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부엌
의령 산골에서 태어난 소년이 십 리 떨어진 읍내로 처음 나가본 기회는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해마다 군청 소재지 읍내에서 당시 관내 30여 개 초등학교 대표 학생들이 한 자리 모여 학예대회가 열렸다. 바로 손위 형의 담임이 인솔교사가 되어 나간 학예대회에서 형은 사생화부에 나가고 나는 상상화부에 나갔다. 사생화부는 초등 고학년이고, 상상화부는 초등 저학년 대상이었다.
그날 오전 읍내 중심 학교에서 학예행사를 가졌다. 내가 참가한 부분의 주제는 ‘어머니’였다. 사실 어머니는 상상으로 그릴 주제가 아니라 매일 뵙는 얼굴이라 나는 그릴 대상이 많아 고민이었다. 밭이랑에서 수건을 두르고 김매는 모습이 떠올랐고, 냇가로 나가 빨래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내 밑으로 두 누이동생이 있었기에 앞가슴을 헤쳐 젖을 먹이는 모습도 보며 자란 막내아들이다.
학예대회가 열린 학교는 역사가 오래되어 넓은 운동장과 웅장한 건물에서 산골 소년은 주눅이 들었다. 교정의 수목은 녹음이 우거지고 봄비가 살짝 내리던 날 상상화부는 교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앞서 언급된 세 가지 말고 남겨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기로 했다. 어머니가 길쌈을 해서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짜는 모습과 부엌에서 밥을 짓는 장면 가운데 하나를 고르려고 했다.
대마의 껍질을 벗겨 가닥 내어 무릎에 비벼 길쌈을 해서 실로 이었다. 삼실은 양잿물로 숨을 죽여 겨울밤에 베틀에 앉아 베를 짜던 어머니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다. 그런데 베를 짜는 어머니 모습을 그리려니 베틀을 그리기가 쉽지가 않아 단념하고 부엌에서 밥 짓는 모습으로 바꾸었다. 연기가 그을린 재래식 아궁이에 불을 지펴 솥에는 김이 나고 도마에 반찬을 만드시는 모습이었다.
그 시절은 누구네 가릴 것 없이 형제자매가 많았고 양곡이 부족해 겪은 고생은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까지 학교에서는 미국 의회 잉여농산물법으로 우리나라는 밀과 옥수수를 원조 받았다. 그 옥수수가루로 솥단지를 걸어 죽을 끓여 먹었고 밀가루로 만든 빵을 배급 받았다. 농사철 가정실습 기간엔 담임이 빵을 자전거에 싣고 동네마다 다녔다.
어느 집 다 그렇거니와 우리 집 식량도 빠듯했음은 마찬가지였다. 그런 속에 어머님은 설 추석 명절과 조상 봉제사와 대가족의 생일을 꼬박꼬박 잊지 않고 챙겨주셨다. 어머님은 한글과 숫자를 모르셔도 음력으로 헤아리는 기제일이나 가족 생일을 한 번도 잊지 않으셨다. 하교해서 집으로 가면 열린 부엌문으로 어머님이 밥을 짓거나 상을 차리기도 한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쌀로만 지은 밥은 명절이나 기제사 때뿐이고 다른 날에는 보리쌀이 훨씬 많이 든 잡곡밥이었다. 할머니나 아버지만 흰 쌀밥을 담고 형제자매는 꽁보리밥이라도 넉넉했으면 했다. 철 따라 고구마나 무도 썰어 넣고 콩을 비롯한 잡곡이야 섞였음은 당연했다. 더러는 호박죽이나 고구마를 잘라 말린 빼때기로 죽을 쑤어 먹었다. 점심 한 끼는 고구마가 간식이 아니라 주식인 겨울이었다.
다시 앞서 언급한 학예대회로 돌아가련다. 몽당 크레파스로 부엌에서 밥을 지으시는 어머니 모습을 그려냈다. 그날 읍내도 처음 나가봤지만 자장면도 처음 먹어본 날이었다. 형의 담임은 참가 학생들을 중국집으로 데려가 점심을 사주셨다. 국수보다 굵은 면발에 까만 춘장이 덮인 자장면에다 단무지와 양파가 조각으로 썰어 나와 단출했다. 산골 소년은 난생 처음 본 음식을 맛보았다.
점심 식후 덩그렇게 보였던 읍내 극장에 들어섰다. 간간이 영화가 상영되던 읍내 유일한 극장은 당시로는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었다. 참가 학생들은 연단 아래 객석에 앉았고 연단 위는 교육장을 비롯한 행사 관계자가 보였다. 나는 그날 장려상을 받았고 손위 형은 우수상을 받아 학교로 돌아오니 교장선생님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이 들고 보니 당신의 부엌이 그립기만 합니다. 21.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