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루처럼 생긴 옷
이러한 천으로 만든 ‘자루옷’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느냐에 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첫째는, 지금도 쓰이는 곡식이나 시멘트 자루처럼 위아래로 긴 네모 형태이다. 밑은 터지고 위는 머리와 팔이 나올 수 있게 구멍을 만든 것이다. 같은 낱말이 ‘자루’와 함께 옷도 뜻한다는 데에서 이러한 견해가 충분히 신빙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는 더러 이 옷을 허리에 걸친다는 표현이 나온다(창세 37,34; 2사무 3,31; 1열왕 20,31; 유딧 4,10; 이사 15,3; 예레 4,8 등).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자루옷의 모양에 관한 둘째 의견이 제시된다. 곧 더운 지방의 미개인들이 입던 것처럼 매우 단순한 형태로 허리에만 둘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들을 놓고 우선은, 자루옷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세월이 흐르면서 그 모양이 조금씩은 변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시대에도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른과 아이가 입는 자루옷에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사회적 신분이라든가 경제적 여건도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수 있다. 어떠한 재료로 만들었든 모든 천이 흔하지 않던 그 옛날에, 예컨대 가난한 남자 어른이나 아이들은 간단히 허리에만 두르는 자루옷을 입었을 것이다(그러나 2마카 3,19 참조). 그리고 길이가 길든 짧든 다 허리에 띠를 묶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루옷을 허리에 걸친다는 표현이 나왔다고 본다.
“나는 자루옷을 내 맨살 위에 꿰매고”라고 욥은 한탄한다(욥 16,15). 자루옷 안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기 때문에(1열왕 21,27) 털이 살갗을 찌른 것이다. 자루옷을 입은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때에는 그 위에 정상적인 복장을 하기도 한다(2열왕 6,30; 유딧 8,5). 경우에 따라서는 자루옷을 입지 않고 앞에다 펼쳐놓기도 한다(2사무 21,10; 유딧 4,11). 그 의미는 분명하지 않지만 자기가 겪는 지극한 슬픔과 고통을 특히 하느님 앞에 극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적 행동으로 여겨진다. 또 때로는 성전 제단에도 자루옷을 두르는가 하면(유딧 4,12) 집짐승들에게까지도 이 옷을 입히기도 한다(유딧 4,10; 요나 3,8).
이사야 50장 3절을 보면 “나는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고 / 자루옷으로 그 덮개를 만든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또 요한 묵시록 6장 12절에는 ‘해가 자루옷처럼 까맣게 된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로써 자루옷은 은유적으로 쓰일 정도로 검은 색깔이 특징이었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질감이 거칠고 색이 어두운 자루옷으로 자기의 아픈 감정을 드러냈던 것이다.
아픈 마음의 표시
성서의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때에 자루옷을 입었는가? 자루옷은 먼저 죽음을 애도하는 의복이다. 아들이 죽었을 때에 아버지나 어머니가(창세 37,34; 2사무 21,10), 남편이 죽었을 때에 아내가 자루옷을 입는다(요엘 1,8). 과부는 자기의 신분을 드러내는 과부옷을 착용하는데, 유딧처럼 절개가 굳은 과부는 그 안에 계속해서 자루옷을 입고 지내기도 한다(유딧 8, 5). 성서에는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에 이 옷차림을 하였다는 말이 없지만, 상제들도 상복으로 자루옷을 입었음에 틀림없다.
이 특수 의상은 자기가 저지른 죄를 참회할 때에도 차려 입었다. 그래서 니느웨에서는 요나의 말을 듣고 임금을 비롯하여 온 백성이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한다(요나 3,5-8. 그리고 1열왕 21,27; 느헤 9,1과 위에서 인용한 마태 11,21도 이 경우에 속한다).
자루옷은 한 개인으로서 또는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모욕을 당하였을 때에도 입는다. 예컨대 침략군 사령관의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임금과 신하들이 자루옷을 걸치고 성전에 가서 기도한다(2열왕 19,1-2). 가까운 사람이 아플 때에는 그 아픔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자루옷을 입기도 한다(시편 35,13). 자루옷은 전쟁에 졌을 때에 패배를 인정하고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일 때에도 입는다. 그래서 아람 임금 벤-하닷이 이스라엘 임금 아합과 싸워 패하자, 그의 신하들이 자루옷을 입고 아합에게 가서 벤-하닷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간청한다(1열왕 20,31-32).
나라 또는 민족의 불운 앞에서도 자루옷을 입었다. 곧 민족적으로 큰 슬픔이나 재앙이 닥쳤거나(에스 4,1-4; 1마카 2,14; 예레 6,26; 아모 8,10), 나라가 망하였을 때이다(이사15,3; 애가 2,10; 에제 7,18). 국난을 당하였을 때에는 이 복장을 하고서 하느님께 자비를 청한다(2열왕 6,30; 유딧 9,1; 1마카 3,47; 시편 30,12; 이사 20,2; 바룩 4,20; 요엘 1,13). 그래서 “기도할 때 입는 자루옷”이라는 표현도 쓰인다(바룩 4,20).
율법에 따르면 온 국민의 공동 금식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하라고 되어있다(레위 23,26-32). 그러나 어떤 시대에는 특정 국난을 애도하는 기념일을 기해서라든가(즈가 7,1-5; 8,18-19) 특별한 계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고자 금식일을 더 늘린다(예레 36,6. 9; 요나 3,5 참조). 자루옷은 이러한 특정 금식일의 복장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이사 58,5).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개인 차원에서든 집단 차원에서든, 고통과 죄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루옷을 입고 기도를 하거나 금식을 하는 데에는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고백하는 의미도 담겨있다(특히 느헤 9,2 참조).
자루옷을 입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 전후로도 여러 가지 행위를 한다. 먼저 자기의 아픈 마음을 드러내는 의미로 입고 있던 옷을 찢어서 벗는다(창세 37,34; 2사무 3,31; 1열왕 21,27; 1마카 3,47). 이어서 자루옷을 입고서는 머리에 재나 흙이나 먼지를 뿌린다(느헤 9,1; 유딧 4,11; 4,1; 2마카 10,25; 애가 2,10). 때로는 아예 잿더미 위에 앉거나(요나 3,6), 상심을 이기지 못할 때에는 잿더미 속에 뒹굴기도 한다(욥 16,15; 예레 4,8). 또 감정이 격할 때에는, 율법에 금지되었는데도(레위 19,27-28; 21,5; 신명 14,1) 이웃 민족들의 관습에 따라 머리털과 수염의 일부나 전부를 깎고 몸에 상처까지 낸다(이사 22,12; 예레 48, 37; 아모 8,10). 그리고 금식을 하며(에스 4,3; 1마카 3,47; 시편 35,13) 슬퍼하거나 통곡한다(에스 4,1; 1마카 2,14; 이사 22,12; 에제 27,31).
이렇게 자루옷은 상심·애도·참회의 의복이었다. 율법에는 이 옷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것은 순전히 관습상의 복장이었을 따름이다. 새 계약의 백성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유다인들도 이제는 자루옷을 입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상태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옷이 아니라 / 너희 마음을 찢어라”(요엘 2,13).
[경향잡지, 2002년 3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교리톡톡 신앙쑥쑥] 재의 수요일의 유래와 영성적 의미
재의 수요일의 유래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590-604)에 의해서 재의 수요일이 사순 시기 첫날로 제정되었습니다. 또한 교황 우르바노 1세(1088-1099)는 모든 신자들이 사순 시기를 맞아 참회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기를 권고하였고, 여기서 재의 수요일에 이마에 재를 뿌리는 예식이 도입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는 이날에 전 세계 교회가 단식과 금육을 지키도록 규정함으로써 사순 시기의 삶을 올바로 살 수 있게끔 권고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살펴본 재의 의미
성경의 전통 안에서 재는 참회의 표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 죄를 지었을 때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옷을 찢는 참회예식을 거행했습니다(2사무 13,19). 예수님께서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루카 10,13)라고 하신 말씀에서도 우리는 이런 당시의 풍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정
재는 불로 온전히 자신을 태운 것으로서 그 시간을 통해 시련과 단련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재를 머리에 얹음으로써 우리 역시도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온전히 태워버리고, 하느님을 향한 열정으로 다시 거듭남을 고백하게 됩니다.
정화의 여정
남김없이 모든 것을 다 태운 재는 아무런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사순 시기의 시작에 재를 머리에 얹는 것은 지난 삶을 돌아보며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던 것들을 끊어내는 정화의 여정을 출발하라는 초대이며, 이러한 정화를 통해 온전히 하느님께로 돌아서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밑거름
불타버린 재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재는 새로운 생명을 위한 가장 좋은 밑거름이 됩니다.
사순 시기 우리가 머리에 재를 얹으며 고백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은, 그리고 참회는 우리가 다시금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데 가장 좋은 바탕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재의 수요일을 보내고 계시나요?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 정화의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는 봉헌, 새로운 삶을 향한 적극적인 변화를 하느님께 내어드리면서 이 시간을 마주하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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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시기는 이렇게 회개로 초대하며 우리를 깨우러 섭리처럼 찾아옵니다. 관성적으로 나아갈 위험과 무기력에서 우리를 일깨우러 옵니다. 요엘 예언자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권고는 강력하고 분명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요엘 2,12) 다시 한번 사순 시기가 그 예언자적 호소를 하며 찾아와, 우리 안에서 또 우리 주변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일깨웁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충실하시고, 거절할 리 없으시며, 한결같이 넘치도록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언제나 용서하고 새롭게 시작할 준비가 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녀다운 이러한 확신으로, 우리 이 여정을 시작해 봅시다! - 교황 프란치스코 재의 수요일 미사 강론, 산타 사비나 성당, 2014년 3월 5일 -
[2019년 2월 23일 연중 제7주일 서울주보 4면, 사목국 기획연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