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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미남덕(米南德)
1449년은 대명왕조에 다사다난했던 한 해이다. 먼저 명영종(明英宗)이 토목보(土木堡)에서 패배한 후 오이라트몽골에 포로로 잡히고, 다시 오이라트몽골은 북경을 몇달간 포위공격한 바 있다. 재정지출이 커서 재정부족에 시달리게 되었을 뿐아니라, 사람의 이동조차 난국으로 제한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국은 인심이 흉흉하고, 여러가지 감춰왔던 문제들이 수면위로 드러나게 된다.
예를 들어, 영남(嶺南)의 주강(珠江)델타지역은 황소양집단을 우두머리로 하는 대규모반란이 일어난다. 이들 반란군의 출현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고, 배후에는 상당히 복잡한 사회적 경제적 요소가 숨어 있다. 나중에 실패로 끝나면서 역시 광범위학 영향을 끼쳐, 이 지역의 역사발전에 수백년간 그 여파가 미치게 된다.
고대 통일제국의 변방으로서, 광주(廣州)를 핵심으로 하는 주강델타지역은 시종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장강중하류처럼 대량의 식량이 생산되는 것도 아니면서, 중앙재정에 상당한 무역수입을 제공하지고 못하고, 또한 남방핵심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이상적인 교두보역할을 하지도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계륵과도 같이 먹기도 아쉽고 버리기도 아쉬운 정도였다.
명나라가 건립된 이후, 주원장의 개인적인 취향이 깊이 반영된 정책의 영향으로, 그러한 점은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한편으로 해금(海禁)정책으로 인하여 무역수입이 감소했고, 다른 한ㅍ녀으로 관리, 군호(軍戶) 및 유동인구들이 정착하기 이상적인 장소가 되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갈등이 커지게 되고, 경작조건을 갖추지 못한 모래밭까지 개간하여 농사를 짓게 되고, 또한 경제적 가치가 높지 않은 광산까지 집중적으로 채굴하게 된다. 이로 인한 환경급변과 생존여건의 악화는 더더욱 지역내의 악순환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무슨 큰 동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북경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할 터였다.
전형적인 주변인인 황소양은 바로 이러한 특수한 환경하에서 성장했다. 그는 원래 불산(佛山)지역의 편호제민(編戶齊民)이었다. 부친이 경작하는 모래밭은 생산량이 적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다른 집에 보내어져 길러지게 된다. 성년이 된 후에는 토지분쟁에 연루되어 사람을 상해입혀 감옥에도 들어간다. 그후에는 아예 소금밀매조직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한편 폭력사건으로 관청에 체포되었다. 그는 어려서 의술을 약간 배운 바 있어, 주강델타지역의 소금밀매집단내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리하여 감옥내에 갇혀 있던 170여명의 동료들과 연락하여 함께 탈주한다. 당시는 남방각지에서 병란이 계속되었고, 명영종이 여러번 운남녹천토사(雲南麓川土司)를 토벌했고, 그러는 사이에 크고 작은 규모의 묘족(苗族), 요족(瑤族)의 반란도 일어났다. 그리하여, 주강델타지역의 주둔군은 대량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고, 주강델타지역은 방어의 진공지역이 되어버린다.
1448년 가을, 황소양은 불산의 고향으로 도망쳐서 만명정도 규모의 반란군을 조직한다. 그중 어떤 사람은 원래부터 소금밀매를 하던 해적이었고, 또 어떤 사람은 몰래 금광은광을 채굴하던 광도(鑛盜)였다. 더욱 많은 사람은 토지를 잃고 사방을 떠돌아다니던 유민이었다. 어쨌든 모두 경제적 착취에 시달리던 파산자들이었다. 황소양은 일찌기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탈옥과정에서 수군의 선박과 관군의 무기도 탈취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가담했다. 그들은 계속하여 무리들을 훈련시키고, 더 많은 선박과 무기를 제조했다. 반년여에 이르는 준비기간을 거쳐 마침내 광주에서 전면적인 공격에 나서게 된다.
명청시기 광주부(廣州府)
명청시기 광주성지도
1449년 8월, 반란군은 300척의 크고 작은 선박을 타고 출동한다. 충분한 준비를 하고,현지상황을 잘 알고 있어서, 금방 병력이 약한 명나라관군을 격패시킨다. 이들은 심지어 공성거(攻城車)와 운제(雲梯, 공성용사다리)까지 만들어, 성에 의지하여 수비하려는 관군을 하나하나 격파하고자 한다. 황소양은 또한 도중에 더 많은 사람들을 가입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결국 그의 부대는 규모가 10만에 이르게 된다.
이와 비교하면 명나라의 관군은 처지가 아주 곤란했다. 먼저, 현지의 군대는 광서로 가서 토사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이어 남은 군대는 북경으로 근왕(勤王)하러 떠났다. 그리하여 광주의 위기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단지 안향백(安鄕伯)의 작위를 세습받은 장안(張安)이 나서서, 이리저리 끌어모은 5천명으로 이들을 상대했다. 그들은 200여척의 대형선박을 소유하고 있었고, 적지 않은 화기도 보유하고 있었다. 최소한 하류의 오합지졸들과 비교해서 표면적으로는 못하지 않았다. 그러나 작위를 세습받은 자들은 왕왕 전문성이 뛰어나지 못했고, 게다가 술주정등 나쁜 버릇이 있었다. 그리하여 군대지휘가 엉망진창이었다. 쌍방이 동선오(㢥船澳)에서 맞부닥쳣을 때, 장안은 술에 취하여 인사불성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물에 빠져 익사한다.
얼마 후, 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 왕청(王淸)이 부대를 이끌고 무명(茂名)에서 광주로 도와주기 위해 온다. 그는 주강 하류에서 반란군의 선박들을 포위섬멸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각미(沙角尾)에 이르렀을 때, 황소양의 반란군에 이미 가담해있던 어민이 왕청의 부대를 속여 얕은 지역으로 데려가 배들이 좌초된다. 그리고 왕청은 싸워보기도 전에 포로로 잡힌다. 그후 광주성까지 끌려가서 수비군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수비군을 지휘하던 천호(千戶) 전혜(錢惠)가 따르지 않자, 그 자리에서 처형당해버린다. 마침 광주성의 성벽은 매우 견고하고, 성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어서, 평소 수상에서 기습전을 펼치던 반란군은 매우 곤란해진다. 이전에 광서로 파견나갔던 관군은 명을 받고 광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다만 장수 서선(徐瑄)은 자신이 왕청의 꼴을 당하는 것이 겁이나, 길을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으며, 광주성이 포위공격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황소양도 전략을 적극적으로 조정하여, 광주를 포위공격하는 동시에 더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자 한다. 그는 스스로 동양왕(東陽王)을 칭하고, 부하들을 제후에 봉하고 재상에 임명했다. 이들을 완전한 자기 사람으로 포섭하려는 의미였다. 그러나, 집단의 구성원들중 다수는 주강델타의 연해지역에서 왔고, 원래 사회적 지위도 보편적으로 낮았다. 그리하여 내륙에 거주하는 토호들과는 공통점이 없었다. 그리하여 자주 양식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현지지주들의 이익을 건드리게 되고, 무형중에 피차 갈등이 커지게 된다. 그때 광주성내에서도 물자가 부족하고, 수비에 가담하는 병사의 수도 적었다. 다행히 성밖의 반란군들은 각종 지주무장세력들과 싸우느라 바빴기 때문에 공성에 집중하지 못했다.
더욱 웃기는 점은 멀리 북방의 북경도 마찬가지로 오이라트에 포위공격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조정의 신하들은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저 급히 경태제(景泰帝)를 내세워 국면을 안정시키고, 외성에서 병력들을 불러 북경성을 지원하도록 했다. 멀리 광주의 위기에 대하여는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다. 먼저 광주순무(廣州巡撫) 양신민(楊信民)을 보내어 이들을 초안(招安)하려 한다. 이런 방법을 고려한 것은 명나라조정이 움직일 군대가 없었을 뿐아니라, 황소양에게 귀순할 의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신민은 원래 광주에서 근무해서 어느 정도 민간에서 명망도 얻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국면을 수습하기 위해 보내어지게 된 것이다.
사실상, 양신민이 광주에 도착한 후에 반란을 종식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정부의 전면대항태도를 버리고, 스스로 성문을 열고 반란군사병들을 맞아들이면서 같은 고향사람들끼리 관계를 잘 유지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물자관리규정도 어기면서 창고의 재물을 반란군에게 주기도 했다. 그리하여 황소양과 대화의 틀을 마련하고, 향후 보복등 조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아쉽게도, 최종합의를 달성하기도 전에 본인이 급사한다. 그의 죽음은 독살을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화해가 이루어지기 직전에 그는 아무런 병도 없이 갑자기 죽어버린 것이다.
1449년 12월, 양신민이 광주에서 초안에 바쁠 때, 명나라는 이미 경영(京營)의 군사훈련을 담당하던 동흥(董興)을 남하시켰다. 그때 북경보위전은 오이라트가 철수하면서 끝이 난다. 그리하여 조정은 광주를 상대할 여력이 생기게 된다. 많은 기동부대가 강서에서 출발을 대기하고 있었고, 4개월도 되지 않아 주강델타지역에 도착한다.
이전의 몇몇 지방장수들과 비교하면 동흥은 대규모반란평정에 경험이 있었다. 이전에 복건(福建)에서 등무칠(鄧茂七)의 반란을 진압한 바 있었다. 이번에도 같은 방식을 써서, 정예 화기부대와 기병부대로 상대방을 압박했고, 육상전투경험이 부족한 황소양부대의 본부를 기습한다. 그해 4월 11일, 쌍방은 대주두(大駐頭)에서 만나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금방 일방적인 국면이 나타난다. 장기간 포위공격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당시 반란군의 내부에서는 이미 이반이 일어나고 있었고, 기본적으로 원래의 소집단별로 각각 나누어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전투역량의 다수는 해적이었고, 대규모 정면전투의 경험이 없었다. 그리하여, 돌연 기습해 들어오는 관군을 맞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혼전 가운데, 황소양은 화살에 맞아 물에 빠진다. 비록 즉시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벌떼처럼 몰려드는 관군에 포로로 잡혀 북경으로 압송된 휴 효수당한다. 그러나, 지방의 기록을 보면, 그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는 공덕을 기리려는 왕조사관들의 기록과 확실한 차이가 있다. 어쨌든 반란군의 궤멸을 피할 수가 없었다. 수륙병진의 관군에 의해 1만의 주력이 도륙당한 후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다. 황소양의 부친, 아들도 화를 피하지 못했고,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힌 후 처형당했다.
명나라의 관군은 광주성의 포위를 푼 후에 즉시 불산등지로 달려가서, 잔당을 제거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특히 황소양의 고향에 가까운 충학보(冲鶴堡), 대량보(大良堡)와 삼산(三山)에는 여전히 수만의 반란군 잔당과 그 가족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중 삼산 한 곳에만도 600여척의 크고 작은 선박이 정박해 있었고, 군영과 공성거에 의존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준비를 했다. 4월 15일, 동흥은 먼저 삼산을 공격한다. 수백의 전함을 5부대로 나누어 동시에 협공하게 한다. 관군은 상류에서 물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계속하여 화기를 쏘고, 불붙은 배는 습격하여, 목표를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다음 날에는 충학보에서 반란군의 선박 300척을 불태우고, 거점을 철저히 뿌리뽑는다.
마지막으로 지형이 수비에 가장 유리한 대량보가 남았다. 지형이 산을 등지고 바다에 면해 있으며, 험준한 곳에는 목책을 세우고, 봉화대도 두어 수비하고 있었다. 4월 23일까지 대치하고나서 비로소 공격을 시작한다. 마지막 반란군잔당은 퇴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전투에서 매우 용감하게 싸운다. 한때는 비처럼 화살과 돌을 쏟아부어 관군을 압도하기도 했다. 심지어 노획한 금속화총을 사용하기도 하여, 수륙양쪽의 관군을 괴롭혔다. 탄약과 화살이 떨어지고 나서, 중갑옷을 입은 명나라관군이 쳐들어간다. 전후로 10여차례 반복하여 싸웠지만 결국 패퇴당한다. 결국 거점에 최종적으로 30여명만 남게 되고 모두 포로로 잡힌다.
그렇기는 해도 여전히 수령 황공방(黃公龐)등은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고, 남쪽으로 가서 요족의 거주지역으로 도피한다. 나중에 다시 반기를 들고 거병하여 관군과 17년간이나 더 싸운다. 이를 보면 이번 반란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그 영향이 얼마니 깊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언급할 점은 복건의 등무칠의 반란으로 명영종은 백은유통을 허용하게 되었는데, 이번 주강델타의 황소양의 반란도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 부분이 있다. 연해의 염장(鹽場)이 마비되고, 많은 편호제민들이 유랑하게 되면서, 명나라는 영남지역에 대한 경제적 착취를 조금 완화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 이전처럼 철면무정(鐵面無情)한 방식을 쓰지 않았다. 일부 반란군가담자들이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와 경작을 하더라도 새로 부임한 관리들이 그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동시에 지방당국은 재정부족으로 인하여 해금정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리하여 수십년후에는 일부 해금이 되고, 다시 광대한 남양지구와 무역의 문이 열리게 된다.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명나라가 반란을 진압할 때 피비린내나는 도륙으로 원래 주강델타지역에서 활약하던 현지해적은 확실히 줄어들게 되었는데, 금방 빈자리를 조산(潮汕, 조주와 산두)과 민남(閩南, 복건남부)의 해적들이 차지하게 되었고, 남해의 밀무역은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황소양의 사후 백년도 되지 않아, 그가 활약했던 지방에는 향산적(香山賊)과 장주거도(漳州巨盜)가 횡행하고 임봉(任鳳), 임도건(林道乾)등 국외에서 명성을 떨친 국제적인 해적까지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