망을 연설하고 군부 독재의 종식을 촉구하였다. 아웅 산 수 치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수 천 수 만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그녀에게서 버마의 장밋빛 미래를 보았다.
잔혹한 진압에 대한 국제적 비난과 민주화에 대한 거센 국민의 요구에 잠시 주춤했던 군부는 아웅 산 수 치의 행보에 당황했다. 군부의 양보는 잠시 궁지를 모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을 뿐 추호도 정권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과거 몇 차례 순박하고 평화로운 버마의 국민들은 때때로 군부의 이러한 조삼모사격 음모에 쉽게 좌절하기도 하였다. 군부는 이번에도 국민을 기만하려 하였다. 그러나 아웅 산 수 치의 등장으로 계획은 어그러졌다. 아웅 산 수 치를 따르는 버마의 국민들은 더 이상 총과 칼로 위협하고 몇 개의 당근정책을 내놓으면 거기에 안주하는 다루기 쉬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군부 정권은 아웅 산 수 치를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네 윈의 퇴진 이후 신군부의 소 마웅은 다시금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 동안 소강상태였던 시위대에 대한 잔혹한 진압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1989년 7월 아웅 산 수 치를 가택 연금하였다. 아웅 산 수 치를 국민들과 격리시키면 시위는 사라지고 군사 독재가 가능 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군부의 커다란 오산이었다. 수도인 양곤이나 대도시의 식자층만이 자신들을 반대할 뿐 국민 전체는 아직도 군대를 믿고 따른다고 여긴 군사 정권은 8888항쟁 때의 약속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1990년 5월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결과는 아웅 산 수 치가 결성한 민주민족동맹(NLD)이 82%의 지지를 받아 압승하였다.그러나 군부는 엄연한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평화로운 정권이양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오히려 선거결과를 무효화 하고 민주 인사 수 백 명을 투옥하였다. 총과 칼이 설치는 군부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선거 시기만 피해보자는 생각으로 1년 기한으로 연금한 아웅 산 수 치의 가택연금을 무기한으로 연장하였다. 한때 민주주의의 봄이 오는 듯했던 버마에는 다시 암흑이 내려 앉았다.
계속되는 버마의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아웅 산 수 치의 근황
선거의 승리도 좌절도 아웅 산 수 치는 가택연금 된 상태에서 맞았다. 그녀는 단식도 하였고 국제적인 청원도 하였지만 버마 군부는 아웅 산 수 치를 가둬 둔 채 총칼을 휘두르며 요지부동 지금까지 버마를 통치 하고 있다. 그 사이 아웅 산 수 치는 199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버마 정부는 아웅 산 수 치의 가택 연금을 풀어주지 않았다. 결국 이 시상식에는 그녀의 남편과 아들이 아웅 산 수 치의 사진을 들고 대신 참석하였다. 1995년에는 국제적 압력에 못이긴 버마 정부가 아웅 산 수 치를 잠깐 가택연금에서 풀어주기도 하였다. 그녀는 이 시기 동안 여전히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운동을 계속하였다. 1999년에는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가 사망하였지만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외국으로 나가면 군부가 그녀를 버마 땅으로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을 염려해서였다. 결국 2000년에 버마 군사정권은 아웅 산 수 치를 다시 가택연금하고 양곤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2002년 국제 연합특사가 버마에 대한 경제 제재를 일부 풀어주는 조건으로 아웅 산 수 치를 가택연금에서 풀려나게 했지만 이듬해인 2003년 군사정권은 그녀를 또 집에 가두어 버렸다. 2008년에는 5년 시한이던 가택연금을 1년 더 연장하더니 최근에는 그녀의 집에 낯선 미국인이 잠입한 사건을 꼬투리 잡아 그녀를 인세인 교도소로 옮겨 구금하고 있다. 그녀의 죄목은 ‘공중보안법’ 위반이고 군부의 시나리오에 의하면 5년 형을 내릴 것이라고 한다. 세계는 아웅 산 수 치에 대한 버마 당국의 처사를 맹 비난 하고 민주화를 향한 버마 국민들의 소망을 무시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버마 정부에 대해 경제 제재까지 가하고 있지만, 버마 군사정권은 아직까지도 묵묵부답,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게 위해 오늘도 총칼로 무장한 채 버마를 통치하고 있다.
Shwedagon Pagoda
탑의 나라 미얀마에서도 가장 유명한 쉐다곤 파고다는 화려함과 장대함, 그리고 섬세한 조각품들로 여행자들의 마음을 사로 잡는 곳이다. 물론 현지인들게에는 자존심과 경배의 대상으로 주로 참배를 하러 오는 현지인들과 많이 접하게 된다.
쉐다곤 파고다는 약 2,500년 전 부처님 살아있을 때 건립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으며, 버마의 두 무역상인 타푸사와 발리카 두 형제가 직접 인도에 건너가 부처님으로부터 여덟발의 부처님 머리카락을 얻어와 봉안하고 파고다를 건립했다고 한다.
17세기에는 8차례에 걸친 지진으로 일부가 손상되고, 1786년에는 대지진으로 탑의 정상이 일부 무너져 내렸으나 현재는 그 때 그모습 그대로 복원되여 탑의 아름다움에는 지장이 없다.
이 탑의 기하학적인 균형미와 섬세한 조각품 그리고 주위의 구조물들은 이 금탑의 존재를 더욱 빛내주고 있다. 높이 99미터에 사용된 금의 양은 약 7톤, 그밖에도 다이아몬드와 루비 등 각종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어 눈이 부시다.
특히, 저녁노을이 질 무렵 쉐다곤 파고다를 방문한다면, 노을빛과 탑에서 나온 광채에 더욱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쉐다곤 파고다
미얀마 옛 수도 양곤의 북쪽 언덕에 있는 거대한 불탑(佛塔).
미얀마 양곤. 미얀마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부처의 유품과 머리카락이 있는 불교 성지이다.
몬족(族)이 미얀마에 세운 페구왕조 때인 1453년에 건설되었다. 둘레는 426m, 높이는 100m이다. 기단부는 정사각형이고, 기단 윗부분은 원뿔꼴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급격히 좁아지는 형태를 취한다. 겉면은 전체가 황금으로 덧씌워져 있고, 내부에는 부처의 유품이 들어 있다.
미얀마인(人)들의 상징물이자 세계 불자들의 성지순례지로, 원래는 금판(金板)이 붙지 않았으나, 1990년대부터 관리위원회에서 일반인들에게 금판 기증을 권유하면서 붙이기 시작하였다. 또 미얀마 역대의 왕과 불교도들이 기증한 금판으로 외벽을 장식하면서 화려해져, 지금은 각종 보석과 황금으로 뒤덮인 세계적인 불교유적으로 자리잡았다.
탑 꼭대기에는 73캐럿의 다이아몬드를 포함해 총 5,448개의 다이아몬드, 2,317개의 루비와 사파이어, 대형 에메랄드가 박혀 있어 해가 뜨는 아침과 석양 무렵에는 온통 황금 빛으로 반짝인다. 경내 북서쪽에는 무게가 23t이 되는 거대한 종(鐘) 마하 간다(Maha Gandha)가 있고, 탑의 기단 부분에는 64개의 작은 불탑이 탑을 에워싸고 있다. 또 불탑을 중심으로 72개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흩어져 있고, 이러한 불탑에는 수많은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다.
불탑 안에는 대리석과 화강암 보도(步道)가 있는데, 맨발로만 들어갈 수 있다.
쉐다곤 파고다 경내-미얀마 양곤. 바닥은 대리석으로 깔려 있으며 크고 작은 건물들이 많이 있다.
관욕의식-미얀마 양곤 쉐다곤 파고다. 불상에 물을 끼얹으며 부처님을 목욕시킨다. 탐욕을 씻는 것을 상징한다.
쉐다곤 파고다 사자상-미얀마 양곤. 파고다를 지킨다는 의미이다.
쉐다곤 파고다 주변의 탑-미얀마 양곤. 쉐다곤 파고다 기단부 주변에는 작은 탑들이 있으며 각 탑에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탑 앞에는 ?을 지킨다는 동물과 사람 등의 조형물들이 있다.
쉐다곤 파고다 조형물-미얀마 양곤. 각 조형물은 파고다와 탑을 지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쉐다곤 파고다 다이아몬-드미얀마 양곤. 파고다의 꼭대기에 있는 다이아몬드.
쉐다곤 파고다 불상-미얀마 양곤. 쉐다곤 파고다 기단부 주변에는 작은 탑들이 있으며 각 탑에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