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2:13~21 / 소유에 생명이 있지 않다고 말씀하신 예수님
(눅 12: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눅 12: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눅 12: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현대를 물질주의 시대라고 합니다. 물질주의라는 말은 정신적인 것보다 물질을 중시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것보다 돈에 관심이 있습니다. 돈에 따라서 울고 웃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많은 교회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중시합니다. 교회도 돈을 많이 내면 훌륭한 신자이고 헌금이 많이 들어오면 좋은 교회라고 합니다. 크리스찬도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반대하여 돈에 초연해야 좋은 성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는 예전의 선비들같이 돈에 대해서는 아주 초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과연 맞습니까? 돈에 집착하는 것이나 돈에 초연한 것이나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둘 다 돈에 매여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돈에 대해서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이 세운 법을 통해서 물질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13~14)
당시에 큰형은 동생의 2배로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형과 유업을 나누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형이 놀부처럼 유산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형의 의견을 듣지 않았으므로 어떤 문제인지 정확한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동생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세상의 재판장을 찾아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재판장의 권세를 인정하고 그에게 판단 받고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과 세상 법과 자연법을 중시하십니다.
우리가 세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열심히 일하여 물질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한 경우에만 이런 법을 초월하여 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법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도 지키고 세상 법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법을 지키며 그 법이 허용하는 안에서 물질을 모아야 합니다. 유산을 나누어야 한다면 세상 법을 따라서 나누면 됩니다. 세금을 내야 하는 것은 내야 합니다.
사업장을 운영하는 사람은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월급을 주어야 합니다.
그 후에 번 돈으로 하나님께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노동자에게 월급을 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법에서 금지하는 불법투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동산을 사고팔거나 주식을 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당한 방법으로 해야지, 불법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과 세상 법을 지키는 범위에서 하나님께 물질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재판관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물질보다 생명을 주시고 풍성히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가서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도 허락해 주십니다. 물질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둘째,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15).
예수님은 유산 나누러 온 사람에게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십니다.
물질과 정욕과 식욕과 명예욕들의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탐심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더 추구하는 것입니다.
탐심은 예수님보다 다른 어떤 것을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이 있는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탐내는 것입니다.
이런 탐심에서 불평불만이 나옵니다. 탐심에서 모든 죄가 나옵니다.
탐심에서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탐심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선 식탐이 있습니다. 우리는 식욕이 있어야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배가 부르면서도 더 먹고자 하는 탐욕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비만에 시달리고 많은 질병을 가져옵니다. 빈익빈 부익부가 나옵니다.
성욕도 그렇습니다. 성욕이 부부 사이에 있을 때 사랑을 하고 자녀를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배우자가 아닌데 성욕을 쓰는 것은 탐욕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내나 남편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남자나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것도 탐심입니다. 이들은 불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많은 여자나 남자를 거느리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명예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명예욕에 매여서 명예욕을 추구하다 보면 잘못된 일을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나로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외모를 뜯어고치고자 하는 것도 탐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셨으므로 우리도 심히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면 하나님이 더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그것은 우리에게 탐심이요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하는 데 방해를 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영생을 얻는 데 방해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우리가 진정 영생을 얻기를 원한다면 이런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하나님 안에서 사랑해야 합니다
셋째, 생명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탐심을 갖고자 할까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부자가 되고 싶어 할까요? 왜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자 할까요? 사람들은 소유의 넉넉함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생명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입니다. 영원한 행복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탐심을 자극하여 소유를 가지면 행복할 것처럼 착각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불만족함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많은 물질을 얻는 것이 꼭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돈이 많으면 바람을 피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가족 간의 우애가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수가 많으면 행복할 것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 빠져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것도 사명을 가장한 탐심입니다.
이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내가 감당할 만큼만 주신다고 생각할 때 평안이 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탐심을 버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그어주신 선 안에서 만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으로 그어 주신 것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시편 16편 6절에는 말씀하십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우리에게 선으로 그어준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요 하나님이 창조주이십니다. 우리가 피조물의 자리에 만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우리나라, 우리 가족, 우리 교회로 만족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나의 아내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내 남편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것이 행복입니다.
진정한 생명은 눈에 보이는 것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습니다.
사람들이 새해가 되면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부자 되세요.’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한 분을 소유하는데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한 분과 그분이 주신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하나님을 내 마음의 첫 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그때 영생이 있고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감사와 찬양이 솟아 나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양들도 주시고 물질도 적당하게 채워주십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소유가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소유를 떠나서 무소유로 살 수는 없습니다. 무소유가 더 많은 탐심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소유를 거부하는 사람이 마음으로는 더 큰 탐심에 시달립니다. 적당한 소유도 의미가 있습니다. 적당한 소유는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어주신 줄을 따라서 적당한 소유를 구해야 합니다. 내 배우자로, 내 가족으로, 내 교회로 만족해야 합니다. 야망보다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적당한 소유로 기쁨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유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