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천재’ 고종수(29.한국)가 1년 반 가량의 무적 선수신세에서 벗어나 재기를 꿈꾸며 대전에 입단했다. 전격적으로 이뤄진 이번 입단은 그의 재능을 안타까워하던 전남 드래곤즈와 대전 시티즌 양 구단의 배려가 없었다면 이뤄지기 힘들었을 영입이었다. 그만큼 그의 재능은 2001년 이후 팬들의 시선에서 벗어났음에도 오랫동안 기억될 비범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고질적인 무릎부상과 일탈행동, 오랜 기간 경기에 뛰지 못한 점은 그의 재기가능성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대전 역시 “구체적인 연봉 등은 동계훈련이 끝난 뒤 결정하겠다”는 입장인데다 “팀 분위기를 해치는 등의 일탈행동을 할 경우 자동 계약해지하는 조항을 넣었다”며 일탈행동 역시 경계했다.
‘앙팡테리블’의 시작 ‘1997년 한일전’
1993년 백록기 전국고교 축구대회에서 금호고를 우승으로 이끌며 MVP에 올라 ‘축구계의 샛별’이 된 고종수는 이후 1996년 창단한 수원 삼성이 창단과 함께 계약했던 6명의 고졸 신인선수 가운데 제 1순위였다. 또 올림픽대표팀에 테스트차 합류했다 비쇼베츠 감독으로부터 기량을 인정받아 올림픽대표팀의 플레이메이커로 떠올라 곧바로 미국에서 열렸던 5개국 친선경기에 주전으로 급성장 ‘무서운 아이’가 됐다.
그런 그의 기량을 전 국민에게 각인시켰던 계기는 1997년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한일전. 당시 유망주였던 나카타 히데토시가 자신의 첫 국제대회 출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며 한국의 미드필드를 유린했다. 한국의 수비진을 마음껏 농락하던 나카타의 천재적인 패스와 돌파 그리고 슈팅은 한국팬들의 가슴을 졸이게 만들었다.
그 때 차범근 당시 대표팀 감독은 나카타 보다 한 살 어렸던 18세의 고종수를 전반 중반이 지날 무렵 투입해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고 ‘앙팡 테리블’의 시작이었다. 고종수의 투입으로 미드필드의 주도권을 되찾은 한국은 후반에는 나카타를 완전히 봉쇄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고종수는 당시 고교졸업후 곧바로 프로에 뛰어들었던 이동국, 김은중, 이관우 그리고 안정환등과 함께 K리그 흥행을 주도했고 K리그를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매김하며 대표팀에 승선했다.
한국이 인정한 재능에서 유럽이 인정하는 재능이 됐던 1998 프랑스월드컵. 고종수는 멕시코와 네덜란드, 벨기에를 137분 동안 출전, 놀라운 경기력을 선보였고 특히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보여줬던 과감한 중거리슛은 오래도록 팬들의 기억에 남을만한 장면이었다.
K리그를 뒤흔들었던 자로 잰 듯 정교한 볼배급과 창의적인 경기운영, 왼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프리킥과 슈팅이 유럽에도 통할만한 수준이었음을 증명해냈던 셈이었다. 그 뒤로 고종수의 이름 앞에는 ‘앙팡테리블’이란 수식어가 빠지지 않았다.
중앙공격형 미드필더와 왼쪽 측면에서 활동이 가능했던 고종수는 1998년과 1999년 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됐고 아디다스컵에 득점왕에 오르는 등 수원이 인기몰이를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그의 전성기라 할법한 시기는 2001년 20경기에 10득점 6도움을 올리며 AFC선정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당시 프로축구리그 상과 인기투표를 모두 독식했다. 2001년 요코하마에서 벌어진 한일올스타와 세계올스타전에서 고종수가 터뜨린 멋진 프리킥은 지금도 팬들의 기억에 자리 잡고 있다.
고종수의 끝없는 돌출행동
고종수는 그 뛰어난 재능만큼 대표팀의 골칫덩이였다. 이미 청소년대표팀에서 박이천 당시 감독으로부터 한달 만에 방출당했다. 박 감독은 “고종수에게 ‘선수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는 뜻에서 전력상 필요하지만 방출했다”고 이유를 말했고, 고종수를 대표팀에 발탁했던 비쇼베츠 감독 역시 성품에 문제가 있다며 3개월 만에 방출시켰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당시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던 고종수는 감독의 지시를 받은 뒤 다시 동료들을 모아 다시 작전지시를 내리는 일이 잦았다. 지금과 달리 매우 엄격한 분위기였던 한국에 이런 그의 행동을 용납할 감독은 없었다. 유럽에서도 쉽게 수긍할 수 없는 일.
게다가 고종수에게는 축구외에도 타고난 끼가 있었다. 출중한 노래실력과 무대매너 그리고 모델활동으로 연예인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던 그는 무릎부상 이후 지루한 재활보다 즐거움을 택했고 결과는 ‘잊혀짐’이었다.
고종수를 망친 주범 ‘거스 히딩크’
2001년 한국을 가장 화려하게 빛낸 국내선수는 고종수였다. 당시 대표팀 감독으로 영입한 거스 히딩크 감독이 그를 대표팀으로 불러들이는 일은 당연한 것.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김호 당시 수원감독은 고종수를 망가뜨린 주범은 “축구협회와 히딩크”라고 주장했다.
당시 2002년에 맞춰 리그 일정을 무시하고 훈련을 준비하던 히딩크 감독은 당시 AFC챔피언스리그 등 다른 구단에 비해 많은 경기를 소화해 체력이 많이 떨어진 ‘수원 전력의 핵심’ 고종수의 몸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시켜 무릎을 망가 뜨려버렸다는 게 그의 설명.
김호 전 감독은 “고종수가 그때 무릎을 다쳐 지금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결국, 고종수는 무릎부상이 악화돼 대표팀에 탈락했고 독일로 수술을 받기 위해 떠나며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 속에 묻히고 말았다.
고종수의 끝없는 시련과 재기를 향한 몸부림
2002 한일월드컵이 끝난 뒤 J리그 교토 퍼플상가에 입단한 고종수는 돌출행동이 문제가 돼 당시 감독이었던 핌 베어벡으로부터 전력외 존재로 분류됐고 2004년 수원으로 복귀했으나 이 과정에 신분논란으로 홍역을 치렀다.
당시 수원구단이 제시한 21년 K리그 역사상 최고 몸값(약 5억원)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며 거절한 뒤, 고종수 측이 주장한 FA(자유계약선수)신분과 수원구단의 해석이 엇갈리며 신분파동을 겪어 5경기 출장에 그쳤고 결국 전남으로 이적했다.
그러나 늘어난 체중은 발목부상을 불러왔고 전남에서 16경기에 출전하며 재기를 노렸지만 역시 실패, 결국 2006년 방출통보를 받고 무적선수가 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테크니션에서 무적선수가 된 고종수는 개인훈련으로 체중감량과 몸만들기에 나섰지만 과거 '왼발의 마술사‘로 불리며 서정원, 데니스 등과 함께 수원의 돌풍을 이끌던 고종수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었다.
고종수의 재기 가능성은?
90년대 K리그 인기몰이를 하던 고종수의 대전 입단은 벌써부터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고종수 역시 "대전 시티즌의 구단 관계자, 서포터들이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최윤겸 대전 감독은 “고종수가 동계훈련을 정상적으로 소화한다 하더라도 후반기에나 출전할 듯 보인다”며 1년 반 가량 쉰 그의 경기감각에 대해 많은 우려를 표시했다. 고종수 역시 “내 경기력의 힘은 자신감인데 많이 떨어져 있다”며 당장의 복귀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
대전은 이미 그의 연봉을 “동계훈련결과에 따라”책정하겠다고 밝혔고, 시즌 중에 팀 분위기를 해치거나 품위를 손상시키면 자동으로 계약을 중지하는 항목을 포함시켜 “감독의 말을 듣지 않거나, 팀을 무단이탈하고, 음주를 하는 등의 행동”을 경계했다. 그만큼 고종수의 악동 이미지는 여전하다.
그러나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축구인들은 “재능이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다”며 그의 재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 팬들 역시 벌써부터 그를 응원할 채비를 하고 있다.
결국 그의 재기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어느 정도 노력하느냐에 따라 리그 후반기에 대전의 핵심적인 선수로 뛸 수 있다는 이야기.
이제 더 이상 ‘무서운 아이’도 K리그 최고의 테크니션도 아니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던 고종수가 다시 한 번 골을 성공시킬 때마다 어김없이 하던 특유의 덤블링 세리모니를 대전에서 여러 차례 보이길 기대한다.
* 고종수 약력
생년월일 : 1978년 10월 30일 생
신체사항 : 176cm, 81kg
1994년 ~ 1998년 청소년 국가대표
1996년 ~ 1996년 애틀란다 올림픽 대표 (국가대표 최연소 출장기록 18세 3개월)
1996년 ~ 2002년 수원 삼성
1997년 ~ 1997년 호주 4개국 축구대회 국가대표
1998년 ~ 1998년 프랑스월드컵 국가대표
1998년 ~ 1998년 킹스컵 국가대표, 다이너스티컵 국가대표
2000년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
2001년 ~ 2001년 한·일 올스타 대표, FIFA 컨페드레이션스컵 국가대표, 칼스버그컵 대표
2003.2 ~ 2003.9 일본 교토 퍼플상가
2005년 ~ 2005.12 전남 드래곤즈
2007년 ~ 대전시티즌
* 주요수상내역
1993년 시도대항 축구대회 득점왕
1994년 백록기 MVP
1997년 아디다스컵 최다 어시스트 상
1998년 한국프로축구 MVP, 프로축구 베스트11 선정
1999년 프로축구 베스트11 선정
2000년 2000 아디다스컵 득점 왕
2001년 AFC 선정 이 달의 선수 상, 나이키 올스타전 최다득표, 헴벨 스투인기상
사진협조=수원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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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에게 축구를 좋아하게끔 만들어준 선수 고종수!!!
반드시 재기에 성공하여라.. 고수 선수
고수, 화이팅
고종수를 망친 주범 ‘거스 히딩크’ 이건좀 아닌거 같다 ㅡ ..ㅡ
아닌지 긴지는 님이 모르는거죠..김호 감독님이 글케 말씀하셨다는데
고종수 선수는 과로와 연습부족(이것은 본인 탓도 큽니다.)으로 인해 체력이 많이 떨어져있었고, 이 상태에서 체력훈련을 심하게 하니 부상으로 이어진 거죠.
당시 협회와 히딩크의 방식은 오로지 '월드컵 성적'을 위한 극단적인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희생자가 나왔을 법도 하죠.
종수형 이제 보여줘주세요~멋징프리킥에이는 덤블림세로모니
제발 진짜 부활하세요 당신의 멋진프리킥 보고싶어요 ㅜㅜ 화이팅 !!!!!
엄청나게 노력한다면 국대 가능할꺼라 보십니까? 밑에 답글좀.... 전 제발 가능했으면 ㅠ_ㅠ
무조건 재기에 성공해야함 !! 최감독님이라면 가능할듯. ㅋㅋ
class 는 영원하다.......면서요.
고종수 꼭 재기하길.!
본인이 이 악물고 죽을 각오로 하지 않으면 힘들듯...
고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