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위안화로 결제한 무역 거래액의 97%가 홍콩서 이뤄져
이달 10일 오전 8시30분쯤 홍콩섬 건너편에 있는 카우룽(九龍)반도 서쪽 간척지에 우뚝 서 있는 118층짜리(높이 484m·세계 4위) 국제상업센터(ICC·International Commerce Center) 빌딩. 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뱅커들이 수십~수백명씩 물결을 이루며 건물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다.1층에 있는 88대의 초고속 엘리베이터는 이들을 건물 안 사무실로 재빨리 실어 날랐다. 10층부터 99층까지의 사무실 공간에 입주한 기업은 54개, 상주인원만 5000여명이다.
102층부터 118층까지를 쓰는 리츠칼튼호텔 등의 방문객들을 포함하면 연인원만 매일 최소 5만명이 넘는다. 빌딩이 워낙 고층이어서 49층 이상 사무실에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중간 로비에서 한 번 갈아타야 한다. 49층에는 26대의 엘리베이터가 가동 중이다.
ICC는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2003년)에 이어 5년 만에 홍콩을 강타한 미국발 금융 위기의 찬바람이 불던 2010년 3월 완공됐다. 하지만 그 해에 모건스탠리·도이체방크·크레디트스위스(CS) 같은 굴지의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입주율 95%'를 달성한 '홍콩불패(香港不敗)'의 상징물이다.
- ▲ 홍콩이‘위안화 금융 허브’라는 신형 성장 엔진을 장착하고 다시 도약하고 있다. 씨티뱅크 타워(왼쪽 두 번째)와 뱅크오브차이나 빌딩(왼쪽 세 번째) 등 홍콩섬 중심가인 센트럴(中環)에 있는 금융가 야경(夜景)과 마오쩌둥(毛澤東) 얼굴이 그려진 100위안짜리 위안화 합성 이미지 모습. / Shutter Stock
ICC의 임대료도 치솟고 있다. 2010년 9월 55홍콩달러(1평방피트당)에서 올 9월 99홍콩달러로 80% 정도 올랐다. 연면적 250만평방피트에 이르지만 공실률(空室率)은 현재 0.5%다. "비어 있는 사무실은 19층의 280㎡짜리 딱 한 개입니다. 공실인 이유도 독특합니다. 해당 기업이 더 큰 사무 공간을 요구하며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회사 외에 입주를 희망하는 금융사와 기업들이 줄지어 있습니다."(신한아시아·오창수 사장)
맞은편 센트럴(中環)에 있는 기존 최고층 건물인 88층짜리(높이 420m)짜리 제 2국제금융센터(IFCⅡ)와 더불어 홍콩 금융의 '쌍두(雙頭) 랜드마크'인 ICC 인근 300만㎡ 일대에는 굴착기들이 굉음을 내며 터를 파고 있다. 30여대의 타워 크레인들은 쉴새 없이 철골을 나른다. 홍콩과 광저우(廣州) 구간을 시속 200㎞ 속력으로 50분 만에 주파할 고속철도 건설공사 현장이다.
2015년에 이 공사가 끝나면 45분 정도 걸리는 홍콩~선전(深�q) 거리는 14분으로 단축돼 홍콩과 선전·광저우·마카오를 잇는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거대 도시군) 탄생이 가시권에 들어온다. 글로벌 부동산 컨설팅사인 '쿠시맨&웨이크필드'의 존 슈(Siu) 이사는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들어오는 부동산 투자금 중 60~70%가 ICC 일대에 집중되고 있다"며 "ICC 일대 최고급 아파트에 중국 자본이 몰려 '호화 차이나타운'도 형성되고 있다"고 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후 인원 감축과 사무실 축소·폐쇄 같은 충격으로 휘청거리던 홍콩이 이렇게 회생하는 추동력은 '위안화 허브'(hub·중심)로의 변신이다. "유럽·미국이 침체이지만 위안화 중심의 역동적인 아시아 무역 금융이 홍콩 경제의 강력한 구세주가 되고 있습니다."(UBS 아시아·태평양 전략책임자·무쉬타크 카파시(Kapasi)
홍콩 금융시장도 신발끈을 다시 매고 있다. 홍콩증권거래소(HKEx)는 올 7월 세계 최대 금속거래소인 런던금속거래소(LME)를 13억 4000만파운드(약 2조 3000억원)에 인수한데 이어 9월에는 세계 최초로 위안화 선물(先物)거래를 시작했다. 또 상하이포썬제약(10월·5억달러), 중국 국영 보험사인 PICC그룹(11월·31억달러) 같은 대형 IPO도 최근 잇따라 성사시켰다. 홍콩이 글로벌 연쇄 경제위기 터널을 '허브 카드'로 정면 돌파하고 있다.
'5500억위안(약 95조원) vs 1160억위안(약 20조원)'
올 상반기 홍콩 금융사들의 위안화 예금액과 싱가포르·런던·대만 등 3개 도시의 위안화 예금 합계 수치이다. 요즘 홍콩 금융가인 센트랄(中環)과 서부 카우룽(九龍)을 포함한 홍콩 전역의 은행·증권사 창구에는 예금·채권·증권투자·환전상품은 물론 리츠(REIT·부동산투자신탁)·금ETF·통화선물(先物) 등 수십 종류의 위안화 상품이 거래되고 있다.
이런 열기를 반영하듯 위안화 거래를 하는 홍콩 내 금융회사는 2008년 말 39개사에서 작년 말 187개사로 4배 넘게 늘었다. 홍콩 내 위안화 예금액(올 6월 말)도 2009년 말(627억위안) 대비 10배 정도 급증했다(홍콩금융관리국·HKMA).
"위안화 허브 경쟁에서 홍콩이 싱가포르와 런던 등을 압도하고 있다. 홍콩은 2000여개 다국적 기업(금융회사 포함)의 아시아·태평양 본부가 모여 있는 데다 중국과 사실상 한몸이어서 위안화 금융투자 상품을 내놓고 운용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애니타 펑·HSBC홍콩 총사장)
홍콩 증시에서는 2010년 10월 사상 첫 위안화 채권 발행을 통한 기업공개(IPO)가 이뤄졌고 지난해 4월에는 아시아 최고 부자인 리카싱(李嘉誠) 홍콩 청쿵그룹 회장이 소유한 부동산투자신탁인 후이센(匯賢)의 사상 첫 위안화 IPO도 성사됐다. 올 10월 말에는 홍콩의 인프라·부동산 기업인 호프웰(Hopewell·合和實業)이 두번째로 위안화 IPO(6320만달러·약 690억원 규모)를 홍콩에서 성공시켰다. 당시 IPO에는 기관투자자들의 청약이 예상보다 10배나 많이 몰려 호프웰은 IPO 발행 주식을 7000만주에서 1억2000만주로 늘렸다.
◇유럽·일본 기업들도 딤섬 본드 발행
홍콩의 이런 변신은 중국 정부와 홍콩 간의 '이인삼각(二人三脚)' 합작품이다. 올 7월 주권 반환 15주년을 맞아 홍콩을 찾은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홍콩에 대한 30여개의 경제 지원책 가운데 절반을 홍콩의 국제금융센터 및 위안화 역외(域外·offshore) 금융센터 지위 강화 방안으로 채웠다.
지난달 베이징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궈슈칭(郭樹淸) 중국증권감독위원장은 "홍콩에서 위안화로 모집한 자금을 중국 본토 금융시장에 다시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RQFII(RMB Qualified Foreign Institutional Investor)의 한도를 기존 700억위안에서 2700억위안으로 4배 늘리겠다"고 했다. 홍콩에서 위안화 금융거래를 획기적으로 활성화할 수 있는 '큰 선물'을 선사한 셈이다.
이미 위안화를 통한 무역결제, 자금의 조달과 운용 등에서 홍콩의 비중은 압도적이다. 지난해 중국이 위안화로 결제한 대외 무역거래액(총 2조810억위안·약 364조원) 가운데 홍콩에서 결제된 금액은 92%(1조9150억위안·약 335조원)였고 올 상반기에는 97%로 치솟았다.
홍콩의 딤섬본드(dim sum bond·홍콩에서 발행되는 위안화 채권) 주체도 중국 정부와 국유 은행은 물론 외국 금융사와 일반 기업으로 확산되고 있다. 맥도날드·볼보·테스코(Tesco)·HSBC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딤섬 본드를 발행해 위안화 자금을 모았다. 일본 기업들도 올 들어 8월까지 34억위안어치 딤섬본드를 발행했는데 이는 작년 동기 대비 3배 많은 것이다.
리샤오자(李小加) 홍콩거래소 행정총재는 "올 9월까지 비(非)중국 기업의 딤섬본드 발행액은 8억달러로 2억 2000만달러에 그친 중국 기업 발행 규모보다 4배 정도 많다"며 "이는 외국 기업들의 위안화 수요 증가를 반영하는 것으로 위안화 국제화의 청신호"라고 했다.
- ▲ 홍콩이 위안화 허브로 다시 비상(飛翔)하고 있다. 홍콩거래소는 올해부터 3년 동안 30억홍콩달러(약 4300억원)를 투자해‘홍콩거래소 오리온 계획(HKEx Orion)’을 추진해 세계 자본시장 최강의 인프라 구축 작업을 진행 중이다. 사진은 홍콩섬 센트랄(中環)에 있는 홍콩거래소 내부 모습.
◇"세계 1위 금융 인프라…'홍콩 침몰'은 없다"
홍콩 내 금융업 종사자는 총인구의 13%인 100만명에 달한다. 2015년이면 홍콩이 금융업 종사자 수 기준으로 런던을 제치고 세계 1등이 될 것이라는 전망(영국 경제분석기관 'CEBR')도 나온다.
글로벌 저성장과 금융·재정 위기가 장기화하면서 홍콩 금융시장도 물론 직격탄을 맞고 있다. 주식시장의 일평균 거래대금이 1년 만에 1000억홍콩달러에서 500억~600억홍콩달러로 반 토막 났고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연속 세계 1위이던 IPO 물량도 급감해 올해 뉴욕에 선두 자리를 내줬다. 상당수 대형 글로벌 IB들과 중국·홍콩계 자산운용사들은 올해 초부터 상시(常時) 구조조정 체제를 가동, 인원 정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금융인은 "금융에 최적화된 사회·경제·도시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한 홍콩의 침몰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달러화와 연동해 움직이는 안정된 환율, 자유로운 외환거래, 한 달 전에 통보만 하면 어떤 사유로든 해고할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한 노동시장, 쉬운 금융사 설립 조건 같은 홍콩만의 강점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금융기관에 부과하는 법인세는 마카오·케이만군도 같은 특수 지역을 제외하면 세계 최저 수준입니다. 내·외국인 차별 대우가 전혀 없고 외국인에 대해서도 주식 배당금과 이자 소득세 및 매매 차익에 대한 세금을 매기지 않습니다. 상속세가 제로(zero)인 데다 3000억달러에 이르는 외환보유액도 든든합니다."(김종선·KDB대우증권 아태 본부장)
세계적 경쟁력 분석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올 7월 세계 70개 도시 가운데 홍콩의 경쟁력을 1위로 꼽고, 세계경제포럼(WEF)이 연례 '금융발전 보고서(FDR)'에서 지난해와 올해 2년 연속 홍콩을 세계 1위로 평가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위안화 파워 등에 성패 달려
하지만 아시아 금융허브 경쟁에서 상하이와 싱가포르·쿠알라룸푸르 등이 홍콩을 맹추격하고 최근 중국 정부가 싱가포르와 대만에 위안화 청산결제 권한을 승인해 홍콩은 결코 방심할 수 없다.
중국공상은행(ICBC)은 지난해 3월 첫 번째 해외 위안화업무센터를 홍콩이 아닌 싱가포르에 세웠다. 중국 국가정보센터는 "중국 금융시장이 빠르게 개방되고 국제화되면서 위안화 중개지로서 홍콩의 지위가 도전받을 수 있다"고 했다. HSBC는 영국 런던에서 올 4월 홍콩 이외 지역 가운데 최초로 위안화 표시 채권 발행에 성공했다. 당시 조지 오스본(Osborne) 영국 재무장관은 "런던을 위안화 역외 거래 중심지로 만들겠다"고 공개 도전장을 내밀었다.
위안화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의문도 여전하다. 달러 대비 위안화 환율은 2005년부터 30% 정도 평가절상(환율 인하)됐지만 최근 그 추세가 주춤해졌다. 도이체방크 아태본부의 벙홍 리(Lee) 위안화 상품부문 총책임자는 "중국 경제에 대해 한동안 비관적 전망이 나돌면서 위안화를 많이 보유할수록 환(換)차익을 얻을 거라는 믿음이 많이 사라졌다"며 "미국이 세계 1위 경제 대국으로 등극한 후 40년이 지나서야 달러가 영국 파운드화를 대체하는 기축통화가 된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위안화 국제화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위용딩(余永定) 중국 세계경제학회장은 "홍콩에서 위안화 예금과 무역결제 증가 속도가 최근 다소 둔화되고 있다"고 했다. 일각에선 중국 경제와 위안화의 파워가 약화된다면, 홍콩의 금융산업도 위축되고 마카오처럼 관광과 쇼핑에만 의지하는 도시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