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주권
한 나라의 왕이 일개 외국 공사관의 보호 아래에 들어간 아관 파천으로, 주권 국가로서 조선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조선은 아관 파천으로 일본의 위협에서는 조금 벗어날 수 있었으나,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이 조선의 주권을 훼손하는 데 경쟁적으로 나서면서 더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을미정권을 대신하여 이범진 등 고종의 측근 세력과 정동파라 불리는 친러, 친미 인사들이 권력을 차지하였다. 이들도 개화 정책에는 적극적이었다. 전면적인 서구화를 추진한 일본이 중체서용을 내세운 청을 꺾음으로써 더욱 큰 힘을 얻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정권은 바뀌었으나 갑오개혁의 상당 부분이 계승되었다. 청으로부터 독립을 확고히 하는 것과 함께 신문의 발행, 학교의 설립이나 신산업 육성을 위한 조치들도 꾸준히 추진되었다. 새로운 호적 제도를 실시하면서 신분 차별을 법적으로 철폐한 것도 이때였다.
독립신문과 독립 협회
서양 열강의 간섭과 이권 침탈이 강화되고 있던 1896년 무렵에는 이래저래 '독립'이란 말이 화두였다.
1896년 4월, "무슨 일에서든 인민의 대변자가 되고, 정부가 하는 일을 백성에 알리고……" 라는 창간 정신을 밝힌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신문 발간을 추진하였던 갑오정권의 계획을 새 정권이 이어받아 서재필로 하여금 신문 발간 사업을 추진하게 한 결과였다.
이해 7월에는 독립 협회도 창립되었다. 독립 협회에는 이완용 등 정부 관료와 서재필, 윤치호 등 개화파 인사들이 두루 참가하였다. 독립 협회는 청 사절단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이 문은 단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 《독립신문》 사설(영문판), 1896. 6. 20.
또한, 독립 협회는 토론회와 강연회를 자주 열어 자주 독립 의식을 높이고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산업을 육성하여 경제력을 길러야 하며, 민권을 보장하고 애국심을 높여 폭넓은 인민의 참여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믿었다. 이들이 행사 때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수시로 '동포'란 말을 사용한 것은 이런 취지에서였다.
조선 왕조, 대한 제국으로 거듭나다
1897년 2월, 고종은 아관 파천 1년 만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러시아나 일본 어느 한쪽도 일방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운 정세였고,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고종이 환궁하자 전직 관료나 유생 들이 독립 의지를 높이기 위해서 왕의 칭호를 황제로 높이자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던 고종도 이에 적극적이었다.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바꾸었으며, 황제 즉위식을 거행할 환구단을 쌓도록 하였다. 그리고 삼한을 아우른다는 뜻의 '대한'을 새 나라 이름으로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조선 왕국을 대신하여 대한 제국이 성립된 것이다.(1897) 반일 감정이 누그러지길 원했던 일본이 가장 먼저 대한 제국을 승인하였고, 다른 나라의 승인도 잇달았다. 1899년에는 대한 제국 황제가 청 황제와 동등한 자격으로 한·청 통상 조약에 서명하였다.
입헌 군주제냐, 전제 군주제냐
왕권 강화를 꾀한 고종과 달리, 왕권을 제한하고 나아가 의회를 만들어 입헌 군주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독립 협회 안에서는 생각이 갈렸다. 정부의 현직 고위 관리들은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으나, 서재필 같은 재야 개화파 인사들은 왕권 강화에 분명하게 반대하였다.
1897년 11월에 독립문이 완공된 이후 정부 관리들은 거의 독립 협회에서 손을 뗐다. 독립 협회는 신교육을 받은 학생이나 개명 유학자, 상인 등이 참여하는 정치 사회 단체로 탈바꿈하였는데, 이때부터 민권을 확대하자는 주장이 높아졌다. 또한, 중추원을 개편하여 외국의 민회(의회)처럼 운영하자고 하였다.
만약에 외국의 예를 들어서 말씀드린다면, 현재 많은 곳에 민회가
있어 정부 대신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이를 전국에 널리 알리고 사람들을 모아 질문하고 논쟁을 벌이며 탄핵함으로써, 민중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은
하지 않게 되는데…….
- 정교,
《대한계년사》
그러나 의회를 운영하면 정책 결정을 둘러싸고 국론이 분열될 뿐만 아니라, 외세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올 수 있다고 걱정하는 이도 많았다. 홍종우 등은 외세를 자주 독립의 가장 큰 장애물로 보았는데, 외세에 맞서기 위해서는 황제를 중심으로 온 국민이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들은 황국 협회를 조직하여 독립 협회의 중추원 개편 운동에 맞섰다. 독립 협회는 중추원 개편(의회 설립)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고, 황국 협회는 반대 집회를 열었다. 정부가 독립 협회를 탄압하던 1898년에는 양자 간에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대한 제국, 왕조 체제를 넘어서다
1898년 12월, 고종은 독립 협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후 고종은 군 지휘권을 장악하고 신식 군대를 육성하는 한편, 측근 세력을 등용하여 황제권을 강화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 제국은 자주 독립 국가이며, 만세 불변의 전제정치"로 시작하는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 국제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황제는 법적으로도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외교권, 군사 지휘권 등을 보장받는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대한 제국은 군주제란 점에서 조선 왕조와 정치 체제가 같지만, 갑오개혁 결과가 어느 정도 반영된 근대 국가의 특징을 지녔다. 무엇보다 군주권이 법의 형식을 띠고 행사되었으며, 신분제가 폐지되어 '법 앞에 평등'이란 정신이 자리 잡았다. 과거 제도가 폐지되면서 신교육이 확대되고 신분을 뛰어넘는 관리 등용이 이루어졌다.
대한 제국은 황제를 나라의 상징으로 세우고 '국민'이란 의식을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황제의 위엄과 권위를 높이기 위한 기념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나라의 상징인 태극기 사용을 확대하였다. "상제(上帝, 하느님)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로 시작되는 최초의 공식 국가도 만들었다. 이 모두가 전근대 왕조 체제와 분명히 구별되는 일이었다.
독도와 간도
대한 제국 정부는 간도와 독도 문제 등 국경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정부는 간도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1897년과 1898년 두 차례에 걸쳐 상세한 현지 조사를 벌였다. 이를 통해 간도가 대한 제국의 영토임을 확인하고, 1902년에는 이범윤을 북변 간도 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 주민을 직접 관할하였다.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서도 대한 제국 정부는 1898년과 1899년에 발행한 지도에서 독도가 대한 제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였다. 나아가 1900년에는 관보를 통해 독도가 대한 제국의 영토임을 밝힌 칙령 41호를 나라 안팎에 알렸다.
대한 제국, 바람 앞에 선 등불
대한 제국은 러시아와 일본의 불안한 세력 균형 위에서 힘겹게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부는 러·일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한편, 미국, 영국 등 구미 제국주의 국가들과 친선을 도모하는 선린 외교를 맺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대한 제국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관 파천 이래 러시아와 일본은 몇 번의 비밀 협상을 진행하였다. 두 나라 모두 대한 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여러 차례 떠들어댔으나, 1896년 6월에는 대한 제국을 양국의 공동 보호령으로 삼으려는 비밀 협약(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을 맺기도 하였다.
러시아는 압록강 하류에서 가까운 용암포를 점령하여(1903) 군사 기지로 삼으려 하였으며, 일본은 영국, 미국과 손잡고 러시아에 맞서면서 대한 제국을 침략할 기회만 노렸다. 영국과 미국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는 데 주력하면서 여러모로 일본을 도왔다.
근대적인 국가를 만들려는 노력은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아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운동이기도 하였다. 의회 설립을 통해 정치 참여를 확대하자는 독립 협회의 주장, 국론 분열을 막고 황제를 중심으로 단결하자는 황국 협회의 주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타당했을까?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상황에서 독립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 제공처
- 휴머니스트, 제공처의 다른 책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